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첫 번째 수하
사천살문을 정리한 나는 하오문 의빈 지부로 돌아왔다. 적마혁의 두 동생들인 적하군과 적하연을 맡겨 놨던 곳이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공자. 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적하군과 적하연의 몸속에서 고를 꺼내 주자, 적마혁이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했던 말이었다.
사천살문의 문주인 일살이란 놈은 생각보다 쉬운 남자였다.
분근착골의 삼 단계까지밖에 안 갔건만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뭐든지 다 협조하겠다고 꽥꽥 울부짖었던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악! 그만! 제발 그만해 주시오! 뭐든지! 뭐든지 협조하겠소! 아아아아아악!’
그래서 산뜻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해 줬었다.
‘에헤이, 거짓말. 살문의 문주라는 자가 설마 이렇게 기개가 없을라고.’
그러곤 사 단계, 오 단계를 천천히 더 맛보여 준 후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자 다양한 정보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보의 종류는 다채로웠다.
적마혁 같은 살문의 문도들에게 먹인 고를 토해 내게 하는 약이라든가, 그가 갖고 있는 재산, 영약들을 은닉해 놓은 곳도 있었고, 심지어 의뢰자들의 정보에 대한 것들도 있었다.
문도들에겐 죽을 때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게 훈련시키더니만 정작 본인이 보여 준 모습은 대단히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역시 탐욕스러운 자가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감격에 젖어 얼싸안은 채 울고 있는 세 남매를 바라보다 문득 내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당신은 십 년 후에 고를 빼내 줄 거야. 억울한가?”
그러자 마치 바위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남자가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약속만 지켜 준다면 아예 빼내 주지 않아도 상관없소.”
그는 사천살문의 이살이었던 견중이라는 남자였다.
아직 절정의 경지를 밟지 않았음에도 절정 고수보다 훨씬 위협적이라는 느낌을 줬던 그 살수.
적마혁에게 사천살문에 관한 정보를 미리 들었을 때, 그는 이 남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이살은 칼과 같은 남자입니다. 살문주의 지시를 군말 없이 수행하긴 하지만 거기에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지요. 거기다 딱 지시한 것만 수행합니다. 마치 감정이 없는 도구처럼요. 딱히 그와 교감을 나눠 본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가 원치 않는 살수 생활을 위해 스스로 감정을 죽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문으로 잡혀 온 아이들을 보는 그의 안타까운 눈빛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것이 내가 이살 견중을 죽이지 않기로 결심했던 이유였다.
그리고 내 검기에 강타당해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는, 내가 이미 살문주를 제압하고 놈에게서 고의 발작을 늦추는 약을 뺏어 낸 것을 보자 순순히 나를 따를 의사를 밝혔다.
마치 누가 쥐든 상관없는 칼처럼 말이다.
그때 나는 그에게 십 년간 날 위해서 일하면 풀어 주겠다고 말하며 이렇게 약속했다.
‘내 밑에서 일한다면 적어도 스스로 감정을 봉인해야 하는 일 따위는 없도록 만들어 주겠다. 당장은 살수로서의 능력을 쓸 수밖에 없겠지만, 곧 양지에 나선 무사로서,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게 해 주지.’
그렇게 말해 준 이유는 암영대에 계셨던 삭무흔 형님의 감정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도 아마 삭 형님과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했던 것이다.
그는 내 약속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의 눈에서 처음으로 격렬한 감정의 빛을 봤던 것 같았다.
그는 역시 천상 무사였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울음을 그친 적마혁 삼 남매는 모두 나를 따르기로 했다.
“공자! 제가 부디 공자를 따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부족한 능력이긴 하지만 분골쇄신 공자를 위해 이 한 몸을 바치겠습니다!”
“저도요! 저도 오라버니와 함께 공자를 따르고 싶어요!”
“…저도 부탁드립니다.”
솔직히 예상했던 바이긴 하지만 그래도 흐뭇했다.
나는 기쁜 마음을 감춘 채 진중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내가 내릴 첫 번째 명령은!”
그러자 그들이 결연한 각오가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명령만 내리면 지옥이라도 찾아갈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내심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로 영약 섭취야.”
“예, 공자! 영약… 예?”
“…여, 영약 섭취요?”
“….”
살문주 놈은 탐욕스러운 놈답게 자기 창고에는 영약을 엄청나게 쌓아 놓고는, 문도들에게는 웬만해선 그것을 내주지 않았던 것 같았다.
