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변화-3
“나 소저! 소저를 진심으로 연모하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심지어 소저를 만나기 전부터 말입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는 뜨거운 눈빛으로 말을 내뱉었다.
드디어 말하게 된 내 진심에, 흥분한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건 너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려나? 만나기 전부터였다는 말은 하지 말까?”
나 소저를 찾아가기 전, 외딴 공터를 찾은 나는 그녀에게 고백할 말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럼 이렇게 해 볼까? 소저! 제 눈엔 소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입니다! 청연 소저보다! 당 소저보다 훨씬 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아, 아무리 내가 나 소저를 연모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거짓말 같잖아? 차라리 외모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해야 하나? 나 소저의 착한 마음에 반했다고?”
벌써 수십 가지의 문구를 떠올리고 시연해 봤지만, 영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두 다 너무 유치하거나 과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푹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이거 정말 해도 되는 게 맞는 걸까?’
내공 팔십 년을 채우며 내 몸을 꽉 채운 듯했던 자신감은, 상상 속에서 해 봤던 수십 번의 고백과 함께 공기처럼 빠져나가 결국 앙상한 뼈다귀만 남기고 말았다.
역시 내공과 자신감은 다른 종류의 것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고백을 한다고 해서 나 소저가 받아 줄 거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 자신감 없는 판단이 냉정한 자기 성찰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감이 없어 쪼그라져 버린 지질함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괜히 고백을 했다가 실패한다면, 앞으로 나 소저와 불편한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웠다.
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냥 하지 말까?”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말하는 순간부터 내게 너무도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럼 이제까지와 변함없이 그녀와 똑같이 지낼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이제까지처럼 나 혼자서만 그녀를 바라보고.
이제까지처럼 나 혼자서만 마음 졸이며.
그렇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그래, 이제까지처럼….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어느새 내가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고서야 드디어 무엇이 문제였는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도망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할 수 없는 두려운 미래로부터.
지금의 나를 파괴할 수 있는 변화로부터.
그리고 이런 마음은 내게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 이래서야 지난 삶의 선우진과 똑같잖아?”
그랬다.
이건 딱 지난 삶의 내가 했을 법한 생각이었다.
예상할 수 없는 결과가 두려워 움직이기를 포기했던 겁쟁이 돼지 선우진 말이다.
“후우우우우.”
깊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야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내 고백이 성공하고 실패하고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닌지도 몰랐다.
정말 중요한 건 고백을 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내가 그녀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가에 말이다.
내 자신을 믿고, 내 두 발로 당당하게 두려움과 대면하는 것.
내게 진짜 필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만약 내가 그럴 수 없다면, 계속 칠 조에 있건 다른 조로 가건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었다.
어디에 있든 영원히 지금처럼 뒤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나 소저가 있을 방향을 향해서.
그게 고백이 아니라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 나 소저 앞에 당당히 서서 제대로 그녀의 눈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지금 간신히 찾아온 이 깨달음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잠시 후 어느새 칠 조 여자 숙소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우우.”
깊게 심호흡을 했다.
내 문제를 깨달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여전히 두렵고 그 자리에 멈춰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움직일 수 있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조심스럽게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그러자 안에서 천주은 소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누구세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는 말했다.
“선우진입니다. 혹시 나 소저가 안에 있나요?”
말했다.
말하고 말았다.
그녀를 불러 달라고 말하고 말았던 것이다.
가슴이 미친 듯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바로 문이 열렸다.
끼이익!
순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선우 공자?”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을 연 사람은 나 소저가 아니었다.
문 안에선 천 소저가 귀여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유 언니는 지금 본부로 가셨어요. 언니의 본가에서 뭔가 연락이 왔다는 모양이더라고요.”
“아, 그, 그래요?”
나 소저가 안에 없었다니, 갑자기 맥이 탁 풀어졌다.
짙은 아쉬움과 함께 마음 한편에선 다행이란 생각도 떠올랐다.
그때 천주은 소저가 숙소의 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들어오셔도 되는데. 안에서 좀 기다리실래요?”
급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제가 그냥 본부로 가 보죠, 뭐.”
그러고는 본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려웠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용기를 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오늘, 반드시 그녀와 얘기를 나눠 봐야만 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숙소 앞이 아닌 밖에서 그녀를 만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눈치는 안 보일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본부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문득 누군가 이쪽으로 빠르게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난 삶부터 지금까지 내 뇌리에 가장 깊게 박혀 있는 여인, 바로 나 소저였다.
꿀꺽.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아까의 마음가짐은 갑자기 다 어디로 갔는지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그녀가 너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달려오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선우 공자!”
반사적으로 정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네, 넵!”
그리고 그녀가 내 앞에 멈췄다.
주변엔 아무도 없는 상태.
이곳엔 그녀와 나 단둘뿐이었다.
그러니 지금 말을 꺼내야만 했다.
“나, 나 소저!”
갑자기 고장 나버린 것 같은 입을 억지로 움직여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뱉어 냈다.
