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159화 (146/359)

159화 혼인 비무

제갈지용은 선우중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부드럽게 웃으며 제갈서율에게 물었다.

“서율아, 혹시 지금 비무를 하기에 곤란한 점이 있느냐?”

그러곤 바로 전음을 보냈다.

- 괜찮다고 하거라, 서율아! 지금 비무를 해야만 한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서 할 수 있다고 대답하거라!

제갈서율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숙부 제갈지용이 뭘 착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선우진을 반드시 이길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 착각을 바로잡아 줘야만 했다.

- 숙부님 저는….

하지만 마음이 급한 제갈지용은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 어허, 어서 할 수 있다고 대답하래도!

그때였다.

선우중이 끼어들며 말했다.

“제갈 소저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군요. 아무래도 오늘 비무를 하는 것은 무리일 듯합니다.”

그러자 제갈지용이 전음으로 호통을 쳤다.

- 어서 할 수 있다고 대답하라 하지 않느냐!

제갈서율로서는 이제 어쩔 수가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는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오늘 비무를 해도 상관없을 듯합니다.”

그러자 선우중이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선우진에게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구나. 진이 너도 괜찮겠느냐?”

그의 물음에 선우진은 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군요. 소가주로서 선우세가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이긴 쪽에서 상대방의 중요한 것들을 가져갈 수 있는 선우진과 제갈서율의 비무가 지금으로 결정된 순간이었다.

***

비무는 곧바로 치러졌다.

두 사람은 방금처럼 선우진과 선우성이 섰던 공간에 마주 서게 되었고, 그때완 달리 가족이 아닌 만큼 좀 더 격식을 차려야 했다.

제갈서율이 먼저 검을 들고 포권하며 말했다.

“제갈가의 직계 독녀 제갈서율입니다. 무림의 동도들로부터 천혜검봉이라는 과분한 별호를 선사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자 선우진 또한 묵랑을 든 채 포권하며 말했다.

“선우가의 소가주 선우진입니다. 무림의 동도들로부터 비천흑랑이라는 과분한 별호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제갈지용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음 짓고 있었다.

적어도 선우진의 소개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그의 소개를 들은 순간 제갈지용의 얼굴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비천흑랑? 비천흑랑 선우진이라고?’

그 별호는 분명히 제갈지용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비천흑랑이라는 선우진을 선우세가의 수치인 선우진과 연관 짓지 못했을 뿐.

제갈지용의 두뇌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비천흑랑 선우진이라면 분명….’

다음 순간, 제갈지용의 명석한 두뇌는 비천흑랑 선우진이 무슨 일로 이름을 떨치게 됐었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비천흑랑 선우진이라면 분명 흑상방의 절정 고수 흑살표 동패경을 죽이고 별호를 얻게 됐던…?!’

경악한 제갈지용의 눈이 커다랗게 확대됐다.

흑살표 동패경은 제갈서율과 동급인 절정 초입의 무인이었다.

하지만 제갈서율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고 노련한 무사이기도 했다.

근데 그런 동패경을 선우진이 죽였다는 것이었다.

제갈지용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흙빛으로 물들고 말았다.

그가 홱 고개를 돌려 선우중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무척 곤란해 보였던 선우중의 얼굴이 이제 편안하게 웃음 짓고 있는 것을….

제갈지용은 속으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안 돼!’

한편, 제갈서율은 복잡한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먼저 선우세가로 와서 그에게 이것에 관해 묻고 싶었다.

정말 자신과 비무를 할 생각인지.

그리고… 그래서 결국 자신을 아내로 맞이할 생각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결국 여러 가지 상황에 물어볼 수 없었는데, 이렇게 생각만 했던 그 상황이 진짜 닥쳐오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제갈서율이 계속해서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선우진이 먼저 말을 걸었다.

“검을 뽑지 않으실 겁니까, 소저?”

그러자 퍼뜩 정신을 차린 제갈서율이 입술을 깨물고는 낮게 물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죠, 당신? 정말로 나를….”

제갈서율이 차마 뒷말을 자신의 입으로 꺼내지 못했을 때였다.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속셈이라…. 이건 무슨 얘길까요? 누가 들으면 제가 비무를 강요한 줄로 알겠군요. 분명 저희 아버지께서 미루자고 하신 걸 제갈 선배님께서 밀어붙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자 제갈서율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랬다.

분명 표면적으론 그의 말이 맞는 얘기였다.

