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광검릉-4
짧은 순간, 선우진은 기습을 준비해야 했다.
어차피 들킨다면 먼저 선공을 가하는 쪽이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압도적인 무위 차와 몸 상태를 보건대 승산은 거의 없겠지만 그냥 죽어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위로 고개를 드는 놈을 향해 막 뛰어나가려 는 찰나,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다.
- 공자! 꼭 무사하세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당여은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위를 향하려던 막우전의 고개가 그쪽으로 휙 돌아갔다.
“크르르르르르!”
그리고 놈은 다시 그쪽을 향해 팡! 튀어 나갔다.
아까처럼 맹렬한 기세의 질주였다.
선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을 뻔한 한숨을 간신히 참아 냈다.
정말 죽을 뻔했던 것이었다.
‘간신히 살았다. 하아.’
당여은이 목소리를 낸 건 이 상황을 알았다기보단 아마도 그저 자신을 걱정해서였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새삼 그녀의 마음이 더 고마웠다.
막우전이 멀어진 후 선우진은 바닥으로 떨어져 착지했다.
그녀의 마음은 고맙지만 이대로 놈을 그녀에게 가도록 둘 수는 없었다.
선우진은 막우전이 육안으로 보이지 않게 됐을 때쯤 공력을 모아 소리를 냈다.
“키하하하하하!”
귀중소, 바로 청홍쌍검이 되어 냈던 웃음소리였다.
그러자 선우진의 감각에 놈이 급작스럽게 정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곤 다시 이쪽으로 맹렬하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좋아, 와라!’
사납게 웃음 지은 선우진은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죽기 싫으면 뛰어야만 했다.
그리고 아직 놈에게 따라잡히지 않을 만큼의 속도를 낼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달리던 선우진은 경악하며 다시 급하게 정지해야만 했다.
‘뭐야, 이게?!’
저 반대편에서도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막우전만큼은 아니지만 꽤 빠른 속력의 누군가가.
그리고 선우진은 그게 누구인지도 바로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부회주 가유악이로구나!’
아마 이성을 잃은 가유악이 막우전의 뒤를 계속 쫓아왔던 모양이었다.
외통수였다.
앞뒤가 모두 강적들에게 막혀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아주 잠깐 멈칫했던 선우진은 다시 이를 악물고는 가유악이 오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신보단 다 고수들이었지만 그래도 가유악 쪽이 더 만만했다.
그리고 어차피 그들과 싸울 생각도 없었다.
정면으로 싸워서야 답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선우진은 달리며 앞과 뒤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극도로 집중했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시점에 정확하게 행동해야 했다.
그래서 양쪽 다 육안으로 보일 만한 거리가 되기 직전, 천장으로 뛰어올라 다시 은신했다.
파박!
그러자 바로 다음 순간 양쪽에서 막우전과 가유악의 신형이 달려오는 것이 육안에 잡혔다.
천장에 은신한 채 마음속으로 빌었다.
‘자, 옛 친구를 만나서 반갑지? 그럼 이제 회포를 좀 풀라고.’
아마 선우진의 바람이 통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더니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맹렬히 달려들었으니까 말이다.
“크르르르르르르!”
“크크크크크크크!”
두 맹수들은 바로 싸움을 시작했다.
“크아아아!”
“캬아아아아!”
콰콰콰콰쾅!
선우진이 매달린 바로 밑에서 내공 구십 년 이상의 고수들이 경천동지할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검과 주먹, 발차기와 몸통박치기까지 사용하는 과격한 싸움.
보기엔 막우전이 좀 더 우세해 보였지만, 선우진은 어차피 거기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은신한 채 아주 천천히 가유악이 온 방향으로 이동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했을 뿐이었다.
‘천천히, 조심조심. 빨리 가는 것보다 들키지 않는 게 중요하다.’
쾅! 콰쾅! 쾅! 콰콰쾅!
밑에선 놈들이 통로를 무너뜨려 버릴 듯 과격하게 싸우고 있었다.
아니, 이 정도 충격을 받고 아직 안 무너진 것이 더 신기할 정도였다.
광검이라는 자는 이곳을 무척 신경 써서 튼튼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역시 모든 것이 그렇듯 내구력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었다.
콰아아앙!
막우전의 강력한 일장을 가유악이 피하며 벽에 적중하자, 그 주변의 석벽이 부서지고 말았던 것이다.
쿠르르르릉!
그리고 한쪽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주변의 석벽도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일 장 정도 거미처럼 기어갔던 선우진이 붙잡고 있는 천장도 마찬가지였다.
