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귀주성
화사유의 얼굴에 문득 뱀같이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린놈들이 버릇이 없구나. 감히 본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역시 너무 성정이 착하면 안 된다니까. 어린 것들이 기어오르잖아? 건방지게 말이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사유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러자 공대각이 급히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피, 피해!”
갈사삼귀 세 사람은 황급히 세 방향으로 흩어져 몸을 날렸다. 현 절대자들의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다는 화사유라면 그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어느새 이귀 공이골의 등 뒤에 나타난 화사유가 가볍게 허공으로 손톱을 그었다.
그러자 공이골의 등이 다섯 갈래로 깊게 갈라졌다.
푸화악!
“으아아악!”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기다란 손톱이 일 장 정도 길이로 길게 뻗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즉사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막대 공삼난의 목은 어느새 던졌던 것인지 화사유가 들고 있던 부채에 의해 이미 잘린 상태였다.
맹렬하게 회전하는 부채가 허공을 돌아 화사유에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위이이이잉!
갈사삼귀의 맏이 공대각은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언제 어디서든 포식자의 위치를 잃지 않았던 내공 팔십 년 이상의 절정 고수인 두 동생들이, 이 짧은 순간에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분노한 공대각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화사유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노옴!”
그를 갈사삼귀라고 불리게 만들었던 사자같이 강맹한 기세였다.
하지만 그를 본 화사유는 그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푸욱!
“!”
공대각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본인이 인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머리가 꿰뚫렸기 때문이었다.
허공을 격하고 날아온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가 그의 머리를 관통했던 것이었다.
그는 그저 날아오던 기세 그대로 땅에 부딪쳐 인형처럼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쿠당탕탕!
즉사였다.
지난 정혈대전에서부터 위명이 자자하던 갈사삼귀가 이렇듯 순식간에 모두 절명하자, 뒤에서 보고 있던 구유상이 빙긋이 웃으며 화사유에게 말했다.
“역시 화 숙부의 무색강기는 언제 봐도 놀랍군요. 고생하셨습니다.”
그러자 화사유가 방정맞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이고, 무슨. 이 정도를 가지고. 그나저나 유상아, 이제 이 숙부는 그만 올라가 봐도 되겠느냐? 그 예쁜 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구나.”
“그럼요. 어서 가시지요. 소질이 숙부님의 즐거운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그래, 그래. 그럼.”
말을 마친 화사유의 신형이 그대로 사라졌다.
아마 바로 여자를 품으러 올라간 모양이었다.
그가 없어지고 난 이후에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구유상은 부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서둘러 정리하고 운씨세가로 돌아간다.”
“네! 공자!”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다른 부하들이 다시 학살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방은 다시 비명 소리로 가득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구유상은 문득 옆에 있던 염라혈승 축호탁에게 물었다.
“다음 일정이 선우세가던가?”
그의 질문에 축호탁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공자.”
그러자 뭔가를 생각한 듯 구유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흠, 이번에야말로 그 귀여운 소저의 마음을 빼앗아야 할 텐데, 화 숙부를 욕할 것이 아니었군. 여자의 마음을 빼앗는 비법이라도 배워야겠어.”
사천제일공자, 백옥지룡이란 호칭까지 얻었던 그의 미소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것은 관심이 있는 여인을 떠올리는 미소라기보단, 맛있는 음식을 기대하는 미식가의 미소처럼 보이고 있었다.
***
사흘 후, 나는 드디어 선우세가가 있는 귀주성 귀양에 도착했다.
거의 팔 개월 만이었다.
암중에서야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지만, 대낮의 귀양은 여전히 활기찼다.
거리는 온통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선우가의 돼지 시절 섭렵했던 각종 식당들도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오랜만에 그 간판들을 보니 절로 목구멍에 침이 넘어갔다.
‘별로 좋았던 일도 없었던 시절이건만 그 음식 맛만큼은 그리워지는군.’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 지은 나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내가 향한 방향은 선우세가가 위치한 귀양의 서쪽이 아닌 남쪽이었다.
그러자 문득 은신한 채 나를 따르고 있을 적마혁의 전음이 들려왔다.
- 선우세가로 향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공자?
