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정리-5
하씨세가는 패망했다.
가주 하구양을 비롯한 절정 고수들이 모두 죽고, 그 밑의 간부급 고수들마저 모두 소리 없이 암살된 하씨세가에서 선우세가의 앞길을 막아설 수 있는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주 선우중은 하씨세가를 접수하면서 하급 간부들과 일반 무인들은 모두 선우세가에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하씨세가의 전력 대부분은 빠르게 선우세가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미 희망이 사라진 하씨세가에 의리를 지키는 무인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군림하려고만 했던 하구양의 업보였다.
이로써 오랜 시간 귀주팔세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던 하씨세가는 역사 속으로 그 모습을 감췄다.
긴 세월 하씨세가와 선우세가에 의해 양분되어 있던 귀주성의 성도 귀양이 마침내 일통된 순간이었다.
최근 귀주성의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모두 이번 일에 대해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아니, 하씨세가가 선우세가를 압도하고 있던 거 아니었나?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패망할 수가 있지?”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역전이 됐대?”
“쯧쯧, 이렇게들 정보가 느려서야. 그게 다 선우세가주이신 환영검객 선우중 대협께서 때를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이라네.”
“때를 기다렸다고?”
“그래, 암중에서 힘을 키우며 하씨세가가 야망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던 거지! 그러다 하씨세가가 자신의 생명을 노리니까 바로 역공에 들어가신 거고 말일세!”
“허어! 대단하군! 그럼 선우가주인 선우중이 우유부단하다던 소문도 다 헛소문이었다는 겐가?”
“그렇지! 다 때를 기다리기 위한 와신상담이었던 거지!”
선우세가의 우유부단한 가주 정도로 알려져 있던 선우중은 어느새 귀주성 사람들에게 때를 기다리고 있던 잠룡으로 격상되고 있었다.
귀주성에서 수위를 자랑하는 거대 문파인 하씨세가의 습격을 물리치고, 오히려 역습으로 그들을 무너뜨리기까지 했으니 그렇게 인식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디에서도 하구양을 죽인 선우진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선우중이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던 장로와 대주들에게 함구를 명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진실을 알고 있는 장로와 대주들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고 싶은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대공자 선우성과 사 공자 선우기가 선우진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이, 네놈은 그 중요한 상황에 대체 어디에 가 있었던 것이냐?!”
벌컥 화를 내는 선우성의 목소리에, 몸을 잔뜩 움츠린 선우진이 말을 더듬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아, 아니, 소제는 그저 늦잠을 좀 자느라….”
“늦잠? 늦자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네놈이 무슨 식객이더냐? 세가의 명운이 걸려 있는 시기에 늦잠을 잤다고?!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냐?!”
“맞습니다, 형님! 이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입니다! 아버지께서도 이번만큼은 절대 용서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자리는 원래 하씨세가를 접수한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정작 하씨세가를 치러 갈 때는 보이지도 않다가 이제야 슬금슬금 나타난 선우진의 모습에, 원래 감정이 좋지 않았던 선우기가 비꼰 것이 그 시작이 되고 말았다.
그 말을 들은 선우성은 마치 자신이 가주라도 된 양 선우진에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선우혁마저 뇌옥에 갇히자 이제 후계자가 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있던 선우성이, 곧 가주가 될 자신이 나서서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선우기는 이 기회에 선우진이 제대로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말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선우진을 맹비난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문의 수치 같은 놈! 어떻게 전선에 가서도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살만 빠졌지 한번 돼지는 영원한 돼지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장로들과 대주들의 심정은 마치 가시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조마조마하기 그지없었다.
원래 선우성을 후계자로 밀고 있었던 이 장로 서통성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선우성을 뜯어말리고 싶었다.
저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선우진이 검이라도 들게 된다면 어쩐단 말인가.
그건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 자리에 있는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을 테니. 서통성의 눈엔 지금 선우성이 범의 아가리 속에 고개를 집어넣고 고함을 지르고 있는 하룻강아지처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빌었다.
‘대공자, 제발 그만하시오. 거기는 사지란 말이오.’
하지만 마음을 졸이고 있던 장로들, 대주들에겐 다행히도 결국 선우진이 폭발하기 전에 일은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만하거라! 외인들도 있는 앞에서 이 무슨 추태를 보이는 것이냐?!”
가주 선우중이 꾸중에 선우 형제들은 언제 소리를 질렀냐는 듯 푹 수그러졌다.
