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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전선 비룡십삼대-124화 (111/359)

124화 사천당문-2

당정후가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네 나이가 스물넷이지? 내년이면 스물다섯. 조금 늦은 나이기는 하지만 네 미모와 무공이 빼어나 아직 본가를 위해 쓸 수 있으니 다행이로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전선 같은 곳은 다른 방계의 쓸모없는 아이를 보냈을 것을. 괜히 체면을 차린다고 너를 보냈구나.”

자신의 딸에 대한 얘기임에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마치 물건을 품평하는 듯한 냉정하고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그는 당 소저가 자신의 말을 거부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 듯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

그리고 실제로도 당 소저는 너무 충격을 받은 듯 가늘게 몸을 떨면서도 차마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가, 가주님. 저는….”

하지만 그 목소리는 당정후에게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니, 상관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너의 혼처는 홍사검문이다. 유명한 검의 명가이지. 또한 너와 혼인을 할 사람은 최근 홍사검문 최고의 기재로 이름이 높은 홍사검룡 온제웅 소협이다. 네가 마침 검을 좋아하니 너와는 잘 어울리는 짝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온 소협이 본가에 와 있으니 머무르는 동안 서로 마음을 좀 나눠 보도록 해라.”

홍사검문? 홍사검룡 온제웅?

내 기억력은 즉시 그 이름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홍사검문은 지난번 당문의 무인들과 함께 정협방으로 왔던 자들, 그리고 홍사검룡 온제웅이라면 그때 부하를 시켜 내게 묵랑을 팔라고 협박했던 바로 그놈이었다.

화영빈 형님이 오시자 바로 부하를 버리고 자리를 피해 버렸던 그놈 말이다.

나는 도열한 무인들 사이에서 그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놈은 붉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의 사이에서 탐욕스러운 웃음을 지은 채 당 소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놈이 그때 곧 당가의 일원이 된다는 얘기를 하긴 했었는데 그게 이런 얘기일 줄이야.

전혀 반갑지 않은 이 인연에 문득 기가 막혀 왔다.

그때 당 소저가 간신히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어 목소리를 뱉어 냈다.

“가주님, 저는 아직 혼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간절한 눈빛으로 힘겹게 뱉어 낸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퍼져 나가자 대전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음굴처럼 냉랭해지고 말았다.

도열한 모든 무인들이 경악한 눈빛으로 당 소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가주의 말에 토를 달 수가 있냐는 듯한 눈빛들, 수많은 무인들로 가득 찬 대전이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차가워진 것은 독암지존 당정후의 눈빛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 얼음칼날 같은 냉랭한 눈빛으로 당 소저를 바라보던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아주 짧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거운 의미에 당 소저는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그녀의 눈엔 눈물이 가득 차 글썽거리고 있었다.

당정후는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던, 심지어 혼인에 찬성하건 반대하건 상관이 없다고.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건대 사천당문에서 이런 생각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인 듯했다.

당정후가 분노한 듯 약간 어조를 높여 다시 물었다.

“묻지 않느냐?”

그러자 고개를 숙인 채 가늘게 떨고 있던 당 소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제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대전에 감돌던 한기가 살짝 걷혔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당정후가 약간 풀어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으로 돌아가 잠시 쉰 후 온 소협을 만나 보도록 해라.”

얘기가 끝났으니 그만 나가 보라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이제 당 소저의 혼인은 기정사실이 된 것 같았다.

그때였다.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가주님. 저는 당 소저의 혼인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한순간 대전의 모든 사람이 얼어붙었다.

모두가 경악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꿰뚫어 버릴 수 있을 듯한 따가운 시선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중 단 한 명의 시선에만 눈을 돌렸다. 이제 내 옆에 선 당 소저의 시선에만 말이다.

그녀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애처로운 시선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나 소저를 떠올렸다.

갑자기 나가장으로 불려 가 계모에 의해 혼인을 강요받았던 그녀의 모습을.

나 소저가 그랬듯 당 소저가 이런 식으로 혼인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아니,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자 당정후가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물었다.

“혼인을 용납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네가 누구이고, 감히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느냐는 의미.

