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누명
제갈서율은 멍하니 선 채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두 곳에서의 싸움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누가 적인지도 명확했고 자신 또한 도와줘야 할 것 같았지만,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끼어들 엄두도 나지 않았다.
여령색마 손은상과 탐화색마 화사유의 싸움은 비현실적이었다.
눈으로도 좀처럼 따라갈 수 없는 속도가 그랬고, 그들이 움직이는 주변이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 가는 모습이 그랬다.
말로만 듣던 호신강기를 옷처럼 입고 있는 손은상이나, 손을 뻗을 때마다 요술을 부리듯 몇 장 떨어진 곳을 파괴하고 있는 화사유의 모습이란….
마치 어렸을 적 읽고 있으면서도 거짓말이라고 비웃었던 무협지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저게 바로… 절대자들의 싸움.’
그것을 바라보는 제갈서율은 마치 개미가 되어 사막에 떨어진 것만 같은, 또는 송사리가 되어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대자연을 바라보듯 압도적이고 막막했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도 또 다른 싸움만큼 제갈서율을 서럽게 만들지는 못했다.
선우진과 구유상의 싸움.
자신과 별로 나이 차이도 나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제갈서율의 눈에는 자조적인 눈물이 글썽거렸다.
‘내가 천혜검봉이라고? 하하, 하하하하.’
혈교도인 듯한 남자, 구유상이 펼치는 혈뢰검결은 경이로웠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붉은 뇌전은 물론, 일 검 일 검을 펼칠 때마다 느껴지는 강력한 위력과 속도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전설 속의 뇌신이 지금 있다면 저렇게 싸웠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였다면 아마 단 일 검도 받아 내지 못했겠지….’
하지만 그와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선우진의 선우십삼검과 사일검법은 신비로웠다.
지난날 선우가의 가주인 선우중이 펼쳐 그녀를 홀딱 반하게 만들었던 선우십삼검은, 선우진의 손에서 더욱 진화한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검을 보고 있던 제갈서율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워….”
그랬다.
선우진의 검은 아름다웠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어떤 것이 환검이고 어떤 것이 실검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이 환상 그 자체인 것만 같았다.
또한 가끔씩 결정타로 섞어 쓰고 있는 사일검법은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무림 최고의 쾌검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는 그야말로 빛살 그 자체와도 같은 검격들이었다.
아직 경지가 모자라는 제갈서율도 한 가지만큼은 알 수 있었다.
선우십삼검도, 사일검법도, 그 하나만 놓고 봤을 땐 혈뢰검결에 비해 모자라 보이지만, 둘의 환상적인 조합이 혈뢰검결을 누르고 있다는 것을.
구유상의 얼굴에 보이는 깊은 상처가 그 증거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 선우진의 움직임은 또 한 번 달라지고 있었다.
제갈서율이 경악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저, 저게 뭐야?”
선우진의 검영이 만든 빛의 날개가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환검일 것이 분명한 연보랏빛 날개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붉은 뇌전을 피하며 깃털 같은 검영들을 쏟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은 마치 거대한 새가 붉은 뇌전을 피해 하늘을 날고 있는 것만 같았다.
중간중간 쏟아 내는 깃털 같은 검영들은 환검인 듯 실검이었고, 실검인 듯 환검이었다.
구유상은 압도적인 위력의 혈뢰검결을 펼쳐 내고 있음에도 선우진의 환상적인 공세를 견뎌 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제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그 순간, 다시 한번 선우진의 검이 빛살이 되어 공간을 관통했다.
쉬이익!
“!”
구유상은 이번에도 황급히 몸을 피하려 해 봤지만 아까처럼 운이 좋지는 않았다.
푸우욱!
그는 자신의 어깨를 꿰뚫은 빛살에 경악한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선우진의 검이 약간 흔들리는 것만으로 그의 검을 든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푸아악!
“안 돼!”
구유상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하지만 선우진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이제 끝이다!”
선우진이 그의 심장을 향해 다시 한번 쏘아지려 할 때였다.
푸우욱!
“크으윽!”
또 한 명의 가슴이 꿰뚫렸다.
그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 선우진이 시선을 돌리자, 바로 여령색마 손은상의 수도가 화사유의 가슴을 꿰뚫어 버린 것을 볼 수 있었다.
두 초고수들의 싸움이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화사유의 가슴을 어렵지 않게 관통한 손은상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뭐냐, 너? 일부러 가슴을 내주다니?”
