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검성-2
나는 무아지경에 빠진 듯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예전에 소문으로, 꿈속에 들어가 수련하는 무공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 무공을 사용하면 꿈속의 공간에서 자기가 원하는 기억을 계속해서 되풀이해 보거나, 심지어 한 번 싸웠던 상대를 만들어 내 대련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는 신비로운 무공.
나는 당연히 그 무공을 쓰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과 살짝 비슷한 것은 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내 가장 뛰어난 재능인 기억력으로 현실에서 봤던 광경을 그대로 되풀이해 보는 것이었다.
명상 속에서 나는 아까 봤던 경이로운 검격을 다시 떠올려 봤다.
그러자 아까의 풍경과 검성의 모습, 그리고 그 초월적인 검격이 내 심상 속에서 선명하게 다시 펼쳐지기 시작했다.
‘사실 묵랑에게 배운 것들을 이렇게 빨리 체화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방법 덕분이었지. 신응비상의 운용도, 공즉시색도.’
특히 묵랑의 경우엔 그저 동작을 본 것이 아닌 내 몸이 움직인 것이니, 그때의 느낌과 감각마저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이 엄청난 도움이 됐었다.
그래서 지금도 난 심상 속에서 검성 어르신의 베기와 찌르기를 계속해서 반복해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호흡, 동작, 느낌이 모두 내 영혼에 각인되도록.
한참을 그렇게 명상하던 나는, 약간의 아쉬운 마음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이따 저녁 식사 약속이 있었기에 계속 수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쉽네. 한 천 번 이상은 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뜬 나는 눈앞을 보고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바로 앞에서 검성 어르신께서 명상이 끝날 때까지 나를 기다려 주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흐뭇한 웃음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시면서 말이다.
“거, 검성 어르신?!”
너무 당황스러워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오히려 검성 어르신께서 먼저 내게 말을 거셨다.
“회식에 늦으면 어쩌나 했는데 적당할 때 깨어났군. 자, 함께 가세나.”
오늘은 우리 칠 조의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나와 청연 소저의 송별연, 그리고 마맹운과 야운향 소저의 환영연을 겸한 회식이었다.
아직 나 소저가 돌아오지 않아 좀 그렇긴 하지만, 그녀가 언제 돌아올지를 모르기에 있는 사람들끼리라도 먼저 하기로 했던 것이다.
검성 어르신께선 아마 나를 데려가기 위해 기다려 주셨던 모양이었다.
“계신 줄 알았다면 진작 일어났을 텐데, 죄송합니다.”
진심을 다해 검성께 사죄의 말씀을 드리자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하! 자네가 집중해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아 지켜보고 있던 걸세. 나 때문에 수련에 집중을 못 하게 됐었다면 오히려 내가 미안했지 않겠나? 그러니 전혀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네.”
“그래도 저 때문에 시간을 너무 낭비하시지 않았습니까? 청연 소저와 함께 보낼 수도 있는 시간을 베풀어 주신 건데요.”
그러자 그가 주변을 슬쩍 살피더니 작게 속삭였다.
“난 우리 딸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늘 청연이와만 있고 싶지는 않다네. 나도 내 생활이 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한 건 청연이에겐 절대 비밀일세.”
그렇게 말하며 눈을 찡긋하는 그의 너스레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금세 상대의 마음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들어 주시다니, 역시 검성 어르신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에게 물었다.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저희에게 이렇게 아낌없이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니까? 제자도 동문도 아닌 저희에게 말입니다.”
무인에게 있어 무공이나 심득은 재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재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무인이 제자나 동문이 아닌 외인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더군다나 다른 문파 제자들의 성장은 후일 자신의 문파를 위협할 수도 있는 잠재적인 위험이 되기도 하지 않던가.
