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염라혈승 축호탁-1
무념무상(無念無想).
몰아일체(沒我一體).
내가 월하환검무 비월의 상태로 천풍신법을 전개해 달리는 동안 느꼈던 것들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걱정도, 늦을지도 모른다는 조급함도 모두 지운 채 오직 바람처럼 달리겠다는 한 가지 생각에만 집중하자, 어느새 나는 정말 바람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내 몸의 무게감도, 육신이 주는 존재감도, 심지어 시간이 흘러가는 느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자유로운 부유감 속에서 유체처럼 흐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선우세가의 현판을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극에 이르면 한 줌의 바람이 되어 아무에게도 잡히지 않는 존재가 된다던 천풍신법의 경지가 한 단계 상승했음을.
그간 신법 하나만큼은 늘 비사영에게 뒤져 왔던 내가 드디어 비사영과 동급이 되거나 오히려 그를 추월했음을 말이다.
‘비사영 녀석이 알면 한동안 삐져 있겠군.’
생각만 해도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 벌어진 일에 집중할 때였다.
담장을 넘자마자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아버지의 안위였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셨을까 걱정했었는데, 천만다행하게도 아버지는 무사하셨다.
오히려 놀랍게도 선우세가 쪽 무인들이 혈교의 마두들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됐다!’
그제야 약간 안심한 나는 이제 두 사람의 초절정 고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변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격전을 벌이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과 건장한 승려에게로 말이다.
두 사람 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둘 중 여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그녀의 병기인 듯한 이호만 보고도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전 귀주성 하오문주인 난혼마녀 소난소겠군. 선우가를 도와주러 온 건가? 일부러?’
그녀에 대한 정보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오문 개양 지부장인 노삼룡이 내게 그녀의 행적에 대해 자세하게 보내 줬었기 때문이었다.
사천성의 하오문 지부에서 정보를 들었을 때, 노삼룡은 분명 하오문주였던 그녀에게 별로 협조적인 인물이 아니었다고 했었다.
하지만 내게 보내온 정보들을 보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은근슬쩍 그녀에 대한 좋은 인상을 주려는 듯한 느낌이 좀 있었지. 그래서 혹시나 싶었는데….’
어쩌면 그녀가 이곳에 온 것도 노삼룡의 영향이 아닌가 싶었다.
그라면 우리와 혈교도들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거기까지 순식간에 파악한 나는 망설이지 않고 우락부락한 승려 같은 자를 향해 덮쳐 갔다.
사일검법 일 초.
일시사일.
슈하아악!
월화환검무 비월의 상태에서 전개한, 그것도 최고의 속도로 돌진하는 와중에 찔러 낸 초고속의 검격이었다.
나는 확실할 수 있었다.
‘이제껏 내가 펼쳐 낸 검격 중 가장 빠르다!’
이거라면 아무리 초절정 고수라도 일검으로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 스스로 느끼기에도 빛살 그 자체가 된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마지막 순간, 문득 뒤를 돌아본 놈과 눈이 마주쳤을 때까지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투웅!
“!”
다음 순간 뒤로 튕겨 나가며 나는 다시 한번 실감해야만 했다.
역시 초절정의 경지는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완전하지도 않은 자세로 다급하게 휘두른 놈의 응조수가 내 검 끝을 정확히 받아 냈던 것이었다.
응조수를 장갑처럼 감싼 두터운 붉은 강기가 내 검과 충돌하자, 그 속으로 살짝 파고들었던 내 검은 결국 강력한 반탄력에 튕겨 나올 수밖에 없었다.
“칫!”
충돌의 반탄력으로 튕겨 난 우리는 양쪽으로 빠르게 물러섰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난혼마녀를 가운데 둔 채였다.
그러자 건장한 체격의 승려가 공중을 휘돌아 날아온 거대한 붉은 륜을 잡아채며 내게 물었다.
터억!
“이렇게 젊은 놈이라니. 누구냐, 네놈은?”
씨익 웃으며 되받아 줬다.
“너 따위에게 말해 줄 이름이 아니다, 축호탁.”
놈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대한 혈륜을 사용하는 흉악한 승려라니, 염라혈승 축호탁임에 분명했으니까.
예전 독림에서 설풍 조장과 맞붙었던 탐혈마군 지광옥급의 초절정 고수였다.
그러자 놈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감히! 어린놈이…!”
그 순간, 내가 먼저 놈을 향해 튀어 나갔다.
파박!
폭진보를 전개한 포탄 같은 돌진이었다.
놈은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흠칫 놀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내가 노린 것은 놈이 아니었다.
중간까지 돌진한 후 쓰러져 있던 난혼마녀 소난소를 낚아챘던 것이었다.
그러고는 바로 방향을 틀어 아버지가 계신 쪽으로 몸을 날렸다.
