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146화 (133/359)

146화 덫-1

선우중이 물었다.

‘하씨세가를 정리한다면 그다음엔 어디를 정리해야 하겠느냐?’

그의 물음에 선우진이 대답했다.

‘운씨세가를 정리해야 하겠지요. 개양문은 마지막까지 미끼가 되어 줘야 할 테고, 서기당은 그리 어렵지 않은 상대이니까요.’

‘흐음, 그렇겠구나. 하지만 그들은 연하가 여인인 데다 거리까지 멀어 지금껏 크게 세가에 영향을 끼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쉽게 움직이겠느냐?’

그러자 선우진이 무엇을 떠올렸는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넷째 기의 서기당과 연합해 웬만하면 서기당을 대신 움직이게 했기에, 얼핏 세가에 욕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과거의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지요.’

‘과거의 사건?’

선우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선우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제가 연하를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려고 했을 때 말입니다.’

그 말에 선우중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단가장의 네 친구 단하상의 죽음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이냐?’

선우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선우중이 다시 물었다.

‘그게 운씨세가의 짓이었단 말이냐?’

그 물음에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운씨세가의 짓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다만 세가의 누가 그 사건과 연관이 있는지가 불확실할 뿐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번 기회에 운씨세가를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그 범인 또한 찾아보려고 합니다.’

선우중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어떻게 말이냐?’

그러자 선우진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어떤 경우에 움직이는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 그 상황을 다시 한번 주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상황?’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우중에게 선우진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

하씨세가를 접수한 바로 며칠 후.

그간 하씨세가와의 싸움에 대한 뒤처리에 정신이 없었던 선우세가 사람들은 또다시 가주 선우중의 호출에 의해 가주 집무실에 모여야 했다.

이번에는 가족들만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선우중은 이번에도 또 폭탄선언을 터트리고 말았다.

“연하를 개양문과 혼인시키겠다.”

선우세가의 가족들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선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특히 개양문 출신인 곡 부인과 그의 친자인 첫째 선우성을 제외한다면, 그 선언은 나머지 모두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경악할 만한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연하를 개양문에 시집보내겠다니, 그 말은 개양문과 더욱 관계를 긴밀하게 하겠다는 의도임에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것은 넷째 선우기의 외가 서기당과 연합해 그를 밀어주고 있던 운씨세가와의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뜻과도 다르지 않았다.

쉽게 말해, 이제 노골적으로 첫째인 선우성을 가주로서 밀어주겠다는 얘기였다.

그러자 얼굴이 창백해진 연하의 친모, 다섯째 운 부인이 말을 더듬으며 반대하려 했다.

“사, 상공! 그, 그것은 불가한 일입니다! 저는 결코…!”

하지만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선우중의 시선에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선우중이 부인이 아닌 외인을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얼어붙은 그녀에게 선우중이 나지막이 물었다.

“불가하다? 지금 가주인 내 결정에 반대하겠다는 얘기로구려. 아마 반드시 그 이유를 제대로 밝힐 수 있어야 할 거요, 부인.”

경고가 담긴 그 차가운 말에 운 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침만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선우중이 둘째 선우혁과 하 부인을 망설임 없이 쳐냈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는 더 이상 부인들에게 휘둘리는 우유부단했던 남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그건….”

그녀가 하얗게 질려 말을 잇지 못하자, 선우중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넷째 부인인 서 부인에게 물었다.

“혹시 부인도 내게 할 말이 있으시오?”

그러자 그의 기세에 이미 겁에 질려 있던 서 부인은 그저 세차게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그때 첫째인 곡 부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선우세가의 일을 가주께서 결정하시는데 어찌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소첩은 가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선우중은 그 후에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가족들을 주욱 쓸어 봤다.

그리고 선우성과 곡 부인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개양문에 기별해 연하와 어울릴 만한 훌륭한 청년을 좀 찾아 달라고 하시오. 가능하면 빠르게 진행하고 싶다고 말이오.”

그 당부에 두 사람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예, 아버지! 바로 기별하겠습니다!”

“예, 상공!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예쁜 연하와 어울릴 만한 훌륭한 청년을 찾을게요.”

말을 마친 선우중은 그대로 축객령을 내렸다.

“그럼 다들 돌아가 봐도 좋소. 아침부터 걸음 하게 해서 미안하구려.”

