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염라혈승 축호탁-2
부아아아아앙!
혈륜이 맹렬하게 날아와 선우진을 찢어발기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바로 몸을 일으킨 선우진의 신형은 다시 바람처럼 가볍게 움직여 그것을 살짝 피해 냈다.
뒤쪽에 선우가의 무인들이 없었기에 굳이 맞부딪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혈륜의 바로 뒤에서 광분한 축호탁이 덮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죽어라!”
쉬이이익!
그의 응조수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선우진을 내리찍었다.
마치 유성처럼 빠르고 강렬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의 응조수가 막 선우진을 찢으려던 순간, 선우진은 다시 꽃잎처럼 나풀거리며 팍 흩어졌다.
파스스스슥!
다시 한번 펼쳐진 천풍화엽의 신법이었다.
“흥! 같은 수를!”
코웃음을 친 축호탁의 대응 역시 아까와 똑같았다.
돌아오는 혈륜을 잡아 선우진의 잔상을 쓸어 버렸던 것이었다.
파사사사사삭!
물에 닿은 눈처럼 녹아내리는 선우진의 잔상 속에서 축호탁은 이번에도 혈륜을 피하는 선우진의 진신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흉광을 번뜩였다.
“끝이다!”
축호탁이 공중에 몸을 띄운 선우진을 향해 맹렬하게 덮쳐 갔다.
혈응마조 구 초.
천조열천.
푸화아악!
그의 응조수가 하늘을 뒤덮을 듯 분화했다.
축호탁의 절기인 혈응마조, 그중에서도 적을 완전히 그물처럼 감싸 버리는 절초였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내고야 말겠다는 그의 각오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자 하늘을 뒤덮은 축호탁의 수영이 선우진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 버린 그 엄청난 광경에, 선우세가의 무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허어, 저런!”
“저럴… 수가.”
그의 공세에 공중에 몸을 띄우고 있던 선우진으로선 다른 대응할 방도가 없었다.
몰려오는 태풍 같은 공세를 향해서 마주 검을 휘두를 수밖에는.
“후우웁!”
슈하아악!
가소롭게도 자신에게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놈을 보며 축호탁은 비릿하게 웃음 지었다.
놈이 무슨 짓을 하든 사방팔방을 완전히 감싸는 천조열천의 수법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선우십삼검 십오 초.
공즉시색.
화아아악!
“!”
웃고 있던 축호탁의 눈이 경악해 크게 확대됐다.
선우진의 검이 갑자기 수백, 수천 개로 분열해 자신의 응조수와 부딪쳐 왔던 것이었다.
그것도 환검이 아닌 하나하나가 다 예리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실검들, 축호탁으로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응이었다.
파바바바바바바바박!
선우진의 검영과 축호탁의 응조수가 동시다발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투퉁! 투투퉁! 투투투투퉁!
축호탁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앞에서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하나의 위력은 분명 자신의 응조수가 훨씬 더 강했건만, 선우진이 만들어 낸 검영의 수가 응조수를 압도하고 있었다.
응조수 하나가 검영 몇 개씩을 소멸시키고 있음에도 그 수가 모자랄 정도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으와아아압!”
축호탁은 사력을 다해 초식의 후반부를 전개했다.
초절정인 자신이 고작 저런 놈 따위에게 밀린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파바바바바바바바박!
하지만 잠시 후, 그는 결국 허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압도적인 검영의 수를 응조수가 감당해 내지 못하고 다 소멸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럴 수가.”
이제 표정을 일그러뜨린 축호탁은 다시 급하게 공력을 추슬러 기합을 내질렀다.
결국 다 소멸시키지 못했던 검영들이 자신을 덮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아압!”
화아아악!
그러자 한순간 그의 몸에서 붉은 강기가 뿜어져 나와 두터운 막을 형성했다.
호신강기였다.
축호탁은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저런 놈 따위에게 이런 식으로 내공을 낭비하는 건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며 애써 자신을 합리화했다.
내공을 좀 낭비해도 저런 놈 따위는 충분히 처리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선우진의 검영들이 그의 호신강기에 막 부딪치려는 순간이었다.
푸스스스슥!
