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90화 (90/359)

90화 어긋나는 것들-2

그 말에 정협방 쪽 절정 고수들이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산서성의 항산파 말이오?!”

항산파는 사천성의 아미파, 절강성의 검각과 더불어 무림에 셋밖에 없는 비구니들의 문파였다.

또한 항산파의 무공은 혈교 무공과 상극인 것으로도 유명했다.

허경이 대답했다.

“그렇소. 다들 아시겠지만 항산파의 무공은 혈교의 무공과 상극이지요. 그러니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연해 소저께 혈교도가 아님을 확인받으실 것을 제안하는 바이오.”

그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정협방 쪽 고수들은 일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들도 항산파의 내공을 이용하면 혈교도를 구분할 수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항산파의 진전을 이은 사람이 나타나 자신들을 검증해 보겠다니,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물론 해청연이 항산파의 진전을 이었다는 것은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여인인 데다, 워낙 신비로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기에 정협방도들에게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설득력을 더해 주고 있었다.

그러자 한 정협방 고수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우리가 허 방주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우리를 혈교의 마두라고 모함하기 위한 술책일 수도 있지 않겠소?!”

하지만 허경은 여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또한 해청연이 써 준 대본 안에 있던 얘기였다.

“여러분들을 모함한다고요? 제가 왜 굳이 그래야 합니까?”

그의 어이없다는 듯한 반문에 정협방도들은 오히려 당황했다.

“여러분들은 아직도 착각하고 계신 모양이로군요. 이제 우리와 싸우던 정협방은 없습니다. 정협방 본방은 청성파와 당문에게 점령당했고, 여러분들은 이제 무림공적인 혈교의 하수인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니까요.”

그의 말에 정협방 고수 한 명이 분노해 소리쳤다.

“우리는 혈교의 하수인이 아니오!”

그러자 허경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소. 모르시겠소? 본인은 지금 여러분께 그걸 증명할 기회를 드리고자 하는 거요.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었던 내가, 여러분들이 혈교도가 아님을 증명해 드리겠다는 말이오.”

잠시 회담장 안에 침묵이 흘렀다.

정협방 고수들도 이젠 모두 깨달을 수 있었다.

적이었던 허경이 확인해 주는 것만큼 확실하게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저 제안이 자신들에게 손해가 될 것이 없다는 걸 말이다.

그러자 다시 한 명이 허경에게 물었다.

“복수심 때문에 우리에게 해코지를 하러 온 것일 수도 있지 않겠소? 확인하는 척하며 공격하면 어떻게 하오?”

그 질문에 허경은 피식 비웃었다.

“우리가 지금 몇 명인지는 보이시오? 여섯 명이오. 단 여섯 명. 여러분은 설마 이 여섯 명이 여러분께 해코지를 할까 봐 두려우신 것이오?”

맞는 말이었다.

회담실 안의 절정 고수의 수도 정협방이 우위였지만, 무엇보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천 명 이상의 무사들 앞에서 그런 수를 쓴다면 그건 자살행위와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정협방의 고수들로선 더 확인할 것이 없었다.

허경의 말대로 자신들에게 손해될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문득 누군가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주시오, 허 방주? 비록 혈교 놈들의 수작이었다고는 하나 방주의 친동생분을 잃은 것도 사실이지 않소?”

그러자 허경이 증오스러운 듯 이를 갈며 대답했다.

“맞소. 나는 내 동생을 잃었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곳으로 온 것이오. 내 동생을 잃게 만든 혈교 놈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이오!”

그러고는 정협방의 고수들을 무서운 눈빛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내 맹세하리다. 만약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 중 혈교 놈이 발견된다면, 맹세코 놈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다고.”

비록 해청연이 만들어 준 대본대로였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그의 말은 정협방도들에게 충분한 설득력을 전해 주고 있었다.

정협방의 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또한 그들로선 원한을 혈교도에게 한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었다.

이제 더 이상의 반론이 없자 허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소. 그럼 이제 저 연해 소저께 한 명씩 확인을…!”

그때였다.

정협방 고수 중 슬쩍 서로 눈길을 교환하던 두 명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파박!

“억?!”

“장 형?!”

“무슨?!”

그들의 돌발적인 움직임에 모두가 깜짝 놀라 그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이기에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정협방 고수들은 그랬다.

슈학!

푸욱!

“끄어억!”

빛살처럼 날아온 창이 몸을 날리던 고수 한 명의 등을 뚫고 벽에 깊숙이 박혔다.

허경의 뒤에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던 독수 오 남매의 둘째인 재림자룡 창혁, 바로 설풍이 날린 창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런 움직임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설풍은 창을 던지고는 그것이 꽂히는 것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맹수처럼 몸을 날렸다.

그러곤 엄청난 속도로 움직여 막 창문을 뚫고 밖으로 나가던 고수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꽈드득!

“크아악!”

발목이 부러지는 고통에 그가 비명을 질렀을 때였다.

바로 다시 회담장 안으로 끌려 들어온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혈되어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말았다.

퍼억!

“커헉?!”

정협방의 고수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간 함께 지냈던 동료들이 도망가려 하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그 짧은 순간 설풍이 보여 준 몸놀림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는 불가해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설풍의 본 실력을 이미 본 적이 있던 허경만이 붙잡힌 혈교도들을 보며 사나운 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수고하셨소, 창 대협.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이 혈교의 개잡종 놈들!”

