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변화-4
수련을 마친 후 천 소저보다 먼저 여자 숙소로 가, 문을 두드렸다.
“청연 소저, 안에 있습니까?”
사실 그녀가 안에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내 감각에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짐짓 그녀의 존재를 모른다는 듯, 그렇게 문을 두드린 후 밖에서 잠시 기다렸다.
내가 밖에 계속 서 있다는 걸 그녀도 느끼고 있을 테니, 그녀가 대화를 나눌 의향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그러자 잠시 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요?”
감정을 추측할 수 없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일단 그녀가 대답을 해 줬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대답을 해 줬다는 건 대화할 마음이 조금은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 그냥 솔직하게 말을 해 보기로 했다.
“그냥 소저와 대화를 좀 해 보고 싶어서요.”
그러자 다시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그러고 싶지 않군요.”
고저 없는 말투였지만, 여지를 주지 않는 분명한 거절 의사 표현이었다.
아마도 예전의 나였다면 분명 이쯤에서 당황해 물러났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그녀의 마음을 두드려봤다.
내 말에 대답하기까지 걸린 약간의 시간이, 아마도 그녀의 망설임을 뜻할 거라고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꼭 지금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언제든 소저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얘기해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조금 더 많이 기다려 봐야 할 모양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따 저녁 식사 후에…. 그때 얘기해요.”
어쩐지 아까보다는 좀 덜 차갑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평소와 달리 뭔가 감정이 깃들어 있는 듯한 목소리.
슬쩍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죠. 저녁 식사 후에, 연무장에서 봅시다.”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막상 해 보고 나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걸?’
어쩌면 사람에게 다가간다는 건 원래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동안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었을 뿐.
만약 지난 삶에서도 조금만 더 용기를 냈다면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버지도, 어쩌면 내 형제들도?
문득 저녁 식사 후에 있을 청연 소저와의 대화가 기다려졌다.
그리고 다시 나 소저를 만날 순간도.
이젠 좀 더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비사영, 배종관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가고 있을 때였다.
문득 주변에서 얘기하고 있던 다른 조 대원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뭐? 십오대에 철귀가 셋이나 나타났었다고?”
“그래, 우리 부조장이 대주에게 들었다더군.”
우리는 깜짝 놀라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허어! 저런! 그래서 어떻게 됐대? 십오대엔 아직 화골산도 보급되지 않았을 거 아냐?”
“그렇지. 그래서 몇몇 조원들의 희생으로 놈들을 십오대 본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유인했다고 하더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다던데? 바로 비룡대 총본부에서 화골산을 지닌 토벌대를 파견하긴 했다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허어!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걱정이로군. 그 괴물들이 셋이나 나타나다니.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그러게 말이야.”
철귀 세 마리가 나타났다라….
물론 그럴 시기이기는 했다.
지난 삶에서도 우리 대에 먼저 나타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대에서 연속적으로 나타났으니까.
그때는 처음 철귀가 나타났던 우리 십삼대도 큰 타격을 입고 제대로 보고하지 못했기에, 다른 비룡대에서도 엄청난 희생이 발생했었다.
그나마 이번엔 우리 보고가 빨라서 본부 차원에서나마 대응할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다른 비룡대에서도 화골산이 확보되기 전까지 대응하기보단 피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렇고 말이다.
문득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내가 돌아온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때 비사영이 문득 물었다.
“비룡십오대 쪽이면 그 위쪽이 흥인 쪽이던가?”
그러자 배종관이 대답했다.
“아니, 그보단 흥의 쪽일걸? 광서성과 맞닿은 곳이잖아?”
순간 내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동시에 비사영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흥의? 누가 예전에 거기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들어 본 것 같은데?”
그때 내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소저.”
“응?”
“나 소저의 본가인 나가장이 위치한 곳이 귀주성 흥의야.”
내 말에 비사영의 얼굴도 순간 굳어졌다.
“…설마?”
아무래도 그 설마일 것 같았다.
만약 십오대를 지나친 철귀가 전선을 넘어 북상했다면, 나가장이 있는 흥의까지는 바로 지척이었다.
내가 빠르게 두 사람에게 말했다.
“사영, 종관. 잘 들어. 난 지금 바로 나가장으로 갈 거야.”
그러자 비사영이 다급하게 말했다.
“어쩌려고? 화골산도 없잖아?”
현재 십삼대 내의 화골산은 십삼대 본대를 지키기 위한 소량만 남긴 채 모두 조장들이 가져간 상황이었다.
그러니 내가 쓸 수 있는 화골산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가야지. 만에 하나 우리 예상대로 된다면, 그래도 나 소저 옆에 내가 있는 것이 나을 테니까.”
“그럼 나도 갈게!”
“그래, 나도….”
친구들이 당연하다는 듯 나를 따라나서려 했지만,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영, 넌 바로 조장을 찾아가 줘. 그래서 바로 화골산을 가지고 와 달라고 해.”
현재 수색을 나간 조장들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니 가장 빠른 비사영이 가 줘야 했다.