이제 선우세가에서 아버지 선우중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선우중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들들을 한 번 쓸어 본 후 분위기를 바꿔 좌중의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자, 내일부턴 모두 정신없이 바빠질 것이오. 그러니 오늘 하루만 즐겁게 잔을 기울이도록 합시다!”
선우중의 말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모두 술잔을 비우고 즐겁게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귀양의 진정한 패자가 된 기념주라니, 비록 적은 양의 술이라도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술자리가 진행되며 대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을 때였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사 장로 요두면이 문득 볼일을 보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주변을 한 번 쓰윽 둘러봤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 여유 있게 본전에서 나왔던 요두면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신속하게 경공을 전개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방에 숨겨 뒀던 비둘기를 꺼내서는 빠르게 서신을 작성해 그것을 비둘기의 다리에 매달았다.
‘빨리, 빨리.’
신속하게 일을 마친 요두면은 창가로 가서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푸드득!
성공이었다.
요두면은 무사히 하늘로 솟구치는 비둘기를 보며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들키지 않고 보고에 성공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날아온 비도가 비둘기의 몸을 꿰뚫었다.
푸슉!
“삐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추락하는 비둘기의 모습에 요두면은 경악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서신을 회수해야만 했다.
그는 생각을 멈추고 비둘기가 떨어지고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뛰쳐나간 그가 막 담장을 넘었을 때였다.
요두면은 그대로 경악한 채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한 사람이 떨어지는 비둘기를 낚아채서는 태연하게 서신을 꺼내 읽고 있었던 것이다.
“흐음, 하씨세가의 하구양을 죽인 것은 삼 공자인 선우진입니다. 그는 최소 칠십 년의 벽을 넘은 절정 고수로 보이니 대비를….”
거기까지 읽던 선우진이 비릿하게 웃으며 요두면을 향해 말했다.
“이게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요 장로님? 가주이신 아버지의 명도 어기고 이렇게 몰래 정보를 유출하시다니 말입니다.”
그러자 요두면은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려, 공자. 난 그저 소화가 안 되어 신법을 펼치고….”
그때 그의 말을 끊으며 선우진이 말했다.
“당연히 운씨세가겠지요?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말에 요두면의 눈이 크게 확대됐다.
이미 자신이 어디에 선을 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선우진은 이제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물었다.
“그보다 요 장로님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배신자이신 장로님을 제가 어떻게 처리할지 말입니다.”
요두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모든 걸 들켰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라면 자신 또한 삼 장로 각중광처럼 죽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으아아아앗!”
요두면은 황급히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선우진에게서 도망쳐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선우진과 싸운다면 물론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그보다 속도로 겨룰 때 더욱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을.
요두면이 겨우 두 발자국을 달렸을 때였다.
어느새 그의 등 뒤까지 접근한 선우진이 간단히 그를 점혈했다.
타닥!
“!”
선우진 입장에선 알아서 등을 보여 주다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털썩!
선우진은 돌처럼 굳어져 바닥에 쓰러진 요두면을 보며 지난 삶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사 장로 요두면은 지난 생에서도 하씨세가로 갈아탄 삼 장로 각중광처럼 운씨세가로 갈아탔던 자였다.
심지어 그 시기는 각중광보다 더 빠르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다른 대주들은 적마혁과 견중에게 감시하도록 했지만, 이 요두면만큼은 선우진이 직접 지켜보고 있었던 중이었다.
‘이제 직접 배신한 자들은 대충 정리됐군.’
지난 생에 배신했던 자들을 대충 정리했으니 이제 남아 있는 자들만 잘 단속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지난 삶에서야 후계 싸움에 말려들어 결국 선우세가를 떠났던 자들도, 이번 생에서는 잘 관리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선우진은 땅에 쓰러져 있는 요두면을 잠시 바라보다 문득 운씨세가가 있을 남쪽을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상대해야 할 자들은 혈교도들이었다.
고작 귀양에서나 왕 노릇을 하고 있던 하씨세가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괴물들 말이다.
그러니 조심, 또 조심해야만 할 것이었다.
***
야심한 밤, 몰래 아버지 선우중을 만나고 온 선우진은 아무도 없는 후원에서 두 수하들을 호출했다.
“마혁, 견중.”
그러자 근처 나무의 그림자에서 두 명의 신형이 스윽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공자.”
“…….”
마치 유령이 나타나듯 신출귀몰한 등장이었다.
선우진은 그사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 되어 버린 두 수하의 은신술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그들을 향해 책자 몇 권을 던져 줬다.
