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칠살 적마혁-2
선우진이 예전 정협방과의 격전지였던 사천성 흥문을 넘어 귀주성 접경 지역에 도착한 건 살수들과 전투를 벌였던 다음 날 저녁쯤이었다.
원래의 속도대로라면 이미 오전에 귀주성으로 넘어갔어야 했겠지만, 전날 살수들 때문에 몰살당하다시피 한 상단의 뒷수습을 도와주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어지고 말았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늦어지는 건 별 상관없었다.
애초에 습격을 예방하기 위해 속도를 높인 것이었는데 이미 습격을 당한 이후라면 굳이 서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더군다나 어차피 당여은의 혼사를 미룰 시간을 갖는 것이 목표였지 진짜 선우세가에 가서 혼담을 추진할 생각도 아니었지 않은가.
‘선우세가의 후계자 자격으로 사천당가에 혼담을 넣겠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무리수지. 또, 당 소저와 진짜 혼담을 추진한다는 것도 그렇고….’
선우진은 문득 당여은의 모습을 떠올렸다.
너무도 아름답고 착한 여인이고, 또 그녀를 볼 때마다 시시때때로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나서유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려 오는 자신이 다른 여인과의 미래를 생각한다는 건 너무 무책임한 일인 것 같았다.
아직은…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던 선우진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뭐가 어찌 됐건 당 소저가 그따위 뱀 같은 놈과 원치도 않는 혼인을 치르도록 놔둘 수는 없지.’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 봐야 했다.
설사 그것이 진짜 선우세가의 후계자가 되어 혼담을 넣는 일이라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귀주성으로 넘어가는 관도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사천성과 귀주성의 경계에 위치한 사첩산의 초입에서, 문득 몇몇 상단들이 고개를 오르지 않고 멈춰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아리따운 소저 한 명이 그들에게 눈물을 글썽거리며 사정하고 있는 모습도.
그녀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부탁드려요! 저희 오라버니를 좀 구해 주세요! 제 모든 걸 바쳐서라도 사례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애절한 부탁에도 상인들은 헛기침만 하며 외면할 뿐이었다.
“흠, 흠. 사정은 딱하지만, 애초에 사첩채가 무서워 이렇게 고개도 못 넘고 사람을 모으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물리치고 소저의 오라버니를 구한단 말이오? 안 됐지만 그만 포기하는 것이….”
“맞소. 일자리가 필요하면 우리 상단에 들어오도록 해 주겠소. 그러니 소저의 오라버니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만 잊으시구려.”
그러자 여인이 마침내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하십니다! 이제껏 저를 키워 온 오라버니를 제가 어떻게 포기한단 말인가요?!”
그렇게 말하며 흐느끼는 여인을 바라보며 상인들은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그러자 잠시 흐느끼던 여인은 이내 눈물을 닦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곤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를 생각해서 말씀해 주신 분들께 소녀가 감히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세요. 저는 혹시 다른 도와줄 분들이 있을지 찾아보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상인들은 혀를 찼다.
“쯧쯧, 아침부터 내내 찾았지만 여태 못 찾았지 않소? 더 찾아본다고 어디 그런 사람들이 나오겠소?”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상인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결연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다가갈 뿐이었다.
선우진은 길을 멈춰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강 흘러가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녀의 오라버니라는 사람은 사첩산에 위치한 사첩채라는 곳에 갇힌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저 소저는 오라버니를 구해 줄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선우진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시간을 좀 끌어야 하니 가는 길에 녹림채 하나쯤 상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무슨 일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소저?”
그러자 선우진의 목소리에 그녀가 반색하며 뒤를 돌아봤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화장을 해서 그렇지 멀리서 볼 때보다 좀 더 어려 보이는 인상, 기껏해야 갓 스물 정도나 됐을까 싶었다.
하지만 환해진 얼굴로 돌아봤던 그녀는 선우진이 혼자인 것을 확인하고는 이내 실망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제 오라버니가 저기 사첩산의 사첩채라는 녹림채에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오라버니를 구해 주실 수 있는 분들을 찾고 있어요.”
‘구해 주실 수 있는 분들’이라는 말.
정중하지만 다소 실망한 표정.
아마 그녀는 선우진 한 명으론 절대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문득 묘하게 승부욕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선우진이 다시 물었다.
“그 사첩채라는 곳의 세력이 많이 강한 모양입니다?”
그러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원래는 작은 녹림채에 불과했다는데, 지난번 정협방이 와해된 후 그 잔당들이 합류해 최근 급성장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상인들도 함부로 가지 못하고 저렇게 많이 모였다 한꺼번에 넘어가는 것이고요.”