“진아!”
막 대장로 허진국과 합공해 또 한 명의 마두를 격살하신 아버지가 반갑게 내 이름을 외치셨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하오문주님을 좀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그리고 그녀에게 전음으로 속삭였다.
- 제 아버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소 선배.
그러자 그녀의 눈에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눈빛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결코 혈교 무공의 광기에 휩쓸린 상태가 아니라는 걸.
노삼룡에게 정보를 들었을 때도 반신반의했지만, 직접 본 그녀의 눈빛은 오히려 웬만한 정파인들보다도 더 맑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초절정의 경지까지 혈교의 무공을 익혔음에도 광기에서는 벗어나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그녀를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석경달 어르신께 도움을 받아 본 적이 있던 나는 어쩌면 정파인들 중 가장 혈교도에게 편견이 없는 사람인지도 몰랐으니까.
오히려 잘만 하면 좋은 아군을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어쨌든 나중의 얘기, 지금은 눈앞에 있는 저자부터 처리해야 했다.
내게 속았다는 생각에 무척 화가 나 보이는 저 염라혈승 축호탁을 말이다.
“이 건방진 애송이 놈이!”
부아아아앙!
놈이 힘껏 던진 거대한 혈륜이 맹렬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거대한 용권풍을 압축하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광폭한 기세였다.
‘이런!’
저건 피해야만 하는 공격이었다.
내 공력으론 도저히 막아 낼 수 없는 기세로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저걸 피해 버리게 되면, 내 뒤쪽에 계신 아버지를 비롯한 선우세가의 무인들이 저 공격을 맞게 될 거라는 점에 있었다.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으득!
이를 악물고는 황급히 다시 월하환검무를 전개했다.
월하환검무 일 식.
비월.
화아아악!
세상이 다시 몽롱한 빛깔로 덧칠됐다.
하지만 감각을 가속해 느리게 바라봤음에도 혈륜의 속도는 여전히 빠르게 보이고 있었다.
역시 초절정 고수의 공격이었다.
양손으로 묵랑을 꽉 움켜잡고는, 혈륜이 막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온 순간 온 공력을 집중해 날아오는 혈륜의 측면을 향해 휘둘렀다.
“으하아압!”
투웅!
순간 혈륜을 받아 낸 묵랑으로부터 엄청난 거력이 느껴졌다.
내 공격 따위는 그대로 무시한 채 밀고 들어와 묵랑을 부수고 나까지 갈가리 찢어 버릴 것만 같은 광폭한 기세였다.
가가가가각!
혈륜이 맹렬히 회전하며 묵랑을 갈아 버릴 듯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으득!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밀리면 모두가 끝장이었다.
기합을 내지르며 죽을힘을 다해 그것을 밀어냈다.
“으아아아아압!”
그러자 혈륜의 궤적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조그만 더!’
으드득!
“끄아아압!”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낸 나는 결국 혈륜의 궤적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나를 비껴간 혈륜이 방향을 틀어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위이이잉!
하지만 축호탁의 공격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혈륜의 바로 뒤에서 놈이 나를 덮쳐 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놈이 살기를 풀풀 뿜어내는 붉은 눈으로 내게 외쳤다.
“죽 어 라!”
붉은 강기를 머금은 놈의 응조수가 유성처럼 나를 찍어 오고 있었다.
내 일시사일과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을 속도와 철판이라도 간단히 찢을 듯한 파괴력이 느껴지는 공격이었다.
감히 받아 낼 자신이 없었던 나는 천풍신법을 이용해 옆으로 흐르듯 그것을 피해 냈다.
스르륵!
그러자 놈의 응조수가 바로 변화를 일으켰다.
허공에서 살짝 흔들리는 듯하더니 뱀처럼 유연하게 휘어지며 내 신형을 쫓아왔던 것이었다.
심지어 한 개였던 놈의 응조수가 세 개의 수영으로 분화한 상태였다.
화아악!
“!”
세 개의 수영은 각각 내 목과 검을 든 오른팔, 복부의 세 군데를 노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모두 실초였다.
‘젠장!’
도저히 막아 낼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바로 폭진보를 전개해 땅을 박찼다.
놈의 영역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파박!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자 내 신법까지는 쫓아올 수 없었던 놈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참, 적어도 신법 하나는 인정해 줄 만한 놈이로구나. 아주 제법이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놈의 얼굴에선 다시 여유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신법은 제법이지만 자신에게 전혀 위협은 되지 않는다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정확한 판단이었다.
월하환검무 비월의 상태에서도 도무지 뭘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실력 차가 컸던 것이다.
‘과연, 이게 초절정과의 차이인가.’
새삼 실감하게 된 수준 차에 입맛이 썼다.
