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광검릉-3
한편, 왼쪽을 선택해 한참을 달리던 선우진은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감지하고는 발걸음을 늦췄다.
그러곤 당여은에게 작게 속삭였다.
“당 소저, 그들은 반대쪽으로 간 것 같습니다. 급하게 서둘지 않아도 되겠어요.”
“아, 네.”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은 이제야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동굴 안은 커다란 벽돌을 쌓아 만들어진 원형의 통로로 되어 있었다.
무척 공들여 만들어진 듯 정교하게 맞물린 벽돌이 거의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깊은 동굴 안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무리 없이 두 눈으로 주변을 식별할 수 있었다.
동굴 안에 온통 희미한 녹색의 빛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여은은 통로를 따라 천장에 불규칙하게 박혀 있는 녹색 광채의 야명주를 바라보며 신기한 듯 말했다.
“전 이렇게 많은 수의 야명주는 처음 봤어요. 당가에 있는 야명주를 다 가져와도 이만큼은 안 되겠는데요?”
그러자 선우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게 야명주로군요. 저는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것도 처음입니다. 엄청 비싸다고 들었는데, 저걸 횃불 대신 사용하다니 좀 기가 죽는군요. 뭐, 횃불을 붙일 필요가 없는 건 좋군요.”
그러고는 야명주의 배열과 그 주변 돌들에 새겨져 있는 문자들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당 소저, 심혼으로 침범하려는 기운이 저기서부터 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네? 저기 야명주에서요?”
선우진의 말을 들은 당여은은 잠시 정신을 집중해 자신의 심혼을 호시탐탐 침범하려는 기운을 살펴봤다.
그러자 선우진의 말대로 그 기운이 야명주와 그 주변에 새겨진 문자들 쪽에서 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러네요! 정말 저기서부터 오고 있어요!”
선우진은 통로를 따라 저 앞으로 주욱 박혀 있는 야명주들을 바라봤다.
아마 이 통로 자체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거대한 진식이었던 모양이었다.
문득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광검이라는 자는 대체 뭘 원했던 걸까요? 왜 이렇게까지 거대한 진식을….”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의 유진을 남긴 곳을 이런 거대한 덫으로 만든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도 실력을 시험하는 곳도 아닌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덫으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일단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하기로 했다.
통로는 한참을 지나도록 계속 똑같은 모습이었다.
앞으로 주욱 뚫려있는 똑같은 모양의 통로.
처음엔 혹시라도 다른 함정이 있을까 주의 깊게 살폈지만, 계속해서 대연정심결의 벽을 뚫고 들어오려는 이상한 기운 외에는 다른 어떠한 함정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당여은이 이상한 듯 물었다.
“왜 앞으로 가는 길만 계속될까요? 다른 함정이 없다는 게 오히려 더 불안해요.”
그러자 고개를 저은 선우진이 대답했다.
“앞으로는 아닌 것 같군요.”
“네?”
“길이 미세하게 옆으로 휘어있어요. 꼭 커다란 원을 그리는 것처럼요.”
그 말에 앞으로 난 통로를 자세히 살핀 당여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자세히 보니 정말 그렇긴 하네요. 약간 휘어져 있어요. 근데, 거기에 큰 의미가 있을까요?”
당여은의 질문에 선우진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만약 이게 정말 원형의 통로고 이런 식으로 계속 연결되어 있다면 아마도….”
그 순간, 선우진은 저 앞쪽에서 맹렬하게 다가오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선우진이 황급히 전음으로 당여은에게 말했다.
- 당 소저, 저 앞에서 누가 달려옵니다!
- 네? 앞에서요? 누가요?
- 아마도… 막우전이겠죠. 이게 원형의 통로가 맞다면요.
- 네?! 그게 무슨, 아!
당여은은 순간 선우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통로가 원형이기에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도 결국 만나게 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래서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던 막우전이 그들의 앞에서 나타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여은은 그 사실을 이해했음에도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선우진의 말이 맞다면 아까의 갈림길은 그저 원의 반대 방향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 통로가 그저 원형으로 뚫려있는 길일뿐이라면 광검은 대체 왜 이곳을 만들었단 말인가?