휘익!
그러자 가볍게 그것들을 받아 낸 적마혁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공자, 이건…?”
“선우세가의 무고에 있는 것들 중 제일 쓸 만한 도법들이다. 내가 직접 가르쳐 주면 좋겠지만, 나도 도법은 잘 몰라서. 일단 두 사람 다 익혀 봐. 뭐 대단한 것들은 아니지만 다양한 도법을 익히고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거다. 천살비기의 도법을 깨우치는 데도 도움이 될 거고.”
그 말에 서로 시선을 교환한 적마혁과 견중은 황급히 책자들을 확인해 봤다.
그것들은 찬류도법, 찰흔도법, 적호도법이라는 제목이 적힌 세 권의 책자였다.
사천살문의 살수였던 두 사람이 익혔던 도법은 어디까지나 기습을 위주로 한 살수들의 도법이었다.
물론 워낙 두 사람의 재능이 뛰어나고 실력이 좋아 웬만한 상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통했었지만, 이번에 하씨세가의 모순도를 상대할 때 느꼈듯 그것만으론 분명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천살비기를 익히고 있는 요즘, 갑자기 배우게 된 수준 높은 무공에 은신술, 암기술을 제외하곤 잘 습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고 말이다.
책자들을 확인한 적마혁은 뜨거운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자, 지금껏 저희에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데….”
아마 이 감성이 풍부한 수하는 또다시 감격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견중 또한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무척 뜨거운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쉽게 감동해 버리곤 하는 순수한 두 수하의 모습에 선우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두 사람이 제대로 된 무인으로서 성장해 줬으면 좋겠어. 그게 나한테도 좋은 일이고 말이야. 그러니까 열심히 수련하도록 해. 나중에 동생들을 다시 만났을 때 그 녀석들보다 약해져 있으면 안 되잖아?”
그러자 두 사람은 결연한 눈빛으로 대답하고는 다시 책자로 눈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자!”
“알겠소.”
이제 정신없이 책자를 읽어 보기 시작한 두 사람에게 싱긋 웃어 준 선우진은 다시 몸을 돌렸다.
선우진은 적마혁의 동생인 적하군과 적하연을 선우진의 스승이 된 광협검성 정명강의 동굴로 보낸 상태였다.
두 사람의 나이가 아직 어려 살수로서의 실력이 다소 부족한 데다, 재능이 충분히 뛰어난 만큼 처음부터 살수가 아닌 무사로 키우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우진은 그들에게 대연정심결을 가르친 후 일단 영남검문의 도문승을 찾아가라고 한 상태였다.
대연정심결을 익힌 세 사람이 함께라면 충분히 이인관을 열 수 있을 것이고, 오십 년 전의 절대자였던 스승 광검이라면 꼭 월야환검무가 아니라도 아마 세 사람에게 적당한 무공을 가르쳐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선우진은 이 선우세가에서의 일이 마무리된다면 적마혁과 견중도 그곳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면 내 수하들도 강해질 테고, 사람들과 같이 있으니 스승님도 심심하시지 않을 테고. 그게 바로 일석이조 아니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기분 좋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던 선우진은 문득 방 근처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흐음.”
자신의 방 안에서 사람의 기척이 감지되고 있었다.
살수는 아닌 것 같았지만 꽤 무위가 높은, 아마도 절정 이상일 것 같은 무인이 몸을 숨긴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절정 이상이라….’
선우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선우세가에 존재하는 절정 고수라면 기껏해야 아버지 선우중과 대장로 허진국 정도였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사람의 느낌이 그들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외부인이란 뜻인데….
그가 누구이든, 외부의 절정 고수가 선우진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문제가 있었다.
선우세가에 와서 제일 신경을 쓴 부분이 있다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 선우진을 대단히 찝찝하게 만들고 있었다.
선우진은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바로 검이 날아왔다.
슈학!
선우진은 일단 옆으로 물러서며 검을 가볍게 흘려 내고 상대를 확인했다.
상대는 왜소한 체격의 흑의복면인이었다.
그러곤 바로 역공해 팔이라도 하나 잘라 버리려던 선우진은 일단 더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절정 고수의 검이라기엔 생각보다 너무 느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
무엇보다도 선우진의 코에 느껴진 어떤 향기가 있었다. 그 향기를 맡은 순간 선우진은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젠장.’
흑의복면인은 첫 검격이 실패하자 계속해서 공격해 오려고 했다.
하지만 한숨을 내쉰 선우진이 평온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갈 소저?”
