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흡혈마호-1
바로 다음 날, 선우세가의 사람들은 개양문으로 출발했다.
그 인원은 선우성과 선우진, 선우연하의 남매들과 제갈세가의 제갈서율, 제갈지용을 비롯한 무사들 삼십여 명이었다.
제갈서율은 제갈지용, 선우성, 선우연하와 함께 마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원래는 선우진도 함께 마차를 타고 가야 했지만, 그는 자신이 전선에 가서 얼마나 잘 달리게 됐는지를 보여 준다며 밖에서 뛰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선우성과 선우연하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갈 소저, 개양문 근처에 음식을 기가 막히게 하는 곳들을 제가 다 꿰고 있습니다.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천상의 맛을 느끼게 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렇군요.”
제갈서율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쉴 새 없이 말을 걸고 있는 선우성에게 대충 대꾸해 줬다.
푼수같이 밝아 보이는 그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안색이 좋지 않은 선우연하도 함께 있기 곤욕스러웠다.
‘나도 밖에 나가서 뛰어가겠다고 해야 하나?’
제갈서율은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선우진이 있었다.
요즘 들어 이상하게도 시선이 닿는 곳에 우연히 선우진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그가 자신의 시선이 향하는 곳 주변을 맴도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제갈서율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맴도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기까지 생각하던 제갈서율은 문득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걸 인정해 버리기엔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제들과 싸우기 싫다는 이유로 실력을 숨기고 패배자 놀이나 하고 있는 한심한 남자, 제갈세가와 나를 존중해 주기는커녕 무슨 사파처럼 취급하는 무례한 남자. 심지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속이 시커먼 남자 같으니.’
그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런 생각을 하며 제갈서율은 선우진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선우성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갈 소저, 표정이 좋지 않으시군요. 여행이 많이 힘드십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제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제갈서율은 피곤한 척 대답했다.
“조금 피곤하네요. 도착하면 좀 쉬어야겠군요.”
그러자 그녀의 말에 선우성은 조금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피곤하시면 그러셔야죠. 좀 괜찮아지시면 제가 최고의 음식점으로 모시겠습니다.”
제갈서율은 내심 계속 아픈 척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진의 도발(?)에 넘어가 개양문으로 온 것이 벌써 후회스러워지고 있었다.
***
혈교의 고수인 흡혈마호 노조송이 개양문 인근에 도착했을 때는, 선우세가의 일행이 막 개양문으로 들어간 직후였다.
노조송은 언덕 위에서 개양문을 바라보며, 자신을 따라온 다섯 명의 절정 고수와 삼십여 명의 무사들에게 말했다.
“공자의 명령을 명심해라. 선우세가의 선우성이라는 놈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리고 선우연하라는 여아는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그때 혈교의 절정 고수 한 명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노조송이 만면에 탐욕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머지? 크흐흐흐, 이상한 걸 묻는구나. 공자께서 언급하시지 않으셨으니, 그냥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크흐흐흐.”
그의 대답에 혈교의 무인들도 모두 탐욕스럽게 웃음 지었다.
“으흐흐흐, 역시 마호십니다.”
“마호 님과 함께 오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아부에 노조송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너무 좋아할 것 없다. 가장 맛있는 피는 내가 마실 테니까.”
“으흐흐흐, 저희는 마호 님께서 드시고 남기신 찌꺼기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흡혈마호 노조송은 내공 구십 년을 넘어 초절정을 엿보는 고수로 이름을 떨치는 마두였다.
하지만 그는 사실 무공 실력보다는 다른 것으로 더 유명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식성이었다.
그는 실제 흡혈을 즐기는 흡혈 마두였던 것이다.
그것도 매 끼니 피를 흡입하지 않으면 식사를 할 수 없을 만큼이나 흡혈 중독자이기까지 했다.
노조송은 바로 잠시 후에 맞이할 만찬을 상상하며 입가에 흘러내리는 침을 닦았다.
“으흐흐흐, 맛있는 피들이 많이 있으면 좋겠군. 자, 얘들아, 식사하러 가자!”
“오오오오!”
혈교의 마두들은 괴성을 지르며 개양문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
“크아아악!”
“으아아악!”
콰아아아앙!
