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변화-2
선우진과 해청연의 조 이동에 관한 문제는 결국 바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쉽게 결정하기엔 사안의 무게에 비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설풍은 바로 조장들의 철귀 수색이 있을 예정이니, 그것이 끝날 때까지만 결론을 내달라고 얘기하며 두 사람에게 시간을 줬다.
그러곤 바로 수색을 위해 다시 본부로 갔다.
설풍이 나간 후 십삼대의 대기실 안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두 사람을 다른 조로 보내고 싶지는 않지만, 그럴 명분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뭐라고 입을 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잠시 후, 비사영이 먼저 가볍게 입을 열었다.
“쳇, 역시 사람이 너무 뛰어나면 안 된다니까. 도드라지면 반드시 정을 맞거든. 그러게 누가 그렇게 뛰어나라고 했냐, 이 자식아?”
아쉬움이 가득 담긴 장난스러운 표현이었다.
그러자 무거웠던 조원들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맺혔다.
천주은도 서운한 듯 웃으며 비사영의 말을 받았다.
“맞아요. 두 사람 다 왜 그렇게 뛰어나서 함께 있지도 못하게 그래요? 서운하게.”
선우진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이래서 나의 뛰어남을 세상에 알리지 않으려 했던 건데, 들키고 말았군. 크으, 이래서 절대자들은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선우진의 장난스러운 너스레에 비사영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아주 지랄을 해라.”
선우진의 너스레와 비사영의 맞받아침에 조원들이 웃음 지을 때, 진지하게 무언가를 생각한 배종관이 천주은에게 말했다.
“천 소저, 나는 앞으로 수련을 좀 줄이도록 하겠소.”
그 말뜻을 알아들은 선우진과 비사영이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래도 너무 뛰어나지지 않아야 천주은과 함께 오래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빨리 말려야 할 것 같았다.
“종관, 그건….”
하지만 그보다 먼저 천주은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저는 더 열심히 수련할 건데요?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조장 후보로 거론되다니 너무 멋있잖아요? 저는 배 공자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에 배종관은 충격 받은 표정으로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모두가 천주은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미는 가운데, 나서유가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선우 공자는 마음을 결정한 건가요?”
그러자 선우진이 깊은 눈빛으로 나서유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조장 말대로 다른 비룡대로 파견가게 되는 것보단, 다른 조라도 십삼대에 속할 수 있는 편이 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생각을 좀 더 해 보려고요.”
선우진의 말에 모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청연만이 아무 말 없이 선우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기실에서 나온 선우진은 일단 칠 조의 공동 창고로 향했다.
마음이 좀 복잡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고에 들어와 영약 보관고 앞에 선 선우진이 손바닥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자, 조 이동은 이동이고, 이제 드디어 내공을 좀 높여 볼까나?”
선우진은 이번 파견을 통해 내공 칠십 년의 벽을 깰 수 있었다.
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지 겨우 두세 달 만에 다시 한 단계 경지를 높이게 된 것이었다.
모두 묵랑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이런 빠른 발전은 선우진에게 무척 놀랍고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선우진은 지난 삶에서 이미 일류 최상급의 경지를 밟았었다.
또한 절정을 거의 앞에 둔 상황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기에 이번 삶에서 절정의 경지에 오른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단계의 벽을 깬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이는 순수하게 이번 삶에서의 성과였으니까 말이다.
지난 삶에서의 기억으로 초고속 성장을 해 왔던 선우진이, 그것이 없어도 충분히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이 성장 속도를 어느 정도라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오 년 안으로 초절정의 벽을 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혈교에 공세를 가한다는 계획이 진짜 현실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묵랑이 있지 않은가.
만약 묵랑검의 비밀을 풀 수만 있다면.
그럼 어쩌면 현 천하제일인인 검제 반중양이 그랬듯 검신의 유산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의 빛이 저 앞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창고로 들어오는 또 다른 인기척에 선우진이 문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해청연이었다.
“청연 소저?”
선우진이 반갑게 그녀를 부르자, 그녀 또한 선우진이 창고에 있었던 걸 이미 알고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영약이라. 혹시나 했는데, 역시 칠십 년의 벽을 깨신 모양이군요?”