이제껏 그녀의 뒤에 계속 서 있었음에도 마치 없는 것처럼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던 그가 이제 나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나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나는 그의 시선을 당당하게 마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비룡십삼대에서 당 소저 조의 부조장을 맡고 있는 귀주 선우세가의 선우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돌려 당 소저를 바라봤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예쁜 눈망울.

그녀가 놀라움과 간절함이 범벅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따듯하게 웃어 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여은과는 장래를 약속한 사이입니다.”

그 순간, 대전 안은 마치 태풍이 몰아친 것만 같았다.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뿐이지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 사람들을 혼란으로 몰아넣은 것만 같은 분위기.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살기들이 사방에서 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문득 나가장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나는 나 소저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혼자인 척해 주겠다고 얘기했었다.

그땐 그녀에게 바로 거부당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당 소저가 감격과 놀라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볼에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천천히 닦아 주었다.

그리고 전음을 보냈다.

- 여은, 강해져야 해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내 전음을 들은 그녀의 눈에 살짝 이채가 어렸다.

그리고 그 눈빛에 약간의 힘이 돌아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대전 안의 분위기는 한겨울 들판처럼 차가워진 상태였다.

특히나 내가 다정하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자 사람들은 이제 더 할 수 없을 만큼 경악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정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초절정 고수의 무거운 기세를 화악 뿜어내 나를 압박하며 말했다.

“감히! 귀주 선우세가 따위가 우리 사천당문의 여식을 탐한단 말이냐?! 우리 당가가 우스워 보이더냐?!”

엄청난 기세였다.

그 살기만으로도 짓눌려 버릴 것만 같은 압박감.

하지만 나는 그 기세 속에서도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몸으로 당 소저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그가 약간 놀란 듯 눈을 실룩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천하 오대세가의 하나인 사천당문, 그 가주인 당정후의 기세는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령색마 손은상, 사혜혈마 전무광, 천의검성 해운백을 직접 만났던 내게, 심지어 전대의 절대자셨던 스승님 광협검괴 정명광의 기세를 정면에서 받아 봤던 내겐 그리 놀랍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그의 기세를 묵직하게 버텨 내며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선우세가의 이름을 등에 업고 사천당문을 우습게 보겠습니까. 천하 오대세가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사천당문을 말입니다.”

사실 사천당문을 천하 오대세가의 첫손으로 꼽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런 말을 해 준 나를 향한 주변의 적의가 살짝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속으로 살짝 웃음 지으며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만 저는 여은의 혼인 상대로서 저런 자보단 제가 훨씬 더 낫다고 자부할 뿐입니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그가 서 있었다.

분노와 질투가 얼룩진 눈빛으로 금방이라도 나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고 있는 홍사검룡 온제웅이 말이다.

모든 사람들의 눈빛이 이제 그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그를 잠시 바라봤던 당정후가 내게 물었다.

“네가 검의 명문인 홍사검문의, 그것도 홍사검룡이란 별호를 얻은 온 소협보다 더 낫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그의 질문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성공이다!’

내가 이 사천당문 안에서 당문의 행사를 막는다는 것, 즉 독암지존 당정후의 의지를 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정치적으로도, 무력적으로도 그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 혼인을 막을 가능성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건 저 온제웅이란 놈과의 상대 비교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정후의 입에서 그와의 비교를 묻는 질문이 나온 순간 내게 가능성이 생긴 것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온제웅을 깔아보듯 말했다.

“홍사검룡이라고요? 홍사면 홍사지 용은 가당치도 않은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간신히 참고 있던 온제웅이 드디어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 건방진 놈!”

슈하악!

그의 붉은 검이 독사처럼 영활하게 나를 덮쳐 왔다.

붉은 검강이 서린 꽤나 빠르고 날카로운 검초였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다.

“빠르군!”

“저 나이에 검강이라니!”

“과연 홍사검룡!”

하지만 코웃음을 친 나는 가볍게 발을 움직였다.

그러자 비종문의 천풍보법을 펼치는 내 신형이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샤아아악!