그러자 우뚝 멈춘 복면인이 잠시 선우진을 노려보다 마침내 복면을 벗었다.
그 안에 드러난 얼굴은 역시 제갈서율이었다.
그녀가 선우진을 향해 씹어뱉듯 말했다.
“세상을 감쪽같이 속이다니, 이 사기꾼 같으니!”
그녀의 말에 선우진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실수였다.
진작 알았더라면 검을 피하지 않았을 것을.
아쉽게도 그녀의 향수 냄새를 맡고 정체를 파악했을 땐 이미 본능적으로 검을 피한 후였다.
하지만 이미 들킨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선우진은 일단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뭘 속였다는 겁니까?”
그러자 제갈서율이 소리쳤다.
“뭘 속였냐고요? 당신의 무위를 속였잖아요! 어쩐지 이상했어요. 전선을 다녀온 사람이 오히려 전보다 더 약해졌다는 게.”
‘아, 그게 문제였나?’
아무래도 그녀의 안목을 좀 과소평가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야밤에 제 방에 숨어서 기습을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제가 형제들과 싸우기 싫어 맞아 줬다는 이유로?”
이 질문은 낚시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게 단지 그것뿐이라면 제갈서율은 형제들과 싸우기 싫었던 선우진을 오해하고 기습한 경솔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는 게 싫다면 다른 알고 있는 것들을 더 털어놔야 할 테고 말이다.
그러자 제갈서율이 바로 걸려들었다.
“그,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당신 하씨세가를 칠 때 늦잠을 잤다는 것도 거짓이었잖아요?! 그때 당신을 만나러 와 봤지만 당신은 선우가 내 어디에도 없었어요!”
아마 그게 자신을 의심하게 된 진짜 이유였던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들은 선우진은 내심 웃음 지었다.
확실히 이 소저는 제갈가 사람답지 않게 순박한 면이 있어 상대하기가 무척 편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그녀의 말에 선우진은 당당히 대답했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니오. 아버지와 형제들이 세가의 명운을 건 싸움을 하는데, 설마 진짜로 자고 있을 만큼 내가 얼빠진 사람으로 보이시오?”
“그, 그건…!”
선우진의 대답에 제갈서율은 오히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답에서 허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녀로서는 그랬다.
선우진은 이제 무척 기분 나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실력을 숨긴 것은 맞소. 예전부터 그랬지. 형제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거든. 근데 그것이 이렇게 암습을 당해도 쌀 만큼 흉악한 일인지는 몰랐구려. 그래, 이제 궁금증이 풀려서 시원하시오? 부디 그러셨으면 좋겠구려. 그러면 이제 그만 좀 나가 주시겠소? 소저야 시원하시겠지만 나는 매우 피곤하구려.”
너무나도 쌀쌀맞은 축객령이었다.
제갈서율이 평생 남자들에게 한 번도 당해 보지 못했던 차가운 대접.
그녀는 너무나도 자존심이 상하고 말았다.
마음이 너무 상해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하지만 제갈서율은 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 다시 선우진에게 물었다.
“당신이 선우가로 오고 나서부터 모든 게 변하기 시작했어요. 다 당신 때문이죠? 맞죠?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죠?”
그러자 선우진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저 철모르는 부잣집 소저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건만, 온실 속의 화초긴 해도 역시 제갈세가의 씨앗임에는 틀림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디?’
선우진은 이제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를 하시는지 모르겠구려. 내가 대체 뭘 꾸몄다는 거요? 그리고 그게 설사 맞다고 칩시다. 내가, 청연 소저를 해쳤을지도 모를 제갈가의 사람에게 왜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해 줘야 하는 거요?”
그 질문에 제갈서율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무, 무슨! 처, 청연이를 해쳤다니…!”
하지만 부정해 보려던 제갈서율은 선우진의 차가운 눈빛에 차마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가 차갑게 물었다.
“소저는 진심으로, 부친께서 청연 소저를 해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오?”
제갈서율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저 말을 내뱉지 못한 입을 달싹거릴 뿐이었다.
그러자 선우진은 충격받은 눈빛으로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는 제갈서율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여 줬다.
마침내 제갈서율의 고개를 푹 숙이게 만들고 만 말이었다.
“내가 뭘 꾸미든 그게 다른 가문의 검법을 강탈하려는 행위는 아닐 것이오. 그러니 소저께선 그만 관심 끊고 돌아가 주시구려.”
제갈서율은 결국 힘없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