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흡혈마호-2
청홍쌍검?
어디서 들어 보지도 못한 괴이한 별호에, 쌍검이라고 해 놓고 혼자서 검 한 자루만 달랑 들고 있는 이상한 괴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이상함을 따져 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그가 순식간에 혈교의 무사들 사이로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혈교도들이 폭발하듯 튕겨 나갔다.
푸하아아악!
“크아아아악!”
“으아아아악!”
그 괴인은 이제 유령과 같은 움직임으로 혈교도들 사이를 무인지경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그의 주변으로 혈교도들이 피를 뿌리며 튕겨 나갔다.
마치 그의 뒤로 피로 만들어진 통로가 형성되고 있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자 선우세가의 무인들을 죽이고 있던 절정의 마두 한 명이 다급히 그에게 달려들며 대도를 휘둘렀다.
“이놈!”
부아아앙!
바위라도 쪼갤 듯한 강맹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 강력한 일격이 날아오고 있음에도 괴인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저 바람처럼 부드럽게 움직여 날아오는 도의 옆으로 살짝 비켜 지나갔을 뿐이었다.
샤아악!
푸학!
그리고 그가 지나간 뒤 마두의 목이 피를 뿜으며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아무리 초입이라곤 하지만 절정 고수가 단 한 합의 부딪침만으로 너무도 어이없이 격살당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
그러자 그를 보고 있던 노조송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방금 본 장면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고수도 상대의 무기를 저렇게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지는 않았다.
목숨이 여러 개라면 모를까. 찰나의 시간, 약간의 계산 착오만으로도 바로 죽을 수 있는 저런 행동은 거의 자살행위와도 같았던 것이다.
그러니 저런 짓을 할 수 있다는 건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노조송이 씹어뱉듯 소리쳤다.
“미친놈!”
놈은 미친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상대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보고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데, 노조송은 저자가 절정 고수의 움직임을 완벽히 파악해서 종이 한 장 차이로 반응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노조송은 이제 자신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들고 있는 괴인을 향해 호조수를 휘둘렀다.
“죽어라, 이 미친놈아!”
부아아아앙!
노조송의 맹수 같은 일격이 괴인에게 작렬하려는 순간, 달려들던 괴인의 신형이 갑자기 직각으로 꺾였다.
관성을 무시하는 듯한 움직임, 오히려 방향이 바뀌며 급가속해 버린 불가해한 움직임이었다.
파앙!
“!”
경악한 노조송의 시선이 뒤늦게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러자 그는 바로 괴인의 표적이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위험…!”
샤아악!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에 노조송은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
제갈서율은 쌍도를 든 마두와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던 중이었다.
무위는 그녀와 비슷한 자였지만 어째서인지 점점 밀리고 있는 상황.
첫 실전의 부담감과 상대의 탐욕스러운 눈빛이 제갈서율을 점점 움츠러들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심했다.
그토록 많은 대결을 벌였었건만, 목숨을 건 실전이라는 것은 이렇게도 달랐던 것이다.
“하아압!”
기합을 내지르며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아 보려 했다.
하지만 옆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몰리고 있는 숙부의 모습에 그녀는 좀처럼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제갈지용은 그녀가 알고 있는 제갈가 최고의 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런 숙부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농락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끝장이었다.
이젠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이렇게 죽는 건가?’
그녀의 눈이 그렇게 절망으로 가득 찼을 때였다.
샤아악!
킬킬킬 웃으며 자신에게 쌍도를 휘두르려던 마두의 뒤로 빛줄기 하나가 스치듯 지나갔다.
“?!”
처음엔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잘못 본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웃고 있던 마두가 갑자기 뒷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푸화악!
털썩!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져 버린 마두의 시신을 멍하니 바라봤다.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창백한 얼굴의 청의 괴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숙부와 흡혈마호 노조송, 후방을 지키고 있던 마두 두 명도 모두 경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괴인이 오만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목숨을 건졌으면 가서 다른 무사들이라도 도와줘야 할 것이 아니냐? 언제까지 넋을 놓고 있을 거지?”
“네, 네? 아, 네!”
퍼뜩 정신을 차린 제갈서율은 아직 격전을 치르고 있는 무사들에게로 황급히 달려갔다.
하지만 달려가던 그녀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그를 돌아봐야 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에 처음 듣는 목소리인 것이 틀림없는데, 어쩐지 그의 눈빛과 체형이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 괴인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이번엔 제갈지용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살려 줬더니 얼빠져 있는 것이 똑같구나! 네놈들 가문의 특징이라도 되는 것이냐?!”