살문의 최고 실력자라는 이살 견중조차도 아직 내공 일 갑자를 채우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 일부러 문도들이 절정의 벽을 넘지 못하도록 조절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내공 일 갑자도 안 되는 능력으로 무슨 일을 시키겠어? 지금부터 모두 내공부터 올리도록 해.”
그러자 그들이 당황해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가운데 남동생 적마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에겐 너무 감사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제가 듣기론 갑자기 영약으로 내공을 채우면 주화입마의 위험이 있다고….”
씨익 웃으며 대답해 줬다.
“다 극복하는 방법이 있으니 그건 걱정하지 말고.”
혈교 놈들에게 감사할 일이 생기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리고 방금 그 점을 지적한 적하군이란 소년을 눈여겨봤다.
쌍둥이 동생인 적하연과 적하군은 적마혁을 얻으니 따라온 부록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큰 기대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이 두 사람의 재능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고작 살수 훈련이나 받은 열여덟 살의 아이들치곤 감각과 실력이 상당히 괜찮아 보였던 것이다.
제대로 키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드는 인재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바로 영약을 먹고 운기에 들어갔다.
내가 새로 가르쳐 준 무화심법을 이용해서였다.
무화심결은 선우세가의 서재에서 외워 놨던 천살비기의 심법이었다. 살수문의 심법이라곤 하지만 웬만한 고급의 심법들보다도 훨씬 뛰어난 공능을 지닌….
혼원무극공을 익힌 내게는 쓸모가 없지만 살수인 이들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이들에게 내가 익혔던 천살문의 살수 비기를 익히게 할 생각이었다.
살수로서 이미 경지에 도달한 견중이나 적마혁이라면 아마 그것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훨씬 상승한 능력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게 해 줘야겠지. 양지의 무사로 이름을 날릴 수 있도록.’
이번 생에 처음 얻게 된 직속 수하라서 그런지 해 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얼마나 성장해 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먼 미래의 일이고, 나는 일단 바로 앞으로의 일을 위해 하오문 의빈 지부장을 다시 만났다.
예전에 영남 지부장에게 부탁해 놨던 귀주성의 하오문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겸사겸사 선우세가에 대한 정보도 좀 얻고 말이다.
그는 침중한 표정으로 현 귀주성의 상황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그래서 지금은 내분이 거의 정리된 상황인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조사해 온 정보에 따르면 얼마 전까지 귀주성의 하오문도들은 내분에 휩싸였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그것이 정리됐다고 했다.
그것도 최악의 방향으로….
“혈교도 쪽으로 말이죠?”
“…예, 그렇습니다.”
그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차마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하, 하지만 그들에 대항하는 문도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 귀주성 하오문주는 물론, 그를 따르는 문도들이 암중으로 숨어들었다고 하니 그들과 접선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혈교의 무리들을 쳐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 봐야 전 하오문주도 혈교도였다면서요.”
“그, 그건 그렇지만….”
그에게 듣고 내가 파악한 대강의 상황은 이랬다.
과거 혈마가 귀주성으로 침투시켰던 마두는 사천성의 소면마군과는 달리 문파를 세우기보단 암중으로 들어가 하오문을 장악하는 쪽을 선택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귀주성의 하오문은 일반적으로 지부들의 연합체 성격이 강한 다른 성들과는 달리 한 명의 하오문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구조가 되었다고 했다.
그 하오문주가 바로 누군지 알 수 없는 혈교의 마두였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다음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최근 유입된 혈교도들이 기존의 하오문 수뇌부인 혈교도들과 충돌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충돌의 승자는 새로 유입된 혈교도들이었다.
“내분을 일으켜 준 거야 고맙긴 한데…. 왜 기분이 쎄하지?”
나는 이번에 새로 유입됐다는 혈교도들이 사천성에서 쫓겨난 정협방의 잔당들이 아닐까 유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엔 문제가 좀 있었다.
‘사천성의 책임자가 소면마군 사원양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귀주성 또한 만만한 자였을 리가 없어. 최소 탐혈마군 지광옥급의 고수였겠지. 근데 그런 자를, 그것도 이미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했던 자를 새로 유입된 자들이 꺾었단 말이지? 대체….’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아무래도 어마어마한 괴물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정협방에 나타났던 철신광마 척강과 구유음마 지기음의 얼굴이 떠올랐다.
청성과 당문의 수많은 고수들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던 괴물들.
