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청홍쌍검-2
수천회의 장로 갈사검객 번사청은 내공 칠십 년의 벽을 넘은 절정 고수이자 수천회의 삼인자인 외당 당주였다.
그런 그가 소란을 듣고 밖으로 나와 봤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맹웅대주 차호중이 정신을 잃고 인형처럼 무너지는 광경이었다.
“저, 저런?!”
너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그의 반응은 빨랐다.
그는 자신을 따라온 호위무사에게 바로 지시를 내렸다.
“너는 바로 가서 맹사대와 맹랑대를 출동시켜라! 당장! 그리고 바로 회주님께도 이 소식을 전달해라!”
그러고는 검을 뽑으며 두 남녀에게로 다가갔다.
주변엔 수많은 외당 무사들이 검을 뽑고 그들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맹웅대가 단 두 명에게 와해된 지금 그들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번사청이 소리쳤다.
“어디서 온 자들인데 감히 우리 수천회에서 횡패를 부리는가?!”
그러자 온통 붉고 푸른색으로 자신들을 감싼 두 명의 창백한 남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번사청을 바라봤다.
푸른 옷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청홍쌍검이다! 사천제일의 악인 막우전은 어디에 있느냐?!”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카랑카랑한 목소리.
번사청은 인상을 확 찡그리며 소리쳤다.
“회주께 무슨 망발이냐?! 감히 우리 회주님을 사천제일악인이라고 칭하다니!”
그러자 순간 두 남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키하하하하하!”
“오호호호호호!”
묘한 조화를 이루어 심혼을 뒤흔드는 괴이한 웃음소리였다.
그 끔찍한 소리에 주변에 모여 있던 무사들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려야만 했다.
번사청 또한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을 때, 웃음을 그친 푸른 옷의 남자가 그에게 말했다.
“그놈이 왜 사천제일의 악인인지는 네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자 번사청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러곤 황급히 소리쳤다.
“헛소리!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들을 쳐라!”
그의 명령을 받은 무사들이 두 남녀에게 달려들었다.
번사청 또한 검을 겨누고 달려들 틈을 노리고 있었다.
“하아아아압!”
“죽어랏!”
“으하아아압!”
사방에서 검의 물결이 쏟아져 밀려왔다.
그러자 두 남녀는 다시 서로의 손을 잡고 태극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빠바바바바박!
“크어어억!”
“크아아악!”
“커허어억!”
그것은 용권풍과도 같았다.
덮쳐오는 모든 것을 튕겨 내는 용권풍.
붉고 푸른 태극 모양의 용권풍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속도를 높여 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것을 지켜보던 번사청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틈을 봐서 공격하려고 했는데 저 상태라면 전혀 틈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놈들!”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번사청은 마침내 검을 들어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으하아아아압!”
기합과 함께 그의 검이 찬란한 빛을 뿌리며 몇 갈래로 나뉘어 남녀를 찔러 갔다.
한 갈래 한 갈래가 모두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휘어지는, 그에게 갈사검색이란 별호를 선사한 영활한 뱀 같은 검초였다.
하지만 그 순간, 계속 회전만 할 것 같았던 두 남녀의 행동에도 변화가 생겼다.
붉은 옷의 여인이 던지듯이 푸른 옷의 남자를 앞으로 쏘아 보냈던 것이다.
화아악!
그러자 앞으로 쏘아지는 남자가 빛살처럼 검을 뽑아 일검을 찔러 왔다.
방어를 도외시한, 마치 동귀어진과도 같은 검초였다.
번사청은 순간 흠칫해 방어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이렇게 무모하게 공격해 올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하지만 상대의 검격을 쳐내려 검을 휘두른 순간, 번사청은 자신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환검?!”
동귀어진인 듯했던 검격은 속임수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와 위치를 바꾼 붉은 여인이 덮쳐 오고 있었다.
세 가닥의 날카로운 검기.
허를 찌르는 빛살 같은 기습이었다.
“크윽!”
번사청은 사력을 다해 땅을 박찼다.
적의 박자에 완전히 휘말린 상황, 일단 뒤로 물러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뒤로 물러났을 때, 이번에야말로 붉은 여인은 남자를 투척하듯 던져 버렸다.
마치 암기를 투척하는 듯 거센 기세였다.
그리고 그 순간, 번사청의 등이 뒤에 있던 전각의 벽과 부딪쳤다.
터억!
뒤로 더 물러설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런?!”
핼쑥해진 얼굴의 번사청에게로 암기처럼 쏘아진 남자가 검을 든 채 날아오고 있었다.
더 피할 수 없게 된 번사청은 이를 악물고 남자의 검에 집중했다.