말의 내용은 부드러웠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더 이상 들을 얘기도, 해 줄 얘기도 없으니 그만 나가라는 뜻이었다.

결국 가족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주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친모에 의해 가주실에서 멍하니 이끌려 나온 선우연하는 완전히 망연자실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혼인에 관한 얘기였건만, 아버지 선우중은 자신의 의사를 묻기는커녕 얼굴 한 번을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한마디도 해 보지 못하고 가주실에서 나온 그녀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셋째 오빠 선우진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연하가 드디어 혼인을 하는구나! 축하한다, 연하야! 원래 내 친구 하상과 혼인을 시키고 싶었는데, 하상이 죽어 혼인을 못 하게 돼서 너무 미안했는데 드디어…. 정말 축하한다, 연하야!”

그렇게 말하는 선우진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듯했다.

선우연하는 그런 그가 너무 어이없었지만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반박할 기운도 없었다.

그녀는 선우진의 말을 무시한 채 슬픈 눈빛으로 넷째 오빠인 선우기를 바라봤다.

그러자 어두운 표정의 선우기가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그녀를 외면했던 것이었다.

눈앞이 뿌예져 오고 있었다.

선우연하는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그녀의 입은 주문을 외우듯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절대, 절대로 이렇게 다른 남자와 혼인할 수는 없어. 내가 개양문 따위에 시집갈 것 같아? 흥! 절대 안 가. 절대!”

선우연하의 마음은 아주 어려서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인 운 부인이 선우기의 어머니인 서 부인과 힘을 합치기로 하며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던 순간부터 말이다.

‘선우세가에서 여기 있는 우리만이 진짜 같은 편이란다. 그러니까 연하 너는 여기 기 오라버니와 사이좋게 지내렴. 우리가 기에게 힘을 더해 주면, 기는 우리를 선우세가의 진정한 주인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말이다. 이제 우리는 운명 공동체, 그러니까 한 몸이나 다름없단다.’

아직 어렸던 그녀에게 운명 공동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이해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선우기가 자신에게 있어서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말이다.

그 후로 선우연하는 자신이 당연히 선우기와 혼인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적어도 같은 형제끼리는 혼인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선우연하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그녀가 결국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 오라버니와 혼인할 수 없어? 그럼 혼인 안 하면 되지. 혼인만 안 하고 영원히 같이 있으면 되는 거잖아? 내가 기 오라버니를 선우세가의 가주로 만들어 주고 그 옆에 있겠어. 기 오라버니의 부인? 흥! 혼인하라고 해. 죽여 버리면 되니까.’

이것이 그녀가 찾아낸 해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비현실적인 답도 아니었다.

어차피 선우기가 가주가 되기 위해서도, 또 그 이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의 외가인 서기당의 힘만으론 부족했으니까 말이다.

선우기가 가주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운씨세가의 힘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그가 선우연하와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가주가 된 이후에도 계속 그럴 것인지까지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말이다.

선우연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후, 감춰 뒀던 전서구가 든 새장을 꺼내 방과 이어진 뒤뜰로 나갔다.

예전에 운씨세가의 가주이신 외조부께서 긴급하게 연락을 넣을 때 쓰라고 주셨던 비밀 전서구였다.

그리고 그녀는 예전에 딱 한 번 이것을 써 본 적이 있었다.

그녀가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잘 부탁해.”

마치 소원을 빌 듯 그렇게 중얼거린 선우연하는 전서구를 힘껏 하늘로 날려 줬다.

푸드득!

그때였다.

타닥!

그녀의 뒤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

선우연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 전서구를 가지고 있다는 건 예전부터 비밀이었다.

게다가 요즘 같은 시기엔 더더욱 비밀로 해야 한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하씨세가와 내통하다 처형당한 삼 장로나 신응이대주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하지만 홱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그저 서책 한 권이 탁자에서 떨어져 있는 모습뿐이었다.

선우연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

그리고 다시 하늘을 바라봤을 때 전서구의 모습은 이미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그새 날아가 버린 모양이었다.

선우연하는 잠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예전에도 그랬듯 그녀의 외조부가 이번에도 해답을 찾아 주실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

선우진은 선우연하의 방문 밖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빙긋이 웃음 지은 그는 몸을 돌려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숙소로 천천히 돌아가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선우진은 종종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는 했었다.

