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철귀 등장-3
지난 생에 철귀가 처음 등장했을 때, 십삼대 오 조는 완전히 전멸당했었다.
독수광 역시 조원들과 함께 거기서 죽었고 말이다.
피해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긴급 신호를 받고 지원을 나갔던 이 조의 인원들도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말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후일 운이 좋았었다고 자평해야만 했다.
우리 십삼대에는 당가의 일원인 당여은 소저가 있었으니까.
곧 십삼대의 모든 절정 고수들이 힘을 합쳐 철귀를 상대하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흠집도 나지 않는 철귀의 피부에 당 소저는 가지고 있던 독들을 모두 다 투척했었다.
어디까지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무식한 방법이 결국 방법을 찾아 주고 말았었다. 저 철귀라는 가공할 괴물을 잡는 방법을.
내 눈앞에서 지난 삶에서도 봤던 익숙한 얼굴의 철귀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놈의 진득한 붉은 안광이 나를 핥았다.
“선우진! 위험해! 물러서라!”
일 조장 한교성의 염려 섞인 외침이었다.
하지만 그를 향해 빙긋이 웃어 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일 조장님.”
그러자 옆쪽에 있던 독수광이 인상을 확 찡그리며 소리쳤다.
“건방지게 나대지 마라! 절정 고수가 아니고서야 놈을 상대할 수가…?!”
소리를 지르던 독수광은 경악한 표정이 되어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내가 반쯤 뽑은 검에 선명한 연보라색의 강기가 맺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교성 조장만큼이나 선명한 검강에 독수광이 경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절정?”
독수광은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교성 조장은 다시 소리쳤다.
“그렇다 해도 너 혼자선 안 된다. 놈에게는 검강이 안 통해!”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며 내게 천천히 다가오는 철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혼자서 상대한다고는 안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한교성의 옆으로 설풍 조장과 청연 소저, 그리고 당 소저가 착지했다.
타닥!
그걸 힐끗 보고는 바로 철귀에게로 돌진했다.
파앙!
“크르르르르!”
철귀가 달려드는 내게로 맹수처럼 팔을 휘둘렀다.
부아앙!
하지만 내 돌진은 속임수, 바로 몸을 띄워 놈의 위로 넘어갔다.
그러자 흠칫한 놈의 시선이 나를 따라 위를 향하고, 동시에 내 뒤로 유성처럼 돌진해 온 설풍 조장이 놈의 배를 강타했다.
퍼어엉!
순간 놈의 몸이 포탄처럼 튕겨 나갔다.
하지만 뒤로 튕겨 나는 놈의 몸보다 설풍 조장의 돌진이 더 빨랐다.
그는 어느새 튕겨 나가는 철귀를 따라붙어서는 한 바퀴 회전하며 놈을 후려찼던 것이다.
퍼엉!
그러자 뒤로 날아가던 철귀의 몸이 엄청난 충격에 수직으로 추락했다.
그 위로 설풍 조장이 공중에서 수직 낙하하듯 방향을 바꿔 벼락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꽈아아앙!
정말 운석이 충돌한 듯한 엄청난 일격이었다.
하지만 조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땅에 누운 철귀를 땅 밑으로 박아 넣겠다는 듯 폭풍 같은 연환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의 손에 덧씌워진 선명한 붉은색 강기가 천수관음 같은 잔상을 만들고 있었다.
“와다다다다닷!”
콰콰콰콰콰콰콰쾅!
거기 산이 있었어도 바닥까지 뚫어 버렸을 듯한 강맹한 연환격이었다.
모두가 넋을 잃고 그 화려한 공격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철귀는 죽지 않았다.
놈이 팔을 휘저어 설풍 조장을 후려치려 하자, 조장이 가볍게 몸을 띄워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내 옆에 착지해서는 철귀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것을 지켜봤다.
조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게 말했다.
“자네 말대로 엄청나군.”
“…그렇네요. 정말 엄청나군요”
조장이야 철귀에 대한 감상이었겠지만, 내 감상은 조장에 대한 것이었다.
그 엄청난 철귀에 대한 조장의 공격이 완전히 무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몸을 일으키는 놈의 가슴은 여기저기 움푹 함몰되어 있었다.
아마 안쪽의 뼈가 으스러져 버린 것 같았다.
설풍 조장의 맹격이 놈의 몸을 두들겨 부숴 버린 것이었다.
철귀를 주먹으로 때려 부수다니, 지난 생에서조차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꿀꺽.