적이 환검까지 쓴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어떻게든 주의 깊게 공격을 막아 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자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향해 그대로 날아오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가 마지막까지 검을 휘두르지 않자, 검의 움직임에만 집중하고 있던 번사청의 눈이 크게 확대됐다.
“무, 무슨?!”
다음 순간, 푸른 남자의 몸통박치기가 번사청을 들이받았다.
퍼어어억!
“끄어어어억!”
그것은 마치 돌멩이에 짓이겨진 개구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완전히 함몰되어 버린 번사청의 몸이 전각의 벽을 뚫고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사라진 전각의 벽은 마치 대포에 피격당한 듯 뻥 뚫려 버린 상태였다.
그러자 잠시 후, 벽과 함께 기둥이 부서진 전각의 한쪽 면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와르르르릉!
그때 푸른 옷의 남자는 이미 붉은 옷의 여인 옆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편안한 모습으로 말이다.
단 두 명이서 수천회를 초토화하고 있음에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창백한 얼굴의 두 사람을, 무사들은 이제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며 차마 그들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때 붉은 옷의 여인, 인피면구를 쓴 당여은이 푸른 옷의 남자 선우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 근데 살상은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수천회를 정면으로 쳐들어가기로 결정하며, 선우진은 누가 사건과 관련된 자들인지 알 수 없으니 살인만큼은 자제하자고 얘기했었다.
그래서 웬만한 상대에겐 검도 뽑지 않고 박투술로 상대했던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상대했던 장로로 보이는 노인을, 선우진은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닌 완전히 분해하는 수준으로 처참히 살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여은은 그 이유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우진 역시 전음으로 대답했다.
- 저자는 무고한 자가 아닌 것 같더군요. 다른 이들은 막우전을 악인이라고 불렀을 때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었는데, 그자는 흠칫 놀라며 다급하게 입을 막으려고 했었거든요.
- 아아, 그랬군요.
당여은은 선우진의 심계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자꾸 사천제일의 악인 막우전이라고 하기에 그저 괴인인 척하기 위한 연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거기에 그런 뜻이 담겨 있었다니.
역시 옆에서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선우진이 당여은에게 물었다.
- 당 소저, 이런 짓을 하는 게 힘들지는 않으세요?
그러자 당여은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무 재밌어요! 이래서 무림인 중에 괴인들이 많은 거였군요! 이런 경험을 하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공자!
완전히 신난 듯한 당여은의 목소리에 선우진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항상 자신을 억누르며 살아왔던 그녀에겐 이번 일이 무척 신나는 모험 같은 느낌인 모양이었다.
그에 반해 선우진은 무표정한 괴인을 연기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론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일은 선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위험해지지 않는 선,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선을 말이다.
그래서 즐길 정신은 없던 참이었는데, 당여은의 즐거운 목소리를 듣자 그래도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늘 상처받은 아이 속에 갇혀 살아왔던 당여은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었다는 건, 선우진 자신에게도 무척 보람이 느껴지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또 그녀와 함께 음양합격술을 쓰고 있다는 것도 기분이 묘했다.
이 음양합격술은 선우세가의 무고에서 읽고는 나중에 누군가와 써 보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었던 무공이었다.
‘정확히는 나 소저를 다시 만나 함께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근데 이제 나서유에 대한 마음을 정리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고, 정작 음양합격술은 상상도 못 했던 당여은과 펼치고 있다니.
역시 삶이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선우진의 눈에 전방에서 새로운 자들이 몰려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통일된 복장으로 보건대 두 무리의 무력대로 보이는 대략 백여 명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을 향해 목을 가다듬으며 선우진은 다시 음성을 변조할 준비를 했다.
이 음성변조술은 이번에 하오문에서 얻은 잡술이었다.
“더 이상 조무래기들에게 손을 쓰고 싶지 않다! 사천제일의 악인 막우전은 어디에 있느냐?!”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두 무력대의 대주로 보이는 자들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냐?! 우리 회주께서 왜 사천제일의 악인이란 말이냐?!”
그들의 반응이 당황인지 분노인지 주의 깊게 살핀 선우진은 당여은에게 전음을 보냈다.
- 둘! 셋!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키하하하하하!”
“오호호호호호!”
예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서로 공명하며 온 공간으로 퍼져 나갔다.
내공이 약한 자들은 귀를 막고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사이한 웃음소리였다.
수천회로 쳐들어오기 전 당여은과 가장 많이 맞춰 봤던 것이 음양합격술과 더불어 이 귀중소였다.