가족들의 계속된 멸시와 고립된 자신의 처지에 앞이 막막할 때도, 스스로 선택한 바보짓이 너무 한심해 눈물이 날 때도, 유일한 친구를 잃고 심지어 그 친구를 죽였다는 누명을 썼을 때도 그랬다.

그가 문득 중얼거렸다.

“집에서 올려다본 하늘빛이 원래 저랬었군.”

새하얀 구름도, 푸른 하늘도, 너무나 익숙한 것이 당연할 텐데도 오늘따라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고 있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선우진은 문득 시선을 저 앞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무거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며 걷고 있는 제갈서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암습 사건 이후로, 정확히는 청연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던 이후로 한 번도 밝은 표정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야 밝은 표정을 짓고 웃기도 했지만, 그게 억지로 만들어 낸 표정이라는 건 그녀에게 소식을 전했던 선우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제갈서율 또한 문득 고개를 들다가 선우진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가 흠칫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선우… 공자?”

하지만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선우진은 그녀가 떨리는 눈빛으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그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그녀를 지나쳐 갔다.

그러자 제갈서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설사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선우진은 발걸음을 멈칫하고는 그녀를 돌아봤다.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저는 고작 가솔에 불과하고 아버지는 제갈세가를 이끄시는 가주이신데요! 선우 공자도 저와 마찬가지 아닌가요?!”

선우진은 잠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주가 결정했으면 가솔들은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건, 무림세가의 자제들이 갖는 일반적인 생각이기는 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아 왔을 테니까 말이다.

그나마 저렇게 고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갈서율이 꽤 착한 성품을 가졌다는 건 알 것 같았다.

해청연을 진짜 좋은 친구로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아마 그녀는 지금 자신의 아버지가 진짜 해청연을 죽였는지를 확인하는 것조차 두려울 것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된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선우진은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통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주범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자들은 공범이라고 부른다더구려. 그걸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제갈 소저의 선택이란 뜻이겠지요. 잘 알겠소.”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의 등 뒤로 이를 악문 제갈서율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잘 났다고 나를 비난하는 거죠?! 후계 싸움에서 밀리고 친구를 죽여 전선이나 가게 된 패배자 주제에!”

하지만 그녀의 외침에도 선우진은 더 이상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저 무심하게 걸어갈 뿐이었다.

그런 선우진의 뒷모습에, 씨근거리며 그를 바라보던 제갈서율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

귀양제일루 사 층.

귀양제일루의 루주이자 하오문 귀양 지부의 지부장인 노삼룡은 선우진으로부터 온 서신을 확인하고는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대단하군, 대단해. 선우 삼 공자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

그가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건데?”

그러자 깜짝 놀란 노삼룡이 홱 뒤를 돌아봤다.

분명히 아무도 없었던 곳에서 또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지난번에도 선우진으로부터 그런 일을 당하고 고까지 삼켜야 했던 노삼룡은, 이제 뒤에서 누가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것에 공포증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그는 고개를 홱 돌려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십 년 감수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버럭 소리를 질렀다.

“후아아아, 아, 기척 좀 하고 다녀!”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여인이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난 기척을 숨긴 적이 없는데? 네가 못 느껴 놓고 왜 나한테 지랄이지?”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눈매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외모는 많아 봐야 삼십 대 중반이나 됐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십 대인 노삼룡에게 편하게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노삼룡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다시 소리쳤다.

“지금 무위 좀 높다고 유세 부리는 거냐?! 가뜩이나 네년 때문에 심란해 죽겠건만! 그리고 내가 나오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네가 지금 남들 눈에 띄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기어 나온 거냐?!”

“에이, 딱딱하게 왜 그래? 우리 둘밖에 없는데? 여기 남들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녀의 능청스러운 말에 노삼룡이 이를 악물고 말을 내뱉었다.

“너 증말 나 죽는 꼴 보려고 그러냐?”

그러자 그녀는 처연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나도 답답해서 그래. 이렇게 맨날 혼자 숨어만 있다가는 놈들에게 안 죽어도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단 말이야.”

하지만 그녀의 처연한 표정에 잠시 흠칫했던 노삼룡은 이내 다시 인상을 팍 찡그리며 사납게 윽박질렀다.

“당장 표정 안 풀어?! 어디서 불쌍한 척 여우 짓이야?! 내가 네년 연기에 속을 줄 알아?!”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금세 다시 장난기로 가득 찼다.