그러자 퍼뜩 정신을 차린 제갈지용이 당황해 되물었다.
“예? 아, 무, 무슨…?”
“저놈과 싸울 능력이 안 되면 저놈들이라도 맡아서 처리해야 할 것이 아니냐?!”
제갈지용은 그가 말하는 저놈들이라는 것이 후방을 지키고 있는 마두들을 가리킨 것이라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도 저 괴인이 노조송과 맞상대할 모양이었다.
제갈지용으로선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서둘러 포권하며 대답했다.
“알겠소, 대협! 그럼!”
제갈지용은 바로 후방의 마두들을 덮쳐 갔다.
“이놈들!”
슈하아악!
흡혈마호 노조송은 자신이 상대하던 제갈지용이 다른 곳으로 가고 있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맹수 같은 눈은 오직 괴인에게만 집중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목을 뚜둑 꺽고는 희미하게 웃음 지은 괴인이 그에게 말했다.
“자, 시작해 볼까?”
***
나는 목을 뚜둑 꺾으며 다시 전의를 끌어올렸다.
원래는 상대가 될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놈은 현재 초절정을 눈앞에 둔 상태, 그에 반해 내 무위는 아직 내공 팔십 년의 벽을 뚫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내가 한 단계 위의 상대들과 싸워 꽤 이겨 보긴 했지만, 그래도 두 단계 위의 고수와 싸우는 건 확실히 선을 넘은 짓이었다.
아마도 자살행위, 비명횡사하기에 딱 적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내가 만약 월하환검무를 익히지 않았었다면 말이다.
사납게 웃으며 놈에게 말해 줬다.
“자, 시작해 볼까?”
그러곤 바로 월하환검무를 발동했다.
월하환검무 일 식
비월
그러자 순간 세상이 뒤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현실이었던 세상에 마치 꿈결 같은 장막을 덮어씌운 듯 몽환적인 느낌.
그 속에서 나는 다시 전능한 존재가 되어 서 있었다.
그때 노조송이 먼저 달려들었다.
맹호가 덮쳐 오듯 위협적인 기세였다.
하지만 나는 빙긋이 웃으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덮쳐 오는 놈의 속도가 순간 달팽이처럼 느려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놈이 휘둘러 오는 호조수의 괴적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까 다른 놈에게 했듯이 놈의 공격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들어 찌르는 쪽을 택했다.
사일검법 일 초.
일시사일.
슈하악!
느려진 세상 속에서도 다른 것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속도의 검격이 휘둘러 오는 놈의 손목을 향해 쏘아졌다.
그러자 경악해서 천천히 부릅떠지는 놈의 눈이 보이고 있었다.
‘자, 팔부터 하나 떼어 내고 시작해 볼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역시 초절정을 바라보는 고수는 만만치 않았다.
놈은 그 촉박한 상황에서도 휘두르는 팔의 궤도를 살짝 바꿔 내 검격을 간신히 피해 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스으으윽!
내 검이 스쳐 지나가며 놈의 팔뚝이 천천히 갈라지고 있었다.
거기서 몽글몽글 올라오는 핏물이 공중을 떠다닐 때, 나는 힘껏 발로 땅을 밟으며 운동 방향을 바꿨다.
발목과 무릎, 골반에 부서질 듯한 거력이 느껴졌다.
으득!
하지만 이를 악문 나는 그 관성을 이겨 내고 이동 방향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몸을 휘돌리며 일시사일을 펼쳐 내던 검의 방향을 바꿔 옆으로 베어 낼 수 있었다.
***
샤아악!
푸화악!
“크으윽!”
옆구리가 깊게 베어진 노조송은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상대의 공세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괴인의 움직임은 너무도 불가해했다.
공격해 들어가는 손목을 노려 검을 찌르지 않나, 간신히 그것을 피했더니 말도 안 되는 움직임으로 빛살 같았던 찌르기를 바로 베기로 전환하지 않나.
그가 이제껏 알고 있던 상식과는 너무도 다른 움직임이었다.
마치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듯했다.
슈학!
괴인이 다시 유령처럼 접근하며 검을 찔러 오고 있었다.
“감히!”
가히 빛살 같은 검격이었지만 노조송은 호조수에 강기를 실어 그것을 쳐 냈다.
부우웅!
