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그들의 동향
운남성 비룡십삼대.
칠 조의 조원들은 오늘도 저녁 시간에 모여 평소처럼 대련 시간을 갖고 있는 중이었다.
칠 조의 부조장인 나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해청연이 그녀에게 줬던 검 ‘연홍’을 고쳐 잡았다.
그녀의 앞에는 여인 한 명이 방만한 자세로 어서 오라는 듯 희미하게 웃음 지으며 서 있었다.
나서유가 절대로 지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하아앗!”
파박!
기합과 함께 나서유가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이제 완숙한 일류 최상급 검사인 그녀의 신법은 신속했고, 그 검격은 무척이나 날카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결국 상대에게 닿을 수 없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던 검은색 강편이 어느새 그녀의 주변을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촤아악!
“이익!”
나서유는 몸을 휘돌리며 사방으로 검영을 뿌려 냈다.
슈하아악!
하지만 검은 강편은 그녀의 검격을 흡수하기라도 하듯 별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투투투툭!
그저 잠시 움찔하고는 다시 묵직하게 조여 올 뿐이었다.
“큭!”
나서유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날려 뒤로 물러서려 했다.
일단 강편의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검은 이무기 같은 강편이 그녀를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아악!
강편 끝의 얇은 부분이 날렵하게 휘돌며 나서유의 다리를 휘감았다.
“!”
덜컥!
나서유의 신형은 허공에서 더 이상 물러나지 못하고 공중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검은 뱀과 같은 강편들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 깜짝할 사이 온몸이 강편에 휘감겨 버렸던 것이었다.
촤르르륵!
“아윽!”
나서유는 그대로 번데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힘을 써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곤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강편에 의해 땅바닥에 부드럽게 놓였다.
“이이익!”
야운향이 버둥거리는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특유의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는 조금도 힘을 쓴 것처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몽롱한 눈빛으로 천천히 말했다.
“약하군요.”
그 말에 나서유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절정 고수인 야운향보다 약한 것이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애써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야 소저에 비해서야 제가 많이 부족하겠죠. 그러니 이것 좀 풀어 주시겠어요?”
그러자 야운향의 입술이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설풍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하면 풀어 줄게요.”
너무도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당황한 나서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갑자기?!”
하지만 야운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다시 말을 반복했다.
“말 그대로예요. 설풍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하면 이걸 풀어 주겠단 얘기에요.”
그러자 평소 좀처럼 화를 내지 않던 나서유가 드디어 분노한 표정으로 야운향을 노려봤다.
“장난치지 말아요. 고작 이런 걸로 날 협박할 셈이에요?”
나가장에서 아버지를 보살피다 비룡대로 돌아왔던 나서유는 갑자기 나타난 야운향이란 존재에 무척 당황했었다.
설풍을 쫓아 비룡대에 들어왔다는 그녀가 적어도 나서유 자신보다는 훨씬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절정 고수이기까지 하고 말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건 설풍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늘 자신에게 솔직하고 당당할 수 있는지 나서유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부러웠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런 야운향이 지금 자신에게 설풍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서유의 마음속에서 오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삶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면 그중 하나가 바로 설풍이었으니까 말이다.
나서유는 결연한 눈빛으로 야운향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요.”
그러자 야운향이 다시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늘 아닌 척하더니, 이제야 솔직하게 말하는군요.”
“…네?!”
나서유는 당황하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설풍을 연모하고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야운향에게 완전히 낚였던 모양이었다.
스르르륵!
나서유를 감고 있던 검은 강편이 마치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풀려서는 야운향의 얇은 허리로 다시 감겨들어 갔다.
하지만 야운향은 그것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특유의 나른한 말투로 말했다.
“일단 물러서지 않는 건 합격이네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해요. 당신은 결국 날 이길 수 없어요. 내 마음은 무공보다 훨씬 더 강하니까. 그리고… 설풍은 그 정도가 아니면 옆에 있을 수 없는 남자더군요.”
선전 포고, 또는 조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 말에 나서유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서유 또한 야운향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검성 어르신과 함께 숲속으로 들어가 따로 대련 중인 설풍은 늘 함께 있어서 잘 몰랐을 뿐 정말 대단한 남자임에 틀림없었다.
지금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다룬 이 야운향도 설풍에겐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었다.
청성의 기재라는 일 조장 한교성도, 현존하는 점창제일기재라는 사군일 조장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그 적안의 무공을 쓰기는커녕 제대로 힘을 다하지 않았음에도 그랬지.’