하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그것조차도 다 당신이 꾸민 것이 아니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사실은 원래 이것을 위해 모든 걸 꾸며 왔던 거라고.

저렇게 어쩔 수 없이 비무를 해야 한다는 태도가 아니라, 제갈서율 자신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모든 일을 추진해 왔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되어서도 여전히 전혀 상관없는 타인을 보는 듯한 그의 태도와 시선에, 제갈서율은 너무도 화가 나고 또 서운했다.

마침내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았다.

스르릉!

제갈서율은 결심했다.

최선을 다해서 그를 상대하기로.

자신 또한 좋아서 그와 혼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로 말이다.

그러자 선우진 또한 빙긋이 웃음 짓고는 묵랑을 뽑아 들며 말했다.

스르릉!

“먼저 오셔도 되오.”

하지만 제갈서율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무림에서의 명성은 제가 더 위인 것 같군요. 공자가 먼저 오시죠.”

제갈서율은 이를 악물었다.

어느 것 하나 져 주고 싶지 않았다.

이 승부 또한 절대 호락호락 양보해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사실, 제갈세가의 팔진검법은 공격보다 방어에 더 뛰어난 검법이기도 했다.

그러자 맑게 웃음 지은 선우진이 검을 겨누며 말했다.

“그럼 먼저 가겠소.”

동시에 선우진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파앙!

제갈서율은 이를 악물었다.

지난 싸움 때 익히 봤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것과 직접 체감하는 것은 그 느낌이 전혀 달랐다.

거의 움직임과 동시에 자신의 앞까지 들이닥친 느낌이었다.

“이익!”

제갈서율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팔진검법 일 초.

출사표.

촤아악!

그러자 공격해 온 자를 오히려 난관에 빠트린다는 제갈세가의 팔진검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철통같은 방어와 미세한 틈.

게다가 그 틈도 사실은 함정이었다.

팔진검법의 일 초식인 출사표는 상대방이 틈을 노리고 검을 찔러 들어오면 반격을 당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초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선우진의 선택은 정면 돌파였다.

선우십삼검 삼 초.

신응강하.

매가 강하하듯 선우진의 검이 그 틈을 향해 빠르게 내리꽂혔다.

제갈서율이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속도로 공격해 일 검에 끝내려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갈서율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변초를 전개했다.

‘얕보지 마!’

슈하악!

그녀의 검이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선우진의 검을 봉쇄했다.

그와 동시에 바로 반격을 가하는 것이 일 초 출사표의 묘용이었는데….

제갈서율은 그의 검을 봉쇄할 수가 없었다.

막 검을 마주치려는 순간 선우진의 검이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스스슥!

“!”

그녀는 알 수 없었지만, 너무도 시기적절하게 사용된 선우십삼검의 오 초 색즉시공의 묘용이었다.

그리고 허를 찔린 그녀가 당황하는 순간, 선우진의 검영이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화아악!

검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날개가 제갈서율의 전신을 감싸오고 있었다.

환검일 것이 분명한데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지독한 현실감이 느껴지는 초식이었다.

제갈서율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아압!”

팔진검법 삼 초.

천하삼분.

그러자 제갈서율의 검에서 옥색의 강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촤아악!

그녀의 주변을 세 개의 공간으로 갈라 버리는 위력적인 검강이었다.

그 강력한 검격에 주위 공간과 함께 그녀를 뒤덮었던 검영의 날개가 찢겨 버렸다.

그러자 선우진은 찢긴 날개 뒤에서 제법이라는 듯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본 제갈서율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눈 아래로 보고 있는 듯한 그의 표정에 너무도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그 얼굴을 굳어지게 만들고 싶었다.

“타아앗!”

팔진검법 칠 초.

칠종칠금.

슈하악!

그녀의 검이 선우진을 향해 찔러 갔다.

상대를 끝까지 추적해 꿰뚫는 팔진검법의 가장 강력한 공격 초식인 칠종칠금이었다.

그러자 공기처럼 가볍게 뒤로 물러서는 듯했던 선우진이 마주 검을 휘둘렀다.

선우십삼검 십삼 초.

환검경.

그 순간, 수십 수백 개로 분열한 선우진의 검이 온 공간을 가득 채웠다.

화아아아악!

제갈서율은 더 검을 찔러 가지 못했다.