‘설마 그런 거물들이 고작 귀주성의 하오문으로 파견됐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갑자기 선우세가로 돌아가기 무서워지는걸.’
이번에 선우세가로 가면 아버지께 인사만 살짝 드리고 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선우세가의 상황도 귀주성 못지않게 개판이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지난 생에 선우세가의 많은 사람들이 혈교에 섭혼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선우세가 또한 혈교의 손아귀가 뻗쳐 있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 선우세가로 가면, 아마도 반드시 혈교의 무리들과 접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의빈 지부장은 선우세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우세가는 지금 가주 선우중 대협께서 축이 되어 지탱하고 계신 양팔 저울과도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삼 팔 저울이라고 해야겠군요. 지금이야 균형을 이루고 있는 듯 보이지만, 한쪽으로 무게가 쏠리는 순간 그대로 무너져 버리고 말 저울 말입니다.”
나도 몰랐던 사실이지만 선우세가는 과거에 한 번 무너질 뻔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젊었을 적 큰 싸움이 일어나 가문의 고수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너무 젊은 나이에 떠밀리듯 가주가 된 아버지는, 귀주 팔세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아마 외부의 조력을 끌어오는 쪽을 택하셨던 모양이었다.
“당시 선우세가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 바로 같은 귀양을 근거지로 갖고 있는 하씨세가였지요. 그래서 부친께서는 오히려 하씨세가의 여식과 혼인을 함으로써 선우세가를 지키셨던 겁니다.”
하씨세가는 귀주 팔세의 하나이자 둘째 형 선우혁의 외가이기도 했다.
그 혼인에 그런 사정이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니 새삼 한심했다.
문득 그에게 물었다.
“그럼 첫째 형의 외가인 개양문은 하씨세가를 견제하기 위해 끌어들인 세력이었던 모양이군요.”
“예,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첫째 형 선우성의 외가인 개양문은 귀양의 인근 지역인 개양에 위치한 문파였다.
귀주 팔세에는 속하지 못한 중급 문파였는데, 세력이 작은 대신 첫째 부인과 장자라는 명분으로 균형을 맞춰 하씨세가를 견제하려 하신 게 아닌가 싶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넷째 동생 선우기의 외가는 도균의 서기당, 다섯째인 연하의 외가는 금사의 운씨세가였다.
모두 선우세가를 중심으로 다른 지역에 위치한 문파들이었던 것이다.
“그럼 서기당과 운씨세가를 끌어들인 건?”
내가 그렇게 묻자 의빈 지부장이 내 눈을 피하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선우중 대협께는 원래 교제하고 계시던 연인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선우세가를 위해 그녀를 삼 부인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으셨지요.”
삼 부인.
내 어머니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었고 말이다.
근데 지금 어머니의 얘기가 나온다는 건….
지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일 부인과 이 부인 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습니다. 둘 다 아들을 낳았고 둘 다 선우세가를 장악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들렸던 소문에 따르면… 그녀들은 유독 삼 부인을 대할 때만큼은 의기투합했던 모양이었습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얘긴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원래 연인이셨지만 배경이 없었던 어머니와 성격이 독하기로 유명했던 첫째, 둘째 어머니.
그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삼 부인의 사인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희가 보기엔 아마도….”
그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후우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정말 그녀들이 내 어머니를 죽인 것인지, 아버지의 연인이셨던 어머니를 질투했기에 내게도 그렇게 모질게 대했던 것인지는 말이다.
하지만 내 가슴속엔 오랜만에 격렬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 후, 삼 부인께서 돌아가시자 일 부인과 이 부인의 다툼은 오히려 더 격해져만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의 추론으론….”
“아예 더 세력을 분산시켜 버린 것이었군요. 양자 대결이 아닌 다자대결이라면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
“예,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를 직접 본 기억은 거의 없었다.
내 좋은 기억력으로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는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였던 내게도 그렇게 잔인하게 대했던 그녀들이 내 어머니께 어떻게 대했을지.
배경 하나 없는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셨을지 말이다.
또한 아버지가 짊어지셨던 무게 또한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부 세력들이 가문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어떻게든 버텨 내며 선우중이란 개인을 완전히 버린 채 가주로서만 살아오셨을 아버지의 삶이….
문득 중얼거렸다.
“할 일이 많구나.”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았다.
이번에 선우세가에 가면 말이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의빈 지부장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네, 공자. 말씀하십시오.”
“서신 두 통을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누구에게 전하면 되겠습니까?”