아무리 무림이 넓고 잠룡이 많다지만, 이십 대의 무인들 중에 그 비슷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라도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설풍은 어쩌면 다음 세대의 절대자가 될지도 모를 그런 남자였던 것이다.
근데 그 설풍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부족하다면?
그건 결국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서유는 절대 설풍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결연한 눈빛으로 야운향을 보며 말했다.
“염려 마시죠. 저도 계속 이 자리에 머물러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곧 지금 내가 당했던 걸 당신도 당하게 해 줄게요.”
그녀의 투지 넘치는 말에 야운향은 희미하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비웃음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처럼 급속도로 성장한 사람들이 실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질풍비응 비사영과 점창검호 제원영이 대련을 하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일류 최상급의 무인이었던 비사영은 현재 절정의 경지에 올라선 상태였다.
이류에서 일류로 올라설 때 감을 잡지 못해 고생했었다는 비사영은, 일류에서 절정으로 넘어가는 고비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넘기고 말았다.
그리고 절정에 오른 비사영은 이제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하아아압!”
제원영의 검이 먹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낙뢰처럼 비사영을 찔러 갔다.
선우진도 종종 사용하곤 하는 사일검법의 절초 흑천검우였다.
슈아아아악!
하지만 검영에 적중당할 것만 같던 비사영의 신형은 순간 팍 흩어져 흩날리는 꽃잎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절정이 되고 드디어 비사영도 사용할 수 있게 된 천풍신법의 절기 천풍화엽이었다.
사라라라라락!
제원영은 이를 악물고는 검법을 사일검법에서 분광십팔검법으로 바꿨다.
날카로운 열여덟 개의 검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바밧!
하지만 바람이라도 베어 낼 것만 같던 그의 날카로운 검기도 결국 비사영의 몸에 전혀 닿을 수 없었다.
비사영은 그야말로 진짜 바람처럼 그의 주변을 휘돌고 있었다.
마치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그의 신형을 제원영이 어떻게든 베어 보려 하고 있을 때, 바람처럼 움직이던 비사영의 신형이 갑자기 급가속해서는 제원영의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젠 숨 쉬듯 사용할 수 있게 된 폭진보였다.
쉬이익!
채앵!
“크으!”
비사영의 도격을 간신히 막아 낸 제원영의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원래도 빨랐던 비사영이 저렇게 급가속해 공격해 올 때면 반응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사람 자체가 암기가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빛살이 된 비사영이 제원영의 후방을 스쳐 지나갔다.
챙!
사방을 가득 채운 채 꽃잎처럼 흩날리는 비사영의 잔상과 순간순간 질풍처럼 뒤를 노리는 그의 도격.
그 현란한 신법에 분명 더 고수일 것이 분명한 제원영이 마치 돌풍 속에 갇혀 버린 듯 쩔쩔매고 있었다.
그 대결을 보고 있던 야운향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제원영이 아닌 자신이었다고 하더라도 저런 자를 잡을 수는 없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위가 더 높은 제원영이나 자신이 비사영에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를 잡을 확률보다는 그에게 당할 확률이 더 높을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도저히 잡히지 않는 공기 같은 적을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그런데 저런 자가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이류의 무인이었단 말이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저쪽에서 해맑게 웃으며 다른 조의 남자 조원들에게 연승을 거두고 있는 천주은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싸, 십오 연승!”
“이번엔 내 차례요, 천 소저!”
“아니오, 내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소!”
천주은은 최근 일류 상급의 경지에 올라서며 많은 남자 대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귀여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던 데다, 늘 웃는 표정으로 사람을 대하는 그녀가 조장급 무위까지 갖추게 됐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그녀가 인기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었다.
하지만 칠 조에서 그녀보다 더한 남자들의 인기를 받고 있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바로 배종관이었다.
배종관은 지금 수많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오오! 대단하군, 종관! 그런 강철 같은 근육으로도 그렇게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다니!”
“역시 철신유성 배종관! 그 멋진 근육은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건가?!”
“나도 그 외공을 가르쳐 주게, 종관!”
“종관!”
“종관!”
물론 인기의 종류는 좀 달랐지만 말이다.
선우진이 전수해 준 폭진보에다 최근 설풍의 집중 지도를 받으며, 배종관은 원래 갖고 있던 강철 같은 외공에다 날렵한 신법, 화려한 월도술까지 갖추게 된 상태였다.
