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제갈서율의 마음
귀주성 개양의 개양문.
청홍쌍검이라는 괴인의 도움으로 혈교도의 습격을 간신히 막아 낼 수 있었던 개양문의 분위기는 현재 매우 좋지 않았다.
개양문의 자랑이던 백여 명의 흑오대가 반 이상 사망하며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개양문주만큼은 그래도 목숨을 건졌지만, 그럼에도 개양문이 이전의 성세를 회복하기란 매우 지난한 일일 것만 같았다.
반면 선우세가에서 온 일행들의 분위기는 그나마 나쁘지 않았었다.
무사들의 피해야 좀 있었지만 그럼에도 첫째 공자인 선우성이나 외동딸인 선우연하, 그리고 제갈세가의 손님인 제갈지용과 제갈서율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무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우세가에서 서신이 도착하기 전까지였다.
선우중이 보낸 서신이 도착하고 그것을 선우성이 읽어 주자, 거기에 적힌 내용에 모두가 완전히 경악하고야 말았기 때문이었다.
일행들 앞에서 서신을 읽던 선우성이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선우연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이게 정말…?”
서신의 초반에 적힌 내용은 선우세가 또한 혈교도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무사히 그들을 물리쳤다고 하니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그다음부터 적혀 있는 얘기였다.
선우중은 선우세가에 쳐들어온 혈교도들에게서 습격을 사주한 배후를 알아냈다고 했다.
바로 운씨세가라는 것을 말이다.
그 소식에 일행 모두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리고 선우성은 그보다도 더 충격적인 다음 내용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으며 선우연하를 바라보았다.
“운씨세가가… 이미 혈교의 괴뢰가 된 상태고, 개양문으로 쳐들어왔던 것도 연하의 혼인을 막고 나를 죽이기 위해서라고?”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순간 선우연하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얼굴은 운씨세가의 얘기가 나온 순간부터 이미 당황하기 시작하더니, 혼인을 막기 위해서라는 얘기가 나오자 완전히 새파랗게 질려 버린 상태였다.
선우성이 경악한 눈빛으로 물었다.
“게다가… 운씨세가에 직접 혼인을 막아 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 연하 너였다니, 이, 이게 진정 사실이란 말이냐?”
선우연하는 덜덜 떨며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오라버니! 저, 저는 절대 이런 식으로 막아 달라고는…!”
그 순간 고개를 젓던 선우연하도, 듣고 있던 선우성도 굳어지고 말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막아 달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란 얘기로구나.”
선우성은 허탈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더니만 이내 바로 움직여 그녀를 점혈했다.
타닥!
“!”
선우연하는 경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이미 점혈된 상태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선우성은 그런 여동생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개양문엔 자세한 상황을 알리지 말고 최대한 빨리 너를 데리고 오라고 하시는구나. 너의 처우는 아버지께서 결정하시겠지.”
경악해서 크게 확대된 선우연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지만 이제 그녀를 보는 누구도 동정의 눈빛을 보내주지 않고 있었다.
선우성은 망연자실해 있는 개양문주에게로 가서 그를 위로하며, 선우세가 또한 습격을 받았기에 자신들이 빨리 선우세가로 돌아가야 함을 말했다.
그사이 제갈서율은 점혈당한 선우연하와 초상집이 되어 버린 개양문을 복잡한 눈빛으로 훑어봤다.
모든 일이 너무도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이 모든 일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그와 연관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문득 귀신처럼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 주었던 창백한 얼굴의 청의괴인을 떠올렸다.
‘그가 정말… 선우진 공자일까?’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 뻔한 얘기였다.
선우세가의 수치라고 불리우는 선우진 공자가 그 엄청난 마두를 물리치고 자신들을 구해 주다니 말이다.
하지만 제갈서율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가 선우진이 맞다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그 눈빛, 체형, 게다가 그 신비한 분위기까지.
제갈서율은 문득 자신의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숙부 제갈지용을 바라봤다.
이런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 숙부님….”
그때 제갈지용이 먼저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구나, 서율아. 절대로 방심하면 안 될 것 같다.”
“…예? 무슨?”
그러자 제갈지용이 심각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숙부는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이 선우중, 선우가주의 계략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우리를 이용해 선우가의 내부를 정리하고 첫째인 선우성 공자의 후계 구도를 확고히 하기 위한 계략 말이다.”
그의 말에 제갈서율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는 이미 들었던 얘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갈지용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 개양문 방문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다른 세력들을 쳐 내고 있는 이 마당에 후계자인 선우성을 선우연하와 함께 개양문으로 보내다니, 너무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아, 그렇… 겠군요.”