선우진 또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선우진은 그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루고,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부터 먼저 고민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주변을 살펴보며 머리를 굴렸다.
‘안 좋은데? 당 소저와 내가 힘을 합쳐도 막우전을 정면으로 상대할 수는 없다. 게다가 아까 가유악을 뚫고 온 것을 봤을 때 광증에 빠져 무위가 더 높아졌을 수도 있겠지. 환경도 불리해. 이렇게 좁은 통로에선 내 특기인 환검이나 신법을 사용해 싸우기 힘들 테니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선우진은 입술을 깨물며 당여은을 바라봤다.
만약 혼자였다면 은신술로 숨을 수라도 있겠지만, 당여은과 함께는 그것도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겠군.’
그때였다.
갑자기 앞에서부터 거대한 진동이 통로 벽을 흔들며 두 사람을 덮쳤다.
우우우우우우웅!
마치 지진이 난 듯 동굴을 뒤흔드는 거대한 진동이었다.
“이건?!”
벽을 타고 밀려오는 거대한 진동, 선우진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런!”
이를 악문 선우진은 황급히 당여은에게 달려들어 양손으로 그녀의 귀를 틀어막고는 품에 끌어안았다.
진동이 덮쳐오자마자 순식간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선우진의 품에 안긴 당여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고, 공자?!”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거대한 음파의 해일이 그들을 덮쳤다.
- 크아아아아아아!
온 통로를 쩌렁쩌렁 울리는 거대한 포효였다.
막우전이 지른 포효가 동굴 안에서 증폭되어 그대로 선우진과 당여은을 폭풍처럼 덮쳐 왔던 것이다.
“아으으으으으윽!”
당여은은 세차게 몸을 두드려 오는 거대한 음공의 파도에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피부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음공이라니, 그나마 선우진이 귀를 막고 몸을 감싸 줬기에 버틸 수 있었지, 갑작스럽게 당했더라면 고막이 모두 터져 버렸을 것이었다.
그들을 덮쳤던 음공의 해일은 잠깐 동안 그들의 온몸을 두드린 후 지나가 버렸다.
그러자 당여은은 황급히 선우진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를 바라봤다.
그의 손으로 자신의 귀를 막아주고 몸을 감싸 줬으니 정작 선우진은 무방비 상태로 저 음공을 맞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저 거대한 음공을 귀도 막지 않은 채 버텼으니 무사할 리 없었다.
“공자!”
당여은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를 불렀다.
하지만 당여은의 눈에 비친 선우진의 모습은 다행히 아무 일도 없어 보였다.
약간 창백해 보이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여은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당여은에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당 소저. 내공으로 귀를 틀어막은 데다 외공을 익혀 웬만한 충격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리고 바로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보다 막우전이 오고 있습니다. 방금 음공으로 보건데 광증에 빠져 이전보다 무위가 더 상승한 게 확실한 것 같고요. 어서 도망쳐야 합니다.”
그 말에 당여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빨리 가요!”
하지만 선우진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아뇨. 같이 도망치면 늦습니다. 놈의 속도가 당 소저보다 빠르니 곧 따라잡힐 테니까요. 그러니 당 소저가 먼저 도망가세요. 저는 시간을 좀 끌다가 도망칠 테니.”
그러자 당여은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그건 안 돼요!”
하지만 선우진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말아요, 소저. 만약 위험해지면 바로 도망칠 테니. 제 신법을 아시잖아요? 놈은 절대 저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겁니다.”
“하, 하지만!”
“자,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최대한 빨리 달려서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나가요. 곧 쫓아가겠습니다.”
그때 다시 뭐라고 말하려던 당여은의 귀에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막우전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닥!
선우진의 말이 맞았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어서! 빨리!”
선우진은 그녀를 부드럽게 반대 방향으로 밀쳐 냈다.
그러자 몸이 붕 떠서 날아간 당여은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선우진을 한번 보고는, 한 마디를 남긴 채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제발 몸조심하세요, 공자!”