그랬다.
정신없이 뒤로 몰리던 화사유가 마치 자살이라도 하듯 손은상에게 가슴을 내줬던 것이었다.
그리고 손은상의 수도가 자신의 가슴을 꿰뚫자 그 팔을 꼭 붙잡고 있었다.
화사유가 죽어 가면서도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함께 가자꾸나, 손은상.”
“뭐?”
그 순간, 화사유의 눈에서 짙은 혈광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선우진의 기억 속에 있는 것과 같은 모습, 탐혈마군 지광옥에게 자폭했던 석경달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손은상이 다른 손으로 급히 화사유의 머리를 부쉈다.
퍼석!
하지만 한번 발동된 혈교의 비기 폭살뢰는 머리가 없어져도 멈추지 않았다.
곧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석경달이 일으켰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위력의 폭발이었다.
“세상에….”
제갈서율은 난생처음 보는 엄청난 위력의 폭발에 멍하니 선 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폭발을 중심으로 반경 십 장 정도가 완전히 초토화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도 저기에 휘말렸더라면….’
그랬다면 아마 흔적도 남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폭발이 아까 그 위치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휘말렸을 것이고 말이다.
제갈서율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된, 또한 소란을 듣고 어느새 밖으로 나와 관전하고 있던 가주 선우중과 선우세가의 사람들을 구해 낸 두 사람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거대한 호신강기를 펼쳐 이쪽 방향으로의 폭발을 막아 냈던 손은상이 다시 그것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있던 선우진에게 웃으며 말했다.
“휴우, 진짜 죽을 뻔했네. 네가 나를 살렸구나? 그 참,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목숨 빚을 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것도 이런 어린 아해에게 목숨 빚을 지게 되다니 말이야.”
그러자 위기의 순간 질풍처럼 들이닥쳐 손은상을 붙잡고 있던 화사유의 두 손을 베어 냈던 선우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를 도와주러 와 주셨다가 봉변을 당하실 뻔했는데 빚이라니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선우진은 화사유의 두 손을 베어 냄과 동시에 ‘호신강기!’라고 외쳤고, 그 말을 바로 알아들은 손은상은 화사유의 몸을 저 멀리로 밀쳐 버리고는 동시에 호신강기를 전개했었다.
그것이 저 거대한 폭발에도 두 사람이 살아남게 된, 그리고 뒤에서 보고 있던 제갈서율과 선우세가의 사람들까지 살아남을 있게 된 이유였다.
손은상은 예뻐 죽겠다는 듯 선우진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어이구,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그 상황에서 날 구하겠다고 온 것 자체가 대단한 거란다, 아가야. 내 협객이라 자부하는 놈들을 수없이 봐 왔지만 너처럼 행동하는 놈들은 손에 꼽을 정도거든.”
그러고는 애틋한 눈빛으로 물었다.
“너 정말 나랑 잘 생각…?”
하지만 그렇게 말하려던 손은상은 문득 뭘 떠올렸는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러자 선우진이 씨익 웃으며 되물었다.
“손 선배님, 괴의 어르신은 잘 계십니까?”
그 질문에 손은상은 살짝 흠칫하더니만 시선을 피하며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구? 그 고집불통? 내가 그걸 어찌 알겠니? 그 작자가 잘 지내든 말든.”
그 토라진 듯한 모습에 선우진은 사실은 육십이 넘었을 이 어려 보이는 여인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진짜 십 대, 이십 대의 여인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도 관심이 가는 남자가 자기 마음대로 안 될 때 보이는 여인의 모습 말이다.
지난 삶에서 두 사람이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는 선우진은 이번 생에서도 그것만큼은 바뀌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슬쩍 말을 꺼냈다.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선배님. 지난번에 뵀을 때 두 분이 어쩐지 잘 어울리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좀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손은상이 약간 흠칫하더니 슬쩍 물었다.
“…우리가 잘 어울려 보였어?”
“아, 네. 물론 선배님이 훨씬 아까우시지만요.”
“그지! 그건 당연한 거지! 어디 그런 늙다리를!”
물론 실제 나이는 손은상이 더 많다는 얘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어쨌든 손은상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그녀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고는 선우진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내가 필요한 일은 다 해결이 된 건가?”
그렇게 질문하는 그녀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그만 돌아가고 싶은 것 같은 기색이었다.
