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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전선 비룡십삼대-89화 (89/359)

89화 어긋나는 것들-1

무림맹 만청각.

총군사 제갈지강은 분노한 얼굴로 서탁을 내리쳤다.

쾅!

“뭐라고?! 구유음마 지기음이 그딴 소리를 했다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만청각주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이익!”

만청각주가 보고한 내용은 정협방을 찾아 사원양을 처리한 구유음마 지기음이 제갈지강의 이름을 청성과 당문 앞에서 말했다는 것이었다.

제갈지강은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정협방을 파헤친 후 그것을 이용해 협약을 지키지 않은 혈마를 압박할 생각이었는데, 그자가 발 빠르게 스스로의 손으로 사원양을 정리해 버렸던 것이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는 것을 무림에 증명하는 것은 물론, 협약을 성실히 지키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함일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거기서 제갈지강 자신의 이름을 꺼내다니….

제갈지강은 이를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이 뱀 같은 작자가….”

놈들이 자신의 이름을 꺼낸 건 표면적으로야 자신들이 떳떳함을 증명하기 위함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제갈지강의 생각으로는 단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놈의 발언으로 무림인들은 이제 무림맹의 군사인 자신, 더 나아가 무림맹이 혈교와 계속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혈교에 대한 적의를 낮추는 대신에 그 적의를 혈교에서 무림맹으로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이었다.

이제 무림인들은 혈교가 저지른 만행을 떠올릴 때마다 무림맹을 함께 떠올리게 될 테니까.

게다가 또 이것은 혈마가 제갈지강에게 보내는 경고로 느껴졌다.

‘모든 것을 폭로해도 자신들은 상관없다는 얘기로군. 폭로했을 때 누가 더 손해인지를 잘 생각해 보고 행동하라는 뜻이겠지.’

이것이 아마도 이번 일로 그들을 압박해 보려 했던 제갈지강에게 보내는 혈마의 대답인 모양이었다.

제갈지강은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무척 애를 써야만 했다.

하지만 그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정협방 사태에 대한 보고뿐만이 아니었다.

“이게… 검성이 보낸 서신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일전에 제갈지강은 검성을 정리하기 위해 검성으로 하여금 정협방으로 와 달라고 요청하고, 한편으론 그의 처리를 혈교에게 부탁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검성의 답신을 읽던 제갈지강은, 부하들 앞에서 그것을 꾸기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검성의 답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금 자신은 전선의 일로 정신이 없고 전선 이북의 일은 맹에서 알아서 처리해야만 한다고.

한마디로 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전선에서 움직이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검성, 이자가 전선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면….’

이를 갈며 서둘러 군사전의 집무실로 돌아온 제갈지강은 과연 혈마에게서 온 비밀 서신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역시 예상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자가 정협방에 나타나지 않았기에 죽일 수가 없었소. 기껏 제대로 준비를 했건만 허탕을 치게 하다니, 제갈 군사의 총기가 예전만 못한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구려. 그래도 설마 전선에 있는 그를 죽여 달라는 바보 같은 요청은 하지 않을 것이라 믿겠소. 이번에 우리를 허탕 치게 만든 대가는 나중에 받도록 하겠소.]

“으드득!”

제갈지강은 이를 갈며 서신을 와락 구겨 버렸다.

혈마의 말대로였다.

검성을 전선에서 죽일 수는 없었다.

무림인들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검성이 전선에서 혈교도에 의해 죽는다면, 아무리 자신이 무림맹의 실세라 해도 이 차 정혈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제갈지강은 검성을 치우기는커녕 오히려 혈마에게 빚을 졌고, 심지어 비웃음까지 받게 된 것이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뻗쳐올랐다.

이 모든 게 검성, 그자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서 제갈지강은 분노를 담아 그의 이름을 소리쳤다.

“해운배액!”

하지만 잠시 후 간신히 머리를 식힌 제갈지강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선 이북에 혈교의 마두들이 나타났고, 이 차 정혈대전을 언급하기까지 했는데도 그걸 무시하고 움직이지 않다니.

아무리 딸을 잃은 충격이 크다 해도 이전까지 알고 있던 검성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이질적인 행보가 아닌가?

그것도 자신을 골탕 먹이는 행보들만 골라서 말이다.

제갈지강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군. 아주 이상해.”