와르르르르!
‘이런 젠장!’
붙잡고 있던 천장과 함께 속절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선우진은 마음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할 때는 아니었다.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저 둘은 주변에 신경을 못 쓰는 상태인 것 같으니 말이다.
‘그래, 계속 그렇게만 하고 있어라.’
휘이익!
선우진은 일단 자신의 위로 떨어지는 돌무더기를 좌우로 흘려내고는, 고양이처럼 몸을 뒤집어 소리 없이 바닥에 착지하는 것까진 성공했다.
착!
하지만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선우진은 순간 깨달아야만 했다.
그 순간, 가유악과 싸우고 있던 막우전과 자신의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는 것을.
찰나의 시간, 둘은 잠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린 선우진이 쌩! 하고 달아났을 때, 막우전은 분노의 포효를 토해냈다.
“크아아…!”
하지만 선우진을 쫓아가려던 막우전은 그만 가유악의 일권을 허용하고 말았다.
퍼억!
콰당탕!
선우진은 최선을 다해 달렸다.
내상을 당한 속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최소한 원형의 통로를 지나 다시 밖으로 나갈 때까지는 버텨야만 했다.
잠시 후, 선우진의 감각에 다시 막우전이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가유악을 떨쳐내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자신이 빠져나갈 때까지 계속 달릴 수 있느냐는 것뿐이었다.
몸 상태를 살피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제발 버텨라, 내 몸아!’
잠시 후, 자신의 상태를 관조해 본 선우진은 이 상태라면 충분히 긍정적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피를 토해낸 이후의 몸 상태가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았던 것이다.
싸우는 건 몰라도 적어도 달리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통로도 여전히 튼튼했다.
무너진 부분은 딱 거기뿐, 주변 통로는 여전히 멀쩡한 상태였다.
추가 붕괴의 조짐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하나. 마음껏 달리는 것뿐이란 얘기지!’
씨익 웃고는 몸 상태를 확인하며 천천히 속도를 올려봤다.
놈들과의 거리가 오히려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좋았어! 이대로 출구까지 가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제 어느 정도만 더 달리면 반대쪽 방향으로도 입구가 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전방에 아직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말았다.
선우진은 경악했다.
‘당 소저?!’
그것은 이젠 어디에서도 그녀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당여은의 기척이었다.
벌써 바깥으로 나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기척이 전방에서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선우진은 완전히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왜 아직도 이 안에?!’
그리고 잠시 후 선우진은 진짜 당여은의 모습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를 본 당여은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소리쳤다.
“공자! 무사했군요!”
그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에, 바로 왜 아직 여기 있냐고 소리치려 했던 선우진은 어색하게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먼저 그녀에게 감사의 말부터 전했다.
“소저가 소리를 내 준 덕분에 살았습니다. 고마워요.”
“아, 그게 진짜 도움이 됐군요! 혹시나 싶어 했던 건데! 정말 다행이에요!”
자신이 위험할 수도 있었을 텐데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런 모험을 걸어 줬다니, 선우진은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 방금 전까지 소리치려 했던 자신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이 없다는 것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근데 소저, 왜 밖으로 안 나가고 이쪽으로 오신 겁니까? 아직 놈들이 쫓아오고 있는데….”
그러자 바로 울상이 된 당여은이 대답했다.
“계속 달렸는데 밖으로 나가는 길이 없었어요. 저도 온 거리보다 훨씬 더 달린 것 같은데 왜 길이 없는지 이상해하던 참이었는데….”
“…예?!”
‘그게 말이 되나?’라고 생각했던 선우진은 문득 그게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광검이라는 자가 만든 사람을 미치게 하는 함정, 한번 들어온 자가 다시 나갈 수 없게 만드는 것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아니면 아까 벽이 무너진 충격으로 문이 닫혔을 수도 있고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
‘뭐야, 그럼 우리는 나가지도 못한 채 이 안에 갇혔다는 얘긴가? 저 괴물 같은 자들과 같이? 심지어 통로 중간도 무너져 끊겼는데?’
만약 그렇다면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망친다 해도 끝이 막혀 있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때였다.
당여은이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선우진에게 말했다.
“저, 공자. 이쪽을 좀 봐 주세요.”
“네?”
당여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통로의 안쪽 벽 상단에 쓰여진 글자였다.
“제가 혹시 놓친 게 있을까 봐, 주변을 자세히 살피며 가고 있었는데 위에 이런 게 쓰여 있었어요.”