내가 없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설풍 조장의 실력이 어디까지 진보한 것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철귀는 여전히 움직이며 붉은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당여은 소저에게 말했다.
“당 소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그녀가 나를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설풍 조장이 철귀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일부러 놔둔 것이었었다.
아무리 해도 저놈을 부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말이다.
그러고 나서 앞으로의 대응에 기준이 될 수 있도록, 당 소저와 협조하여 철귀를 처리하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 줄 생각이었는데….
‘…부서졌잖아?’
설마 저렇게 넝마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었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했다.
살짝 민망한 얼굴로 설풍 조장을 보며 말했다.
“조장, 놈의 시선을.”
그러자 고개를 한번 끄덕인 조장이 다시 놈에게로 돌진했다.
파박!
그러자 놈이 그르렁거리며 팔을 휘둘렀다.
부아앙!
하지만 이번엔 조장 쪽이 미끼였다.
설풍 조장이 훌쩍 몸을 날려 위로 피하고 놈의 시선이 그쪽을 쫓아가자, 바로 따라갔던 내가 놈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놈의 몸이 공중으로 부웅 떴다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퍼억!
선우세가의 박투술인 질풍십삼박의 금나술이었다.
놈을 얼굴 쪽으로 땅에 처박은 나는, 뒤에서 놈의 한쪽 팔을 누르며 소리쳤다.
“조장! 반대쪽 팔을!”
그러자 바로 설풍 조장이 날아와 놈의 반대쪽 팔을 눌렀다.
잠시나마 놈의 몸을 구속한 것이었다.
그다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바로 뒤따라 몸을 날린 당여은 소저가 놈의 뒷목에 화골산을 일자로 길게 뿌리고는 바로 빠졌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크르르르르!”
철귀는 우리가 빠지자마자 바로 몸을 일으켜서는, 상처 입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우리를 둘러봤다.
설풍 조장에게 두들겨 맞은 기억 때문인지 쉽게 달려들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아마 상황을 살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의 관심은 마인답지 않게 그런 영악한 모습을 보인 놈이 아닌 놈의 뒤로 향해 있었다.
치이이이익!
화골산을 뿌린 놈의 뒷목에서 무언가 녹아내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뿜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교성이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정말… 효과가 있었군.”
나는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놈은 대단히 영리하지만 아직 마인의 본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최초의 상대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요. 여전히 입 속이 약점이긴 합니다만, 좀처럼 입을 벌리지 않습니다. 드러난 약점이 거의 없다는 얘기지요. 다만 화골산에 접촉할 경우 피부가 점점 약화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골산을 뿌린 후 잠시 기다려 줘야 한다더군요. 시간이 지날수록 효과가 더 나타날 테니까요.”
그리고 설풍 조장을 보며 말했다.
“조장, 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설풍 조장이 다시 철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번에도 놈의 시선을 끌기 위함이었다.
설풍 조장이 위쪽으로 몸을 날리고 놈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을 때, 나는 이미 놈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놈의 뒷목을 바라보며 검파를 잡았다.
검강은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신 머릿속에 묵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批大卻(비대각) 導大窾(도대관) 因其固然(인기고연) 틈이 있는 곳에 칼을 넣어 베는 것이니 그것은 본래 그러한 것을 따를 뿐이다.]
그리고 발검했다.
하얀 검광이 바람처럼 가볍게 공기를 갈랐다.
문득 세상을 가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것도 검날에 걸린 것이 없는 것 같은 부드러운 느낌.
잠시 후, 뻗었던 검을 다시 천천히 검집으로 넣을 때, 철귀의 목이 앞으로 서서히 미끄러졌다.
놈의 거대한 몸이 쿵 소리와 함께 넘어간 건 그로부터도 잠시 후였다.
***
전투가 끝난 뒤 모인 인원들은 죽은 오 조원들과 철귀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열한 명의 오 조원 중 무려 일곱 명이 사망했기에 승리에도 불구하고 장내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조용하고 침울한 상태였다.
설풍은 철귀의 시신을 수습하며 놈의 몸을 만져 봤다.
마치 고래 가죽을 만지듯 단단하고 뻣뻣한 감촉이 낯설었다.
분명 인간이었던 것의 피부일 텐데 강기를 버텨 내는 강도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때 일 조장 한교성이 설풍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잘도 그런 놈을 때려 부쉈군. 난 흠집도 못 냈는데 말이야.”