그 모습에 웃음 지으며 선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 끝났습니다. 이제 제가 선배님께 융숭한 대접을 좀….”
“아니야! 됐다! 대접은 무슨! 일 끝났으면 된 거지! 난 이제 간다!”
그와 동시에 손은상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신법 하나는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다고 자신했던 선우진마저도 고개를 내저을 만큼의 엄청난 속도였다.
잠시 어이없는 듯 웃음 짓고 있던 선우진은 이제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한쪽에 쓰러져 있는 구유상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아까의 폭발 때 황급히 도망치려 했었다.
어쩌면 화사유가 자폭을 한 것도 그가 도망갈 수 있게 틈을 벌어 주려 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럴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운이 없게도 화사유의 뼛조각이 심장을 관통해 그대로 즉사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를 사로잡아 혈교의 정보를 캐내려고 했던 선우진에게도 아쉬운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웠다.
선우세가에서 외가 쪽 세력들을 모두 쳐냈고, 귀주성에 암약한 혈교의 세력들도 다 드러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반면 아버지나 선우세가의 주축이 될 만한 무인들 중 죽거나 다친 사람도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최상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선우진은 마침내 하늘을 바라보며 개운하게 웃음 지을 수 있었다.
“해냈구나.”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제갈서율과 선우세가의 사람들이 눈부신 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손은상과 화사유, 선우진과 구유상의 결전이 있었던 지 하루가 지났다.
그 하루는 무림의 호사가들에게 있어선 무척이나 풍요로운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그 하루 사이, 운씨세가가 혈교의 괴뢰였다는 사실이 무림에 쫘악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곳을 습격했던 무림맹의 타격대가 혈교의 탐화색마 화사유에 의해 전멸당했다는 비보도, 그래서 비상이 걸린 무림맹이 귀주성의 혈교도들을 악착같이 척살하고 있다는 내용도 역시 호사가들에겐 절대 놓칠 수 없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 소식보다 더 호사가들을 흥분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은 바로 선우세가를 치러 갔던 탐화색마 화사유가 마침 그곳에 머물고 있던 여령색마 손은상에 의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무림의 호사가들은 모두 흥분했다.
“탐화색마! 그자가 죽었다고?!”
“그래! 그것도 여령색마 손은상에게 죽었다지 않은가?! 무림에서 두 번째로 강한 색마가 첫 번째로 강한 색마에게 죽은 것이지!”
“크으, 대단하군! 그게 진짜라면 그전 정말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이 아닌가? 그야말로 색마대전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 그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봤어야 하는 건데!”
물론 때때로 무림맹의 타격대를 몰살시킨 화사유가 왜 선우세가로 찾아갔던 것인지, 또 왜 하필 그때 손은상이 선우세가에 있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 소문 자체가 하오문 귀양 지부장 노삼룡이 각색해서 퍼트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 어디에서도 선우진의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것 또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는 사이, 선우세가의 사람들은 세가 내에서 전투의 흔적을 어느 정도 지워 낼 수 있었다.
또한 개양문에 갔던 첫째 선우성과 제갈지용, 지난 혈교도들의 침입 때 뒷문을 통해 서기당으로 피하게 했던 넷째 선우기와 부인들도 모두 세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자 선우가주인 선우중은 갑자기 선우세가의 모든 인원들을 연무장에 모이게 했다.
선우세가의 가족들은 물론 제갈세가의 사람들과 단가장의 장자 단하선, 선우가의 일반 무사들까지도 모두 다 모이게 한 최상급의 소집령이었다.
선우중은 그들이 모두 모인 앞에서 입을 열었다.
“오늘 모두를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그간 우리 선우세가를 좀 먹고 있던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침중한 목소리였지만 거기에 실린 강력한 내공에 연무장에 모인 모두는 그의 목소리를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선우중의 말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선우중이 다시 말했다.
“죄인들을 데려와라.”
그러자 무사들이 묶여 있는 두 명의 여인을 연무장 중앙으로 끌고 왔다.
그녀들은 선우중의 사 부인인 운 부인과 그녀의 딸인 선우연하였다.
아혈을 점혈 당한 상태인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들의 초췌한 모습에,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더욱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 사 부인? 막내 아가씨?”
“뭐야? 대체 무슨 일이지?”
“지난번 하씨세가와의 싸움 때 이 부인, 이 공자와 같은 상황인가?”
