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여인의 한
운남성 점창산, 점창파 장문인의 집무실.
혈교오마이자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인 구유음마 지기음은 현재 바닥까지 부복해 가늘게 떨고 있는 중이었다.
거의 무림의 절대자에 가까운 그로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세가 그를 내리누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기세가 향한 곳이 그가 아님에도 그랬다.
퍼석! 챙! 콰직!
방 안의 집기들이 공중에 둥둥 떠올랐다가 퍽! 하고 깨져 나가고 있었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집무실의 벽도 점점 바깥쪽으로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이대로 있다간 집무실 자체가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때 그 모든 현상을 만든 장본인 사혜혈마 전무광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화사유와… 유상이가 죽었단 말이지? 그게 확실한 정보인가?”
그러자 지기음은 더욱 납작 부복하며 힘겹게 대답했다.
“저도 놀라서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조사해 봤습니다만… 아무래도 확실한 것 같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지존!”
그러자 혈마 전무광이 주먹을 꽉 움켜쥐며 씹어뱉듯 소리쳤다.
“손은상!”
와지직!
동시에 이미 천천히 우그러지고 있었던 탁자가 지기음의 눈앞에서 와직! 소리를 내며 그대로 짓이겨졌다.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는 지기음조차도 그 무형지기에는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려울 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지기음은 오히려 지금 혈마가 보여 주는 분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유상이 혈마에게 있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혈마가 진짜 애정을 가지고 소중하게 키워 온 후계자였다.
적어도 지금도 행방을 찾을 수 없는 외손자 마유겸 따위보단 훨씬 더 혈육에 가까운 존재가 바로 구유상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지기음은 지금 혈마가 당장 이차 정혈대전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교의 중원 진출이 계획보다 좀 더 앞당겨질 수도 있겠군.’
하지만 지기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혈마로부터 맹렬하게 뿜어져 나오던 기세가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그에 오히려 당황한 지기음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혈마를 바라봤을 정도였다.
그러자 그는 볼 수 있었다.
어느새 혈마의 얼굴이 평정심을 되찾은 것을.
침중한 얼굴의, 하지만 다시 냉정을 되찾은 혈마가 지기음에게 물었다.
“지금 무림맹이 귀주성을 들쑤시고 있다고 했나?”
지기음은 예상과는 달리 이토록 빨리 평정을 되찾은 자신의 주인에게 감탄하며 다시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예, 유상이의 부하들은 물론 각지에 심어 놓은 자들도 벌써 거의 전멸된 상태로 알고 있습니다. 놈들이 귀주성에 심어 놓은 씨앗들의 정보를 모두 얻은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확한 정보를 얻기도….”
“흐음.”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혈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기음, 어렵겠지만 귀주성으로 가 그 아이와 화사유의 시신을 찾아와 줄 수 있겠는가?”
지기음은 바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지존.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고 바로 나가려던 지기음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혈마에게 물었다.
“지존, 손은상 그년에게 복수는 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잠시 멀쩡해졌던 방 안의 공기가 다시 확 무거워졌다.
무의식적으로 분출한 혈마의 기세 때문이었다.
하지만 혈마는 아까처럼 폭풍 같은 기세를 뿜어내지는 않았다.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기음을 보며 말했다.
“자네나 척강이 손은상을 상대할 수 있다면야 지금 복수하는 것도 괜찮겠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의 말에 지기음은 차마 가능하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혈마와 동급인 천하사마의 일인인 그녀에게 자신이 복수한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였으니까.
멍청한 척강이라면야 할 수 있다고 날뛰었겠지만 결국 화사유처럼 개죽음을 당할 것이 뻔했다.
지기음은 다시 납작 엎드리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지존! 저희가 무능하여…!”
그러자 혈마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농담일세. 죄송할 게 뭐가 있겠는가? 자네가 손은상을 상대할 수 있다면 굳이 내 밑에 있을 이유가 없을 텐데 말일세.”
그러고는 웃음기를 지우고 나지막이 말했다.