처절한 비명 소리와 정문이 폭발하듯 부서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때 개양문의 문주는 개양문 무인들을 연무장에 도열시킨 채 막 선우세가의 일행들을 맞이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그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귀한 손님들이 오셨는데 이게 무슨 소란이냐?!”
하지만 부서진 정문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노조송과 혈교인들은 그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살기가 진득하게 흐르는 웃음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그들이 불청객임을 깨달은 개양문주는 도열해 있던 백여 명의 무인들에게 명령했다.
“감히 우리 개양문의 정문을 부수고 들어오다니! 모든 개양문도들은 저 악적들을 잡아라!”
“예! 알겠습니다!”
백여 명이 합창하듯 소리친 우렁찬 대답이 울려 퍼지고, 개양문의 무사들은 바로 적들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그러자 귀엽다는 듯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노조송이 침이 잔뜩 묻은 입술을 혀로 핥고는 소리쳤다.
“자! 만찬이다!”
그의 외침과 함께 혈교도들이 맹수처럼 튀어 나갔다.
“크하하하하하!”
“이히히히!”
“다 죽여라!”
개양문은 귀주팔세에는 속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귀주성 개양 지역에서는 최강을 자랑하는 중급 문파였다.
특히 그들의 무력대인 백여 명의 흑오대는 무림 어디에 내놔도 떨어지지 않는 최정예 무인들이란 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내공 구십 년을 넘은 마두 노조송과 다섯 명의 절정 고수, 삼십여 명이 넘는 일류 상급 이상의 혈교도들을 상대로는 그저 오합지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노조송이 달려오는 그들의 정면으로 뛰어들며 호조수를 휘둘렀다.
“크하하하하!”
푸하악!
“끄아아아악!”
“끄어어어억!”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개양문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돌처럼 굳어졌다.
한 번의 호조수에 무려 다섯 명의 몸이 한꺼번에 끊어져 버렸던 것이었다.
무사들의 몸이 갈라진 건지 분쇄된 건지조차도 구분이 가지 않는 처참한 상흔이었다.
그리고 노조송이 피를 마시기 위해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시신 한 구의 떨어진 팔을 들고 태연히 자신의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그의 뒤에서 튀어나온 다섯 명의 절정 고수들이 흑오대 무사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푸화악!
“크하아악!”
촤하악!
“끄어억!”
그것은 학살이었다.
마치 양 떼 사이로 뛰어든 다섯 마리의 늑대들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들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다섯 명의 절정 고수에게 학살당하고 있던 그들의 측면을 서른 명의 혈교도 무사들이 다시 들이받았던 것이었다.
푸화악!
“크아아악!”
“으아아아악!”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개양문주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창백해지고 말았다.
이건 지나치게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이대로라면 일각도 지나기 전에 백 명의 흑오대가 모두 전멸당하고 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뛰어들겠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절정의 경지도 밟지 못한 자신으로선 저들 중 한 명조차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대, 대체 어디서 저런 자들이…?!”
개양문주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선우세가의 일행들도 순식간에 벌어진 참상에 당황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행의 인솔자라고 할 수 있는 선우성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때였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최고수라고 할 수 있는 제갈세가의 장로 제갈지용이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자는 설마… 흡혈마호?”
그의 눈은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태연스럽게 시신들을 찾아다니며 피를 찍어 먹어보고 있는 털북숭이 남자에게로 못 박혀 있었다.
누렇고 검은 털이 뒤섞인 체모와 장대한 체격의 호랑이 눈, 맛있는 음식을 맛보듯 피를 탐하는 모습까지.
그는 혈교의 마두 흡혈마호 노조송임에 틀림없었다.
제갈지용이 선우성에게 황급히 외쳤다.
“선우 소협!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어서 무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게! 저들은 혈교의 마두들이란 말일세! 어서!”
그러자 깜짝 놀란 선우성이 황급히 명령했다.
“네, 네?! 아, 예! 알겠습니다! 선우가의 무사들은 뭐 하느냐?! 어서 모두 흑오대를 돕도록 해라!”
“예? 아, 알겠습니다!”
선우세가의 무사들 또한 눈이 있으니 죽을 게 뻔한 자리로 기어들어 가고 싶지는 않았다.
적도들의 놀라운 무위에 그들 또한 질려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사이 제갈지용은 바로 제갈서율에게 전음을 보냈다.