그 얘기는 제갈서율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로 운씨세가에서 왔다는 혈교도들에게 습격을 받았으니 오히려 몸으로 와닿기까지 했다.
그러자 제갈지용은 주변을 스윽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전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을 봤을 때, 어쩌면 선우가주는 일부러 선우성 공자를 쳐 내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구나.”
그 말은 제갈서율을 깜짝 놀라게 하고 말았다.
후계자가 될 것이 분명한 선우성을 쳐 낸다면 대체 누가 선우가의 후계자가 된단 말인가?
“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래, 그렇게 하면 선우가에 후계자가 될 사람은 넷째 선우기 공자밖에 남지 않게 되지. 그는 분명 선우성 공자보다도 낫다고 볼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 숙부도 거기까지는 아직 확신을 하지 못하겠구나. 하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말하고 침중한 얼굴로 한숨을 내쉰 제갈지용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숙부는 우리가 이렇게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도 대단히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단다. 흡혈마호 노조송을 비롯한 절정의 마두들이 습격했는데도 아무 일 없이 살아남을 수 있다니, 정말 천운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선우세가도 역시 무사히 살아남았다는구나. 우리에게 흡혈마호가 왔다면 그들 또한 그리 만만한 자들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이게 과연 우연만으로 가능한 것일까? 이 숙부는 도저히 알 수가 없구나.”
제갈서율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선우진의 잘생긴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되는 그의 얼굴이….
제갈지용은 허탈한 표정으로 당부하듯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이 모든 일을 제갈세가에 보고하려고 한다. 혈교의 마두들이 당당히 귀주의 무림세가들을 습격했다니 아마도 난리가 나겠지. 그리고… 만약 우리를 이곳에 동행시킨 것마저 혈교도의 등장을 무림맹에 보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면, 이 숙부는 진심으로 선우중, 그자가 두려워지는구나. 그러니 너도 절대 방심하지 말거라. 그런 선우가주가 절대 선우세가를 우리에게 넘겨주려고 대결을 제안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 말에 제갈서율은 그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해지고 말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 모든 일을 계획했다고 생각되는 선우진이 고작 선우성 따위를 선우세가의 후계자로 만들 생각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너무도 뛰어났다.
아니, 지나치게 뛰어났다.
어느 정도로 뛰어나냐 하면 제갈세가에서도 두뇌가 뛰어나기로 손꼽히는 숙부 제갈지용마저도 이 상황이 될 때까지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제갈서율은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려 봤다.
‘만약 선우가의 후계자가 선우성이 아니라 선우진 공자라면?’
그러자 문득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다 설명이 되는 것이었다.
선우가에 영향을 미치는 세력들을 다 정리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말이다.
‘그, 그럼 나와 대결할 선우가의 후계자가 바로…?’
선우진이었다.
자신과 대결해 제갈세가와의 관계를 결정할 사람은 선우성이 아니라 바로 선우진이었던 것이다.
문득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제갈서율은 대결의 승리를 당연시하고 있었다.
선우성 따위에게 자신이 패할 리는 절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설사 대결 상대가 선우진이라고 생각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었다.
그가 아무리 실력을 감추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상대가 될 거라곤 생각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그 괴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그 괴인이 진짜 선우진 공자라면….’
그가 보여 줬던 엄청난 무위가 떠올랐다.
단 일 검에 자신과 동급인 절정의 마두를 격살했던 모습과, 심지어 내공 구십 년이 넘는 괴물 흡혈마호를 단신으로 참살했던 그 모습을 말이다.
제갈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가 선우진이라면 결과는 뻔했다.
자신이 절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얘기는 곧….
‘내가 설마, 그의 아내가 되어 선우세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제갈서율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결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숙부 제갈지용이 문득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서율아, 괜찮으냐? 갑자기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되다니,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것이냐?”
“네, 네?”
숙부의 물음에 그녀는 문득 양손으로 자신의 볼을 만져 봤다.
그러자 어느새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자신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숙부님. 저는 괜찮아요.”
제갈서율은 황급히 웃으며 숙부를 안심시켰다.
그러곤 두근거리는 자신의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제갈서율은 결국 선우진에 관한 얘기를 숙부에게 꺼낼 수 없었다.
그녀 자신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
“삼 공자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삼 공자님,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직각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무사들에게 밝게 웃으며 화답해 줬다.
“잘 잤습니다. 좋은 아침이로군요.”
“예! 그렇습니다!”
