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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전선 비룡십삼대-132화 (119/359)

132화 칠살 적마혁-3

선우진과 적하연이 고개를 올라가던 중이었다.

적하연이 갑자기 발을 헛디디며 넘어졌다.

“아야!”

일부러 넘어졌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연기였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선우진은 뒤돌아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소저! 괜찮으시오?!”

그러자 묘하게 상의가 흐트러져 어깨가 살짝 드러난 적하연이 애써 몸을 일으키려 하며 말했다.

“괘,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하지만 일어나려던 그녀는 발목이 다쳤는지 다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아악!”

“소저! 발목이!”

적하연은 늘씬한 한쪽 다리를 옆으로 쭉 뻗은 채 모로 앉아, 애처로운 눈빛으로 선우진에게 말했다.

“죄, 죄송해요, 공자. 저를 도와주려고 해 주시는 분께 오히려 제가 방해가 되다니….”

그렇게 말하는 적하연의 자세는 온몸으로 색기를 풀풀 발산하고 있었다.

몸의 유려한 곡선이 강조되는 자세, 어깨가 살짝 보이도록 흐트러진 옷차림, 게다가 애처로운 눈빛까지.

과연 유혹의 전문가다운 자태였다.

‘게다가 음약도 살짝 뿌려 놨으니, 아마 백 년간 수행한 스님이라 해도 버티기 힘들걸?’

지난 이 년간 수없이 많은 남자를 유혹해 봤던 적하연은 자신했다.

이건 완벽하다고.

빠르면 지금 당장 자신을 범하려고 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마음이 무척 흔들렸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슬쩍 선우진을 바라봤을 때, 굳어진 표정으로 다가오는 그를 확인하고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아무래도 바로 끝낼 수 있을 모양이었다.

자신이 끝내든, 근처에 은신하고 있을 오라버니 적마혁이 끝내든 말이다.

선우진이 바짝 다가오며 그녀를 불렀다.

“소저….”

적하연 또한 촉촉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네, 공자님.”

그러자 선우진이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네, 얼마든… 악!”

적하연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선우진이 적하연을 번쩍 안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저를 여기다 두고 갈 수는 없으니 아무래도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소. 불편해도 조금만 이해해 주시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그의 행동에 깜짝 놀랐던 적하연은, 문득 바로 눈앞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멋있어? 그리고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자신을 안아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우진의 얼굴에선 어떠한 음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몸에 음약까지 향수처럼 뿌려 놨음에도 말이다.

오히려 미리 해약을 먹어 놨던 그녀 자신의 가슴만 거세게 두근거리고 있는 상황이라니, 그의 멀쩡한 모습이 너무 야속해 속이 다 상할 지경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협객인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모든 남자가 넘어왔던 자신의 유혹에 이렇게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이 잘생긴 공자야말로 책 속에서나 보던 진정한 정인군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긴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이런 사람을 죽여야 하다니.’

너무도 안타까웠다.

이젠 하늘마저 원망스러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적하연은 곧 체념했다.

하늘이 언제 의인에게 관대한 적이 있었던가.

그저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약육강식만을 강요했을 뿐이지.

적하연은 결국 안타까운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본 후 작업을 준비했다.

선우진의 두 손이 지금 자신을 안고 있는 데 반해 자신의 두 손은 자유로운 상태.

게다가 바로 눈앞에 그의 가슴이 있으니 아무리 절정 고수라 해도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옷소매에 감춰 놓았던 독침 통을 슬며시 그를 향해 겨누려 할 때였다.

선우진이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시오, 소저?”

그러자 살짝 놀란 적하연이 반문했다.

“네, 네? 무슨 일이라뇨?”

고개를 들어 보니 선우진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너무 슬퍼 보여서 말이오. 오라버니를 구하러 가는 중인데 왜 그렇게 슬퍼하시오?”

그 질문에 적하연은 문득 멍하니 선우진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진심을 내뱉었다.

“그냥… 하늘이 너무 원망스러워서요.”

그 대답에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하늘이 왜 원망스럽소?”

그러자 적하연은 처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살기 위해 다른 것들을 해치잖아요. 벌레도, 새도, 동물들도. 그리고… 사람도요.”