그리고 다음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선우 공자! 저 빨리 본가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네, 네? 본가로 간다고요?”
뒤늦게 해석된 말뜻에 문득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자 이제야 그녀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껏 정신이 나가 있어 못 알아봤지만, 나 소저는 지금 무척 다급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절박한 얼굴로 말을 쏟아 냈다.
“아버지께서 많이 편찮으시대요! 지난번 서신엔 그런 말이 없었는데, 대체 갑자기 무슨 일인지…. 그래서 휴가를 받았어요. 일단 한 달을 받았는데, 정확히 얼마나 있게 될지는 가 봐야 알 것 같아요. 지금 조장이 없는데 저까지 자리를 비우면 안 될 것 같긴 하지만. 아, 정말 그러면 안 되는데…. 이걸 어떡하지?”
그녀가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자 내 머리는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달았다.
일단 그녀를 진정시켰다.
“나 소저, 괜찮아요. 아무 걱정 말고 다녀와도 돼요. 조장이 간 수색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선우 공자.”
이제야 조금 진정되어 보이는 그녀를 보며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절 믿어요, 나 소저. 이래 봬도 이곳저곳에서 조장, 부조장 시켜 주겠다고 찾고 있는 인재잖아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다른 조원들에겐 제가 잘 전달할 테니 염려 말고 어서 아버님께 다녀오세요.”
그러자 그녀가 이제야 조금 진정한 듯 글썽거리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그럼 바로 짐만 챙겨서 다녀올게요.”
“예, 조심해 다녀와요. 부친을 잘 보살펴 드리고, 괜찮아지셨을 때 다시 돌아와요.”
나 소저는 바로 숙소를 향해 달려갔다.
무척 절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아직 때가 아니라는 하늘의 뜻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
“하아, 하아, 아이고, 죽겠다. 오늘도 조장은 안 돌아오는 모양이네?”
나와 대련해 신나게 얻어맞은 비사영이, 땅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다 뜬금없이 물었다.
피식 웃으며 대답해 줬다.
“글쎄, 아직 이틀밖에 안 지났으니까.”
그러자 잠시 또 헐떡거리던 녀석이 다시 물었다.
“나 소저는 한 달 후에 온다고?”
“일단 그렇게 휴가를 받았다는데, 부친의 병세에 따라 달라지겠지? 왜? 나랑 계속 대결하니까 조장과 나 소저가 그리워지냐?”
내 말에 정곡을 찔렸는지 흠칫한 녀석은, 이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흐흠, 뭐, 꼭 그래서는 아니고. 그냥 다양한 사람과 대결하는 게 더 좋지 않나 싶어서.”
비사영 녀석은 전선에 복귀한 이후로 부쩍 수련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진짜 화영빈 형님을 따라잡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녀석의 열의에 맞춰 진지하게 임해 줬던 건데, 다른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걸 보면 아마 좀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녀석이 멍하니 누워 있다 문득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우리 휴가를 이제 한 달까지나 쓸 수 있게 된 거냐?”
“아아, 검성 어르신께서 바꿔 주신 모양이야. 정기 휴가는 삼 주까지 쓸 수 있고, 집안의 대소사는 한 달까지 가능하게 됐다는군.”
그러자 녀석이 감탄하며 한편으론 아쉬워했다.
“이야, 우리 휴가가 아직 안 지나갔다면 우리도 삼 주를 쓸 수 있었을 텐데, 좀 아쉽게 됐군.”
“아쉽기는. 원래 이번 휴가 차례였던 오 조가 우리 파견 때문에 계속 휴가를 못 가고 있었다가, 이번에 철귀 때문에 그렇게 된 건 생각 안 나냐?”
“음, 그런가?”
청연 소저의 아버님이신 검성 어르신은 우리가 없는 한 달 동안 전선의 많은 것들을 바꿔 주셨다.
그리고 그중엔 휴가에 관한 것도 있었다.
원래 일주일이던 휴가가 최대 한 달까지 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마유겸의 양보로 사 조 대신 휴가를 갔던 우리야, 일주일 나갔다 온 것이 끝이었지만, 우리 다음 차례인 오 조부터는 이제 삼 주간 휴가를 나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오 조는 이번 철귀 사태로 너무 많은 인원이 죽은 데다, 조장인 독수광이 철귀 수색을 나가 휴가가 또 밀리고 말았다.
문득 늘 나를 못마땅해하곤 했던 오 조장 독수광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또한 그가 마음에 들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짠하게 느껴졌다.
그가 나나 설풍 조장에게 하는 행동이 열등감의 표현이라는 걸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만 아니라면 그는 나름대로 자기 조원들에게 신뢰받고 있는 조장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틀이나 지났는데, 이번 수색 중에는 설풍 조장과 잘 지내고 있으려나?’
십삼대의 조장들이 철귀 수색을 떠난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그것은 또한, 나 소저가 황급히 본가로 돌아간 지도 그만큼 지났다는 얘기기도 했다.