그 말에 선우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협방의 잔당들이 녹림채에 합류했다고요? 그들은 그래도 정파였을 텐데요?”
그러자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혈교의 주구였던 곳이었으니까요. 그 밑에 있던 자들이 다 정파인다운 자들이었다면 애초에 혈교도였던 정협방주의 명령을 따르지도 않았겠지요.”
듣고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얘기긴 했다.
정협방의 행사는 사실 전혀 정파 같지 않았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행사에 군말 없이 따랐던 자들이라면 설사 혈교도는 아니었다 해도 제대로 된 정파인 역시 아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우진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대협. 너무 감사한 말씀이긴 하지만 그들은 대협 혼자서 대항할 수 있는 자들이….”
하지만 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선우진의 살짝 뽑은 검에서 휘황하게 빛나는 연보랏빛 검강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서, 설마 저, 절정…?!”
그러자 선우진은 바로 검을 다시 넣으며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쉿, 굳이 주변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군요. 어떻게, 이 정도로도 부족하시겠습니까?”
그러자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푹 고개를 숙였다.
“제가 눈이 어두워 대협을 몰라봤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제 주제에 어찌 절정의 무인께 부족하단 말을 하겠습니까?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러고는 문득 물었다.
“혹시 유명한 분이신가요? 제가 견문이 모자라…. 대협의 존성대명을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질문에 선우진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해 줬다.
“선우진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녀가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는 듯 당황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 죄, 죄송합니다, 대협. 제가 견문이 너무 어두워서….”
자신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미안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에, 선우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리 대단한 이름도 아니고, 이름을 떨칠 일도 없었으니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나저나 사첩채의 위치는 어디쯤인지 아십니까?”
그러자 그녀가 반색하며 황급히 대답했다.
“네! 오라버니가 저를 도망치게 해 주시고 혼자 잡혀가셨기에 그 근방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선우진과 그녀는 함께 고개를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우진은 알지 못했다.
그의 약간 뒤에서 따라오는 여인, 적하연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 짓고 있는 것을.
***
선우진이 적하연을 만나기 전인 오늘 오전, 적마혁은 두 동생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었다.
“이번 일은 나 혼자 한다.”
그러자 두 동생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무슨 소리예요, 오라버니?! 모든 의뢰는 함께 처리하기로 했잖아요!”
“맞아요, 형님! 의뢰 대상이 죽일 만한 놈이면 죽이고 아니면 죽이지 않기로 우리와 약속하셨잖습니까?!”
“그, 그건….”
그들의 말에 당황한 적마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분명히 그가 했던 말이었다.
동생들이 스스로를 증오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했던 약속 말이다.
적마혁은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살수가 되긴 했지만, 악인도 아닌 자들을 그저 의뢰 때문에 죽여야 할 때마다 스스로를 증오하게 되곤 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자신이 쓰레기라는 사실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적마혁은 동생들에게만큼은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이 아이들이 나처럼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생각하며 살도록 할 수는 없다.’
그렇게 결심한 그는 동생들에게 약속했었다.
의뢰 대상이 죽어도 싼 놈이면 죽이되, 정말 의인이라면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그것은 모두 실력을 인정받아 칠살이 된 적마혁이, 사천살문 내에서 받고 싶은 의뢰를 고를 수 있을 만큼의 위치가 됐기에 할 수 있었던 약속이었다.
그 후, 여동생 적하연은 의뢰를 받을 때마다 대상을 유혹해 보는 것으로 그 인격을 시험해 보곤 했다.
아직 십 대 후반인 자기의 유혹에 넘어와 자기를 범하려는 사람이라면 죽어도 싸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하연의 행동을 방관하면서도 사실 적마혁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인격자라도 하연이 정도의 젊고 예쁜 여인이 대놓고 유혹하는데 참을 수 있는 자가 많을 리 없지. 수도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오늘 죽인 백숙방주 혁목안만 해도 그랬다.
그가 선인인지는 몰라도 악인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살면서 수많은 선행을 했고, 최근에도 이곳 흥문의 사람들에게 많은 좋은 일들을 해 왔지 않은가.
그러니 그가 하연이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해서 죽어도 싼 자라고 매도하는 건 억지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저 의뢰를 수행하기 위한, 그리고 동생들에게 죄책감을 주지 않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문주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몰라도 강제 수행을 지시했다. 그것도 내공 칠십 년 이상의 고수를 죽이는 의뢰를. 의뢰를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를 죽이겠다는 뜻이야.’
아니, 어쩌면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죽이려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건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동생들과 자신이 모두 살기 위해서.
그리고 혹시 자신이 실패한다 해도, 동생들만큼은 살려야 했다.
그래서 혼자서 가려고 했던 건데….