귀중소는 화음을 이용해 효과를 증폭시키는 음공으로, 정확하게 조화만 맞춘다면 많은 사람이 쓸수록 그 파괴력이 증가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것 또한 선우진이 선우세가의 무고에서 외워 놨던 무공 중 하나였다.
웃음소리를 통하여 적들의 기세를 꺾은 선우진이 다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엾은 것들! 눈이 멀어 사천제일의 악인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너희같이 모자란 것들에겐 용무가 없다! 어서 막우전을 불러오너라!”
그러자 두 무력대의 대주들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닥쳐라! 맹사대! 모두 저자들을 공격하라!”
“맹랑대! 돌격이다!”
그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백여 명의 무인들이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모래성을 향해 밀려드는 파도처럼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달려든 곳은 모래성이 아니었다.
다시 거세게 일어선 붉고 푸른 용권풍만이 그들을 맞이했을 뿐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
“크아아아악!”
“으아아아악!”
“끄아아아악!”
돌진했던 무인들이 왔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갔다.
용권풍에 휘말린 근처의 전각들도 또다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수천회의 회주이자 초절정의 벽을 바라보는 사천성 남부 최강의 무인, 등천검객 막우전이 말이다.
“이, 이럴 수가.”
막우전은 참담한 눈빛으로 장내를 둘러봤다.
신음소리를 흘리며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무인들.
포탄을 맞은 듯 무너져 버린 전각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막우전은 설마 자신까지 나서야 할까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반성했다.
아무리 불시의 기습이었다고는 하지만 설마 단 두 명에게 이렇게까지 초토화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막우전은 바로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놈드으으으을!”
슈하아아악!
찬란한 녹빛 검강을 뿜어내는 막우전의 검이 무인들을 튕겨 내고 있던 용권풍을 향해 그어졌다.
공간 자체와 함께 그들을 반으로 쪼개 버릴 듯한 엄청난 기세의 검격이었다.
푸하아아악!
그의 검이 공간을 쪼개자, 용권풍이 실제로 갈라졌다.
수많은 무인들을 갈아 버렸던 두 괴인의 합격을, 막우전은 단 일검에 와해시켜 버렸던 것이었다.
그 압도적인 무위에 주변에서 지켜보던 무사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와아아아!”
“역시 회주님!”
“역시 등천검객! 사천 남부 최고의 고수시다!”
하지만 정작 그런 무위를 선보인 막우전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양쪽으로 갈라졌던 두 남녀가 다시 그의 몇 장 앞에서 합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떨어졌던 건 막우전의 검 때문이 아닌 그의 등장을 미리 감지했던 선우진의 판단 때문이었다.
선우진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사천제일의 악인 막우전!”
그러자 막우전이 눈을 움찔하며 소리쳤다.
“내게 사천제일의 악인이라니?! 침입자 주제에 무슨 헛소리냐?!”
그가 분노한 듯 소리치자 선우진은 인피면구 위로도 드러나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 많은 목숨을 네 사욕을 위해 희생시켜 놓고도 사천제일의 악인임을 부정할 셈이냐? 역시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그러자 막우전의 얼굴이 순간 눈에 띄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건 한순간일 뿐이었다.
바로 이를 악문 막우전은 더 시간을 끌지 않겠다는 듯 그들을 향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헛소리!”
아까 처음의 일격보다도 더 광폭한 기세의, 그야말로 사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적하신검 화영빈이나 설풍과도 동급의 무위를 자랑하는 그의 기세는 과연 놀라웠다.
하지만 선우진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예측했다는 듯 그가 돌진해 오는 앞, 땅을 향해 무언가를 투척했을 뿐이었다.
퍼어어어엉!
땅에 부딪힌 그것은 바로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폭발과 동시에 검은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깜짝 놀란 막우전은 황급히 숨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독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우려와 달리 그것은 단순한 연막탄일 뿐이었다.
그리고 연막이 사라진 후 막우전이 보게 된 것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두 괴인의 빈자리뿐이었고 말이다.
막우전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포효했다.
“이놈드으으으으을!”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농락만 당했다는 자괴감에, 그리고 푸른 옷의 괴인이 했던 의미심장한 말에 막우전은 도저히 이대로 그들을 보내 줄 수가 없었다.
“당장 놈들을 쫓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들을 잡아야 한다! 절대 놓치지 마라!”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 길길이 날뛰는 막우전의 기세에. 수천회의 무사들은 급히 추격대를 편성해 괴인들을 따라가야만 했다.
하지만 괴인들의 흔적은 인근 숲에서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미 해가 졌던 하늘이 바로 어둑어둑해지자 추격은 도저히 계속 수행될 수 없었다.
마치 마지막까지 그들을 농락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