설풍 조장은 나와 비슷한 경지 때도 탐혈마군 지광옥과 그래도 어느 정도는 치고받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다시 날아드는 혈륜을 손으로 잡아낸 놈은 문득 선우세가의 무인들을 스윽 훑었다.
그러곤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저기 있는 모두를 죽일 것이다. 어디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고 아니면 도망치려무나.”
염라혈승이 여우 같은 자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과연 심계 또한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방금 한 번의 부딪침만으로 내가 뒤에 있는 선우세가 사람들을 지키고자 혈륜을 쳐 냈다는 걸 바로 눈치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인질로 삼고는 내게 도망치지 말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젠장!’
뒤를 슬쩍 바라보자 선우세가의 무인들은 어느새 다른 마두들을 모두 정리하고는 긴장된 눈빛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힘만으로 혈교의 마두 네 명을 물리친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성과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절정 초입의 마두들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선우세가의 무인들이 저 염라혈승 축호탁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결과는 너무도 뻔했으니까.
아마 저 혈륜을 던져 대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모두가 몰살당해 버리고 말겠지.
그러니 이제 상황은 명확했다.
어떻게 해서든 내 손으로 축호탁 저자를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무리하지 않고 해결해 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한 것이었지. 하긴, 생각해 보면 조장도 시간 제한을 넘어서까지 무리하게 몸을 움직였었는데 말이야. 그걸 감안하면 굳이 억울할 것도 없나?”
그러자 축호탁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중얼중얼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벌써 정신이라도 나간 게냐?”
피식 웃어 주며 대답했다.
“아직은. 근데 이제 곧 나갈 예정이긴 하지.”
한 번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바로 전개했다.
광검 스승님께서 아직 허락하시지 않았던 월하환검무의 이 식을.
‘아직 내가 감당하기에 무리라고 하셨지만 최소한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간닷!’
월하환검무 이 식.
현월.
화아아아아악!
곧 아찔한 느낌과 함께 황홀한 감각이 내 전신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내 감각 안으로 들어오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전지의 감각이었다.
땅을 이루는 흙 알갱이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나 있는 풀잎들의 잎맥 하나하나도, 거미줄에 맺힌 작은 물방울 하나까지도 모두 선명하게 인식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내 피부를 스치는 바람과 그에 흔들리는 솜털들, 그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모두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내 인식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그 황홀한 고양감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와하하하하하하!”
***
염라혈승 축호탁은 혼자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폭소를 터트리는 어린놈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 건가?”
갑자기 약간 술에 취한 듯 몽롱해진 눈빛을 보건대, 그 생각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일부러 미친 척을 하는 것이든가.
아무튼 자신이 차기 혈마로서 모시기로 한 구유상만큼이나 뛰어나 보이는 젊은 놈은 처음이 아니던가.
아직 자신의 상대는 아니지만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축호탁은 놈이 뭘 하든 그냥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미쳤든 제정신이든 어차피 죽으면 상관없을 테니.’
그렇게 결정한 축호탁은 다시 전의를 끌어올렸다.
그러곤 혈륜을 잡은 팔을 뒤로 힘껏 젖혔다 세차게 휘둘렀다.
“으아아아압!”
부아아아아앙!
그러자 맹렬하게 회전하는 혈륜이 선우진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쏘아졌다.
그리고 그것의 적중 여부와 상관없이 축호탁 역시 놈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특기인 혈륜을 이용한 연환공격이었다.
그에 대한 놈의 대응은 아까와 다르지 않았다.
아까처럼 힘껏 검을 휘둘러 혈륜의 방향을 틀어 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놈의 뒤쪽에 있는 선우세가 무인들의 안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투웅!
혈륜이 살짝 비껴져 공중으로 날아갔다.
아까보다 더 힘껏 던졌음에도 묘하게 좀 더 간단히 날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래 봐야 자신의 상대는 아닐 것이니까.
“죽어라!”
축호탁의 응조수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놈을 향해 내리꽂혔다.
아까보다 더 맹렬하고 날카로워진 기세였다.
츄하아아악!
하지만 응조수가 선우진의 목을 막 찢으려는 순간이었다.
선우진의 신형이 바람에 부서진 꽃잎처럼 갑자기 팍 흩어지고 말았다.
축호탁으로선 알 수 없겠지만 천풍신법의 비기 천풍화엽의 수법이었다.
푸스스스!
“이건?!”
사방으로 흩어진 선우진의 신형이 축호탁의 주변에서 바람에 날리듯 가볍게 떠다니고 있었다.
처음 보는 놀라운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선우세가의 무인들도 놀라움에 탄성을 질러 댔다.
“오오오!”
“저런 신법이!”
하지만 초절정의 무인인 축호탁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흥!”
코웃음을 친 그는 회전하며 돌아온 혈륜을 그대로 받아 선우진의 잔상들을 향해 다시 던져 버렸다.