이것마저 우연이라고 치부한다면 자신은 책사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분명 누군가 뒤에서 그를 움직이게 하는 자가 있는 것 같았다.

문득 뇌리에 가장 의심스러운 이들이 떠올랐다.

“설마 사마세가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사마세가는 전대 무림맹주인 구협왕 천기성의 지낭이 돼 주었던 인물들이었다.

또한 근 백여 년간이나 제갈세가를 밀어내고 천하제일지가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던 자들이기도 했다.

제갈지강은 현 맹주 모용검의 군사로서 권력을 잡은 후 그들을 철저하게 실각시켜 버렸었다.

다시는 기어 나오지 못하도록 아주 철저하게.

그 이후 지금까지도 그들에 대한 감시의 눈길을 거둔 적이 없었고 아직 어떤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를 들은 적도 없었지만, 제갈지강 자신을 이렇게 골탕 먹일 수 있는 지략을 가진 자들이라면 아직도 그들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제갈지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만청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마세가와 검성의 동향, 그리고 이번 사태에 관해 소상한 보고를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

음영대 부대주 주원서는 직속 부하들과 함께 숲속 외딴 장원을 살피고 있었다.

거력마 저웅원이 부하들과 함께 머물렀던 바로 그 장원이었다.

부하 한 명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부대주님, 발견된 음영대원의 시신은 모두 네 구입니다. 강력한 공력에 분쇄된 듯 훼손이 심한 데다 시간이 많이 지나 정확한 신원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부하들의 보고에 인상을 찌푸렸던 주원서는 바로 자신의 앞에 놓인 시신을 보며 다시 물었다.

“팔 조장 휴자승의 시신만이라도 구분할 수 없겠나?”

“예,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음….”

거력마 저웅원을 추적해 정협방과의 관계를 밝혀냈던 음영대 팔 조장 휴자승은 그 보고 직후 보낸 소환 명령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잠적하거나, 아니면 보고도 올릴 수 없도록 전멸당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무림맹으로 오기는커녕 아무런 답신조차 보내지 않는 그의 반응에, 음영대 부대주 주원서는 직접 그를 찾으러 이곳까지 와 봐야만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건 그저 혈교도들의 시체와, 그들과 상잔한 듯 보이는 음영대원들의 시신뿐이었다.

그나마도 무더운 날씨의 숲속에서 부패되어 신원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유골과 옷가지들뿐, 이 시신들 중 팔 조장 휴자승이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주원서는 인상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군. 이곳에서 거력마 놈들과 상잔했다면 보고는 어떻게 올릴 수 있었던 거지? 또 구속돼 있던 여인들은 어떻게 구해 냈고?”

그러자 옆에 있던 부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중상을 입은 채 보고를 올렸던 게 아닐까요? 그래서 마지막 힘을 다해 보고를 하고 숨을 거둔 것이….”

“흠, 휴자승, 그 녀석이 말인가?”

물론 책임감이 강한 무사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원서가 기억하는 휴자승은 그렇게 사명감이 넘치거나 성실한 무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은근히 살인을 즐기는 느낌에 눈살이 찌푸려졌던 자였는데….

잠시 고민하던 주원서는 다시 부하에게 명령했다.

“일단 조사를 중단하고 모두 모이도록 해라. 돌아가서 군사께 보고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지. 다만 너희 셋은 여기서 구조된 여인들을 한번 수소문해 보도록. 그녀들을 구해 준 사람들에 관한 증언을 확보하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그런 후 주원서와 그 부하들은 모두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그러자 모두가 돌아간 장원.

아무도 없던 장원 옆 나무 그늘에서 검은 옷을 입은 인영이 유령처럼 쑤욱 올라왔다.

바로 음영대의 오 조 조장이었다가 이제 해청연을 돕고 있는 삭무흔이었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역시 청연 사매의 말대로 직접 조사하러 나왔군. 게다가 하필 납치됐던 여인들을 조사한다라. 꽤 날카로운 걸?”

해청연은 진작부터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는 삭무흔으로 하여금 마치 거력마 패거리와 음영대가 상잔한 듯한 흔적을 만들어 놓도록 했다.

그 상태로 시간도 한참 지났으니 조사대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납치됐던 여인들에 관해서까지는 손을 쓰지 못했었다.