그곳에는 二人關(이인관)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인관이라고?’
이인관, 두 사람의 관문이라.
그걸 보는 선우진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저런 글자가 쓰여 있다는 건 이곳에 어떤 관문이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게다가 글자가 쓰인 위치상, 그것은 마치 문 상단에 쓰인 현판과도 같아 보였다.
선우진은 그 글자의 밑을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자 그 바로 밑의 돌벽이 다른 곳과는 약간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돌들의 경계가 한 줄로 이어져 있잖아? 그것도 네모난 모양으로. 이건 마치….’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문?”
그랬다.
그것은 마치 문 같아 보였다.
그러자 당여은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렇게 보였어요. 하지만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가 않아서….”
당여은의 말에 선우진도 바로 다가가 문으로 보이는 돌벽을 밀어 보았다.
하지만 전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타다다다다닥!
막우전이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벌려놨던 놈과의 거리가 좁혀진 것이다.
마음이 급해졌다.
빠르게 생각해 봤다.
‘당 소저는 막우전보다 확실히 속도가 느려. 그렇다고 그녀를 안고 뛰기엔 내 몸 상태가 받쳐 주지 못할 테고.’
이대로 도망치면 잡힐 확률이 높을 것 같았다.
게다가 만약 어찌어찌 잘 도망친다 하더라도 당여은의 말대로 입구가 사라졌다면?
심지어 통로 중간까지 무너져 끊어져 버렸지 않은가.
‘젠장.’
이를 악문 선우진은 다시 문으로 보이는 돌벽을 밀어봤다. 어떻게든 이 문으로 들어가야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돌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타다다다다닥!
놈의 달려오는 소리가 이제 귀로도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당여은이 소리쳤다.
“공자! 여기 손자국이 나 있어요!”
“예?!”
당여은이 가리킨 곳을 보니 문 옆쪽 돌벽에 희미한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바로 소리쳤다.
“그걸 눌러봐요!”
“네!”
당여은은 손바닥 자국에 그녀의 손바닥을 대고 힘껏 눌러봤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비켜 봐요, 내가 한번!”
선우진이 달려가 급히 눌러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타다다다다다닥!
“크르르르르르릉!”
이제 저 멀리 육안으로 보이는 곳에 막우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자 선우진과 당여은을 본 놈이 눈에서 줄기줄기 붉은 살광을 내뿜으며 더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선우진은 이를 갈며 외쳤다.
“이런 젠장! 도망쳐요, 당 소저!”
이젠 방법이 없었다.
그냥 도망치는 수밖에.
더 늦어지면 아예 도주마저 불가능해질 수도 있었다.
빌어먹을 이인관 같으니!
그때였다.
선우진의 머릿속에 ‘이인관’이라는 단어가 문득 크게 다가왔다.
‘이인관? 두 명이라고?’
달리려다 급히 멈춰선 선우진의 눈이 문의 반대쪽을 살펴봤다.
그러자 발견할 수 있었다.
당여은이 발견한 손자국의 맞은편에 나 있는 희미한 손자국을.
“당 소저! 잠깐!”
“네?!”
이게 잘하는 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막우전과의 거리가 이제 바로 몇 장 앞이었으니까.
“크르르르르르!”
하지만 어쩐지 느낌이 왔다.
모험을 걸어보기로 했다.
선우진이 달려가 그 손자국에 손바닥을 갖다 대며 소리쳤다.
“그쪽을 눌러요!”
그러자 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당여은은 잠시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는 막우전을 힐끗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와 돌에 난 손자국에 자신의 손바닥을 갖다 댔다.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선우진의 판단을 신뢰하기로 결정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것을 눌렀다.
꾸우욱!
그러자,
우르르르르르릉!
문으로 보였던 석벽이 천천히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르릉!”
막우전은 이제 몇 장 앞까지 달려온 상태였다.
선우진이 검을 뽑아 들고는 달려오는 막우전과 천천히 밀려 들어가는 문을 번갈아 바라보며 소리쳤다.
“틈이 생기자마자 들어가요!”
그리고 그 순간, 막우전이 몸을 날려 덮쳐 왔다.
“크아아아아아!”
하지만 선우진은 그와 맞부딪치지 않았다.
석문 사이에 약간의 틈이 생겼던 것이었다.
당여은의 손을 잡은 선우진이 바로 그 틈으로 뛰어들었다.
“가요!”
파박!
그 직후, 막우전의 일장이 헛되이 석벽을 때렸다.
콰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