빙긋이 웃음 지었다.
귀양은 처음일 텐데도 벌써 지리를 어느 정도 파악한 모양이었다.
미처 그럴 틈이 없었을 텐데 역시 수완이 대단했다.
내 첫 수하의 유능함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 선우세가로 가기 전 먼저 들러야 할 곳이 두 군데 있다.
그러자 적마혁은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고 납득했다는 듯 대답했다.
- 네! 알겠습니다, 공자.
적마혁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자신이 딱 알아야 할 것 이상은 질문하지 않았다.
아마 내 의도가 무엇이든 충실히 따르겠다는 그 나름대로의 표현인 것 같았다.
그런 그의 태도는 물론 충실한 수족으로서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나는 최종적으로 내 수하들이 양지의 무인으로서 우뚝 설 수 있기를 바랐다.
내 충실한 수족 따위가 아닌 자신의 의지를 갖춘 훌륭한 무인으로서 말이다.
그러니 그는 더 많이 질문하고, 판단하고, 내게 의견을 제시해야만 했다.
내가 뭘 하든 아무 말 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적마혁과, 내가 뭘 하든 아예 아무 말도 없이 따르고 있는 견중에게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 우리가 처음 갈 곳은 귀양의 하오문 지부다. 그곳을 가는 이유는….
잠시 후, 나는 귀양제일루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화려한 주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삼 층 건물인 이곳은 주종이 다양하고 그 맛이 무척 깊어 선우가의 돼지 시절에도 종종 애용했던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가 하오문 지부였다니,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했었군.’
하지만 이제는 볼 수 있었다.
문 앞에서 활짝 웃으며 ‘어서 옵쇼!’를 연발하고 있는 건장한 점소이가 일류 중급의 무인이라는 것도, 주루 건물의 곳곳에 매복한 채 주변을 감시하고 있는 무인들의 기척도 말이다.
나는 피식 웃음 짓고는 감각을 최대한 개방한 채 귀양제일루의 주변을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그리고 측면으로 돌아 감시의 사각을 발견한 순간, 그대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스스슥!
주변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움직임이었다.
***
귀양제일루를 오는 손님들은 다들 이곳이 삼 층으로 된 건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층이 올라갈수록 점점 비싸고 고급스러운 대접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최종 층이 삼 층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귀양제일루는 원래 사 층 건물이었다.
교묘하게 건축했기에 겉으로 보기엔 삼 층 부분이 좀 높아 보이도록 지어졌을 뿐.
그리고 그 사 층에는 귀양제일루의 루주이자 하오문 귀주성 귀양 지부의 지부장인 노삼룡의 집무실이 위치해 있었다.
“으음, 결국은….”
노삼룡은 오늘도 자신의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평상시 늘 실없이 웃는 모습만을 보여 소소객이라고까지 불리는 그였지만,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서는 이렇듯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고, 또 그래야만 할 집무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고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노삼룡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이곳에 사람이 들어오다니, 심지어 자신이 전혀 인식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말이다.
만약 살수였다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너무 당황스럽고 두려웠다.
하지만 노삼룡 또한 산전수전 다 겪은 하오문의 지부장이었다.
그는 바로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혈교 쪽인가? 자객? 하지만 아직 그럴 이유를 찾지 못했을 텐데? 게다가 목소리가 젊다. 젊은 남자, 그것도 정중한 말투를 지닌 남자야. 혈교도가 아니다. 무엇보다 자객이었다면 굳이 내게 말을 걸지 않았겠지.’
거기까지 결론을 낸 노삼룡은 곧 평소처럼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어이쿠, 이거 내가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구려! 손님이 오신 것도 모르고 글자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니 말이오. 요즘 들어 가끔 정신이 깜빡깜빡한다오.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게 이런 말인가 보오.”
그는 말을 하며 어느새 자신의 서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잘생긴 젊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자 상대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도 전혀 몰랐다는 사실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영준한 외모 또한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저렇게 잘생겼으면서도, 자신이 전혀 모르는 얼굴이라는 것은 더 놀라웠다.