- 서율아! 잘 들어라! 지금 저들이 시간을 벌어 주는 사이 우리는 당장 빠져나가야만 한다!
그러자 제갈서율이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선우가의 무사들에게는 싸우라고 말해 놓고 우리들끼리만 빠져나가자니, 그녀에게는 너무 상식 밖의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네, 네?! 하, 하지만!”
너무 놀라 전음이 아닌 육성으로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제갈지용은 다시 전음을 날려 그녀를 독촉했다.
- 대제갈세가의 금지옥엽인 너와, 장로인 나의 목숨값이 이들과 같을 수는 없다! 빨리 빠져나가지 못하면 기회를 놓치게 된다! 어서!
그의 재촉에 제갈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선우진을 찾았다.
그런 짓을 한다면 안 그래도 제갈세가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는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무의식적으로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돌려 그를 찾았던 제갈서율은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없다는 걸.
선우진, 그의 모습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 무슨?!’
주변 어디에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샌가 이미 도망쳐 버린 후였던 것이다.
“하!”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주범이 어쩌고 공범이 어쩌고 얘기하던 자가 이렇게 가족들과 동료들을 버리고 순식간에 내뺐다고?
실망이 너무 커서 절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때 제갈지용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뭐 하느냐, 서율아! 어서…!”
제갈서율은 그의 호통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크헤헤헤헤! 졸라 예쁜 계집이다!”
혈교도 한 명이 그녀에게로 덮쳐 오고 있었다.
휘둘러 오는 철조에 붉은 강기가 서려 있는 모습, 절정 고수였다.
“이익!”
제갈서율은 이를 악물고 발검했다.
슈하악!
그러자 옥색의 검강이 흐르는 검이 마두의 철조와 부딪쳤다.
쩌어엉!
“호오?! 절정이라고?!”
단숨에 제갈서율의 검을 부수고 그녀를 잡으려 했던 마두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정뿐, 그의 철조는 바로 질풍처럼 날카롭게 휘둘러지며 다시 그녀를 덮쳐 가고 있었다.
그러자 제갈서율 역시 침착하게 검초를 펼쳤다.
팔진검법 일 초
출사표
슈하악!
채채채채챙!
옥색의 검강이 철벽을 쌓듯 그어지며 마두의 맹공을 모두 막아 냈다.
화려한 공격력은 모자라지만 견고함만큼은 무림일절이라는 평가를 받는 제갈세가의 팔진검법이었다.
그러자 마두는 자신의 공격이 모두 막혔음에도 신이 난 듯 광소를 터트렸다.
“으헤헤헤헤! 재밌다, 재밌어! 우리 계속 놀아 보자꾸나!”
그러곤 바로 다시 제갈서율에게 철조를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럴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푸화악!
“끄에에엑!”
뒤에서 습격한 제갈지용의 일격에 그대로 고혼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마두를 죽인 제갈지용이 다시 급히 외쳤다.
“서율아! 어서…!”
하지만 그의 의도는 이번에도 성공할 수 없었다.
“이이하!”
“죽어랏, 늙은이야!”
다른 절정 고수 두 명이 제갈서율과 제갈지용에게 각각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압!”
“감히!”
채채채채챙!
마두는 절정 초입의 고수로 보였지만, 제갈지용은 내공 팔십 년의 경지를 넘어선 제갈세가의 손꼽히는 실력자였다.
그런 제갈지용의 검이 고작 절정 초입의 마두 한 명을 격살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할 리 없었다.
푸화악!
“끄아아아악!”
자신에게 무모하게 달려든 마두를 어렵지 않게 죽인 제갈지용은 다시 제갈서율을 바라봤다.
그녀는 얇은 쌍도를 든 마두와 막상막하의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하아아아압!”
“이이하!”
채챙! 채채챙! 채챙!
제갈지용은 서둘러 그녀를 도우려 했다.
어서 그녀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막 그녀에게로 몸을 날리려던 그는 갑자기 뒷목을 스치는 섬뜩한 느낌에 황급히 뒤로 몸을 날려 피할 수밖에 없었다.
파박!
그러자 다음 순간 그가 있던 곳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제갈지용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지면이 폭발하듯 터져 나가고 있었다.
제갈지용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폭발을 만든 자를 바라봤다.