하지만 검성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그의 성라검법을 가르치지 않았을 뿐, 비룡대의 무사 전원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아낌없이 가르침을 베풀어 왔으니까 말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청연 소저의 동료이기 때문에 친절을 베풀어 주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른 비룡대에서도 우리에게와 똑같이 가르침을 주시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의 행동은 분명 너무나도 감사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론 의문점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자 검성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문득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내 꿈은 천하제일의 대협이 되어 인의가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네.”
조금은 뜬금없는 그의 말에, 나는 살짝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러셨군요.”
그건 감탄할 수밖에 없는 얘기였다.
그는 진짜 어린 시절의 꿈대로 천하제일의 대협이 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꿈을 이룬 삶이라니, 멋지고 또 부러웠다.
하지만 검성 어르신은 어쩐지 씁쓸한 얼굴로 다음 말을 이으셨다.
“지금 나는 부끄럽게도 천하제일의 대협이라고 불리고 있다네. 그 부분에 있어선 어느 정도 꿈을 이뤘다고 봐도 되겠지. 그런데 말일세. 내가 천하제일의 대협이라고 불리게 됐는데도 인의가 살아 있는 세상은 도무지 오지 않더란 말일세. 아무리 흉악한 마두들을 죽이고 악인들을 징벌해도 세상은 여전히 약자들이 살기 힘든 곳이었지. 오히려 그런 허명을 얻고 나자 그들을 처단하기가 더 힘들어지기도 했다네. 놈들이 바퀴벌레처럼 나를 피해 다니게 됐으니까 말일세.”
거기까지 말한 검성 어르신은 문득 피식 웃음 지으셨다. 어딘가 자조감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씁쓸하게 말씀하셨다.
“오만했던 거지. 나 하나의 힘만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일세.”
문득 한숨이 나왔다.
그의 고백은 지금의 내게도 큰 울림을 전해 주고 있었다.
나 또한 내 힘으로 미래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저 검성조차도 할 수 없었다니, 역시 그런 내 생각은 오만이었던 걸까?
마음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때 그가 씨익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해 봤다네. 그리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지. 내 결론은 바로 이것이었네. 인의가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려면 나 혼자만의 힘만으론 절대 안 된다는 것. 그럼,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지. 약자들 사이에서도 악인이 있고, 삼류 무사들 사이에서도 악인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자들은 그저 유명해진 고수들뿐이었으니까 말일세.”
그러고는 문득 악동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네. 하지만 나 혼자서는 힘들어도 함께 할 사람을 늘린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일반인 사이에서도 악인이 있다면 선한 일반인을 강하게 만들어 주고, 삼류 무사들 사이에서도 악인이 있다면 선한 삼류 무사를 강하게 해주는 식으로 말일세. 그렇게 인의를 갖춘 사람들이 각 집단마다 늘어난다면 결국 인의가 살아 있는 세상도 오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열정 가득한 젊은이처럼, 천하 제패의 야심을 가진 정복자처럼 말이다.
“아까 내게 아무 상관도 없는 외인들에게 가르침을 전수한다고 했나? 그럴 리가. 그 말은 매우 잘못된 말이라네. 절대 아무 상관도 없지 않지. 자네들은 모두 내 꿈을 함께 이뤄 줄 동지들이 아닌가?”
순간 가슴이 울컥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소년처럼 웃고 있는 그의 열정에, 모든 이를 동지라고 말하는 그의 거대함에 압도당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녕 천하제일의 협객이 아닐 수 없었다.
“자네들이 전선에 있는 이유는 물론 다양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네. 소중한 청춘의 시간을 바쳐 혈교도와 싸우고 있는 자네들이라면, 협객이라고 칭하기에 모자람이 없다고 말일세. 그러니 내가 자네들이 강해지도록 도와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그렇게 물은 그는 따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제껏 내가 어른에게 별로 받아 본 기억이 없는, 너무나도 따듯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는 뭔가 생각난 듯 ‘아!’하더니 다시 말했다.
“물론 전선에도 지난번의 마유겸 같은 자도 있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 또한 내 가르침을 받은 자네가 막아 내지 않았던가? 이거야말로 내 꿈을 이뤄 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하하하하!”