그렇게 말하며 적하연은 손의 위치를 천천히 바꿨다.

소매 안쪽이 선우진을 향하도록 하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건 그저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적어도 사람에겐 언제나 선택을 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오. 동물들의 가장 큰 목적은 먹고 번식하는 것이지만, 인간들은 때로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스스로 굶어서 죽기도 하고 산으로 들어가 홀로 늙어 가기도 하지 않소? ‘의’라는 것도 결국 그런 선택이 아니겠소? 동물처럼 그저 약육강식의 법칙 속에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약자를 보살피고 옳은 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니까 말이오.”

그 말을 듣고는 암기를 선우진에게 향하고 있던 적하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적하연은 항상 당당히 주장해 왔었다.

자신들이 사람을 죽이게 된 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저 자신들을 이렇게 하도록 만든 자들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선우진은 말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있다고.

자신이 저지른 일은 결국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이다.

적하연이 마음속으로 외쳤다.

‘…개소리!’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진심이 아니라는 건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적하연은 가볍게 비웃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오히려 그를 유혹해 버리고 당당히 말했을 것이다.

자기 주제를 알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을 도와주려 하고 있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음에도 자신의 유혹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이 사람의 말을, 적하연은 차마 비웃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문득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왜 흐르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다만 적하연은 눈물을 흘리며 선우진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공자.”

그러곤 마침내 소매 안에 숨긴 독침 통의 격발 장치를 눌렀다.

꾸욱!

아니, 누르려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

깜짝 놀라 당황한 그녀에게 선우진이 웃으며 말했다.

“미안할 필요 없소, 소저. 소저는 날 죽일 수 없을 테니 말이오.”

적하연은 이제껏 자신의 몸을 안은 선우진의 두 손이 묶여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전신 혈도를 선우진에게 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선우진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는 것만으로 안고 있던 적하연의 전신 혈도를 점해 버리고 말았다.

선우진은 이미 그녀가 살수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누군가 은신한 채 따라오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는 이미 피독주까지 입속에 넣은 상태, 그렇기에 적하연의 음약도 전혀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

적마혁은 은신한 채 선우진과 하연을 뒤따라가는 중이었다.

평소처럼 먼저 자신의 유혹에 넘어오는지 시험해 보자는 하연의 고집에 일단 지켜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적마혁은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꿀꺽!

적마혁은 하연이 저럴 때마다 혹시라도 자신이 제때 막지 못해 동생이 상대방에게 몹쓸 짓을 당하지는 않을까, 살수라는 것을 들켜 다치지는 않을까 늘 불안에 떨곤 했었다.

게다가 오늘은 더했다.

상대가 내공 칠십 년 이상의 고수라는 압박감 때문일까?

적마혁은 아까부터 내내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눈 한 번 마주친 적이 없으니 절대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상대가 마치 자신의 은신을 감지하고 있는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거미줄 같은 시선이 자신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은 끈적끈적한 기분.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하연이를 데리고 빨리 도주해야겠어.’

적마혁은 마침내 그런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판단이었다.

하연이가 이미 선우진에게 안겨 있기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적마혁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선우진이라는 놈이 갑자기 하연이를 땅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하연이는 놀란 표정임에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 적마혁은 바로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파악했다.

‘점혈?! 점혈당했구나!’

아무래도 놈이 하연이에게 음심을 드러내고 범하려 하는 모양이었다.

으득!

바로 놈을 덮쳐야 할 것 같았다.

놈이 하연이를 범하기 전에!

하지만 몸을 날리려던 적마혁은 또다시 이상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놈은 하연이를 범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갑자기 검을 뽑더니 하연이를 그대로 내리찍으려고 할 뿐이었다.

적마혁의 귀에 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죽어랏!”

순간 적마혁의 시야가 하얘졌다.

놈이 하연이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자신이 선우진을 뒤에서 덮친다면 그를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하연이도 죽을 것이었다.

절대 그렇게 둘 순 없었다.

“안 돼!”

온 힘을 다해 소리치며 놈을 덮쳐 갔다.

살수 일을 하며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짓이었다.