그동안 딱히 별다른 일은 없었다.
우리는 조장들이 없어도 평소처럼 수련하고 순찰을 나가며 전선에서의 일상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다만 약간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긴 했다.
그건 바로….
문득 우리의 바로 옆에서 대련 중인 배종관과 천주은 소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지난 파견 이후로 많이 성장한 모습들이었다.
문제는 지금 수련 중인 우리 조 인원이 이렇게 네 명으로 끝이라는 것에 있었다.
비사영이 슬쩍 지나가듯 말했다.
“해 소저는 오늘도 안 나오는 모양이군.”
“음, 그러네.”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바로 청연 소저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의 상태가 영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요즘 순찰 때든 평상시든 늘 생각에만 잠겨 있고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았다.
뭘 물어봐도 늘 단답식으로 대답하고 말이다.
심지어 수련에도 참여하려 하지 않아서, 오죽하면 천주은 소저가 나에게 걱정을 토로했을 정도였다.
잠시 생각하다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가서 얘기를 좀 해 봐야겠지?”
따로 시간을 내서 그녀와 얘기를 한번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 전선에 들어온 사이기도 하고, 또 그나마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람도 바로 나이니까 말이다.
그러자 비사영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요즘 좀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다?”
그 뜬금없는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응? 내가?”
“그래, 너 그런 거 되게 불편해했잖아?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거. 적이라고 생각하면 엄청 무자비해지는 주제에, 가까운 사람들은 꼭 깨지는 물건 대하듯 조심조심 대했었지. 예전 같으면 아무리 청연 소저랑 가까웠어도 먼저 다가가 그녀의 문제에 대해 얘기해 볼 생각 같은 건 안 했을 것 같은데?”
문득 ‘내가 그랬던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인정했다.
아마도 녀석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내 가까운 사람들과 혹시라도 감정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일을 무척이나 두려워하곤 했다.
선우 세가에선 가족, 형제, 친구들과 부딪치는 것이 두려웠고, 전선에선 조원들과 부딪치는 것이 두려웠다.
가뜩이나 얼마 없는 내 사람들이 혹시라도 또 내게서 멀어져 갈까 봐 말이다.
그래서 늘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곤 했었다.
‘지난 삶에서도 형제들과 싸우기보단 바보가 되는 쪽을 택했던 것도 그래서였지.’
이번 삶에서의 나는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었지만, 아마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지난 삶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마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그 후로 사람들이 내게서 멀어지는 것만을 봐 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선우세가에서도, 전선에서도, 내 지난 삶은 늘 사람들을 잃어 가기만 했던 삶이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또 잃어버리게 될까 봐 늘 불안해했던 것이다.
‘그랬었는데….’
그랬던 것이 지금 조금이라도 변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나 소저에게 고백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일 것 같았다.
실제로 고백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내 안의 두려움을 대면하기로 한 결심이 아마 행동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피식 웃으며 비사영에게 물었다.
“왜? 너무 나대는 것 같냐?”
그러자 녀석이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이제야 좀 괜찮아 보인다. 뭔가 껍질을 벗은 것 같다고나 할까? 세상에 부러운 거 하나 없어도 될 만큼 잘난 놈이, 안 어울리게 늘 불안해하며 남 눈치나 보는 거 좀 그랬거든. ‘아, 이 자식은 참, 사람에 목마른 삶을 살아왔나 보구나. 나는 그렇게 굶주리고 힘들었어도 사형제들에게는 늘 사랑받았었는데, 이 녀석에겐 그런 것도 없었나 보다.’ 뭐, 그런 생각을 했었지.”
“…….”
처음 들어 보는 얘기였다.
처음 들어 보는 친구가 해 주는 나에 대한 얘기.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헤집고 있어 콕콕 쑤시면서도, 한편으로 시원했다.
녀석이 계속해서 말했다.
“넌 좀 거만해져도 돼. 너 꽤 잘난 놈이다. 얼굴도 잘생겼어. 무공도 높아. 머리까지 좋아. 너 같은 놈이 그렇게 스스로에 대해 자신 없어 하면 근거 없는 자신감밖에 없는 내가 좀 민망해지지 않겠냐? 그리고… 이젠 너 혼자도 아니잖아? 널 좋아하고 응원해 주는 친구가 이렇게 많아졌는데 말이다.”
문득 속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녀석의 말이, 그렇게 말해 주는 진솔한 눈빛이, 너무 따뜻하게 느껴져서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비사영을 보고 있자, 녀석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 잘 쉬었다. 다시 수련이나 해 볼까? 어이, 종관! 천 소저! 나랑 이대 일로 한번 붙어 봅시다!”
녀석이 민망해 죽겠다는 얼굴로 자리를 피한 후에도, 난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지금의 따뜻함을 좀 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문득 생각했다.
다시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돌아와서 내 친구들을 살릴 수 있게 되어 너무 다행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