그날 허경은 정협방에 남아 있던 혈교의 무리들을 모두 소탕할 수 있었다.

그러자 남은 정협방의 잔당들은 허경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모두 해산했다.

허경은 만족했다.

남은 정협방의 무리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뭉쳐 산검문에 위협이 되는 것을 막아 주겠다던 해청연의 약속대로 됐기 때문이었다.

***

산검문으로 돌아와 외딴 방에서 삭무흔이 보낸 서신을 읽던 해청연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에 잠겼다.

거력마에게 붙잡혀 있던 여인들에 관한 것은 해청연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이 대책을 마련해 놨다면 좋겠지만, 아무리 그라도 특별한 대책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더군다나 꼭 그 부분이 아니라도 처음 예상보다 독수 오 남매의 명성이 너무 커진 상태였다.

제갈지강이 이번 사태에 대해 제대로 조사하기 시작한다면 자신들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아마도 절강성에서 왔다는 독수 오 남매가 사실은 절강성과 전혀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빨리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자신들이 밖으로 나와 있는 사이, 그녀의 아버지 검성 해운백은 전선의 통제권을 거의 가져온 모양이었다.

그러니 제갈지강의 시야에서 벗어나려면 빨리 전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죽음의 땅이었던 전선은 어느새 그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선우진과 비사영이었다.

소문은 딱히 퍼지지 않았지만 정협방의 몰락에 그들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정협방을 몰락시킨 지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선우진이라면 별일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해청연마저도 걱정이 될 정도였다.

‘어떻게든 서로 연락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 놨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오래 따로 떨어져 행동하게 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이 실수였다.

하다못해 정협방주가 소면마군 사원양이라는 것만 알려 줄 수 있었어도….

평상시 사람들이 쓸데도 없는 불길한 상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해청연은,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 밀려드는 여러 가지 불길한 상상에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만약 정협방주가 사원양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무모하게 덤벼들었다면?

만약 불의의 사고로 중상을 입고 움직일 수 없게 됐다면?

만약 그가… 이미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됐다면?

해청연은 도무지 제어할 수 없는 상념에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람?”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비합리적이고 시간만 낭비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니.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려고 애써 봤다.

‘선우 공자나 비 공자가 사고를 당했을 확률은… 그래, 그리 적지는 않아.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지.’

그 결론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생각을 이어 갔다.

‘설사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여기서 오래 기다릴 수는 없어. 무림맹의 조사대가 내려올 수 있다는 걸 생각했을 때 최소한 내일 안에는 이곳을 떠나야 할 테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린 해청연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머리가 내린 냉정한 판단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심장이 욱신욱신 조여 와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하아, 하아, 후우우.”

잠시 심호흡을 하며 몸을 추스른 해청연은 문득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저 호기심이 조금 커진 정도의 감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해청연은 그만 방에서 나가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방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맑은 공기를 호흡하고 싶었다.

그러자 산검문의 연무장에서 모여 있다 그녀를 본 조원들이 말을 걸었다.

“언니! 이리 와요!”

“어서 오시오, 소저! 우린 지금 두 녀석들이 뭘 하다 늦는 건지 내기하고 있었다오!”

해맑아 보이는 표정의 조원들은 아마 두 사람이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내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한심해지는 기분이었다.

‘누가 한심한 건지는 잘 모르겠군.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조원들인지, 아니면 저들만큼도 그를 믿지 못하는 나인…!’

그런 생각을 하던 해청연은 순간 깜짝 놀라 외쳤다.

“선우 공자?!”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것은 다른 조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바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고, 그러자 담장을 넘으며 날아오고 있는 선우진과 비사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원들 모두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진! 사영!”

“비 공자! 선우 공자!”

“이 녀석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기다렸잖아!”

“엄청 걱정했다구요!”

모두가 달려가 두 사람을 둘러싸며 소리쳤다.

선우진과 비사영은 환하게 웃으며 반가움으로 가득한 그들에게 화답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조장, 모두들. 확인할 일이 좀 있어서. 모두 별일 없었죠?”

“난 빨리 오려고 했소. 근데 진이 녀석이 자꾸 시간을 끌더라고.”

해청연도 평상시 보여 준 적 없었던 환한 표정이 되어 그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하지만 무언가를 본 해청연은 그들에게 닿기 전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환했던 그녀의 표정이 천천히 식어 가고 있었다.

“응? 왜 그랬을까요? 선우 공자, 설마 거기서도 여인들 마음을 홀렸던 건 아니겠죠?”

“뭐? 진짜야? 우리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여인들이나 홀리고 있었다고?”

“크크, 왜 아니겠소? 아미파 여인들이 진이 녀석에게 어찌나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지, 옆에서 보던 내가 다 안쓰럽지 뭐요.”

“우와아! 그게 진짜예요?! 너무해! 이 여인들의 적 같으니!”

“어쭈? 사영, 네가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많지.”

“억!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해청연은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그저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없어도 즐겁게 조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선우진을.

그리고 그의 눈길이 가끔씩 조심스럽게 나서유를 향하고 있는 것을 말이다.

해청연은 볼 수 있었다.

처음 설풍 조장을 향했던 그의 눈빛이 바로 나서유에게로 향하는 것을.

다른 조원들과 자신에게도 모두 잠깐씩 시선을 주기는 했지만, 결국 그의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나서유에게였다.

그 조심스럽고도 다정한 눈빛을 보고 있던 해청연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