하지만 이제 머리가 클 대로 큰 동생들은 그의 말을 따라 주지 않았다.
“하군아, 하연아. 이번만큼은 오라버니 말을 좀….”
“안 돼요! 오라버니 지금 저희를 떼어 놓고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시는 거잖아요?!”
“맞아요, 형님! 약속하셨잖아요! 늘 함께하기로! 만약 의뢰 대상이 악인이 아니라면 설사 같이 죽을지언정 절대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기로요!”
적마혁은 난감했다.
동생들의 말이 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말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적마혁은 오랜만에 동생들에게 화를 내기로 했다.
그가 무서운 눈빛으로 소리쳤다.
“시끄럽다! 내가 하자면 하는 거지 뭘 그렇게 말들이 많아! 이번 일은 나 혼자 한다고 했다! 그렇게 결정됐으니 더 이상 잡소리는 하지 마!”
무섭게 윽박지르는 적마혁의 기세에 동생들은 일순 조용해졌다.
잔뜩 기가 죽은 얼굴에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적하연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흐흐흑!”
그걸 본 적마혁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적하연은 눈물을 흘리며 적마혁에게 이렇게 말했다.
“흐흑! 전 오라버니가 왜 이렇게 억지를 부리시는지 알아요. 저희를 떼어 놓으시려는 거죠? 위험할 것 같으니까, 죽을 것 같으니까요!”
적마혁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맘대로 하세요! 오라버니 혼자 가라고요! 하지만 이것만 알아두세요! 오라버니가 가서 못 돌아오시면 저는 그대로 따라 죽을 거예요. 거기서 안 죽어도 결국 같이 죽을 거라고요! 흐흐흑!”
그녀의 말에 적마혁은 석상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러자 남동생 적하군 또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님, 저희도 이젠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들이 아니에요. 형님께서 왜 이러시는지 잘 알고 있고, 또 하연이 말대로 형님이 못 돌아오신다면 저는 그 선우진이라는 자에게 복수하러 갈 겁니다. 그러니 다 같이 죽는 건 어차피 똑같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적마혁은 더 이상 동생들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또 뭉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침내 다 함께 가자고 선언했을 때, 흐느끼고 있던 적하연이 적하군과 몰래 시선을 교환하는 것까지는 눈치챌 수 없었다.
***
적하연은 자신의 약간 앞에서 고개를 오르고 있는 선우진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봤다.
그리고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왜 저렇게 잘생긴 거야! 죽이기 싫게! 게다가 저 외모로 절정 고수라니, 이건 너무 반칙이잖아!’
적하연의 꿈은 저렇게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와 혼인해 오빠인 적마혁을 호강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이상형에 가까운 외모를 가진 선우진을 죽여야 하다니, 그 잔인한 현실에 적하연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직 돈이 많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나이에 절정 고수면 앞으로 돈 버는 거야 식은 죽 먹기겠지?’
생각할수록 너무 안타까웠다.
문득 그에게 물었다.
“저기… 선우 공자의 사문을 혹시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자 그가 씨익 웃으며 대답해 줬다.
적하연의 눈에는 너무도 싱그러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아, 저는 귀주 선우세가 출신입니다.”
“네?! 선우세가요?!”
아무리 사천성에서만 활동한 적하연이라지만 귀주팔세의 하나인 선우세가를 모를 리 없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 그럼 귀주팔세인 선우세가의 후계자…?”
그러자 그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다시 대답해 줬다.
“아니오. 후계자는 전혀 아니고 삼남입니다. 가문에선 거의 버린 자식이나 다름없지요.”
“어쩜.”
적하연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선우세가의 삼남이라니 부자일 거란 그녀의 예상이 맞았던 것이다.
게다가 저렇게 완벽한데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저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올랐는데 가문에서 버린 자식이라고? 말도 안 되지. 아아, 어쩜 저렇게 겸손할 수가!’
적하연은 다시 한번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사람을 암살해야만 하다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라버니와 자신들이 살기 위해선 그를 죽일 수밖에.
사실 적하연 또한 알고 있었다.
자기가 유혹해서 넘어온 남자들을 나쁜 놈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억지라는 걸, 그게 의뢰를 수행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말이다.
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적하연은 이제껏 고생고생하며 자신과 적하군을 키워 온 오라버니 적마혁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차피 자신들이 살기 위해선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사람 죽이는 거야 나쁜 일이지만, 그게 엄밀히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 그걸 의뢰한 놈들, 그리고 어린 우리를 이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살문 놈들 잘못이지.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 죽을 수 없어. 못 죽는다고! 몇십, 몇백 명을 죽이든 이제껏 고생한 게 억울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야!’
초심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은 적하연은 바로 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바로 선우진을 유혹하는 작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