“몇 년 안에 곧 기회가 오지 않겠나? 우리가 운남성을 벗어날 날이 곧 올 테니 말일세. 그때 복수해도 늦지는 않을 걸세. 그리고… 손은상이 머물고 있었던 곳이 선우세가라고?”
“예, 지존. 유상이 운씨세가의 뒤를 이어 점령할 계획이라고 밝혔던 곳이기도 합니다. 혹시 갔다 오는 김에 그곳이라도 먼저 쓸어버리길 원하십니까?”
지기음의 말에 혈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흐음.”
지기음이라면 선우세가 따위를 쓸어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그 정도라면 부족하나마 기분을 풀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혈마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굳이 더 무림맹을 자극할 필요는 없겠지. 또, 손은상이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고 말일세. 그냥 조용히 시신만 가지고 오도록 하게.”
손은상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역시 선우진의 지시를 받은 노삼룡이 소문을 조작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모를 도발에 대비해 손은상이 여전히 선우세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주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결국 그 안배가 지기음의 습격을 막아 낸 것이었다.
선우진으로선 알 수 없겠지만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혈마의 말에 지기음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예, 지존.”
지기음의 모습이 바로 사라지고, 혈마 전무광은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문득 혈교의 비기들을 떠올렸다.
혈교에는 무공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비기들이 존재했다.
독술, 섭혼술, 강시술은 물론 강령술, 초혼술, 이혼대법과 같은 술법에 가까운 다양한 분야의 비기들이.
지금 혈마가 떠올리고 있는 비기도 그중의 하나였다.
죽은 이의 혼을 불러내는 초혼술.
혈마가 중얼거렸다.
“유상이의 혼을 불러내 혈마인으로 만든 육신에 고정시킬 수만 있다면….”
물론 그것은 거의 성공 확률이 없는 얘기였다.
혈교의 긴 역사 속에서도 죽은 자의 혼이 다시 육신에 안착하는 것을 성공시킨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한 명이 있었다는 얘기는 불가능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리고 당대의 혈마인 자신은 많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인물이고 말이다.
또한 구유상은 혈마에게 있어서 충분히 불가능에 도전해 볼 만큼 애정을 쏟았던 존재였다.
“흐으음.”
혈마의 사색이 깊어지고 있었다.
***
귀주성, 선우세가.
선우세가의 소가주가 선우진으로 결정된 후 며칠이 지났다.
그사이, 짧은 기간 많은 외흉에 시달렸던 선우세가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예전과 달리 권력이 가주 선우중에게로 집중되었고 세가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소가주까지 정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선우세가에는 앞으로 좋은 일들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하씨세가를 병합해 개양의 진정한 지배자가 되었고, 혈교의 침입을 물리쳐 무림에 위명을 떨쳤으며, 색마 손은상이 지켜 주고 있다는 사실과 다른 소문까지 퍼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곧 제갈세가와 혼인으로 관계를 맺을 예정이라는 소문까지 돌며,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귀주제일세는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겠냐는 추측까지 떠돌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요즘 선우세가의 접객당은 입문을 희망하는 무사들로 매일매일 문전성시를 이루는 중이었다.
가주 선우중과 장로들, 신응대주들은 바쁜 업무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이제 소가주가 된 선우진은 전선으로의 귀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선우중의 집무실로 찾아와 오늘 떠나겠다는 의사를 전하자, 함께 있던 대장로 허진국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선우진에게 물었다.
“꼭 가셔야 합니까, 소가주?”
그는 선우진의 지난 생에서도 끝까지 선우세가를 지켜 주다 죽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우진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아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선우진은 묘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웃으며 대답해 줬다.
“벌써 휴가가 거의 끝나 가고 있습니다. 사천당문까지 들렀다 전선으로 돌아가려면 이미 시간이 촉박한 상태이지요. 선우가의 소가주가 전선의 탈영 무사가 된다면 그것도 망신이 아니겠습니까?”
“흐음, 그렇긴 하지요.”
허진국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주변에 있는 다른 장로들 또한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가주 선우중이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 년이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닌데 뭘 그러는가. 아마 이런 식으로 일하다 보면 금방 돌아와 있을 걸세. 오히려 진이가 돌아왔을 때 달라진 세가의 모습을 보여 주려면 시간이 모자라지 않겠는가?”