설풍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별 소용도 없었지 않습니까? 결국 놈을 죽인 건 선우진의 말대로 화골산 덕분이었습니다.”
“흠, 좀 더 두들겼으면 그냥도 때려 부쉈을 것 같던데? 이제 내 실력으론 절대 못 이길 것 같더군. 너무 강해졌어. 파견 중에 무슨 기연이라도 얻은 건가?”
그렇게 묻는 한교성의 눈빛엔 짙은 부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순수하게 상대의 강함을 인정하고 뭔가 배워 보려 하는 의욕이 담긴 눈빛.
이제껏 늘 게으른 강자의 모습만 봤던 십삼대 사람들에겐 익숙지 않았지만, 그것은 원래 한교성을 천재라 불리게 만들었던 그 본연의 모습이기도 했다.
설풍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해 줬다.
“일전에 검성 어르신께서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한 깨달음이 좀 있었습니다. 제가 아둔해 이제야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 알겠더군요.”
“흠, 검성 어르신이라. 다시 오시면 나도 그분께 가르침을 좀 청해 봐야겠군.”
설풍과 한교성이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선우진은 떨어져 나간 철귀의 머리를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다.
붉은 안광을 뿌리지 않는 철귀의 얼굴은 전혀 사나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굳게 다문 입술과 남자다운 생김새에서 정파의 대협 같은 풍모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선우진은 아마 그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철귀가 되기 전 남자의 정체는 아마 정파의 대협이었을 거라고 말이다.
‘마인이 된 후에 무공을 익히게 했을 리는 없어. 일류 최상급의 무위는 분명 원래 이 사람이 갖고 있던 것이겠지. 그리고 석노인의 말씀대로라면 철귀를 완성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 이 사람은 아마도….’
선우진은 이 사람이 어디서 혈교도들에게 붙잡혔을지를 추측했다.
그 장소가 아마도 가장 먼저 조사해 봐야 하는 곳일 터였다.
아마도 마인들이 생산되고 있을….
선우진이 철귀의 머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당여은이 그의 뒤로 다가오며 물었다.
“아는 얼굴인가요?”
이미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선우진은 빙긋이 웃으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아니오. 그냥 추측해 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왔을지를.”
그리고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아, 소저. 혹시 당문에 이런 것의 피부에 대해 분석해 줄 만한 분들이 계실까요?”
“네, 안 그래도 이미 간귀와 효귀, 주귀들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잘 됐군요. 그럼 이 철귀에 대한 분석도 부탁드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런 피부가 될 수 있는지. 또 왜 화골산에 취약한지. 화골산 이외에 다른 방법은 혹시 없는지에 대해서도 말이지요. 하는 김에 이분이 원래 누구였는지도 알 수 있으면 더 좋겠군요.”
선우진의 말에 당여은이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좀처럼 보여 주지 않는 맑은 미소였다.
“물론이죠. 본가의 분들은 오히려 좋아하실 거예요.”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작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걱정했어요.”
그렇게 말한 당여은은 바로 몸을 돌려 선우진에게서 멀어졌다.
고개를 숙인 채 말한 데다 바로 몸을 돌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귀가 살짝 붉어진 것을 선우진은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쩐지 가슴이 따듯해지는 기분에 서둘러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웃음 지었다.
그리고 그런 선우진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독수광이었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선우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구대문파도 아닌 보잘것없는 문파 출신의 미천한 놈, 처음 십삼대에 왔을 때 고작 이류에 불과했던 돼지 같은 놈, 그리고 설풍 따위를 우상이라며 그의 조로 기어 들어간 멍청한 놈.
그랬던 놈이 어느 순간 독수광 자신을 능가하고는, 심지어 절정 고수가 되어 나타나고 말았다.
독수광은 그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어쩌지도 못한 마인을 놈이 해치웠다는 것도.
무엇보다 놈이 이제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것도 말이다.
독수광의 눈에서 뜨거운 질투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선우진을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한 사람.
그녀는 바로 해청연이었다.
산검문을 나올 때부터 다시 머리카락을 내려 눈을 가린 그녀는, 머리카락 속에 숨긴 눈으로 무표정하게 선우진과 당여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여은과 얘기하는 선우진의 표정과, 그녀가 평소의 차가운 모습과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선우진에게서 멀어지는 모습, 그리고 그런 당여은을 향해 웃음 짓는 선우진의 모습을….
아무 표정도 없었기에 누구도 알아챌 수 없었지만, 머리카락 밑에 감춰진 그녀의 눈빛은 거센 파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