그녀의 물음에 선우진이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역시 그녀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예, 대련을 할 때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이미 들켰었나 보군요.”
그러자 청연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표정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제 다시 앞머리를 내린 그녀의 표정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선우진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음에 약간 아쉬움을 느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청연 소저는 여기에 무슨 일로?”
그러자 그녀가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저도 벽을 넘어서요.”
하지만 그 대답을 들은 선우진은 도저히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
선우진이 눈을 껌뻑거리며 반문하자, 해청연이 다시 대답했다.
“저도 이번 파견 때 칠십 년의 벽을 넘었거든요. 그래서 영약을 좀 섭취하려고요.”
“…….”
선우진이 멍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이었다.
선우진이 알기로 그녀가 절정에 들어선 시기는 자신과 비교해 봐도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근데 벌써 다음 단계의 벽을 넘었단 말인가?
자신이야 묵랑이란 기연을 만나 그럴 수 있었다지만, 그런 것도 없이?
선우진이 충격으로 말을 더듬으며 다시 물었다.
“소, 소저. 혹시 무슨 기연이라도 얻으신 겁니까?”
하지만 청연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뇨. 그냥 수련하다 보니까 되던데요?”
그냥 수련하다 보니까 벽을 넘었다.
내공 칠십 년의 벽을 말이지?
갑자기 빠르게 벽을 넘었다는 아까의 감동이 사그라지는 기분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원래 칠십 년의 벽은 아무나 쉽게 넘는 것이었던가?
이제껏 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별것도 아닌 일로 감동받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잠시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절정 고수들이 절정 초입에서 멈춰 평생 벽을 넘지 못하지 않는가.
그럼 대체 이 소저는….
문득 예전에 검성 해운백이 팔불출 같은 모습으로 청연에 대해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살면서 그녀만큼이나 아름답고 현명하며 재능 있는 여아를 본 적이 없다고 호언장담했던.
그땐 팔불출 아버지의 과도한 딸 사랑 같은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주 객관적인 진실이었던 건가?
침을 꿀꺽 삼킨 선우진은 간신히 냉정을 회복하고는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소저. 엄청나게 빠른 발전이로군요.”
그러자 빙긋이 웃은 해청연이 대꾸했다.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선우 공자를 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네요.”
두 사람은 각자 필요한 만큼의 영약을 챙겨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때 해청연이 문득 선우진을 불렀다.
“선우 공자.”
“네?”
해청연은 잠시 선우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 조장… 당 소저의 제안을 받아들일 건가요?”
그 질문에 선우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비룡대로 전출되는 것보다야 그게 훨씬 나은 선택이란 생각은 드는데…. 그래도 좀 망설여지네요.”
그러자 해청연이 다시 물었다.
“서유 언니… 때문에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나서유의 이름에 선우진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납득했다.
청연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읽고 있는 그녀니까 말이다.
쑥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것까지 알고 계셨군요. 이것 참. 좀 부끄러운데요? 네, 뭐. 설풍 조장이나 다른 조원들과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게 가장 큰 이유이긴 하죠.”
해청연은, 순진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선우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문득 앞머리를 다시 내려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자신의 눈빛을 그에게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가슴을 움켜잡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던 해청연은, 문득 다시 물었다.
“그냥… 고백해 보는 것은 어때요?”
그러자 깜짝 놀란 선우진이 반문했다.
“네, 네?! 고, 고백이요?!”
고백이라니.
두 번의 삶 동안 단 한 번도 여인과 교제해 보지 못했던 선우진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단어였다.
그 두 글자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경직되는 기분이었다.
소면마군 사원양의 앞에 있을 때보다 더 두려웠다.
그런 선우진의 모습을 바라보며 해청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일이 닥치든 늘 현명하고 용기 있는 모습만을 보여 줬던 선우진의 저 순박한 모습이, 그녀에겐 더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청연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혼자만 간직하고 있을 마음이 아니라면 고백을 해야 하잖아요? 만약 다른 조로 옮기게 된다면 그 전에 서유 언니의 마음을 알아 두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 질문에 충격 받은 선우진이 멍해졌을 때, 해청연은 바로 몸을 돌리고는 서둘러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렇게 비겁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어차피 나서유가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 선우진의 마음을 끝장내려고 수를 쓰는 자기 자신이 말이다.