검을 향할 대상을 잃어버려 칠종칠금이 무력화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녀는 더 이상 검을 휘두를 수 없었을 것 같았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봤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공간이 연보랏빛 검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연보랏빛 빛무리 속에 자신의 몸이 떠다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결국 검을 내린 채 멍하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워.”

그 빛무리가 사라졌을 땐 어느새 제갈서율의 뒤로 이동해 있는 선우진의 검이 그녀의 뒷목을 겨누고 있었다.

승부가 끝난 것이었다.

***

제갈지용은 이제 완전히 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설마설마했었는데, 정말 제갈서율이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약속대로라면 제갈서율은 이제 선우진과 혼인하여 선우세가의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 돼. 그럴 순 없다. 서율이를 선우세가 따위로 보내다니, 절대 그럴 순 없어!’

제갈서율은 제갈세가에서 매우 중요한 인재였다.

그것도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인재 말이다.

제갈세가는 전통적으로 무림 최고 수준의 세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늘 상대적으로 부족한 무공 때문에 번번이 오대세가의 말석조차 차지하지 못하곤 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갈서율이 태어났었다.

제갈세가의 자손들 중 드물게 뛰어난 무재를 갖춘 그녀가.

그리고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녀는 마침내 제갈세가의 희망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당대의 유일한 희망이 말이다.

그래서 제갈세가는 절대 제갈서율을 어딘가로 시집보낼 생각이 없었다.

혼인을 한다 해도 당연히 최고의 조건과 무공을 갖춘 무사여야만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녀와 혼인한다면 무조건 데릴사위가 되어야만 했다.

이것이 제갈세가의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제갈서율을 선우세가 따위에게 시집보내야 할지도 모를 상황이 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것도 제갈지용 자신이 추진한 일 때문에 말이다.

제갈지용은 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깨물었다.

‘절대 안 된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어떻게든 그 일만큼은 막아야 했다.

설사 선우세가를 지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선우중이 여유 있게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승패가 결정된 것 같구려, 제갈 대협.”

그러자 제갈지용은 굳은 표정으로 묵묵히 선우중을 바라봤다.

이제는 그도 드디어 웃음을 가장할 수 없게 된 상태였다.

하지만 선우중은 그런 기색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제갈 소저는 저희 선우세가의 며느리가….”

그때였다.

제갈지용이 숨기지 못한 살기를 드러내고, 제갈서율이 상기된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이던 그때, 갑자기 선우진이 선우중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선우중이 슬쩍 제갈지용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죄송하다니, 뭐가 말이냐?”

그러자 선우진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큰 소리로 고백했다.

연무장에 모인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실 장래를 약속한 여인이 따로 있습니다! 하여 제갈 소저와는 혼인할 수 없습니다!”

“!”

그것은 충격적인 고백이 아닐 수 없었다.

장내의 모두가 할 말을 잃고 그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봤다.

물론 선우진에게 장래를 약속한 여인이 있다는 것이야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무려 천혜검봉이라고 불리는 제갈서율과의 혼인을 거부하다니.

그녀의 미모와 무공을 눈앞에서 지켜본 사람들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폭탄선언에 선우세가의 무사들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동시에 제갈지용의 얼굴에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서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갈서율은,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 경악한 눈빛으로 선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때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가주 선우중이 노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라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그러자 선우진이 절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이번에 집에 돌아온 것도 그녀와의 장래를 아버지께 허락받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발생하여 마음이 번잡하실까 봐 말하지 못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것은 정말 죄송하오나, 그녀와 저는 이미 헤어질 수 없는 사이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아버지!”

그러자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제갈지용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어렸다.

방금 전까지 죽이고 싶던 선우진이란 놈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우중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단호한 말투로 소리쳤다.

“절대 안 된다! 이것은 가문과 가문 간의 약속! 네 개인사 따위가 감히 양가의 관계를 망칠 사유가 된다고 생각하느냐?! 절대 허락할 수 없다!”

그러자 제갈지용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끼어들어 뭐라도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선우진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는 결연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선우가의 후계자가 제갈 소저와 혼인해야 한다는 양가의 약속 때문에 제 혼인을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소가주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폭탄선언이라 할 만했다.

아까 한 발언조차 별거 아니게 느껴질 정도였다.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이 경악했고, 제갈지용은 참지 못하고 감탄사를 토해 내고 말았다.

“오!”

그러자 이제 완전히 격분한 듯한 선우중이 소리쳤다.

“네놈이 선우세가의 명예를 땅바닥에 처박을 셈이로구나! 소가주의 자리가 그리 우스워 보이더냐?! 제갈세가와의 약속이 그렇게 우스워 보여?!”

