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소가주
선우가주 선우중은 이번 행사를 통해 선우세가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선우진의 누명을 벗겨 주고 운씨세가의 세력을 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용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잠시 따뜻한 눈으로 선우진과 당가장 장자 단하선의 포옹을 지켜보던 선우중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러자 모든 이들이 다시 한번 선우중에게 주목했다.
“다들 알겠지만 나는 얼마 전 비무를 통해서 선우세가의 후계자를 정하겠다고 선언했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후계 문제라니, 이번 주제 또한 폭탄선언일 것이 충분히 예상됐던 것이다.
특히 맏아들 선우성과 넷째 선우기는 눈이 번쩍 뜨여서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제 후보는 자신들 둘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선우중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비무를 지금 이 자리에서 하려 한다!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많이 빨라졌지만, 그간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빠르게 후계자를 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간 하씨세가와의 싸움이나 혈교도와의 싸움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있었던 만큼,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한시라도 빨리 후계자를 정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말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선우중이 아들들을 보며 말했다.
“자, 소가주 후보자 세 명은 모두 앞으로 나오도록!”
그 말에 무심코 앞으로 나가려던 넷째 선우기가 문득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응? 근데 왜 세 명이지?”
“음? 세 명?”
뒤늦게 그 말뜻을 깨달은 선우성 역시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셋째 선우진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선우기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뭐요, 셋째 형? 셋째 형이 비무를 하겠다는 거요? 정신 나갔소?”
선우성 또한 실소하며 말했다.
“뭐야? 세 명이 진이까지 세 명이라는 거였어? 크크크크! 진아, 누명을 벗게 되어 기분이 좋은 건 알겠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냐?”
그러자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형님, 그리고 기야. 제가 누명을 벗은 것에 대해서 뭔가 제게 해 줄 말은 없으십니까?”
그 말에 선우성의 표정이 살짝 묘해졌다.
선우진이 누명을 뒤집어썼을 때 자신이 그에게 했던 모진 말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우성은 헛기침을 하고는 선우진의 눈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흠흠, 무슨 말 말이냐?”
선우기는 더 심했다.
그는 피식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운이 좋았구려, 형님. 사람이 얼마나 모자라면 그런 누명이나 쓰고 다니시오?”
그의 말에 선우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가 보구나.”
그때 가주 선우중이 물었다.
“혹시 먼저 대결하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
그러자 넷째 선우기가 반색하며 서둘러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접니다! 소자가 먼저 셋째 형과 대결해 보고 싶습니다! 제게 먼저 기회를 주십시오, 아버지!”
사실 선우기는 이제 후계자에 대한 미련을 거의 버린 상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큰형 선우성을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저 망신만 당하지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셋째인 선우진이 후계자 후보라니 그로서는 너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 대신 망신을 당해 줄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말이다.
그러자 가주 선우중이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기, 네가 진이와 먼저 대결하고 싶단 말이지?”
선우진을 두들겨 팰 생각에 신이 나 있는 선우기로선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세가의 무사들이 경악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선우중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려무나.”
***
제갈세가의 장로인 제갈지용은 복잡한 눈빛으로 눈앞에서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우중이 드디어 선우세가에서 외부의 세력을 모두 털어 내는 데 성공한 모습이었다.
하씨세가를 점령했고, 혈교도의 세력으로 개양문을 몰락시켰으며, 이제 운씨세가의 세력까지 털어 냈다.
아직 넷째 선우기의 외가인 서기당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운씨세가와 연합하지 못하는 서기당으로선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그 모든 과정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깔끔하게 진행됐다.
제갈지용 자신이 봐도 박수를 쳐 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만큼은 아니었다.
그 직후 바로 후계자를 정하는 비무를 진행하는 것만큼은 그로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만약 자신이 선우중이라면 여러 가지 핑계들을 들어 상황을 질질 끌었을 것이었다.
누가 후계자가 되든 선우가의 자제들이 제갈서율을 이길 수 없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설사 후계자를 정한다 해도 자신들이 모르게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노린 것인지 그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냥 생각이 짧았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간 보여 준 선우중의 심계를 봤을 때, 여기에도 분명 다른 의도가 숨어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여러 가지 생각들로 고심하고 있던 제갈지용은 문득 뭔가를 깨닫고는 넷째 선우기를 바라봤다.
‘혹시 넷째 선우기에게 뭔가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서기당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던 거고?’
문득 떠올랐던 그 생각은 생각을 거듭할수록 점점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저 선우중이라면 이미 암중에 서기당과 밀약을 맺었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제갈지용은 이제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선우기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는 선우기에 대해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선우중이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면 분명 자신이 아직 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았다.
제갈지용이 그런 생각을 하며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을 때, 선우기는 선우진을 향해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셋째 형, 좀 아프고 망신스러워도 참으시오. 원래 모자란 사람은 좀 맞아야 성숙하고 어른도 되고 그런 거 아니겠소? 그러게 왜 이 자리에 나오고 그러셨소? 평소처럼 그냥 죽은 듯이 숨어 있으면 될 걸 말이오. 아, 이제 숨겨 줄 연하도 없으니 그것도 안 되려나?”