실체였던 검영들이 호신강기에 부딪치기 직전 갑자기 환검이 되어 사그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로선 알 수 없었지만, 선우진이 십오 초 공즉시색을 정확한 시점에 오 초 색즉시공으로 전환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번에 보여 준 한 수 또한 축호탁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처음 보는 신기한 초식에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도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순간, 색즉시공으로 공력을 발산하지 않고 순환시켰던 선우진이 그 공력을 일시에 모아 검을 찔러 냈다.
빛살 같은 일격, 사일검법의 일시사일이었다.
슈학!
아까 흡혈마호 노조송에게 했듯 호신강기를 뚫어 내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투웅!
그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역시 초절정인 축호탁의 호신강기는 노조송의 것과는 차원을 달리했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의 검이 호신강기를 다 뚫어 내지 못하고 다시 튕겨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력한 반탄력에 선우진의 몸 역시 뒤로 튕겨 나왔을 때, 그 최악의 순간에 선우진의 등을 향해 혈륜이 맹렬이 돌진해 왔다.
부아아아앙!
축호탁은 눈을 번뜩였다.
이번엔 아까와 달리 정확한 방향과 시점이었다.
혈륜이 놈의 허리를 동강 내는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선우가의 무인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안 돼!”
“삼 공자, 뒤를!”
하지만 혈륜이 막 선우진의 허리를 끊어 버릴 것 같던 순간, 마치 미리 알고 있었던 듯한 선우진의 몸은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부드럽게 뒤로 회전했다.
마치 혈륜이 만든 풍압에 밀려난 것만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뒤로 재주를 넘으며 혈륜의 위로 타고 올라간 선우진은, 그 순간 날아가는 혈륜의 중심축을 정확하게 걷어차 버렸다.
투웅!
“!”
축호탁은 경악했다.
놈이 각법으로 혈륜을 가속시켰던 것이었다.
급가속한 혈륜이 이제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부와아아아앙!
기세가 너무 강했다.
저런 기세라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받아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으윽!”
축호탁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날려 그것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병기를 자신이 피해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너무 화가 나 이가 갈렸다.
으드득!
하지만 훌쩍 뛰어 혈륜을 뛰어넘던 축호탁은 그게 단지 분노스러운 일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만 했다.
“!”
삐이이이이이익!
혈륜을 피한 그의 눈앞에 커다란 강기로 이루어진 연보랏빛 봉황이 덮쳐 오고 있었다.
선우십삼검의 십사 초 주작현신이었다.
축호탁은 이를 악물고 양손으로 그것을 받아 냈다.
“잔재주를!”
콰아아아앙!
“크으윽!”
그것은 초절정인 축호탁으로서도 받아 내기가 쉽지 않은 강력한 공격이었다.
봉황의 형상에 실린 강력한 경력에 그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뒤로 밀리고 있었다.
“으아아압!”
축호탁은 양손에 공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이를 악물었던 그의 응조수는 결국 주작의 머리를 간신히 찢어 낼 수 있었다.
촤아아아악!
푸화아아악!
그러자 연보랏빛 주작은 그대로 부서지며 소멸했다.
꽤 위험했던 사태에 축호탁도 이제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아직도 선우진의 공격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소멸한 주작의 뒤로 선우진이 빛살처럼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선우진이 전개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공격, 일시사일이었다.
쉬이익!
“큭!”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으려는 순간, 너무나도 완벽한 시점에서의 기습이었다.
축호탁은 이번 공격만큼은 도저히 막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었던 그는 다시 온몸으로 공력을 방출했다.
“으아아아압!”
화아아아아악!
그러자 또다시 붉은 장막이 그의 온몸을 뒤덮었다.
호신강기였다.
투웅!
그 위를 벼락같이 찔렀던 선우진의 검 역시 이번에도 호신강기를 뚫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날 수밖에 없었다.
축호탁은 드디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우!”
내공이 거의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호신강기를 두세 번만 더 사용하면 완전히 내공이 고갈될 것만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축호탁은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놈의 최후의 공격은 결국 무위로 끝났고, 이제는 자신의 차례가 왔기 때문이었다.
위기 뒤엔 언제나 기회가 오는 법.
자신은 놈의 공격을 버텨 냈지만, 아마도 이제 놈은 그럴 수 없을 것이었다.
“그만 죽어라!”
축호탁이 눈을 번뜩이며 막 선우진에게 역습을 전개하려 할 때였다.
문득 그의 눈에 비릿하게 웃고 있는 선우진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눈이 묘하게 자신이 아닌 자신의 뒤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문득 뒷목이 섬뜩했다.