“오늘 하루도 평안하십시오, 삼 공자님!”
대꾸 좀 해 줬다고 눈을 반짝거리며 큰 소리로 대답하는 무사들의 모습에 쓴웃음이 나왔다.
오늘 아침, 마주치는 모든 무사들이 굳이 내 앞으로 달려와서는 저렇게 인사하고 있었다.
바로 그제까지만 해도 눈을 마주쳐야 마지못해 인사하더니만 말이다.
이게 모두 어제 염라혈승과의 격전 이후에 생긴 변화였다.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좀 씁쓸하군.’
무인이 강한 자를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일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씁쓸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꼭 그런 걸로 이루어지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내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들 또한 내가 받아들이고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일 것이었다.
지난 생에 그랬듯이 말이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은 선우가의 외곽에 위치한 별채였다.
아주 오랫동안 가 본 적이 없었던….
오랜만에 그곳으로 가는 내 기분이 새삼 묘해졌다.
그곳이 아주 오래전 내 어머니께서 거하시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지금 다른 사람이 임시로 거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별채의 문 앞에 서서 물었다.
“혹시 일어나셨습니까?”
그러자 안에서 여인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공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소 창백한,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생기 넘쳐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소 선배?”
그러자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후후후, 몸은 그냥 그런데 마음이 아주 좋네요. 선우 공자 같은 정파의 기재에게 선배 소리를 듣는 날이 올 줄이야.”
빙긋이 웃으며 대답해 줬다.
“저희 식구들을 보호해 주신 은인분께 선배라는 호칭이 대수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소저라고 불러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그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응? 꺄하하하! 나이 사십이 넘은 내게 소저라니, 공자가 이 아줌마를 놀리고 싶은 모양이군요.”
“아닙니다. 겉보기엔 저랑 동년배로 보이시는데요.”
그 말은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동년배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정말 너무도 젊어 보였던 것이다.
팽팽한 피부나 외모뿐만이 아니라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분위기가 그런 느낌을 더해 주고 있었다.
한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원래 나이가 사십 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동안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마침내 웃음을 그치고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어요. 여자를 기분 좋게 하는 법을 알고 있는 공자로군요. 자, 이제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도 좋아요. 어차피 그러려고 온 거죠?”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귀주성 내에 암약한 혈교의 세력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오문 지부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것은 귀주성의 혈교도를 청소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
물론 하오문 귀양 지부장인 노삼룡이 이미 알려 준 정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하오문주였던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가 더 많을 것 같았다.
또 교차 검증도 필요했고 말이다.
그러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이제 와서 뭘 숨기겠어요? 어차피 혈교가 아닌 나를 따르던 하오문도들은 구유상에 의해 대부분 다 죽었는걸요. 다 알려 드리지요. 일단 운씨세가는 알 테고….”
그녀는 혈교의 세력이 미친 곳을 바로 주욱 나열해 주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빛내며 그녀가 말한 내용들을 이미 알고 있던 내용들과 대조해 봤다.
그녀가 말해 준 내용들은 확실히 노삼룡이 알려 준 정보보다도 더 자세한 것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야말로 귀주성에서 혈교의 세력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물론 구유상을 먼저 처리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물론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내가 하오문주로 있었던 몇 개월 전까지의 정보들이에요. 그러니 지금은 또 상황이 좀 변했을지도 모르죠. 어떻게 도움이 됐나요?”
빙긋이 웃으며 대답해 줬다.
“물론입니다, 선배님.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항복했다는 듯 양손을 번쩍 들더니만 내게 물었다.
“자,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되나요? 정보를 모두 얻어 냈으니 폐기할 건가요? 죽일 건가요? 아니면 감금? 이건 내 부탁인데 부디 무림맹이나 혈교에 넘기지만 말아 줄래요?”
그녀의 장난스러운 넉살에 나는 그만 풋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확실히 그녀는 혈교의 마두라는 것이 믿기지 않게도 유쾌한 사람이었다.
지난 정혈대전 때 악명을 떨쳤던 난혼마녀라는 건 더더욱 믿기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분명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분명 혈교의 악명 높은 마두였고, 나는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문득 그녀에게 말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네, 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저는 완전히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그녀는 확실히 이상했다.
지난번 만났던 석경달 노인은 자기 자신을 일부러 반신불수로 만들었다고 했었다.