단 한 번의 일격만으로 땅에 큰 구덩이를 만들어 버린 건장한 털북숭이 사내, 그는 바로 흡혈마호 노조송이었다.
피를 맛보느라 정신이 팔린 줄 알았던 그가 제갈지용을 직접 상대하러 왔던 것이었다.
노조송은 움푹 팬 구덩이에서 고개를 들며 탐욕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의 입에는 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으흐흐흐, 꽤 강한 늙은이로구나. 늙었어도 피는 꽤 맛있겠어.”
“…노조송.”
제갈지용은 이를 악물었다.
벌써 그가 여기까지 와 버리다니….
낭패였다.
물론 제갈지용 자신도 내공 팔십 년의 벽을 넘은 제갈세가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이긴 했다.
하지만 상대는 수준이 달랐다.
그는 초절정을 바라보고 있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좀 받아야….’
제갈지용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어봤다.
그러자 이제 곧 얼마 후엔 괴멸되어 버릴 것 같은 개양문과 선우세가의 무사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개양문주와 개양문의 장로들, 선우성까지 합세해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기는 하지만 모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돌리자, 자신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절정의 무인인 제갈서율은 다른 절정의 마두 한 명과 막상막하로 싸우고 있었다.
결국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던 것이다.
제갈지용의 마음이 점점 급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도주해야….’
하지만 그것 또한 이미 불가능한 상태였다.
도주를 생각하고 후방을 슬쩍 바라본 제갈지용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두 명의 마두들이 자신의 후방에 선 채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심지어 두 명 다 절정의 경지로 보이는 자들이었다.
아마 퇴로를 막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제갈지용은 이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눈앞의 흡혈마호와 싸워 이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제갈지용은 이제 막막해진 눈으로 노조송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제 눈은 다 굴렸느냐? 그럼 어디 피를 시식해 볼까?”
노조송의 눈빛은 이미 자신을 피를 빨 대상으로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갈지용은 그 짐승 같은 눈빛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실전을 그리 많이 치르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 역시 내공 팔십 년 이상의 고수, 제갈세가의 장로였다.
기세에서부터 밀려 버린다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제갈지용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이 짐승 같은 놈! 제갈가의 검을 보여 주마!”
그리고 바로 몸을 날려 선공했다.
“하아압!”
슈하아악!
하지만 그의 사력을 다한 검격은 노조송이 후려친 호조수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터어어어엉!
제갈지용의 검이 세차게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마치 물컹한 가죽 공과 부딪친 듯한 거센 반탄력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승부의 추는 기울고 말았다.
제갈지용의 튕겨 나간 검은 하나였지만, 노조송의 팔은 튕겨 나간 것을 제외해도 하나가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조송은 자신의 오른손이 튕겨 나가자 왼손의 호조수를 바로 휘둘렀다.
“으하하하하하! 이것도 간다!”
부아아앙!
“으윽!”
신법이 비슷한 무인끼리의 정면충돌에서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절대 금물이었다.
상대의 기세를 그대로 살려 주는 동시에 자신이 그 공격 범위에서 벗어날 수도 없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제갈지용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기세를 탄 노조송의 호조수가 점점 더 거세게 휘몰아쳐 오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하! 쥐새끼 같구나!”
터텅! 텅! 터터텅!
제갈지용은 간신히 노조송의 호조수를 막아 내며 정신없이 뒷걸음질 쳤다.
손도 머리도 점점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이대론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이 점점 암담해졌다.
자신이 이대로 쓰러진다면 조카인 제갈서율마저도 끝장일 텐데….
아니, 오히려 자신보다 더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끔찍한 미래가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의 눈이 절망의 빛으로 가득 찼다.
‘이대로 끝인가?’
그때였다.
“키하하하하하하!”
문득 어디선가 괴이한 광소 소리가 들려왔다.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약간 아찔해지는 사이한 음공이었다.
그 범상치 않은 웃음소리에 전투를 벌이던 사람들의 시선도 모두 소리가 들린 쪽으로 쏠렸다.
그러자 그들의 시선이 향한 담장 밖에서부터 푸른 옷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괴인이 유성처럼 날아들었다.
그가 다시 웃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키하하하하하! 귀주 제일의 악인들아! 청홍쌍검께서 오셨다!”
사천성 이후 오랜만의 등장한 창백한 얼굴의 청의괴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