아니, 쳐 낸 줄 알았다.
마지막 순간 놈의 검이 갑자기 진로를 바꾸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슈학!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유연하게 자신의 호조수를 피한 검격이 가슴으로 찔러 오고 있었다.
이젠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경악한 노조송은 사력을 다해 모든 힘을 발산했다.
“흐압!”
화아악!
그러자 가슴이 막 꿰뚫리기 직전, 노조송의 온몸에서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설프지만 분명한 호신강기였다.
투웅!
가슴을 꿰뚫을 뻔했던 선우진의 검격이 노조송의 가슴에 살짝 닿았다 다시 튕겨 났다.
호신강기로 막아 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간신히 위기를 넘긴 노조송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내공을 소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죽지 않은 것이 어디인가.
그때였다.
호신강기의 반탄력에 한발 물러섰던 괴인의 눈빛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술에 취한 듯 몽롱해 보이던 아까와는 달리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집중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괴인의 검이 다시 한번 노조송을 찔러 왔다.
쉬이익!
퉁!
하지만 진지하게 바뀐 괴인의 분위기에 잠시 당황했던 노조송은, 빛살처럼 찔러 온 놈의 검이 다시 호신강기를 찌르고 튕겨 나는 것을 보고는 순간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뭐 하는 거냐?’
분명 아까보다도 더 빨라진, 빈틈을 노렸다면 충분히 위협적이었을 검격이었다.
근데 그런 검격으로 굳이 호신강기 위를 공격하다니.
게다가 그걸로 끝도 아니었다.
“후우우우.”
놈이 이번엔 심호흡을 내쉬며 다시 검을 찔러 넣을 자세를 잡고 있었다.
어떻게든 호신강기를 뚫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진짜 미친놈인가?’
노조송은 놈의 무모한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말릴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그래, 어디 한번 다시 와 봐라!’
노조송은 다시 양팔에 공력을 집중했다.
이번까지만 호신강기를 유지하다가 놈이 이번 공격을 실패하는 순간 바로 역공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죽어라, 미친놈!’
그 순간, 괴인의 검이 다시 빛살처럼 찔러 왔다.
노조송은 알 수 없었지만, 그 모습은 선우진의 기억 속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과 거의 닮아 있는 검격이었다.
푸우욱!
“커헉!”
양손을 벌려 놈을 후려치려던 노조송은 가슴에 느껴진 화끈한 통증에 그대로 힘이 풀려 버리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놈의 검이 노조송의 가슴을 관통해 있었다.
결국 호신강기를 뚫어 내고 자신의 가슴에 닿고 말았던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털썩!
검에 꿰뚫린 채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 버리고만 노조송이 한 맺힌 얼굴로 중얼거렸다.
“안 돼. 이렇게, 이렇게 죽다니, 내가, 내가 선우세가로 갔어야 했는데….”
그러고는 곧 숨을 거뒀다.
피를 즐기는 악명 높은 마두 흡혈마호 노조송의 최후치고는 무척 허무한 죽음이었다.
선우진은 깊은 호흡을 내쉬었다.
그간 수만 번을 찔러 왔던 자신의 찌르기가 드디어 벽을 깼음을 느낄 수 있었다.
흥분되어야 할 것이 당연하지만 그는 지금 다른 것을 생각하느라 그럴 새가 없었다.
노조송이 죽기 전에 중얼거린 마지막 한마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은 일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봤다.
그러자 제갈지용이 절정 초입의 마두 두 명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곧 승부가 날 것 같았다.
일반 무사들의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혈교 무사들 쪽은 아까 선우진에게 한 번 초토화당한 데다 이제 절정 고수도 없는 반면, 개양문과 선우세가 무사들 쪽엔 이제 절정 고수인 제갈서율이 참전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암중에서 적마혁과 견중 역시 그들을 지원해 주고 있었다.
적들의 일 차 목표였던 선우성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유 또한 그들 덕분이었다.
선우진은 적마혁과 견중에게 각각 전음을 보냈다.
- 나는 먼저 선우세가로 가 보겠다. 일을 마무리하면 따라오도록.
죽은 노조송의 마지막 말을 해석해 보건대, 아무래도 선우세가 쪽에도 적들이 가 있는 것 같았다.
파앙!
폭진보를 전개한 선우진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져 날아갔다.
선우세가 방향이었다.
그러자 혈교 무사들을 도륙하던 제갈서율은 문득 하늘로 날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매우 혼란스러워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