그러자 외공을 익혀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른 조의 남자 대원들이 이제 더 망설이지 않고 배종관에게 외공을 가르쳐 줄 것을 청하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장수 취급을 받았던 배종관이 비룡십삼대 남자 대원들의 인기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야운향은 그녀의 주변에서 수련 중인 칠 조원들을 주욱 둘러봤다.
누구 하나 평범한 사람이 없었다.
아직 자신에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말하듯 몇 개월 전까지 이류에 불과했던 사람들이라고는 절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야운향은 다시 도전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서유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기대하죠.”
저들의 성장을 보건대, 나서유가 자신을 따라잡겠다는 얘기 또한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문득 오랜만에 무인으로서의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새처럼 가벼운 신법으로 그녀들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사 조의 부조장인 해청연이었다.
“서유 언니!”
그녀가 평소와 달리 다급한 목소리로 나서유를 부르고 있었다.
야운향은 자신 이전에 칠 조의 조원이었다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뛰어난 무위를 인정받아 사 조의 부조장이 됐다는 그녀는 요즘 사 조장인 점창검호 제원영의 여인으로도 유명했다.
사 조 조장인 점창검호 제원영이 한결같이 그녀에게 연모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작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서유 언니! 아버지는 어디 계셔?!”
그녀의 말에 야운향은 그녀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을 빼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여인이 천의검성 해운백의 딸이라고 했었지?’
이제껏 다른 어떤 여자에게도 부러움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야운향마저도 문득 조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대단한 조건을 갖춘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대단한 해청연의 표정은 지금 무척 심각해 보이고 있었다.
나서유는 평소 같지 않게 조급해 보이는 해청연의 태도에 살짝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검성 어르신이라면 저쪽 숲에서 설풍 조장과 대결을 하고 계실 거야. 근데 왜…?”
“고마워!”
해청연은 뒷말은 듣지도 않고 나서유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정말이지 평상시의 그녀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나서유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지?”
같은 시각, 검성 해운백은 완전히 초토화된 숲에서 호탕하게 웃음 짓고 있는 중이었다.
“으하하하하! 자네 정말 대단하군! 내가 젊은 무인을 상대로 이렇게 마음껏 팔다리를 움직여 본 건 정말 처음일세!”
그렇게 말하는 검성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지 않았다.
아마도 권각법만을 이용해 설풍과 대결을 해 봤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초토화된 숲에 대자로 뻗어 있던 설풍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다 검성 어르신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으하하하! 그런 소리 하지 말게! 내가 이제껏 가르친 젊은이들이 몇 명인데, 그게 다 내 덕이면 세상은 벌써 초절정 무인들로 가득 찼을 거라네, 으하하하하!”
그러더니만 문득 주변을 살피더니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는 혹시 내 딸 청연이한테 관심이 없나?”
“…예?”
느닷없는 질문에 설풍이 당황한 표정으로 검성을 바라봤을 때였다.
갑자기 멀리서 해청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그러자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이 되어 버린 검성이 다시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으, 으하하하하하! 그저 농이었다네! 사람, 심각하기는. 어때 재밌었는가?! 으하하하하!”
그러고는 다시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그러니 청연이에게 이런 농을 했다는 건 절대 비밀….”
그때 해청연이 그들의 옆에 착지했다.
“아버지!”
“오! 우리 딸이 왔구나! 오늘도 여전히 예쁜 우리 딸이 이 아비가 보고 싶어…!”
검성은 늘 그렇듯 능청스럽게 해청연을 맞으려 했다.
하지만 해청연은 딱딱한 표정으로 그에게 서신 한 장을 내밀었다.
“무림맹에서 이런 게 왔어요.”
그러자 의아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읽던 검성의 얼굴에서 점점 장난기가 사라져 갔다.
그의 눈빛은 이제 예리한 정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것은 도전장이었다.
천하오괴의 일인인 독안괴검 서일이 검성 해운백에게 도전을 하겠다는 도전장.
게다가 이 도전장이 도착하기도 전에 괴검이 검성에게 도전했다는 소문이 이미 전 무림에 파다하게 퍼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갈지강의 수작임에 분명했다.
해청연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독안괴검 서일이 도전했다는 건 이길 자신이 있다는 얘기예요.”
일제, 이왕, 삼성, 사마, 오괴 중 오괴에 속하는 독안괴검 서일은 불패의 승부사로 유명했다.
그는 천하를 떠돌며 승부를 벌여 여태껏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패한 상대를 모두 죽였었다.
근데 그런 서일이 이번에 검성에게 도전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무림맹을 통해서.
검성은 빙긋이 웃으며 해청연에게 물었다.
“너는 이 아비가 그에게 질 것 같으냐?”