‘최악이야.’
이런 혐오스러운 자신의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만은 절대 이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렸을 적부터 늘 남들과는 다른 것에 흥미를 느꼈고, 늘 남들보다 뛰어났던 해청연은 언젠가부터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자신은 남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그래서 남들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고.
이성이 아닌 감정에 몸을 맡기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참을 걸어 마침내 선우진이 보이지 않게 됐을 때, 해청연은 결국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욱신거리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중얼거렸다.
“한심해. 너무 한심하구나, 해청연.”
대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대체 언제….
문득 선우진에게 처음 호감을 느꼈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엔 그저 좀 강한 호기심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늘 그랬듯 잠깐 왔다가 곧 시들해지는 흥미에 불과하다고.
그 후, 그를 옆에서 지켜보며 점점 커가는 감정을 느꼈을 때에도, 그저 그를 연모한다고 인정했기에 느끼게 된 착시 효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없앨 수 있는 얕은 감정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 파견에서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해청연은 비로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죽었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안 쉬어질 만큼 깊은 마음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이제껏 자신이 그렇게 경멸했던 행동들을 무심코 해 버릴 만큼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너무도… 한심했다.
***
“후우우우.”
반개했던 눈을 뜨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처음 느껴 보는 활력이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팔십 년을 꽉 채운 내공의 힘이었다.
이류의 경지와 돼지 같은 몸매로 전선에 들어왔던 것이 고작 칠 개월쯤 전인데, 어느새 청성파에서도 천재라 불리우는 한교성 일 조장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수준이 되었던 것이다.
그건 곧 설풍 조장을 제외한 비룡십삼대원 중 최고라는 뜻.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목을 뚜둑 꺾으며 연무장 중앙으로 나아갔다.
“자, 어디 내공 팔십 년의 힘을 좀 느껴 볼까?”
바로 검을 뽑아 든 나는 검무를 추듯 선우십삼검과 사일검법을 펼치며 내 상태를 점검해 봤다.
거세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육체가 한없이 자유롭게 느껴지고 있었다.
확연하게 느껴지는 변화된 감각에 절로 즐거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깊은 만족감을 느끼며 흐뭇하게 미소 짓던 나는, 이내 푹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문득 청연 소저가 해 준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혼자만 간직하고 있을 마음이 아니라면 고백을 해야 하잖아요? 만약 다른 조로 옮기게 된다면 그 전에 서유 언니의 마음을 알아 두는 게 좋지 않겠어요?’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말인 것 같긴 했다.
언제까지 혼자서 간직할 게 아니라면 언젠가 고백을 하기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다른 조로 가게 된다면 지금보다 자주 보지 못하게 될 테니,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지금 고백을 하는 것이 분명 맞는 것 같기는 했다.
문제는 전혀 자신이 없다는 것에 있었다.
너무도 불안하고, 또 두려웠다.
침을 꿀꺽 삼키며 생각했다.
‘지금의 내가 나 소저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있을까?’
냉정하게 나 자신을 한번 가늠해 봤다.
그랬더니….
의외로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했다.
이젠 살도 뺐고, 요즘은 잘생겼다는 얘기도 꽤 듣고 있지 않은가?
연모한다고 고백해 온 소저들도 꽤 있었고 말이다.
게다가 무공만 놓고 봐도 나는 이제 어엿한 절정 고수가 된 상태가 아닌가.
비천흑랑이란 별호도 얻었고, 다른 조에서 부조장이나 조장으로 모셔 가려는 인재가 되기도 했고.
거기까지 생각하니 문득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내 단전에 가득 찬 팔십 년의 내공이 꼭 자신감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문득 주먹을 불끈 쥐며 중얼거렸다.
“그래, 할 수 있어. 이제 나도 나 소저에게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는 남자가 됐다고!”
그리고 나 소저가 있을 숙소 쪽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공 팔십 년을 꽉 채운 오늘.
바로 오늘이 바로 그녀에게 고백할 운명의 날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