“에이, 안 통하나? 우리 삼룡이, 예전엔 참 순진했는데, 너무 때가 탔어.”

“흥!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냐? 그리고, 내가 아무리 때가 탔어도 네년만 할까?”

노삼룡은 여인에게 계속 화를 냈지만 그럼에도 딱히 진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여인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방금의 말에는 여인도 문득 씁쓸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래, 내가 때가 좀 많이 타긴 했지.”

씁쓸히 중얼거리는 여인의 읊조림에 노삼룡은 살짝 ‘아차!’ 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흠, 흠. 그래, 뭐. 많이 심심했냐? 여기까지 기어 나오고?”

말을 돌리려는 의도가 눈에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여인은 그냥 빙긋이 웃고는 그의 의도에 맞춰 줬다.

“그래, 엄청 심심하더라. 무슨 얘기라도 좀 들었으면 싶을 정도로. 그래서, 그 선우 삼 공자라는 녀석이 너한테 고를 먹였다는 걔지? 그 제갈세가를 핑계로 형제들 싸움을 붙여서 하씨세가를 잡아먹었다는 녀석. 걔가 또 뭘 어쨌다는 건데?”

그러자 노삼룡은 자신의 의도가 통한 것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것 봐. 선우 삼 공자의 요청인데 운씨세가 쪽에 정보를 흘려 달라는 거야. 가주 선우중이 다섯째 선우연하를 개양문의 자제와 혼인시키기로 결정했다는 정보를 말이야.”

그 말에 여인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딸을 혼인시키겠다? 다섯째면 운씨세가랑 이어진 아이였지, 아마? 그럼 운씨세가의 세력을 선우세가에서 완전히 축출하겠다는 뜻인가?”

그러자 노삼룡이 흥분한 듯 고개를 저으며 열성적으로 대답했다.

“그것만이 아니지. 개양문은 첫째 선우성 공자의 외가거든. 표면적으로만 보면 첫째 선우성 공자에게 힘을 더 실어 주겠다는 의미가 되는 거란 말이지.”

“흠, 그렇겠네. 근데… 표면적으로라고?”

“그래, 표면적으론 그렇지. 그런데! 그 정보를 운씨세가에 흘려 달라고 했단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겠어? 더군다나 혼인 상대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 개양문의 청년이라고 뭉뚱그려진 상태에서?”

“…운씨세가로 하여금 개양문을 공격하게 하겠다? 그것도 혼인 상대를 특정할 수 없으니 암살을 선택할 수도 없을 테고. 게다가 그 녀석 운씨세가가 혈교에 먹혔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했잖아? 그럼…?”

여인의 추리에 노삼룡이 주먹과 손바닥을 따악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첫째와 다섯째의 세력을 상잔시킬 셈인 게지. 정확히는 개양문이 혈교놈들의 상대가 될 리 없으니 개양문을 끝장낼 셈일 테고.”

“…동시에 혈교 놈들도 밖으로 끌어내고?”

“그렇지!”

거기까지 들은 여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스물한 살이라고 하지 않았나? 근데 절정 이상의 무위에다 그런 심계까지 갖추고 있단 말야?”

“그렇다니까! 그러니 내가 무섭다고 안 하겠어?!”

노삼룡의 말에 한숨을 내쉰 여인이 문득 중얼거렸다.

“역시 세상은 넓구나. 정파에도 구유상 그놈 같은 후기지수가 있었다니.”

그녀의 말에 노삼룡이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

“그 구유상이란 놈이 그렇게 뛰어난가? 선우 삼 공자와 비견될 정도로?”

그러자 그녀가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놈이 뛰어나냐고? 말도 못 하게 뛰어나지. 이십 대의 나이에 내공 구십 년의 경지에 도달한 무위도 놀랍지만, 놈의 외모와 심계는 그보다 더 놀랍거든. 물론 그 독사 같은 심성도 그렇고 말이야. 아마 놈이 다음 대 혈마가 된다면 모르긴 몰라도 지금의 혈마보단 훨씬 더 무서운 존재가 되고 말걸?”

그녀의 말에 노삼룡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아는 그녀는 누굴 잘 칭찬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런 극찬이라니, 직접 안 봐도 구유상이란 자의 무서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좀 걱정이야. 선우진이란 놈의 심계는 분명 뛰어나지만, 구유상이란 놈이 거기에 쉽게 말려들 놈이 아닐 테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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