잠시 목이 메었던 나는 간신히 웃으며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렇군요. 어르신께선 정말 원대한 꿈을 이뤄가고 계십니다.”
그러자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역시! 자네는 알아 주는구먼! 사실 내 친우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 나이를 그렇게 먹고도 아직도 철이 안 들었다고 타박만 한다네, 하하하하! 역시 내 사… 아무튼 고맙네, 하하하하!”
한참을 통쾌하다는 듯 웃던 그는 문득 내게 물었다.
“그런데, 나는 자네 얘기도 궁금하군. 자네의 꿈이 뭔지 혹시 물어도 되겠는가?”
그의 질문에 나는 민망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의 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목표입니다. 말을 꺼내기가 너무 부끄럽군요.”
그러자 그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게나. 내 이 나이 먹고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면, 사람은 모두가 다른 존재라는 것일세. 그걸 인정하지 못 하는 자들이 무공까지 강해지면 세상의 해악이 되곤 하더군.”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이 힘을 가지면 해악이 된다.
무척 마음에 와닿는 말이었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말게. 천하제일인이 되어 세상을 독패하겠다는 꿈이면 어떻고, 단란한 가정을 만들어 행복하게 살겠다는 꿈이면 또 어떤가? 다 자기만의 꿈인 것을. 약자들을 착취하며 살겠다는 꿈만 아니면 되지 않겠나? 자기 꿈을 부끄러워하지 말게나. 그건 꿈에게 미안해야 할 일이라는 게 내 생각일세. 아, 물론 이것도 그저 내 생각일 뿐이지만 말일세.”
나는 그의 마지막 말에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정의고 진리라고 부르짖는 고수들은 많이 봤지만, 이건 그저 내 생각일 뿐이라고 말하는 고수들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과의 다름을 인정하고 내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관대함과 배려심, 대체 어떻게 하면 이분처럼 나이가 들 수 있을까?
너무나도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순간 그에게 내 꿈을 말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말았다.
그라면 분명 내 꿈을 응원해 주고 도와주겠다고 말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꿈은 혈교를 세상에서 지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 때문에 내 주변의 사람들이 죽지 않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의 제 꿈입니다.”
그러자 그가 흐뭇한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역시! 자네가 협객이라는 건 내 진작 알아봤었지! 그래, 꼭 그 꿈을 이루기를 바라네. 내 힘이 닿는 곳까지 도와주도록 하겠네!”
너무도 마음 든든해지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뿌듯한 마음에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그는 잠깐 뭔가를 생각하더니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일세. 내 착각인지 모르겠네만 자네 꿈에 어쩐지 자네는 보이지 않는군. 그 꿈속에 자네의 자리는 어디 있는가?”
“…예?”
그의 질문에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 꿈에 내 자신이 없다?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혈교를 지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살린다. 매우 바람직한 꿈일세. 하지만 혈교가 없어진 그 세상에서 자네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잠시 생각해 본 후에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꿈은 천하제일의 협객이 되어 인의가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니 천하제일의 협객이 되어 살아가는 그 자신이 꿈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혈교를 지운 세상을 만든다는 내 꿈에서 나의 위치는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나도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그가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이것도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세상만큼이나 나 자신 또한 중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네. 세상보다 나 자신이 중요한 사람들은 악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보다 세상이 더 중요한 사람들은 결국 허무에 빠져 버리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 내 자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내 기대와 다른 곳일 때 오는 허무함 말일세.”
내 자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내 기대와 다르다?
쉽게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세상은 원래 내 기대와 다른 곳이 아니었던가.
그러자 검성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좀 극단적인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자네가 만약 혈교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는데, 그 덕분에 세상을 지배하게 된 다른 자들이 그에 못지않은 악인들이라면 그땐 어떻게 할 생각인가? 자네 덕분에 살아난 자들이 만약 혈교 못지않게 세상을 어지럽힌다면 말일세.”