그러자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해청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가 아버지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가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을 거란 뜻이죠. 모르시겠어요? 그가 왜 불패의 승부사인지?”
독안괴검 서일은 불패의 승부사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불패인 이유는 그가 항상 이길 수 있는 상대에게만 도전하기 때문이었다.
자기보다 강한 상대도, 비등한 상대도 아닌 자기가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상대에게만 말이다.
그래서 그는 승부사라곤 하지만 여태껏 한 번도 무림의 다른 절대자들에게 도전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이길 수 있는 상황이란 분명 무림맹과 관련이 있겠죠. 이건 함정이에요. 아버지를 제거하기 위해 제갈지강이 판 함정이요.”
이 소식을 해청연이 직접 전달한 이유 또한 그것 때문이었다.
만약 다른 경로를 통해 그녀의 아버지에게 들어갔다면, 검성은 당연히 이 도전을 받아들였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함정이라는 걸 알려 줬음에도 검성은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청연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해청연이 버럭 소리쳤다.
“안 돼요, 아버지! 절대로!”
하지만 검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무인에겐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이 아비는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죽음이 두려워 뒤로 물러서는 것은 두렵구나. 그리고… 내가 만약 이 도전을 피한다면 어떻게 될는지 너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니냐?”
그러자 해청연도 그 말에는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제갈지강이 검성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검성이 무림의 절대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가 모든 무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무인이기 때문이었다.
현시대의 무인들에게 검성이란 존재는 협객과 동의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절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어떤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 이상적인 무인 그 자체. 그것이 바로 검성에 대해 무인들이 갖고 있는 관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검성이 괴검의 도전을 피한다면?
검성의 위명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아니, 제갈지강이 분명히 그렇게 만들고 말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해청연도 잘 알고 있었다.
‘제갈지강이 아버지를 건드릴 수 없었던 이유가 사라지게 되는 거겠지. 더 이상 무인들의 우상이 아닌, 무림에 대한 영향력이 사라진 검성은 그저 강하기만 한 무인일 뿐일 테니까. 어떤 식으로 처리해도 별 상관이 없는. 그럼 제일 먼저 우리 가문부터 건드리려 할 거야.’
해운백의 가문인 하남해가는 하남성 허창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무림맹이 위치한 하남성 정주와 지척이기도 했다.
지금까지야 모든 무인들의 우상인 검성의 가문이니, 무인들의 반발이 두려워 차마 건드릴 수가 없었겠지만, 만약 제갈지강이 아버지인 검성의 위상을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하남해가는 아주 좋은 인질이 되고 말 것이었다.
그러니 제갈지강 입장에선 그녀의 아버지인 검성이 도전을 받아들이든 피하든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무림맹이라는 거대 단체를 이끌고 있는 제갈지강의 입장에선, 한 명의 고강한 무인을 처리하는 것이 모든 무인의 존경을 받는 무인의 그림자와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할 테니까.
‘어쩌면 피해 주기를 더 바라고 있을지도….’
해청연이 그런 생각을 하며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검성이 문득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걱정 말거라, 청연아. 네가 그러고 있으면 꼭 내가 이미 진 것 같지 않으냐? 네 아비는 그리 약하지 않단다. 내가 그 제갈가 놈의 함정에 빠져 죽거나, 검괴 따위에게 죽을 만큼 허약했다면 아직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네 아비를 한번 믿어 봐 주지 않겠느냐? 그게 어떤 함정이든 박살 내고 다시 네 곁에 돌아올 테니까 말이다.”
검성은 확고한 자신감이 담긴 어조로 자신의 딸을 안심시키려 했다.
해청연은 그런 아버지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검성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가 모든 무인들의 우상이 된 데에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싸움과 위험을 모두 극복해 냈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제갈지강 또한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해청연이 말했다.
“그럼 일단 독안괴검에게 이쪽으로 오는 것을 조건으로 답신을 보내 주세요. 저들이 미리 함정을 파 놓은 곳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없도록요.”
그녀의 말에 검성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그렇게 하마.”
망설임 없이 수락하는 검성의 태도에 해청연은 조금 안도감을 느꼈다.
함정을 팔 수 없도록 그를 이쪽으로 불러들여 대결을 한다면 냉정하게 생각해도 그녀의 아버지가 서일 따위에게 질 리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 이성적으로 그것이 맞고, 이 무림의 절대자 중 한 명인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 누구보다 강한 사람임이 틀림없을 텐데도, 그녀의 불안한 예감은 어쩐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