적마혁은 자신의 목소리에 놈이 제발 검을 멈추고 자신 쪽을 바라봐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그대로 하연이에게로 검을 내리찍고 있을 뿐이었다.

슈욱!

“으아아악!”

적마혁은 괴성을 지르며 목표를 바꿨다.

선우진이 아닌 선우진의 검에게로였다.

내리찍는 검을 향해 필사적으로 암기를 던지고 몸을 날렸다.

쉬이익!

간절히 기원했다.

자신의 암기가 선우진의 검을 비껴 내기를, 그래서 하연이를 살릴 수 있기를.

‘제발, 제발!’

하지만 그의 간곡한 바람에도 암기는 검에 명중하지 못했다.

쉬이익!

그저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적마혁의 암기가 헛되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선우진의 검은 그대로 방향을 바꿔 빛살처럼 쏘아졌다.

바로 적마혁의 목을 향해서였다.

쉭!

“?!”

적마혁은 순간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연이를 찔러 가던 선우진의 검이 어느새 자신의 목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언제 자른 것인지 자신이 쓰고 있던 복면도 반으로 갈라져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적마혁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마도 방금 그건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적마혁에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의 온 신경은 온통 동생 적하연에게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연아….”

하연이가 점혈된 채로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다친 곳도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너무 다행스러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선우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를 노린 것이 아닌 이 소저를 살리고자 달려든 것이 너의 생명을 살렸다.”

“…예?”

그리고 적마혁은 바로 점혈당했다.

***

적마혁의 남동생이자 적하연의 쌍둥이 남매인 적하군은 멀찍이 떨어진 채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아직 은신술 실력이 적마혁을 따라가지 못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한순간, 문득 적하군도 보게 되었다.

갑자기 선우진이 적하연을 죽이려고 하고, 형님 적마혁이 놈에게로 달려드는 모습을.

그리고 형님이 선우진에 의해 무력하게 제압당하는 모습을 말이다.

“하아.”

적하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인 모양이었다.

형님인 적마혁이나 누이동생 적하연은 항상 십 년 후의 미래를 꿈꾸곤 했다.

십 년 후에 사천살문에서 벗어나 그들이 누리게 될 행복한 삶 같은 것들을….

하지만 적하군은 사실 한 번도 그런 것을 믿어 본 적이 없었다.

자신들이 사천살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십 년 후까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꿈같은 얘기야.’

사천살문이 준 고를 삼킨 순간부터 그들의 목숨은 이미 사천살문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 살기 위해선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하고, 듣기 싫다면 목숨을 버려야만 하는 그런 삶.

그런 삶에 무슨 미래가 있을 것이고, 또 살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 놓고 자신들이 무슨 염치로 미래의 행복을 바란단 말인가.

그러니 적하군이 바랐던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얼마가 될지 모를 살아 있는 날 동안 셋이 함께 있는 것, 셋이 함께 웃고 장난치고 살다가 한날한시에 죽게 되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적하군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그날이 왔군.”

그러곤 이제 전속력으로 선우진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하아아압!”

파바박!

형 적마혁보다 훨씬 실력이 떨어지는 그가 은신도 하지 않은 채 절정 고수에게 달려드는 건 너무나도 무모한 짓이었다.

공격이라기보단 자살에 가까워 보일 정도의 행동.

그리고 그건, 정확한 사실이었다.

적하군은 제일 먼저 죽고자 했다.

형님께는 죄송하지만 형님과 하연이 죽는 것을 보고 죽느니 가장 먼저 죽는 쪽을 택하고 싶었던 것이다.

속으로 웃음 지으며 생각했다.

‘미안, 대신 다음 생에는 내가 제일 형으로 태어나 두 사람을 먹여 살릴게. 형님이 그렇게 해 줬듯 구걸하다 돌로 얼굴이 짓이겨지고, 음식을 훔치다 얼굴이 불로 지져져도 늘 웃어 줄게. 절대 포기하지 않을게.’

자신의 돌진에 경악한 형 적마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마혈은 점해지지 않은 것인지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하군아! 안 돼! 도망가!”

씨익 웃어 줬다.

자신이 가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두 사람 없이는 자신도 없었을 터인데.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텐데 말이다.