그때 선우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틀 전! 우리 선우가의 무사들은 혈교 마두들의 침입을 목숨 걸고 막아 내야만 했었다!”
그러자 모두가 조용히 선우중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우리는 결국 모두의 힘으로 그 악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전 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던 혈교 마두들을 물리치고, 우리 힘으로 선우세가를 지켜 냈던 것이다!”
그의 말에 모든 무사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틀이 지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슴 뜨거워지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선우중의 목소리가 갑자기 침통해졌다.
“그런데! 그 후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한 가지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쳐들어왔던 혈교의 마두들이 사실은 금사에 있는 내 처가, 운씨세가에서 왔다는 것을 말이다! 운씨세가는 이미 혈교 마두들의 소굴이 된 지 오래였던 것이다!”
그 말은 아직 정보를 듣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너무도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일반 무사들은 깜짝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앞에 끌려 나와 있던 운 부인과 선우연하의 얼굴도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하지만 선우중은 거기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놀라운 사실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을 우리 선우세가로 불러들인 사람이 바로 저기 있는 내 딸 연하라는 사실을 또한 알게 되었다!”
그러자 이제 선우세가의 사람들은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선우연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너무 지나치게 충격적인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운씨 부인 또한 경악한 얼굴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하얗게 질린 선우연하가 마구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선우중이 침중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짧게 말했다.
“아혈을 풀어 주어라.”
그러자 곧 그녀의 아혈이 풀렸고 선우연하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저, 저는! 운씨세가가 혈교의 소굴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제가 개양문으로 시집가지 않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을 뿐,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전혀 알지 못했어요! 아버지, 소녀는 억울합니다! 저는 결코…!”
하지만 선우중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무겁게 물었다.
“지난번 단가장의 단하상 공자를 죽이고 네 오라버니인 진이에게 누명을 덮어씌울 때처럼 말이냐?”
그 말은 마치 선우연하의 심장을 쪼개 버리는 얼음 칼날과도 같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경악한 그녀의 동공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선우중이 드디어 분노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감히! 무고한 단 공자를 청부 살인하고, 그것도 모자라 네 오라비에게 누명을 씌워!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더냐?! 그러고는 그때와 똑같이 해 달라고 요청하고서 고작 혈교도임을 몰랐으니 무고하다고?! 억울해?! 네가 정녕 사람이기는 한 것이냐?!”
사람들은 이제 망연한 표정으로 선우연하와, 그녀를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선우진을 번갈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선우진은 가슴에서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야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자신에게 미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야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것은 선우진 자신에게는 한 번의 생을 건너서야 드디어 받을 수 있게 된 사죄의 눈빛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드디어 풀게 된 억울한 누명에,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비참하게 죽어 간 친구의 얼굴에 가슴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선우중이 다시 목소리를 높여 선언했다.
“연하와 함께 운씨세가와 소통하며 우리 가문을 어지럽힌 운 부인은 즉시 뇌옥에 가두도록 해라! 그리고 연하는 단가장으로 보낼 것이다! 그곳에서 연하를 갈가리 찢어 버리든 평생 동안 노비로 살게 하든 나는 일절 상관하지 않겠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선우중의 뒤에 서 있던 단가장의 장자 단하선에게로 향했다.
그가 왜 이제껏 선우중의 뒤에 서 있었는지 궁금해했었는데,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우중이 그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말 미안하네. 가문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자식을 잘못 키운 내 죄로, 아까운 단가장의 인재가 희생당하고 말았네. 내 평생에 걸쳐 단가장에 속죄하겠네.”
그러자 단하선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어찌 가주님 때문이겠습니까? 모두 다 혈교 마두들의 음모 때문이지요.”
단하상이 죽을 당시의 운씨세가는 아직 혈교에 장악당하기 전이었다.
그 사실을 단하선도 잘 알고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 책임을 혈교에게로 돌려 버렸다.
선우세가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돌려서 표현한 것이었다.
선우중과 손을 굳게 맞잡으며 그런 대화를 나눴던 단하선은, 문득 한쪽 옆에 있던 선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말했다.
“그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느라 마음고생이 많았을 걸세. 고생했네, 진. 그리고, 오해해서 미안하네.”
그렇게 말한 단하선은 선우진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은 선우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고,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선우진의 무고함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깊은 한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우우….”
지난 삶에서부터 가슴에 답답하게 얹혀 있었던 억울함을 이제야 밖으로 내뱉을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