“한 통은 사천당문으로 전할 서신입니다. 그리고 또 한 통은….”
***
어두운 밤, 커다란 객잔의 지하 공간.
“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수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학살이었다.
적의를 입은 자들이 포위망을 구축한 채 천천히 사람들을 죽이며 포위를 좁히고 있었다.
마치 독 안에 든 쥐를 가지고 놀 듯 여유롭게 웃으며.
그러자 포위망의 중심에 갇힌 사람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인이 험악한 얼굴로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공자?! 우리는 공자를 따르겠다 맹세했지 않소?!”
그가 그렇게 외치자 포위망의 중심이 살짝 열리며 그곳으로 청년 한 명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어두운 사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서 빛을 뿜어내듯 잘생긴 미청년이었다.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첫째, 지존께서 혈교 천하의 대업을 위한 중책을 맡겼음에도 그간 소난소에게 협력해 고작 하오문이나 관리하고 있던 죄. 둘째, 죄인 소난소를 잡지 않고 빼돌린 죄. 셋째, 그 모든 행동들로 인해 신뢰를 잃은 죄.”
거기까지 말한 청년이 걸음을 멈추고 냉랭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유가 더 필요한가, 공대각?”
그러자 혈교의 마두 갈사삼귀의 첫째 공대각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오해시오! 마녀께서는 음지를 장악한 후 양지로 나아가실 계획이셨지 결코 게으름을 피우신 것이 아니오! 게다가 우리는 마녀께서 어디에 계신지 정말 모른단 말이오!”
하지만 미청년, 사천제일공자라고 불렸던 백옥지룡 구유상은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라. 고작 고아들이나 구제하고 기녀들의 억울함이나 봐주고 있어 놓고 게으름을 피운 게 아니라고?”
그러자 공대각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우리 또한 고아였소! 고아였던 우리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돕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소! 또 그럼으로써 혈교의 세력을 더 넓힐 수 있는…!”
“닥쳐라! 그 귀한 시간과 인력을 써서 그따위 짓이나 하라고 지존께서 너희를 보내신 줄 아느냐?! 여러 말 할 것 없다! 그 죄를 목숨으로 갚아라!”
구유상이 차갑게 일갈하자 공대각을 비롯한 갈사삼귀들의 표정 또한 차갑게 변했다.
“흥! 마녀께서 말씀하셨지. 혈마는 결국 우리 구시대의 인물들을 청소하고 싶어 하고 있다고. 소면마군을 처리했듯 우리 또한 그렇게 할 거라고 말이다. 역시 마녀님의 안목이 정확하셨구나! 진작 그분을 따라 빠져나갔어야 했는데!”
투쟁할 마음을 굳힌 갈사삼귀의 몸에서 강력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공 구십 년 이상의 맏이 공대각은 물론 내공 팔십 년 이상인 그의 두 동생들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공대각이 소리쳤다.
“어린놈아! 혈마의 전인이라고 대우해 줬더니 네놈이 진짜 혈마라도 된 줄 착각한 모양이구나! 네놈 따위에게 우리 갈사삼귀가 호락호락 당할 것 같으냐?!”
그러자 구유상의 양옆에 있던 두 마두들이 사나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감히 갈사삼귀 따위가 지존을 저딴 식으로 입에 담다니, 공자!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이 축호탁과 노조송이 저 개 놈들을 갈가리 찢어 버리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공자!”
구유상의 양옆에 있는 자들은 염라혈승 축호탁과 식인마호 노조송, 각각 초절정과 내공 구십 년 이상의 마두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이라면 아무리 갈사삼귀라 해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구유상은 빙긋이 웃더니 그들이 아닌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화 숙부께 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의 뒤에서 화사하게 생긴 미공자가 부채를 부치고 하품을 하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하암, 유상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해 줘야지. 근데 저놈들만 처리하고 바로 다시 돌아가 봐도 될까? 저기 위층에서 아주 예쁜 아이들을 발견했거든.”
기껏해야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외모, 무인이라기보단 풍류공자로 보이는 화사한 옷차림을 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를 본 축호탁과 노조송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좌우로 물러났고, 갈사삼귀는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려야 했다.
“타, 탐화색마 화사유?”
탐화색마 화사유.
그는 철신광마 척강, 구유음마 지기음과 함께 혈교오마의 일인이자 천하삼십육성에 올라 있는 극강의 고수였다. 그런 그가 구유상과 함께 이 자리에 나타났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