하지만 선우진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역시 큰 소리로 소리쳤다.

“그녀와의 약속도 우습지 않습니다, 아버지! 그녀의 아버지께도 정식으로 혼약을 넣겠다는 약조를 드리고 온 것이란 말입니다!”

두 부자의 목소리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불안한 눈빛이 되어 그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자 선우중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대체 그 여인이 누구냐?! 누구길래 제갈세가와의 약속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냐?!”

그러자 선우진이 짧게 대답했다.

“사천당문의 여인입니다.”

그 대답에 선우중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뭐?”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묻자 선우진이 다시 한번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녀는 사천당문의 직계인 당여은 소저입니다. 저는 사천당문의 가주이신 당정후 대협께 정식으로 혼약을 넣겠다는 약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잠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던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 사천당문이라고?”

“그 사천성의 사천당문 말이지?”

“게다가 당정후면 당가 가주이신 독암지존 당정후 대협이 아닌가?”

“맙소사!”

제갈세가 역시 가주인 제갈지강이 무림맹의 군사 역할을 하고 있는 강력한 세가이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천당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천당문은 근 몇백 년간을 한 번도 오대세가에서 빠진 적이 없었던, 심지어 독과 암기의 조종이기에 무림인들에겐 무의식적인 공포로 각인되어 있는 그런 무림세가였다.

그런데 선우진이 그 사천당문의 가주와 약속을 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무게감이 그쪽으로 확 쏠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선우중은 이제 난감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러곤 제갈지용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갈지용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선우중이 지금 자신에게 물러날 기회를 주고 있다는 것을.

그는 감탄했다.

‘이것조차 계획된 것이었구나!’

생각해 보면 그토록 치밀한 계략을 세웠던 선우중이 제갈서율을 데려가겠다는 무리한 욕심을 부릴 리가 없었다.

그것이 진정한 파국이 될 거라는 건 그 또한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는 지금 자신이 체면을 차리며 물러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준 것임에 틀림없었다.

선우세가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약을 받아들여 주는 식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제갈지용은 다시 한번 감탄해야 했다.

‘선우중, 정말 무서운 자였군.’

아무래도 이후 귀주성의 패권을 차지하는 곳은 선우세가가 될 확률이 매우 높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어차피 나중의 얘기, 지금은 그가 만들어 준 상황을 감사히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제갈지용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흠, 흠. 들어 보니 선우 공자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 같군요.”

“제갈 대협.”

“생각해 보면 우리가 너무 젊은이들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고 섣불리 혼약을 결정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서로가 원하지 않는 혼인이라면 결국 그들을 불행하게 하는 것일 텐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우 가주?”

은근슬쩍 웃으며 파약을 말하는 제갈지용의 말에 선우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만약 못난 자식 때문에 양가의 관계가 틀어진다면, 이 죄를 대체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제갈지용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허허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정 아쉬우시면 다른 아이들을 짝지어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선우가주에겐 소가주가 아닌 다른 아들들이 있고, 저희도 방계의 여아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대놓고 다른 아들과의 혼약을 추진하자는 얘기였다.

앞으로 귀주성의 패자가 될 것으로 보이는 선우세가이니만큼, 절대 손해 볼 일이 아니라는 계산에서 나온 제안이었다.

그러자 선우중이 안심했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십니다! 역시 제갈세가 사람들의 지혜는 따를 수가 없군요!”

“과찬이십니다, 허허허허!”

물론 방금 젊은이들의 감정을 생각지 않은 혼약이 서로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얘기와는 전혀 상반된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양쪽 누구도 거기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서로가 원하던 것을 얻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원만하게 해결된 양가의 상황을 지켜보던 선우세가의 무인들은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제갈세가와의 관계도 틀어지지 않으면서 사천당문과의 약속도 지킬 수 있다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이제 후련한 표정으로 웃음 짓고 있었다.

단 한 명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말이다.

제갈서율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선우진이 했던 모든 말들이 비수처럼 푹푹 박혀 있었다.

자신과 절대 혼인할 수 없다니, 사천당문의 여식과 장래를 약속했다니.

비참했다.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비참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눈앞이 뿌예져 있었기에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손에서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선우진, 선우진, 선우진!’

그녀의 뇌리에 평생 잊히지 않을 ‘선우진’이란 이름 석 자가 낙인처럼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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