날아오던 기세에 새로운 힘까지 더했기에 그 위력은 이전보다 더 강력해진 상태였다.
부와아아앙!
맹렬하게 회전하는 혈륜은 축호탁의 주변을 돌며 선우진의 잔상들을 쓸어가기 시작했다.
사방을 떠다니던 잔상들이 혈륜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물에 닿은 눈처럼 사그라지고 있었다.
스스스슥!
그리고 축호탁의 예리한 눈은 잔상들 중 부드럽게 움직여 혈륜을 피해 내는 잔상 하나를 순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거기로구나!”
축호탁의 신형이 선우진을 향해 맹렬하게 쏘아졌다.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천수관음처럼 수십 개로 분열한 응조수가 사방에서 덮쳐 가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죽어라!”
반면 혈륜을 피하느라 몸을 띄운 선우진의 발은 아직 땅에 닿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아무리 신법이 뛰어나다 해도 이번엔 절대 피할 수 없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급박한 상황에 관전하고 있던 선우세가의 무인들이 안타깝게 소리쳤다.
“공자!”
“진아!”
축호탁의 입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예상대로 선우진은 피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을 덮친 응조수의 유성우를 향해 마주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슈하아아악!
“크흐흐흐흐!”
축호탁은 이것으로 끝이 났음을 예상했다.
놈의 수준으로 자신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낸다는 건 어불성설, 이번이 결정타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유성우처럼 쏟아진 응조수가 사방에서 선우진을 폭격했다.
그 광풍 같은 공세 속에서 선우진은 금방이라도 쓸려 나갈 듯 비틀거리며 간신히 검을 휘둘러 응조수를 쳐 내고 있었다.
파바바바바바박!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났다.
공세를 퍼붓던 축호탁의 표정이 점점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으음?”
뭔가 이상했다.
아직 내공 팔십 년 정도밖에 안 됐을 것이 분명한 놈이 자신의 응조수를 어떻게든 받아 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터터터터터텅!
분명 뒤로 형편없이 밀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검을 휘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유효타를 허락하지 않고 다 방어해 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풍랑 속에서 침몰할 듯 침몰할 듯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조각배를 보는 것만 같았다.
축호탁은 이를 갈며 남은 공력을 쏟아부었다.
“이 건방진!”
퍼엉!
그러자 분노해 후려친 축호탁의 일격에 검으로 방어했던 선우진의 몸이 속절없이 뒤로 튕겨 나갔다.
허수아비를 후려쳐 날아가듯 무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선우진을 날려 보낸 축호탁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마침내 선우진이 단 한 번의 정타도 허용하지 않은 채 자신의 모든 공세를 다 견뎌 냈기 때문이었다.
축호탁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도 제법이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 순간 뒤로 튕겨 나던 선우진의 측면으로 혈륜이 회전하며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위이이이잉!
경악한 선우세가의 무인들이 소리쳤다.
“진아!”
“삼 공자!”
선우진은 맹렬하게 날아드는 혈륜에도 검을 갖다 대는 것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혈교의 절기 혈륜마공은 역시 그런 정도로 막아 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터엉!
선우진의 신형이 포탄처럼 튕겨 나 맹렬한 기세로 땅으로 처박혔다.
그러곤 몇 번을 땅에서 튕기며 힘없이 뒹굴었다.
쿠당탕탕탕!
“아아!”
“삼 공자!”
이미 패배한 듯 너무나도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축호탁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은 상태였다.
방금 놈이 혈륜에 빗겨 맞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마지막에 분노해서 너무 세게 후려쳐 버린 탓이었다.
덕분에 놈이 오히려 혈륜의 진로에서 살짝 비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축호탁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운 하나는 끝내주는 놈이로군.”
그의 기분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 분명 압도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데도 어쩐지 점점 답답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드득!
이를 간 축호탁은 다시 혈륜을 받아 내서는 힘껏 팔을 뒤로 젖혔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반드시 가루로 만들어 주마.”
그때였다.
갑자기 땅에 대자로 뻗어 있던 선우진이 큭큭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큭큭큭큭큭, 크큭, 와하하하하하!”
점점 웃음이 커지다 갑자기 미친 듯 웃고 있는 선우진의 모습에 축호탁은 잠시 멈칫하고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놈을 바라봤다.
자신도 혈교의 마두였지만 도무지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는 놈이었다.
저 꼴이 되어서 웃고 있다니, 완전히 미친 것 같았다.
그때 선우진이 드디어 웃음을 멈추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비웃듯 말했다.
“약하구나? 너.”
순간 벙쪄 버렸던 축호탁은 다음 순간 완전히 광분하고 말았다.
그가 온 힘을 다해 혈륜을 던지며 소리쳤다.
“이 미친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