선우진이란 자는 무모하게 돌진하고 있는 자신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 검이 날아왔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속도로.

슈학!

역시 끝이었다.

***

퍼억!

내 검기에 적중당한 살수 소년이 달려오던 방향으로 다시 맹렬히 튕겨 나갔다.

그러자 흉측한 얼굴을 지닌 파면의 살수가 절박하게 소리쳤다.

“하군아아아!”

요즘 나는 검기를 의지에 따라 날카롭게도, 뭉툭하게도, 또 딱딱하게도, 부드럽게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러니 뭉툭하고 부드러운 검기에 적중당한 소년은 그저 기절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파면인의 눈에선 어느새 굵은 눈물 줄기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보며 피식 웃음 지었다.

‘역시 이자가 맞는 모양이군.’

지난 생에 사천성의 어떤 살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동생들을 인질로 잡혀 살수로 일하다, 어느 날 동생들이 죽임을 당하자 속해 있던 살수 문파를 단신으로 지워 버렸다던 파면의 살수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살수문의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죽인 후, 흐르는 빗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결했다는 그의 얘기는 내게 무척 큰 인상을 남겨 줬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런 인재를 진작 알았었다면 참 좋았겠다고.

내가 미리 정보를 얻어 그를 도와줄 수 있었다면, 당시 인재 부족으로 시달리던 선우세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그런 생각을 말이다.

‘그런데 이번 생애 진짜 만나게 되고 말았군.’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랄까?

유년기에 사고 싶었으나 사지 못했던 장난감을 성인이 된 후 다시 보게 된 기분?

그러니 안 봤다면 모를까 내 눈에 뜨인 이상 절대 놓칠 수 없었다.

파면의 살수가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울부짖었다.

“이 개자식! 절대 살려 두지 않겠다!”

비릿하게 웃으며 대꾸해 줬다.

“웃기는군. 지금 살수인 네놈이 내게 화를 내는 거냐? 나를 죽이려 하다 실패해 놓고? 적반하장도 풍년이구나?”

그러자 파면인은 일순 말문이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적반하장을 할 만큼도 성품이 뻔뻔하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그, 그건, 네, 네놈 실력이라면 굳이 죽이지 않아도….”

“내가 왜? 내가 왜 나를 죽이려는 살수들에게 그래야 하지?”

그러자 반박하지 못하는 그의 흉측한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자였다.

“게다가…. 아직 끝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이제 점혈 당해 누워 있는 소녀에게로 검 끝을 향했다.

그러자 그자의 얼굴이 한순간 창백해졌다.

그러곤 내게 간절히 사정하기 시작했다.

“고, 공자! 아니, 대협! 저 아이는 멍청한 오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수가 돼야 했던 불쌍한 아이입니다! 제발! 제발 저 아이만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 불쌍한 아이에게 죽었던 자들도 그렇게 생각해 줄까? 뻔뻔하기 이를 데 없군. 하긴, 그러니 살수 따위를 했던 거겠지. 네놈이 진짜 동생을 위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런 짓은 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말하며 소녀의 배 위로 검을 거꾸로 세웠다.

내 검을 보는 소녀의 크게 뜬 눈이 절망의 빛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파면인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어쩔 수 없었소! 어쩔 수 없었단 말이오! 놈들이 동생들에게도 고를 먹여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죽게 될 텐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단 말이오!”

빙긋이 웃음 지었다.

‘어쩐지. 그런 상황이었군.’

동생들을 위하는 마음이야 진짜라 해도 자신의 동생들에게 살수 짓을 시킬 수 있다는 부분에서 심성이 좀 의심스러웠는데,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을 것 같았다.

합격이었다.

문득 검을 배에서 떼며 고민하듯 그에게 물었다.

“그럼… 만약 내가 네 동생을 죽이지 않는다면 뭐든지 할 수 있겠나?”

그러자 그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확대되며 급박하게 대답했다.

“뭐든지! 뭐든지 하겠소!”

나는 이제 빙긋이 웃음 지으며 놈을 바라봤다.

내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무척 사악한 웃음이었다.

아마 비사영 녀석이 지금의 나를 봤다면 혈교의 마두 같은 놈이라고 욕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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