그녀들을 모두 관리하는 것은 삭무흔 혼자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거기까지는 저들의 생각이 미치지 않기를 바랐는데….

“일이 좀 복잡해지겠군.”

삭무흔은 간단한 쪽지를 써 전용 전서구에 매달아 날렸다.

청연에게 보내는 전서였다.

비둘기가 무사히 하늘 위로 날아가는 것을 확인한 삭무흔은 바로 여인들을 조사하러 간 이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혹시 그들이 유의미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면 처리해야 할지도 몰랐으니까.

***

벼랑 끝까지 몰렸던 산검문은 결국 생존에 성공했다.

두 번에 걸친 대승에도 불구하고, 이번에야말로 산검문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는데도 말이다.

정협방의 주력이 모두 산검문을 치기 위해 귀주성 경계에 집결했으니 그것은 사실 당연한 예측이었다.

아무도 정협방이 스스로 무너져 버릴 것이라곤 예상할 수 없었을 테니까.

정협방 본방에 있던 정협방주가 원래 혈교의 마두 소면마군이라는 것이 갑자기 밝혀지고, 그 본방이 청성과 당문에 의해서 접수되자, 산검문을 정벌하기 위해 귀주성 경계에 집결했던 정협방도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혈교도가 아닌 정협이란 이름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순순한 정파인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모두가 코웃음 쳤다.

“우리 방주님이 혈교의 마두 소면마군이라고?! 흥! 웃기는 소리!”

“산검문 놈들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수작을 부린 모양이군!”

“하여간 사파 놈들의 개수작이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그 소식이 구체적으로 변하고, 당장이라도 산검문으로 쳐들어갈 것 같았던 수뇌부들도 침중한 얼굴로 서로 모여 회의만 하고 있자, 정협방의 무사들은 결국 그것이 헛소문이 아니란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들은 절망에 빠져야만 했다.

“이럴 수가….”

“우리가 이제껏 한 것들은 대체, 그 모든 게 혈교의 사주였다고?”

이제 뭘 해야 하는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일부 무사들은 환멸을 느끼고 바로 무리에서 이탈해 빠져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무사들은 여전히 귀주성 인근에 집결한 채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그저 혼란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그때 누군가 그들을 찾아왔다.

놀랍게도 그들이 싸우려고 했던 산검문주 허경이었다.

그가 소수의 인원들만을 이끌고 오히려 정협방의 진영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곤 내공을 가득 실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 나는 산검문주 허경이오! 본인은 비록 정협방의 침략으로 소중한 친동생이자 부문주인 분소검객 허중을 잃었으나, 그것이 정협방에 속한 진짜 정파 협객들의 의지였다고는 절대 믿고 싶지 않소! 그것은 아마도 이번에 밝혀진 대로 혈교 놈들의 음모 때문이었을 거라고, 우리를 상잔시키려는 놈들의 음모에 휘말렸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소! 그렇기에 회담을 제의하려 하오! 그대들마저 우리를 상잔시키려는 혈교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대화에 응해 주시오!

자신은 어디까지나 정협방의 침략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이고, 그럼에도 정협방에 원한을 갖지 않을 테니 혈교의 하수인이 아니라면 대화에 응하라는 요청이었다.

정협방 쪽에선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비록 사망자야 정협방 쪽이 훨씬 더 많았지만 먼저 침략한 것도 사실이었고, 정협방도들부터가 이제 수뇌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회담을 수락한 정협방 쪽 절정 고수들은 허경으로부터 상상도 못한 얘기를 들어야만 했다.

“나와 함께 오신 분들은 이번에 우리 산검문을 구원해 주신 독수 오 남매분들이시오.”

독수 오 남매의 명성은 정협방도 사이에서도 이미 유명해진 상태였다.

어떤 면에선 적이기에 오히려 산검문에서 보다 더 유명할지도 몰랐다.

그런 명성 자자한 독수 오 남매, 특히 그중에서도 넷째인 천상미희 연해의 아름다움에 모두가 감탄하고 있을 때 허경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모두가 해청연이 준비해 준 대본대로였다.

“사실 이분들은 낭인이 아니라 과거에 인연이 닿았던 은인께서 저를 돕기 위해 보내신 분들이시오. 특히 여기 연해 소저는 항산파의 진전을 이으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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