그 말에 허진국이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군요, 가주. 소가주에게 천천히 오시라고 해야겠습니다.”
선우진은 여유롭게 웃음 짓는 허진국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런 농담까지 하다니. 확실히 허진국은 선우진의 지난 생은 물론 얼마 전과 비교해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마도 그가 항상 독불장군처럼 굴었던 이유는 진심으로 충성하던 그때의 선우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진심으로 선우세가를 위하는 충신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때 가주 선우중이 문득 선우진에게 물었다.
“그래, 언제 출발할 생각이냐?”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지만, 선우진은 아버지의 눈 속에 깃든 진한 아쉬움과 걱정의 빛을 읽을 수 있었다.
모두 지난 생에선 받아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아니지. 어쩌면 아버지는 늘 저렇게 바라보셨는데 내가 그걸 몰랐을 수도 있겠지.’
가슴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문득 집을, 아버지의 옆을 떠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진은 애써 웃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점심 식사를 하고 바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그렇구나. 그럼 오늘 점심 식사 때 사람들을 모아 주마. 일일이 인사하러 다니는 것보다야 그때 한꺼번에 인사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예, 그래 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사실 선우진이 딱히 인사를 드려야 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장로들과 신응대주들, 그리고 난혼마녀 소난소 정도만 인사를 하면 됐으니까.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우중의 첫째 부인이나 넷째 부인, 그리고 형제들은 오히려 선우진을 보는 것을 더 껄끄러워할 것이 뻔했다.
그들은 요즘 선우진 앞에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뭐, 그래야 아버지 마음이 좀 편해지신다면 그 정도는 해 드려야지.’
선우진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며 잠시 그들을 생각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우진은 그들의 처우에 대해 좀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도 마저 쳐내야 하는지, 아니면 그대로 놔둬도 되는지를….
특히 첫째 부인인 곡 부인은 어머니의 죽음과도 연관된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큰형 선우성이야 아주 쳐 버릴 만큼의 악인은 아니고 넷째 선우기도 곧 제갈세가에 데릴사위로 팔아 버릴 인물이기에 놔둔다고 하지만, 그녀만큼은 선우진도 그냥 두기엔 마음이 시원치 않았었다.
그래서 원래 그녀도 몰락시킬까 생각하고 있던 선우진은 얼마 전 그 생각을 그냥 버리기로 했다.
그 이유는 바로 난혼마녀 소난소 때문이었다.
그녀를 떠올린 선우진은 피식 웃음 지었다.
‘소 선배님은 정말 멋진 분이시라니까.’
둘째 부인과 다섯째 부인이 뇌옥에 갇힌 후, 이제 경쟁자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첫째 곡 부인은 꽤나 안하무인으로 굴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넷째 부인에게는 물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위세를 부렸고, 그러다 그만 별채에 기거 중인 소난소에게까지 찾아가 강짜를 부리고 말았다.
‘네년은 대체 누군데 여기서 거하고 있는 게냐?! 이곳의 전 주인처럼 여우같이 생긴 것이! 상공이 새로 들인 첩이라도 되는 게냐?!’
그러자 처음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던 소난소는 곧 생긋 웃음 지었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소난소가 그런 그녀의 시비를 그대로 넘길 리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이게 뭐야? 웬 돼지 같은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설치는 거지? 변태인가? 꺄악! 살려 주세요. 돼지 같은 변태가 있어요!’
안 그래도 살쪘다는 얘기를 가장 싫어하는 곡 부인이 그냥 돼지도 아니고 돼지 같은 남자라는 얘기를 들었으니, 눈이 뒤집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이, 이년이 감히!’
그리고 달려들었던 곡 부인은 당연하게도 신나게 땅을 뒹굴고 말았다.
옷이 거의 누더기가 될 때까지 땅을 뒹굴었던 곡 부인은 결국 서럽게 울며 가주 선우중에게로 찾아갔다.
하지만 선우중에게서 돌아온 것은 차가운 대응뿐이었다.