그렇게 말하며 킥킥거리는 선우기를 향해 선우진은 그저 빙긋이 웃어 줄 뿐이었다.
그러자 가까이서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던 장로와 대주들, 그리고 일반 무사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어쩌면 저렇게 죽여 달라고 사정을 할 수 있는지.
아무래도 오늘 선우기의 명복을 빌어 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 잔뜩 거드름을 피우던 선우기가 드디어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환한 얼굴로 소리치며 출수했다.
“자, 간다!”
슈하악!
그의 정권이 네 개의 수영으로 갈라졌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얼마 전 선우진을 두들겨 팰 때 사용했던 질풍십삼박의 초식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불행히도, 결과는 그때와 같지 않았다.
짜악!
선우기는 갑자기 뺨이 터지는 듯한 강력한 통증과 함께 빛이 번쩍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뺨을 어루만지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왜 자신이 이렇게 아픈 것인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그가 멍한 눈빛으로 선우진을 쳐다봤다.
그러자 선우진이 빙긋이 웃음 짓고는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모자란 사람은 좀 맞아야 성숙하는 법이지.”
“…에?”
그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선우기의 반대쪽 뺨에 다시 번개 같은 따귀가 날아들었다.
짜악!
“!”
선우기는 또 한 번 눈앞에서 불이 번쩍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명도 지를 수 없을 만큼 아팠다.
그는 이제야 자신이 방금 선우진에게서 따귀를 맞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도 두 대나 맞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자 수치심과 더불어 분노가 확 치밀어 올랐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셋째 형 따위에게 따귀를 맞다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통도 참으며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정권을 뻗으려 했다.
“감히!”
하지만….
짜악! 짜악! 짜악!
선우진의 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선우기가 손을 뻗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로 뺨을 후려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아무리 두 팔을 휘저어도 선우진에게 반격하기는커녕 도저히 따귀를 막을 수도 없었다.
짜악! 짜악! 짜악! 짜악! 짜악!
“우워어어어어!”
선우기는 드디어 울부짖기 시작했다.
수치심이고 뭐고 이젠 너무 아팠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앞이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우진의 따귀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짜악! 짜악! 짜악!
그러자 선우기는 이제 그대로 풀썩 쓰러지듯 주저앉아서는 납작 엎드려 사정하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제발 그만하시오!”
하지만 그런 선우기를 향해 선우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흠, 바로 얼마 전 일이 떠오르는구나. 내가 그만해 달라고 사정했을 때 네가 어떻게 했더라?”
그 순간 선우기의 머릿속에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바닥을 뒹굴고 있는 선우진을 발로 마구 후려 찼던….
선우기는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잘못했소! 내가 정말 잘못했소, 셋째 형! 제발 그만하시오! 내가 정말 잘못했단 말이오! 제발… 제발 이제 그만….”
사정하던 선우기는 어느새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무인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너무도 비굴하고 추한 모습이었다.
선우가의 무사들은 모두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선우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 선우기를 지지했던 신응삼대주 공도경은 무사들의 시선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무사로서 선우기의 인생은 끝났다는 것을….
선우진처럼 엄청난 반전을 보여 줄 수 있다면 모를까 앞으로 선우기는 선우세가의 수치로 기억될 것이라는 걸 말이다.
선우진은 추하게 흐느끼고 있는 선우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선우세가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라고 알려져 있던 선우성이 경악한 표정으로 선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너, 네, 네가 어떻게?”
그러자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전선에서 살아남는다오. 그래서 형님은 뭘로 하시겠소? 권각이요? 아니면 검?”
그러자 그 말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선우성이 아니었다.
선우기가 당할 때부터 멍한 눈빛이 되어 있던 제갈지용이었다.
‘전선….’
그랬다.
전선의 위험성은 제갈지용 자신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사히 살아서 휴가를 받아 돌아온 선우진에 대해 전혀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니.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그는 그야말로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선우진이 오래전부터 선우세가의 수치였다는 사실에서 온 고정관념에, 진실을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일순 정신이 아득해졌던 제갈지용은 서둘러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서율이의 상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것이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제갈지용은 이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선우진을 뚫어져라 집중해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선우진을 잠시 노려보던 선우성이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그래, 내가 그간 너를 너무 무시했구나. 이제 제대로 상대해 주겠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검에선 아지랑이 같은 검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일류 중급의 무사가 발현할 수 있는 검기였다.
그러자 선우진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형님. 형님은 지금도 저를 충분히 무시하고 계시다오.”
“…뭐라고?”
선우성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선우진은 이제 말없이 검을 뽑았다.
스르릉!
칠흑의 묵랑검이 자신의 새하얀 검날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선우진이 짧게 기합을 내질렀다.
“합!”
그러자 선우성의 눈이 빠져나올 듯 크게 확대됐다.
그가 경악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 어떻게!”
선우성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검에서 자신의 것보다 훨씬 뚜렷하고 넓은 검기가 안개처럼 뿌옇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일류 상급, 아니 일류 최상급도 될 것 같았다.