선우진은 멀어지는 당여은의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그러고는 참았던 피를 토해 냈다.
“쿨럭!”
촤아악!
붉은 선혈이 한 사발 정도 동굴 바닥으로 쏟아졌다.
“크윽!”
아까 당여은에게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말했던 건 거짓말이었다.
선우진의 몸은 현재 내상을 입어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아까 지진이 난 듯 통로가 진동했을 때, 곧 음파가 덮쳐올 거라는 걸 미리 알았던 건 소리가 공기보다 단단한 땅에서 더 빨리 도달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굴 벽을 타고 오는 진동을 느낀 순간 바로 거대한 소리가 올 거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선우진 자신의 몸이 음파 공격에 취약할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단단하게 단련된 몸이 오히려 진동을 내부로 쉽게 전달해 줄 줄이야.
그래서 자신의 몸으로 감싸줬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몸을 단련하지 않은 당여은보다도 더 큰 피해를 입고 말았던 것이었다.
선우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제 어떻게 한다?”
타다다다다닥!
달려오는 막우천의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
희미한 녹광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 안광을 뿌리고 있는 막우전은 미친 듯 통로 안을 달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이제 아무런 기억도, 이성적인 판단도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청홍쌍검에 대한 분노만이 선명하게 남아 이글이글 끓어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막우전의 가슴 속엔 점점 분노만 쌓여 갔다.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말이다.
그러던 얼마 후, 한참을 달려도 보이지 않는 놈들의 모습에 결국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막우전은 끌어오르는 분노에 온 공력을 실어 포효로 방출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제 자리에 멈춰 사자처럼 울부짖자 그의 포효가 통로 속으로 거대한 해일이 되어 밀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예민해진 막우전의 귀에 여인의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린 것 같았다.
아주 멀리 있는 듯 작은 소리였지만, 막우전은 분명히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다.
전방에 뭔가 있는 것이었다.
“크르르르르!”
막우전은 다시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며 전방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먹이를 쫓는 짐승처럼 그의 시선은 오직 전방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다시는 놓칠 수 없었다.
같은 시각, 선우진은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막우전의 기척을 듣고 있다가 결국 천장에 거미처럼 달라붙었다.
놈이 달려오는 기세, 자신의 몸 상태, 어떤 것을 봐도 정면으로 붙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은신뿐이었다.
하지만 좁고 단순한 원형의 통로였기에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선우진은 야명주가 박혀 있는 돌의 바로 옆에 달라붙기로 했다.
등하불명, 광원의 바로 옆이었기에 오히려 좁은 통로에서 유일하게 약간의 그림자가 진 그곳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잘되어야 할 텐데.’
선우진은 불안한 마음으로 막우전이 점점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타다다다다다!
이젠 나름 은신술에 자신이 붙은 상태였지만, 그것이 내공 구십 년 이상의 고수에게도 통할 거란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이 은신하기에 적합한 환경도 아니지 않은가.
놈이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도 쉽게 발각당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마 그대로 끝장일 것이고 말이다.
타다다다다닥!
이제 육안으로도 놈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놈은 붉은 안광을 뿌리며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꿀꺽!
그리고 잠시 후, 놈이 선우진의 머리 아래로 쏜살같이 지나쳐 갔다.
투다다다다닥!
선우진은 속으로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그래서 다음 행동을 준비하려 할 때였다.
문득 놈이 달리던 것을 멈추고 갑자기 급정지했다.
끼익!
동시에 선우진의 심장도 덜컥 내려앉았다.
놈은 제자리에 멈춰서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다.
“킁킁!”
뭔가 냄새를 맡은 듯한 모습.
그것을 본 선우진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피 냄새!
아까 토해냈던 피 냄새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놈은 짐승처럼 바닥에 코를 박고는 킁킁거리며 뒤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아까 피를 토해 냈던 곳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선우진의 심장이 쉴 새 없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놈이 고개를 들었다.
거기서 고개만 올리면 선우진과 눈이 마주칠 수도 있는 방향에서 말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