‘안 그래도 소식은 들었소. 내가 듣기에 부인이 감히 우리 세가의 은인이신 소 여협께 찾아가 시비를 걸었다더구려. 게다가 그곳의 전 주인처럼 여우같이 생겼다는 말을 했다지?’
그의 차가운 눈빛에 곡 부인은 울음도 뚝 그친 채 얼어붙고 말았다.
‘부인이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구려. 그곳 전 주인의 아들이 바로 우리 세가의 소가주라오. 그리고 내가 알기론 그 소가주도 어미가 왜 죽었는지를 알고 있지. 나는 사실 그 아이가 왜 아직 부인을 가만히 뒀는지가 더 신기하다오. 부인이 개양문과 내통한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말이오.’
결국 곡 부인은 덜덜 떨며 도망치듯 가주전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후로 소난소는 마실 나가듯이 매일매일 곡 부인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당연히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고 말이다.
한번은 곡 부인을 괴롭히는 소난소를 선우진이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선우진에게 눈을 찡긋하며 악동같이 웃어 보였다.
그때 선우진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귀주성의 하오문주였던 그녀가 선우세가의 사정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일부러 선우진의 어머니가 당했듯 그녀를 괴롭힐 생각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결국 선우진은 결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냥 놔두는 게 낫겠군.’
아무래도 뇌옥에 갇히는 것보다 그냥 있는 것이 그녀에겐 더 괴로운 삶이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이제 선우진이 선우세가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가려던 선우진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했던 일들 중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
제갈서율은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음식 또한 거의 먹지 않았다.
너무 자신이 비참해 밖으로 나갈 수도, 뭘 먹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방 안에서 끝없이 그날의 일들을 떠올렸다.
비무에 지고도 그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 설레하고 있던 멍청한 자신과,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과 혼인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그의 모습을.
‘어떻게 그렇게 바보 같을 수가….’
너무 한심하고, 부끄럽고, 비참했다.
그날의 일은 늘 다른 사람들에게 선망의 시선만을 받아 왔던 그녀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치욕이자 시련이었다.
도무지 다른 이들을 볼 자신이 없었다.
모두가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 자살을 고민했던 그녀는 결국 죽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그녀가 결심한 것은 복수였다.
자신을 농락하고 웃음거리로 만든 선우진에게, 평생을 바쳐서라도 복수하겠다고 말이다.
‘반드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그의 모든 것을 부숴 버리겠어!’
이제 독기만 남은 그녀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방법은 많았다.
자신은 무림맹의 군사인 제갈지강의 딸이었으니까.
제갈세가의 힘만으로도 선우세가 따위는 압도하고도 남겠지만, 자신이 노력한다면 무림맹의 힘도 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뿐이 아니지. 무림의 강력한 세력에 시집을 간다면 그곳의 힘 또한 쓸 수 있을 테니까.’
복수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한 제갈서율에게 있어서 이제 혼인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문득 그녀의 입이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선우진을, 그의 선우세가를 몰락시킨다는 상상 하나만으로도 벌써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앞으로의 계획을 하나하나 세워 나가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녀의 방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갈 소저, 안에 계시오?”
그러자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찾아오다니. 자신이 꾸미고 있는 일들이 벌써 들킨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침을 꿀꺽 삼킨 제갈서율은 가만히 숨을 죽였다.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다시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나는 심안으로 방 안의 제갈서율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안에 그녀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가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한숨이 나왔다.
“후우우.”
그녀가 나를 피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간 늘 딱딱하게만 굴었으니 그녀도 나와 혼인하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히 없었겠지만, 자신이 거절하는 것과 상대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느낌이 많이 다르지 않겠는가.
그녀로선 충분히 모욕당했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며칠을 두문불출할 정도로 반응이 심각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듣자 하니 식사도 잘 하지 않는다는 것 같고.’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녀는… 친구의 죽음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긴 했지만,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일반적인 무림세가의 자제들이 가문의 결정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도록 교육받는다는 것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뭐, 당 소저도 그랬으니까.’
그러니 내가 그녀를 비난한 것은 좀 과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그녀와 거리를 두기 위함이기도 했다.
어차피 나중에 그녀와 비무는 하되 혼인은 하지 않을 것까지 계산에 뒀었으니까.