부드럽게 흩날리는 내 신형이 독사 같은 그의 검초를 가볍게 피해 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나는 아주 여유 있는 표정으로 당정후에게 물었다.

“가주님, 제가 감히 당가 가주님의 앞에서 미흡한 검초를 좀 펼쳐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이제 약간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던 당정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감히 당문의 대전에서 함부로 검을 뽑은 온제웅과 그 검을 가볍게 피해 내며 정중하게 검을 뽑아도 되는지를 묻는 나.

둘 중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그가 짧게 대답했다.

“허락한다.”

그 순간, 내 묵랑이 세상에 자신의 검날을 드러냈다.

백색의 검날 위로 짙은 연보라색 검강이 이글이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선우십삼검 제일초.

신응비상.

검날로 이루어진 연보라색의 거대한 날개가 온제웅의 전면을 뒤덮었다.

슈하아악!

“무, 무슨?!”

깜짝 놀란 온제웅은 이내 이를 악물고 다시 검초를 펼쳐 냈다.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인지 사력을 다한 듯한 검초였다.

십여 마리의 홍사들이 빛의 날개를 향해 빛살처럼 돌진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놈의 검초는 내게 닿지 않았다.

앞으로 쏘아지던 빛의 날개가 마치 살아 있는 듯 날갯짓을 하며 놈의 검초를 흘려 냈기 때문이었다.

온제웅의 눈이 경악한 듯 크게 확대됐다.

“!”

주변 사람들 또한 탄성을 질렀다.

“저, 저럴 수가!”

“세상에!”

다음 순간 씻은 듯 검강을 걷어 낸 내 묵랑은 어느새 그 검날을 온제웅의 목에 갖다 대고 있었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온제웅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자신의 목에 닿은 내 검을 바라보았다.

“이, 이럴 수가….”

그리고 문득 묵랑을 쳐다봤던 그의 동공이 순간 크게 확대됐다.

아마 우리가 구면이라는 것을 이제야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나는 빙긋이 웃어 주며 다시 천천히 납검했다.

그리고 당정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이자가 용으로 보이십니까? 저는 아닙니다만.”

온제웅은 이제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더 이상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당정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법이로구나. 그토록 젊은 나이에 무척 인상적인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서릿발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내게 말했다.

“당문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개인의 실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온제웅, 그는 홍사검문의 후계자이지. 다시 말해 그가 당문의 데릴사위가 된다는 것은 홍사검문이 우리와 한식구가 된다는 뜻이다. 너는 네 실력이 홍사검문 전체와 비교할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의 질문에 주변에 있던 많은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당정후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문득 지금 이 말이 핵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당가주가 갑자기 이런 혼사를 추진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번 정협방에서의 상황을 봤을 때 당문은 아마 지금도 청성파와 영역 다툼을 벌이고 있을 것이었다.

둘 다 사천성을 대표하는 정파이기에 그러면서도 함부로 싸움을 벌일 수는 없는 입장일 것일 테고 말이다.

‘그러니 지금 당문에겐 자신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면서도 대신 영역 다툼을 해 줄 수 있는 손발이 필요한 것이겠지. 바로 홍사검문과 같은.’

그리고 그들을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서 혈족의 혼인과 같은 수단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 보니 전선에 있는 당 소저에게까지 급하게 생각이 미쳤던 것이고 말이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생각은 분명 정확한 상황 파악일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이해하자 일이 점점 더 막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들이 원하는 것이 그런 거라면 내게 매력을 느낄 만한 구석이 너무 없잖아?’

그랬다.

저들이 원하는 것이 그런 상대라면 내 무위가 얼마나 높든 나는 온제웅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물론 귀주 선우세가도 귀주팔세의 하나이긴 했다.

하지만 당장 사천성에서 개싸움을 벌여 줄 말이 필요한 저들에겐 귀주성에 있는 선우세가는 아무 소용이 없는 배경일 것이었다.

더더군다나 내가 온제웅처럼 선우세가의 후계자여서 나를 데릴사위로 받는 것이 선우세가의 복속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젠장.’

난감했다.

문득 옆을 보니 분노와 수치심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온제웅이 다시 냉정을 찾은 얼굴로 나를 향해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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