“부탁한다, 사영. 네가 조장을 얼마나 빨리 찾아 주는가에 나와 나 소저의 목숨이 달릴 수도 있어. 그리고 종관, 너는 조원들과 풍양 대주께 이 사실을 알려 줘. 그 후에 가능하다면 사영과 다른 방향에서 조장을 좀 찾아봐 주고.”
전속력으로 움직여야 한다면 배종관은 나나 비사영을 따라올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이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 것 같았다.
그러자 비사영과 배종관도 내 말을 이해한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몸조심해라.”
“진, 나 소저를 부탁해.”
“알았어. 날 믿어라.”
그러곤 바로 몸을 날렸다.
이 소식이 지금 전해졌음을 감안하면 철귀가 십오대를 지나친 것이 언제였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
해청연은 숙소 안에서 동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경 속에는 앞머리를 코까지 내려 눈을 가린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늘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답답하게 느껴졌다.
잠시 망설이던 해청연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눈과 얼굴이 드러났다.
세상 모두가 아름답다고 칭송했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늘 귀찮아하기만 했던 그 얼굴이….
해청연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이렇게 해 볼까?”
오늘만큼은 이 얼굴로 그와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그가 자신의 외모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확인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는가.
약간의 변수를 만들 수 있을지.
해청연이 그렇게 생각하며 막 얼굴을 드러낸 채 머리를 묶으려던 참이었다.
숙소 밖에서 천주은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청연 언니! 큰일 났어!”
해청연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천주은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역시 천주은이 바로 말을 쏟아 냈다.
“십오대에서 철귀 세 마리의 종적을 놓쳤는데, 놈들이 전선 위로 북상하면 바로 닿는 곳이 서유 언니의 본가인 나가장이래! 그래서 선우 공자가 바로 나가장으로 출발하고, 비 공자는 조장을 찾으러 갔어! 우리도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닐까?!”
해청연의 무표정했던 얼굴은 나서유의 얘기가 나오자마자 심각하게 변했다.
하지만 천주은의 말이 끝났을 때 해청연이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은 다른 것에 대한 얘기였다.
“선우 공자가… 떠났다고?”
머리 위로 쓸어 올렸던 해청연의 앞머리가 다시 사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
이틀 전 오후에 출발했던 나서유는 노숙까지 강행하며, 다음 날 오후에 귀주성 흥의에 있는 나가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너무 걱정되어 잠시도 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간 본가에서 나서유는 그녀의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야 말았다.
경악한 나서유가 소리쳤다.
“네?! 아버지를 뵐 수 없다니요?!”
그러자 그녀의 맞은편 상석에 앉아 있던 거만한 표정의 여인이 대답했다.
“의원의 말로는 절대 안정이 필요하시다는구나. 그래서 나와 의원 이외엔 아무도 네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지 않는 중이다. 네가 아버지를 걱정하는 마음이야 잘 알겠다만, 만약 너를 보시고 안정을 잃으셔서 상세가 더 악화되기라도 하면 안 되지 않겠느냐?”
차갑고 거만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여인은 바로 나서유의 계모인 민 부인이었다.
삼 년 전, 나가장을 위한 일이라며 자신의 아들이 아닌 나서유를 전선으로 보냈던 바로 그 여인 말이다.
나서유는 편찮으신 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그녀의 말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정하듯 말했다.
“그럼 아버님이 주무실 때, 아주 잠깐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제발 제가 뵐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러자 민 부인이 갑자기 벌컥 화를 내기 시작했다.
“돼먹지 못하게 감히 네가 누구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냐?! 그따위 행실로 가뜩이나 편찮으신 아버지께 걱정을 끼칠 셈이냐?! 나가장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네 죽은 어미에게 욕이라도 먹이고 싶은 게야?!”
이 말은 어려서부터 민 부인이 나서유의 마음을 꺾고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해 줬던 마법의 주문과도 같은 말이었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했기에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나서유는, 이 말 한마디로 계모가 그녀에게 행했던 온갖 불합리한 처우들을 모두 묵묵히 견뎌 내곤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서유는 자신의 요구에 대해 어떤 납득할 수 있는 해명도 하지 않은 민 부인 앞에서 그저 다시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이제 일류 최상급 경지의 무인이 된 나서유였지만, 그녀는 차마 민 부인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그것이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이기 때문이었다.
나서유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랜 세월 민 부인에게 괴롭힘을 당해 왔던 그녀는,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민 부인은 나서유가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을 때마다, 늘 아버지를 핑계로 협박하고는 그 후 반 시진 가까이 폭언을 이어 가곤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받아 왔던 상처와 공포는 아직도 나서유의 마음속에 그대로 새겨져 있는 상태였다.
나서유는 지금부터 또 그런 시간이 반복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민 부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흠, 네가 반성하고 있다니, 나도 그럼 이만하도록 하겠다.”
나서유는 깜짝 놀라서는 눈을 번쩍 뜨고 민 부인을 바라봤다.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던 것이다.
그러자 민 부인은 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서유에게 물었다.
“가만있자. 서유, 네 나이가 올해 몇이었지?”
“…스물다섯입니다.”