축호탁은 황급히 기합을 내지르며 공력을 방출했다.
“으하아아아압!”
화아아아악!
본능적으로 형성한 호신강기였다.
그리고 그 판단이 그의 목숨을 살리고 말았다.
퍼어엉!
“으윽!”
어느새 덮쳐 온 난혼마녀 소난소의 이호가 뒤에서 그의 호신강기 위를 강타했다.
소난소가 아까 선우진이 몰래 건네준 영약으로 급하게 내상을 회복했던 것이었다.
축호탁이 경악해 외쳤다.
“소난소! 네년이!”
축호탁은 내공이 또다시 쑤욱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번 뒤를 잡은 소난소가 이호와 활대로 축호탁의 뒤를 계속해서 난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콰콰콰콰콰쾅!
축호탁은 이를 악물었다.
아까 자신이 소난소를 쓰러뜨렸을 때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내공이 쑥쑥 빠져나가는 감각, 축호탁의 마음이 점점 다급해지고 있었다.
“으드득! 이년!”
축호탁은 간신히 몸을 돌려 호신강기를 풀고는 소난소의 공격을 막아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무언가가 그를 덮쳐 왔다.
부아아아아앙!
“!”
그것은 축호탁의 혈륜이었다.
선우진이 다시 한번 가속시킨 혈륜이 또 자신을 덮쳐 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축호탁의 얼굴이 더 일그러질 수 없을 만큼 구겨졌다.
“이 개자식이!”
결국 호신강기를 풀 수 없었던 축호탁은 그대로 혈륜과 소난소의 공격을 호신강기 위로 받아 내야만 했다.
양쪽에서 거대한 충격이 그의 호신강기를 강타했다.
콰아아아앙!
그리고 그 충격은 결국 축호탁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야 말았다.
“쿨럭!”
쩌정!
공력의 소모를 견딜 수 없었던 축호탁의 호신강기가 깨진 순간이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무방비 상태가 된 축호탁을 향해 소난소와 선우진은 양쪽에서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죽어라, 축호탁!”
“끝이다!”
퍼어억!
푸욱!
선우진의 검이 축호탁의 등을 꿰뚫었을 때, 소난소의 이호는 축호탁의 머리를 날려 버리고 말았다.
산산이 부서진 축호탁의 머리가 사방으로 분수처럼 흩뿌려지자, 심장이 꿰뚫리고 머리가 사라진 축호탁은 이제 무릎을 꿇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털썩!
끝이었다.
고강한 무위와 영악한 심계로 수많은 정파 고수들의 피를 빨아들였던 혈교의 초절정 고수 염라혈승 축호탁의 허망한 최후였다.
머리를 잃은 축호탁이 무릎을 꿇자, 소난소 역시 비틀거리며 무너져 무릎을 꿇었다.
“크윽!”
그녀의 입에서도 울컥 피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내상이 완전히 치료되지 않은 가운데 무리하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선우진이 갑자기 폭풍처럼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미 죽은 축호탁의 시체를 향해서였다.
“으하아아압!”
츄하아아악!
깜짝 놀란 소난소가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서 축호탁의 시체가 수십, 수백 개의 육편이 되어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핏물과 살점이 소나기처럼 공간을 뒤덮고 있었다.
소난소는 이제 경악한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축호탁의 시신을 갈가리 찢어 버린 그가 광기에 물든 듯한 몽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음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뭐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사천성 성도 사천당문.
그곳의 한 건물 안에서 홍사검룡 온제웅은 자신의 앞에 부복해 있는 부하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이미 선금을 다 지불했건만, 사천살문과의 연락이 끊겼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부하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소, 속하도 잘…. 어떻게든 접선해 보려고 해 봤지만 원래 우리와 접선하던 경로도, 다른 접선 경로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꼭 아예 없어진 것처럼….”
“뭐라고?! 그럼 놈들이 내 돈을 먹고 도망쳐 버리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온제웅의 분노에 부하는 더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더 푹 수그렸다.
그 또한 그런 생각이 들었기도 했고, 여기서 무슨 말을 해 봐야 얻어터지기만 할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온제웅은 아니나 다를까 바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이 개 같은 놈들! 살수라는 놈들이 감히 계약을 어기고 사기를 치다니! 그러고도 사천성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더러운 벌레 새끼들 같으니라고!”