너무 놀라 손까지 덜덜 떨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순간, 선우진이 기습적으로 돌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합!”
슈하악!
그러자 선우진의 검영이 커다란 날개를 만들었다.
선우성도 익히 알고 있는 선우십삼검의 일 초, 신응비상이었다.
그러자 이를 악문 선우성도 마주 검을 휘둘렀다.
선우십삼검으로 자신이 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익!”
슈하악!
하지만 그가 만든 검영의 날개는 누가 봐도 작고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두 검영의 날개가 충돌하려는 순간, 선우진의 날개가 마치 살아 있는 듯 활개를 치더니 선우성을 그대로 감싸 버렸다.
화아악!
선우성은 이제 사방에서 조여 오는 검영에 당황해서는 검을 마구 휘저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초식이건만 선우진의 신응비상은 그에게 너무나도 낯설어 보이고 있었다.
“크윽!”
그리고 그 순간, 환검의 날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선우성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춘 묵랑검 하나뿐이었다.
선우성은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묵랑검을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이럴… 수가….”
완패였다.
그도 이젠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늘 무시해 왔던 셋째 동생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자 선우진은 천천히 검을 거두며 그에게 전음으로 말을 전했다.
- 형님은 그래도 다른 형제들과 달리 사람의 선만큼은 넘지 않으려고 했었소. 그것이 형님과 형님의 어머니를 살렸다는 걸 잊지 마셨으면 좋겠구려.
선우성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항상 무시해 왔던 수치스러운 동생 선우진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된 것이었다.
선우세가의 진정한 후계자가 결정된 순간이었다.
가주 선우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선언했다.
“이로써 선우가의 후계자, 소가주는 셋째인 진이로 결정되었다!”
그러자 순간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선우진!”
“소가주님! 축하드립니다!”
그 광경을 보며 제갈지용은 또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선우진이 소가주가 되는 것에 대해 아무도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선우세가의 무사들에게 있어서 소가주는 이미 선우진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선우진이 선우가의 무사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갈지용의 명석한 두뇌는 빠르게 그 이유를 추측해 낼 수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평가가 달라진 이유가 다른 것일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혈교! 혈교의 마두들이 쳐들어왔을 때 선우진이 뭔가 보여 줬다는 건가?’
하지만 그의 명석한 두뇌는 곧 다시 그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고야 말았다.
‘개양문과 선우세가에 혈교의 마두들이 쳐들어온 시간은 거의 동시였다. 그러니 개양문에 있었던 선우진 공자가 그사이에 선우세가로 돌아가 마두들과 싸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그렇다면 대체 뭐지?’
제갈지용이 거듭된 의문에 미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가주 선우중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제갈 대협.”
제갈지용은 살짝 놀랐지만 겉으론 그런 티를 내지 않은 채 웃으며 대답했다.
“예, 선우가주. 말씀하시지요.”
그러자 선우중이 다소 미안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일전에 우리가 후계자가 정해지면 비무를 통해서 서로의 자녀들을 혼인시키기로 했던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제갈지용은 내심 잔뜩 긴장했다.
드디어 선우중이 약속에 대해 말을 꺼낸 것이었다.
이제야 숨겨 왔던 선우중의 꿍꿍이를 알 수 있게 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달리 제갈지용은 여유롭게 웃으며 선우중의 말을 받았다.
“예, 그랬었지요. 한데 그 얘기를 지금 왜…?”
그러자 선우중이 살짝 망설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우리 선우가의 후계자는 셋째인 진이로 결정이 났다오. 하나 제갈 대협도 아시다시피 진이는 현재 전선의 근무자 신분이지요. 그래서 곧 전선에 복귀해야만 하고, 앞으로도 사 년 정도는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오. 그러니 송구스럽지만 우리 약속도 그 이후로 미루는 것은 어떻겠소?”
순간 제갈지용의 눈이 번뜩였다.
이제야 선우중의 생각을 알게 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이 전선의 근무자라는 사실을 핑계로 사 년 후로 약속을 미루려는 것을 말이다.
‘그렇군. 사 년이면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지. 선우진의 무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수도 있을 테니까. 또한 그 기간 동안 서율이가 선우진을 기다려 준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얘기이니, 서율이에게 먼저 짝이 생길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핑계로 약속을 없었던 일로 하려는 생각이었구나!’
분명 그것은 선우세가 입장에서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명분도 충분했고, 실리도 챙길 수 있는 한 수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제갈지용이 그렇게 넘어가 줄 생각이 없다는 데 있었다.
이제 귀양의 진정한 지배자가 된 데다, 앞으로 귀주팔세의 수위를 차지하게 될 확률이 높은 선우세가에 고삐를 채울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갈지용이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비무를 진행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선우중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말이오?”
“그렇습니다. 선우가의 모든 무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후계자가 결정된 이 기쁜 순간에, 제갈가와 선우가의 혼인 또한 결정될 수 있다면 더욱 기쁘지 않겠습니까?”
제갈지용은 환하게 웃음 지었다.
선우중의 굳어 버린 표정을 보는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