혈교 무공에 따라오는 광기를 막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석경달 노인보다도 훨씬 경지가 높은 초절정의 난혼마녀 소난소가 어떻게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는 것일까?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제가 알기론 혈교 무공을 익히면 점점 광기에 침식당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소 선배님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시는군요. 그 연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소난소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음, 선우 공자의 말이 맞아요. 혈교의 무공을 익히면 점점 광기에 휘둘리게 되죠.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피를 즐기게 되는…. 나 역시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마찬가지였어요.”
“이곳이라면, 귀주성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처음 이곳 귀주성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혈마의 지시대로 귀주성을 점점 장악해 나갈 생각이었죠. 그랬는데….”
그녀의 얘기에 따르면 그녀는 원래 귀주성 출신의 기녀였던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가 고향에 돌아와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어린 시절의 고향 친구였던 하오문 귀양 지부장 노삼룡이었다.
그리고 노삼룡은 광기에 빠진 그녀를 걱정하면서 그녀에게 마음을 다스리는 비법이라며 책 한 권을 건네줬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책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책의 이름을 들은 내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대연정심결이라고 하셨습니까?”
“맞아요. 처음엔 코웃음 쳤었는데, 옛 친구인 삼룡이에게마저도 자꾸 살기를 품게 되는 제 상태에 저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고요. 그래서 속는 셈 치고 한번 익혀 봤었는데, 놀랍게도 그걸 익히며 그간 제 행동들을 돌아볼 수 있게 됐었어요. 광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던 거죠. 물론 선우 공자가 쉽게 믿기는 힘들겠지만 그 대연정심결은 정말이지….”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대연정심결의 이름을 또 듣게 될 줄이야.
문득 그녀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혹시 그 대연정심결도 철나한심법, 나한권과 같이 묶여 있었습니까?”
그러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그걸 선우 공자가 어떻게?”
나는 이제 웃음을 참지 못하고는 완전히 환한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저도 그걸 익혔거든요. 그래서 선배님의 말씀을 충분히 믿을 수 있습니다.”
“예? 그게 정말인가요?”
그녀의 놀란 눈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광검 스승님을 생각했다.
스승님께서 세상에 풀어 놓으신 대연정심결 덕분에 난혼마녀 소난소가 제정신을 되찾았고, 그런 그녀가 염라혈승 축호탁에 대항해 아버지를 지켜줬다니.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이 촘촘하게 얽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삼 스승님께 감사했다.
그때 소난소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혹시 선우 공자가 익힌 무공이…?”
나를 보는 그녀의 조심스러운 눈빛에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마 월하환검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축호탁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던 모습을 떠올린 것이겠지.
그 순간을 떠올리면 나 역시 등이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월하환검무에 먹혀 버릴 뻔했던 순간이었으니까.
고작 이 식 현월을 전개했을 뿐이었는데, 그 순간 환각 상태에 빠져서는 나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상태로 조금만 더 있었다면 소난소에게도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알 수 없었던 순간이었다.
‘정말 위험했지.’
그때 내 정신을 깨운 것은 우습게도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외침이었다.
‘진아!’라고 외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퍼뜩 내가 어떤 상태인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문득 술을 부모 앞에서 배우라는 게 이런 이유인가 싶기도 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소난소에게 대답했다.
“제가 익힌 것은 혈교 무공은 아닙니다. 다만 역시 정신적으로 조금 위험한 부분이 있어 저 역시 대연정심결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아아!”
그녀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같은 대연정심결을 익혔다는 사실에 공감대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대연정심결을 익혀 광기에서 벗어났다는 걸 확인한 이상 더 그녀에게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선배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혹시 어디 다른 가실 곳이 있으십니까?”
그러자 그녀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응? 날 그냥 보내 줘도 돼요? 난….”
뒷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무슨 얘기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무림 공적인 혈교의 난혼마녀라는 얘기를 하려했던 거겠지.
빙긋이 웃으며 대답해 줬다.
“선우가를 지켜 주신 은인께서 어디로 가신다면 저희가 감히 어떻게 말릴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희는 좀 더 선배님을 오래 모시고 싶긴 합니다. 혹여 가실 곳이 없으시다면 저희 선우가에서 식객으로 모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놀라움의 빛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장난기로 바뀌어 갔다.
“흠, 내가 좀 갈 곳이 많긴 한데, 그렇게까지 사정한다면야… 한번 그래 볼까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렇게 묻는 그녀에게 나 역시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해 줬다.
“그래만 주신다면 저희 선우가의 다시없을 영광이겠습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선배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다행이었다.
그녀라면 내가 전선에 돌아가 있는 동안에도 아버지와 선우세가를 지켜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녀에 대한 정보라면 노삼룡이 잘 통제해 줄 테고 말이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