온제웅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분노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그로선 설마 선우진에 의해 사천살문이 멸문했을 거라고까지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벌레 새끼들! 으와아아아압!”
우당탕! 콰당! 탕!
분노를 못 이긴 온제웅은 이제 마구 사방으로 집기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복한 부하는 더욱 몸을 움츠렸고 주변에 서 있던 부하들 역시 팔로 얼굴을 감싸며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
지금 여기서 물건을 피하기라도 하면 그 분노가 자신에게 쏠린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멍청한 놈들! 이 쓸모없는 것들!”
온제웅은 그간 쌓여 왔던 분노를 마구 표출했다.
요즘 그의 상태는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당가 내에서의 평판은 바닥까지 처박힌 상태였고, 그의 혼인 상대인 당여은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얼굴 한 번을 볼 수가 없었다.
아마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것 같았다.
온제웅은 이 모든 게 다 그 선우진이란 개 같은 놈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희망이 사천살문에 의해 놈이 살해당하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그 살수 놈들마저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아닌가.
온제웅은 이제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으아아아아아악!”
그때였다.
사방으로 물건을 던지며 분노를 터트리던 온제웅이 갑자기 씩씩거리며 행동을 멈췄다.
부하들은 문득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마 이제 좀 화가 풀린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화가 풀린 온제웅이 약간 의아하긴 했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그저 다행일 뿐이었다.
물론 아직 완전히 화가 풀렸는지는 알 수 없기에 모두 그에게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온제웅이 행동을 멈춘 것은 화가 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갑자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온제웅은 온몸을 비틀어 보려고 노력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물건을 던지던 중 갑자기 아무 전조도 느낌도 없이 몸이 덜컥 멈춰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온제웅이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이, 이놈들아! 나를 좀 도와다오!’
하지만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부하가 있을 리 없었다.
주변에 많은 부하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었다.
문득 온제웅의 뇌리에 자신이 점혈을 당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내 그는 그럴 리가 없다고 결론을 냈다.
무슨 점혈이 이렇게 아무런 느낌도 없이 당할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주변엔 자신의 부하들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가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의 귀에 전음이 들려왔다.
무척이나 낮고 음침한 목소리였다.
- 네가 암혈향을 찾았느냐?
그 목소리를 들은 온제웅은 순간 깜짝 놀랐다가, 이내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음침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한 말의 내용 때문이었다.
‘암혈향이라고?!’
꿀꺽!
온제웅은 지금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 누구에게 당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천하 모든 살수들의 왕이자, 살수의 몸으로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으로까지 인정받은 바로 그자.
암혈향이 그를 찾아왔던 것이었다.
물론 다른 누군가가 암혈향을 사칭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온제웅은 그가 암혈향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있어 이렇듯 대낮에 천하오대세가 중 하나인 용담호혈 사천당문의 안으로 침입할 것이며, 부하들이 가득한 방 안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자신을 점혈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럴 수 있는 자는 천하에 암혈향, 그 하나밖에 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가 암혈향을 찾은 것이 맞다면 고개를 끄덕여라.
문득 ‘점혈을 당했는데 어떻게 고개를 끄덕이지?’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의문을 가졌던 것도 잠시, 온제웅은 다음 순간 신기하게도 자신이 고개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신기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온제웅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부하들을 모두 내보내라.
이번에도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몸에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도,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게 된 상태였다.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온제웅은 황급히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다, 당장 나가라!”
그 말에 부하들이 놀란 눈으로 온제웅을 쳐다봤다.
하지만 온제웅은 지금 그들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당장 나가란 말이다! 내 말 안 들리느냐?!”
그의 호통에 부하들은 모두 황급히 방에서 뛰쳐나갔다. 알아서 내보내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이제 모두가 나가고 조용해진 방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음으로 들었던 음침한 목소리, 그것도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모를 주인 없는 목소리였다.
“내 의뢰금이 꽤 비싸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겠지?”
온제웅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혈향은 의뢰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의뢰자를 죽이는 것으로도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무, 물론입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약간 기분이 좋아진 듯한 목소리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
“좋군. 그래, 내가 누구를 죽여 주면 되겠느냐?”
온제웅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천천히 그의 이름을 말했다.
그가 너무나도 죽이고 싶은 그의 이름을….
“선우진, 선우진이란 놈입니다.”
선우진이 천하제일의 살수 암혈향의 목표가 되어 버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