“아니, 벌써 그렇게 됐단 말이냐? 성혼을 해도 벌써 했어야 할 나이가 아니더냐? 내 그간 너에게 너무 무관심했었구나.”
짐짓 미안하다며 과장되게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행동이 점점 더 수상했다.
나서유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일단 공손하게 대답했다.
“무림인으로서 스물다섯은 그리 늦은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비룡대에 적을 두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민 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그 비룡대에는 천년만년 있는 다더냐? 마침 네가 집에 왔으니 이 기회에 너의 혼인을 추진해 봐야겠구나.”
“…예?!”
나서유가 깜짝 놀란 눈으로 민 부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민 부인은 이제 그녀가 자기에게 눈을 치켜뜨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기 시작했다.
“어디가 좋을까? 옳지! 흑상방이 무너진 후 욱일승천하고 있는 살상방이 좋겠구나! 살상방의 후기지수라면 너도 좋고, 우리 나가장의 입지에도 도움이 되는 그런 혼처가 아니겠느냐?”
“어머니!”
“생각해 보아라. 너도 더 늦지 않게 혼인하고, 우리 나가장도 든든한 뒷배를 얻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
나서유는 이제야 민 부인이 아버지를 만나지도 못하게 할 거면서 서신을 보내 자신을 부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목적은 자신의 정략결혼이었던 것이다.
나서유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민 부인은 그녀의 생각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내가 바로 살상방에 청혼을 넣어 줄….”
그때 나서유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혼인이라니.
그것도 정략결혼이라니.
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십대가 된 이후로 늘 희생하고만 살아왔던 나서유도, 그것만큼은 도저히 참아 낼 수가 없었다.
이건 어린 시절도 모자라 자신의 평생을 이용하겠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자 민 부인의 얼굴이 다시 분노로 가득 찼다.
“네가 감히 내게 눈을 치켜뜨고 목소리를 높여?! 내가 정녕 네 아버지께 너의 패악질을 말씀드려야 하겠느냐?! 가뜩이나 편찮으신…!”
하지만 너무 분노한 탓에 이번만큼은 나서유도 굽히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똑바로 뜨고 민 부인에게 물었다.
“아버지께서 너무 편찮으셔서 저를 만나지도 못한다고 하시더니, 이 일은 말씀드리겠다고요?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은 괜찮으신 건가요?”
그러자 민 부인이 살짝 찔끔했다.
애초에 일류 최상급 무인인 나서유가 제대로 기세를 드러낸다면, 고작 호신 무공 정도만 익힌 민 부인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나서유의 기색이 심상치 않자 그녀는 살짝 눈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내가 언제 진짜 그렇게 하겠다더냐? 말이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더냐? 말이!”
그러고는 다시 은근한 표정으로 나서유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거라. 네가 혼인을 한다면 어쨌든 네 아버지를 만나게 되지 않겠느냐?”
“…예?”
“무려 인륜지대사인 혼인인데, 아무리 몸이 편찮으셔도 네 아버지 얼굴도 못 보고 혼인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 또 네 혼인 소식을 들으시면 기분이 좋아지셔서 상세가 호전되실 수도 있고 말이다.”
한마디로 나서유가 혼인을 하겠다고 결정해야만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겠다는 얘기였다.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서유에겐 이제껏 민 부인이 해 왔던 행동들과 별다를 것 없는 행동들이기도 했다.
나서유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저는 절대 혼인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자 한동안 차갑게 나서유를 쏘아보던 민 부인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잊고 있었구나. 너는 어려서부터 이기적인 아이였지. 이제껏 피땀 흘려 키워 준 부모와 가문을 위해 그 정도도 하지 못하겠다니. 네 아버지가 들으시면 얼마나 속상해하실지 참으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구나. 썩 꺼지거라! 가문을 위해 털끝 하나 움직일 생각도 없는 네가 대체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나서유는 심장에 돌덩이를 올린 듯 묵직한 답답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이기적이라니.
가문을 위해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니.
어려서부터 민 부인의 소생인 남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해 왔고, 심지어 전선에까지 대신 가야 했던 나서유로서는 숨이 막힐 듯 답답한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 입을 열기도 힘들었던 나서유는 간신히 말을 꺼냈다.
“…어머니.”
하지만 민 부인은 그녀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못 나가겠다는 거냐?! 이제 이 어미의 말도 듣지 않겠단 말이지?! 하, 그래. 그렇게 하려무나! 네가 못 나간다면 내가 나가마! 딸자식 하나 잘못 키웠더니 이젠 어미를 방에서 쫓아내는구나!”
민 부인은 그렇게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나서유는 뭘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었다.
쾅!
문을 부서질 듯 닫고 나간 민 부인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대들기나 하는 저런 버릇없고 무도한 년이라니!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워 도저히 살 수가 없구나!”
세상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소리치며 멀어지는 민 부인에, 나서유는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가 나서유가 돌아온 첫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일이기도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민 부인은 나서유를 결코 만나 주지 않았고, 이미 민 부인의 심복이 된 나가장의 사람들도 나서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서유로서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