하지만 노삼룡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어디 보자, 손님이 오셨으니 차라도 내와야 할 텐데. 이놈들이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게야? 야, 이놈들아! 썩 차를 내오지 못할까?!”
그렇게 소리치며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정말 차라도 대접할 듯 너무도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빙긋이 웃으며 그를 보고 있던 남자, 선우진이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아마 가셔도 소용없을 겁니다.”
노삼룡은 일으키던 몸을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선우진의 말과 동시에 문을 열고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모두 노삼룡의 부하들이 아닌 흑의를 입은 복면인들이었다.
선우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차를 대접할 사람들이 모두 자고 있을 거거든요.”
노삼룡은 이제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문밖에는 원래 자신의 수하들이 철통같이 사층을 지키고 있었어야 했다.
그러니 저들이 저 문으로 들어왔다는 건 이미 자신의 수하들이 모두 당했다는 뜻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겐 이미 대응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선우진이 그를 향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앉으시죠, 지부장님.”
노삼룡은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에겐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이제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입을 열어 물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오? 뭘 원하시는 건지?”
그 질문에 선우진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선우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 하오문 귀양 지부를 접수하러 왔습니다.”
선우진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노삼룡의 놀란 눈이 크게 확대되고 있었다.
***
잠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노삼룡은 언제 그랬냐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말했다.
“하하하하! 공자께서 뉘신지는 모르나 너무 사전 조사도 없이 오셨구려. 차라리 지워 버린다면 모를까 귀주의 하오문은 일개 개인이 접수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오. 게다가 귀주성의 하오문을 현재 지배하고 있는 자들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해 줬다.
“귀주의 하오문이 다른 성들과는 달리 중앙 집권적인 형태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혈교에게 점거됐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러자 노삼룡의 표정에서 다시 웃음이 사라졌다.
“그, 그걸 어떻게?”
“그리고 소소객 노삼룡 지부장께서 이전의 혈교도들에게도, 이후의 혈교도들에게도 마지못해 협조하고 계시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사천성 의빈 지부에 있을 때 나는 특히 이 귀양 지부장에 대한 정보를 세세히 살펴봤었다.
선우세가가 위치한 곳이니만큼 이 사람과 협력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일의 성패를 좌우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보에 따르면 그는 약간 회색분자 같은 사람이었다.
특이하게 빈민과 고아들, 기녀들에게 신경을 썼다는 이전의 혈교도들이 장악했을 때도 크게 협조적이지 않았고, 지금의 과격한 혈교도들이 장악한 이후에도 설렁설렁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열성적이진 않지만 반항하지 않는 그의 기질이 그 목숨을 살렸다는 것이 의빈 지부장의 분석이었다.
이전 하오문주의 심복들이 쓸려 나가는 와중에도 아무도 그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내가 마지못해 혈교에 협조하고 있는 건 사실이오만, 그렇다고 공자에게 협조할 거라 생각했단 말이오? 애초에 내가 혈교에 왜 협조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들에게 반항하면 죽을 것이 뻔한데, 내가 왜 내 목숨을 걸고 공자에게 협조한단 말이오?”
빙긋이 웃음 지었다.
의빈 지부장의 분석 중에는 분명 그런 말도 있었다.
자기 보신에 눈이 먼 겁쟁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를 점찍은 이유이기도 했다.
활짝 웃으며 대답해 줬다.
“그러시겠죠. 목숨은 소중하니까요. 그래서 저도 좀 준비해 봤습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준비? 뭘 준비했단 말이오?”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내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두 복면인, 적마혁과 견중이 유령처럼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억! 뭐, 뭐야?!”
두 사람이 노삼룡을 제압해 그의 입에 무언가를 넣어주고 다시 내 뒤에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이 흐르는 듯한, 마치 진짜 유령을 보는 것 같은 움직임들이었다.
천살비기를 익히기 시작한 두 사람은 이제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역시 취미로 살수 비기를 익힌 나와는 발전 속도 자체가 다른 듯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수고했다는 웃음을 보내고는 목을 움켜잡고 켁켁거리는 노삼룡을 바라봤다.
“켁켁! 내, 내게 뭘 먹인 거요?!”
빙긋이 웃으며 대답해 줬다.
“고입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라고 하셨소?”