그러자 이번엔 확실히 이해가 됐다.
머릿속에 바로 무림맹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만약 혈교를 무너뜨렸는데 그로 인해 거칠 것 없어진 무림맹에 의해 내 소중한 사람들이 죽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그에게 물었다.
“검성 어르신께서도 그런 허무함을 느끼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아까는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고 하셨지만, 어쩐지 그게 남의 얘기가 아닌 듯하기에 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협행의 결과가 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말일세.”
그의 대답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물어보기엔 그의 표정에 담긴 무게가 가볍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대신 다른 것을 물어봤다.
“그럼 그 허무함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그러자 그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내 경우엔 가족이었다네.”
“가족이요?”
“그래, 가족. 세상 전부를 바꾸지는 못했어도 적어도 내 가족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인의가 살아 있는 곳으로 바꿀 수 있었거든. 그리고 설사 실패해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편히 쉬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내게 정말 큰 힘이 되어 줬지.”
가족에 대해서 말하는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어쩐지 그걸 지켜보고 있는 내 마음마저 행복해지는 것 같을 만큼.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혹자는 무인에게 있어 가족은 약점일 뿐이라고 얘기하기도 하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네. 약점이 된다는 건 그만큼 내게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 아니겠나? 내게 있어 가족은 내 삶을 지탱해 주는 기둥이었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벌써 세상에 실망하고 꿈을 포기해 버렸을 지도 모르지. 지금도 보게. 무려 십 년 이상을 알고, 또 신뢰했던 무림맹의 친우에게 배신당했지 않았는가? 만약 가족이 없었다면 그걸 대체 어떻게 버텨 냈겠나?”
문득 그의 말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확실히 제갈지강의 배신이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비사영이나 배종관이 나를 배신하는 것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가족이라….”
내게 있어 가족은 이제껏 그리 좋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단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검성 어르신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충분히 내게 큰 힘이 되어 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검성 어르신은 문득 슬쩍 내 눈치를 보시더니만 은근한 목소리로 물으셨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는 혹시 혼인 상대로 점찍어 둔 여인이 있는가?”
왠지 모르지만 묘하게 부담스러운 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문득 나 소저를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아직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습니다. 지금은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그러자 검성께선 어쩐지 실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음, 그런가?”
어쩐지 죄송했다.
이렇게 열심히 가르침을 주고 계신데 실망시켜 드린 것 같지 않은가?
내가 뭔가 많이 잘못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서둘러 말했다.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 꿈에 제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러자 그가 바로 환한 표정이 되더니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오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해 주다니 고맙네! 역시 내 사…. 흠, 흠, 사질 같다는 뜻이었네.”
“아, 네. 감사합니다.”
천하의 검성께서 제자까진 아니어도 사질처럼 생각해 주신다니 무척 영광이었다.
검성은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흠, 흠, 그리고 말일세. 이건 내 경험에 따른 얘긴데 가장 좋은 여인은 항상 내 주변에 있는 여인이더군. 그러니 주변을 잘 살펴보게나.”
그의 말을 듣자 다시 나 소저가 떠올랐다.
살짝 씁쓸해지려고 했지만,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내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조금 아팠다.
“하하하하! 역시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 내 그럴 줄 알았네. 바보 같은 남자 놈들이야 처음 보는 여인들에게 환상을 갖곤 하지만, 그거야말로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 아니겠나? 가장 소중한 건 언제나 내 옆에 있는데 말일세! 하하하하!”
“예, 진짜 그런 것 같습니다.”
“으하하하하! 역시 마음이 잘 통한단 말이야! 천생 내 사… 질 같단 말이지! 하하하하!”
그 후로도 회식 자리까지 가는 동안 검성과 나는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무공에 대한 것부터 전선에서의 생활, 젊은 시절 여인과의 사랑에 대한 얘기까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분이 내 아버지였다면 정말 좋았겠다고.
내 아버지와도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다고 말이다.
청연 소저가 무척 부러워지는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