그래서 나와 혼인하지 않게 된다면, 그녀도 다행이라 생각할 거라고 예상했었던 것이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는 여인의 수치심이란 부분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모양이었다.
‘역시 여인은 내게 너무 어렵구나.’
물론 그게 내 잘못은 아니었다.
두 번의 삶을 다 통틀어도 내 삶에 여인이랑 관계된 적은 거의 손에 꼽으니까.
조언을 해 줄 사람들도 설풍 조장, 비사영, 배종관 같은 놈들뿐이지 않은가.
생각만 해도 깜깜했다.
‘하지만 제갈 소저가 내 그런 사정을 이해해 주진 않겠지?’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지금 상황은 내 힘으로 해결해 봐야 했다.
일단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나와 얘기하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구려.”
하지만 그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득 이 상황이 예전에 겪었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청연 소저가 대화를 거부했을 때 그녀의 문 앞에서 기다렸던 그때의 상황과 말이다.
‘그땐 계속 기다리다 나중에 얘기하자는 대답을 받아 냈었지.’
하지만 그 나중의 기회는 결국 오지 않았었다.
문득 가슴이 무거워졌다.
나는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하기로 결심했다.
그것도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말이다.
그것을 제갈 소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소저는 잘 모르시겠지만, 아니 나도 사실 얼마 전까지는 잘 몰랐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선우세가는 한 번 몰락할 뻔한 적이 있었다고 하오. 가문의 고수들이 모두 살해당했고 그때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되어 세가를 지켜 내야만 했다는구려.”
그녀가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차분히 과거의 일들을 풀어냈다.
왜 아버지가 많은 가문을 끌어들이셔야 했는지, 왜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는지.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꼭 복수가 아니더라도 가문을 좌지우지하는 외가 세력들을 털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소. 또 운씨세가를 장악한 귀주성의 혈교도들도 털어 내야 했고 말이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일을 위해 제갈세가의 힘을 빌릴 계획을 세웠었소. 그래, 맞소. 소저의 말대로라오. 모든 것은 내가 계획한 일이었소.”
거기까지 고백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이 모든 것을 고백하는 게 현명한 짓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갈세가에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 혈교도들을 소탕한다는 명분도 있었으니 딱히 문제를 삼을 수야 없겠지만, 그녀가 만약 제갈지강에게 나에 대한 얘기를 한다면 그의 주의를 끌게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얘기해 주고 싶었다.
그게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았으니까.
“청연 소저의 일에 대해 소저를 비난한 건… 사실 진심이 아니었소. 비록 그게 옳은 일은 아니지만, 소저로서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으니까 말이오. 나는 다만… 그렇게 하는 것이 나중에 나와 혼인하지 않을 소저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리라 생각했었소. 그래서 일부러 소저를 멀리하려 했다오.”
거기까지 말한 나는 이제 마지막 말을 골랐다.
“내가 한 모든 일에 대해서 후회는 하지 않소. 세가를 좌지우지하려는 세력을 털어 내는 것도, 어머니의 복수도, 혈교도들을 소탕하는 것도 모두 성공했으니까 말이오. 다만, 소저에만큼은 미안하구려. 이 일이 소저에게 큰 모욕감을 줄 수 있다는 것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말이오. 진심으로… 미안하오.”
거기까지 말한 나는 등을 기대고 있던 문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다 해 준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면, 그것까지는 내가 더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고 발걸음을 돌리려던 나는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생각에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아버지께 혼인을 허락받기 위해 돌아왔다는 것과 사천당문의 가주께 약속을 드리고 왔다는 것은 모두 진실이라오. 그러니 소저와의 혼사를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던 건 결코 소저 때문이 아니오. 너무 기분 나빠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소.”
그 말까지 끝낸 나는 이제 진짜로 발걸음을 옮겼다.
더 생각해 본다면야 다른 해야 할 말이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그냥 빨리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안에서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너무나도 서럽게 울고 있는 흐느낌 소리가….
아무래도 내 말은 그녀의 마음을 풀어 주는 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역시 여인의 마음이란 내게 너무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