“살수문에서 쓰던 고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제가 드리는 해약을 먹지 않으면 몸속에서 미쳐 날뛰어 숙주를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게 만든다고 하더군요. 뭐, 저도 그 광경을 직접 본 적은 없어 실제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자 그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대,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요?”
씨익 웃으며 대답해 줬다.
“혈교에게 목숨을 빼앗길까 봐 움직이지 못하시는 것 같기에 말입니다. 이제 공평해졌군요. 제게 협조하다 들키면 혈교도에게 죽겠지만, 제게 협조하지 않으면 역시 고통스럽게 죽게 되실 겁니다. 이래도 저래도 죽으니 마음이 더 끌리는 쪽을 선택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 이제 어느 쪽에 더 협조하고 싶으십니까?”
그러자 그의 안색이 잠깐 사이에 몇 번이나 변했다.
푸르죽죽해졌다 붉게 상기됐다를 반복하는 그의 얼굴은 무척 흥미진진했다.
잠시 후 그가 마침내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본인은 공자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선택을 하란 말이오?”
고개를 저으며 대답해 줬다.
“말씀드렸습니다, 선우진이라고.”
그러자 잠시 인상을 찌푸렸던 그의 눈이 천천히 커지기 시작했다.
“설마… 선우가의 돼지였던 선우 삼 공자란 말이오? 전선에 끌려갔다던?”
“정확히는 뛰어갔었지요.”
그의 눈알이 떼구루루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럼… 예전에 흑상방을 무너뜨렸다던 비천흑랑 선우진도 본인이시겠구려. 동명이인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리고 정협방에서 적하신검 화영빈과 함께 소면마군과 싸웠다던 사람도…?”
“제가 맞습니다.”
그가 마침내 허탈한 탄성을 터트렸다.
“허어, 세상에! 그 짧은 시간에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이오? 아니지, 원래 어린 시절 공자는 기재로 소문이 자자했었소. 설마 일부러 재주를 감췄던 거요?”
솔직히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있는 그대로의 돼지였으니까.
하지만 그저 빙긋이 웃음 지어 줬다.
그러자 내 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가 다시 감탄한 탄성을 터트렸다.
“허어! 세상에, 세상에! 그 긴 시간 자신을 그렇게 감출 수 있었다니! 공자야말로 진정한 잠룡이셨구려!”
…무척 민망했지만 꿋꿋이 참기로 했다.
노삼룡이 긴장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그럼 공자가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오? 선우세가를 정리하기를 원하시는 거요? 아니면 설마 귀주성에 암약한 혈교도들을?”
그의 진지한 질문에 나 또한 진중한 눈빛으로 대답해 줬다.
“저는 그 둘이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자 노삼룡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허어, 공자. 귀주성의 혈교는 공자 혼자서 대적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오. 게다가 이곳에는 사천성처럼 청성이나 당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계획을 더 잘 세워야 하겠지요. 그래서 지부장님의 협조가 제게 더 중요한 것이고 말입니다. 그리고… 혼자 대적한다고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제게도 숨겨 둔 패는 있습니다.”
내 말에 그가 의문 섞인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내 패를 다 깔 수는 없었다.
몸을 숙여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노 지부장님?”
그러자 그는 암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내게 별다른 방법이 있겠소? 혈교도에게는 안 들키면 살 수도 있겠지만, 공자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얘기가 아니오.”
정확한 얘기였다.
씨익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그가 허탈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귀주성에서의 첫 단추가 훌륭히 꿰어지는 순간이었다.
***
이틀 후 나는 드디어 선우세가의 정문 앞에 서 있었다. 팔 개월 만에 보는 본가의 모습이 감개무량했다.
내가 감격한 표정으로 멍하니 대문을 바라보고 있자 수문 무사들이 이상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물었다.
“선우세가에 용무가 있으시오?”
씨익 웃으며 대답해 줬다.
“정 무사, 상 무사. 나 선우진이요.”
“예?”
그러자 처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무사들의 눈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경악해 소리를 질렀다.
“사, 사, 사, 삼 공자?!”
“저, 정말 삼 공자십니까?!”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맞소. 아버지께선 평안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