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독안괴검 서일-2
문득 예전에 화영빈 형님께서 말씀해 주신 묵랑에 대한 얘기가 떠올랐다.
현 무림의 최강자인 혈랑검제 반중양의 혈랑검과 내 묵랑이 색깔만 다를 뿐 똑같이 생겼다는 얘기.
어쩌면 서일이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화 형님이 알고 계신 거라면 다른 사람도 알고 있을 수 있겠지. 더구나 무림의 절대자 중 일인인 서일이라면야….’
그리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살펴보며 내가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해 봤다.
자기 목적을 위해 나를 치료했으면서도 내내 짜증을 내고 있는 모습, 그리고 소인배라는 그의 평판, 그렇다면 내가 보여야 할 모습은….
물을 다 삼키고는 아직 쉰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허공섭물의 경지라는 거군요. 후배는 너무 감탄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러자 짜증으로 가득 찼던 그의 눈빛이 약간의 이채를 띠었다.
그리고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흥, 그따위 것은 대단할 것도 없다. 너 같은 조무래기들에게나 신기하겠지.”
나는 그의 반응을 예리한 눈으로 지켜봤다.
그러고는 진심을 담아 다시 한번 감탄해 줬다.
“그런 경지가 대단할 것도 없단 말씀이십니까? 하아, 역시 대단한 고수십니다. 저는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다시 한번 코웃음을 쳤다.
“흥!”
하지만 그의 얼굴에 짜증이 많이 풀려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내가 아는 소인배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누가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소인배들은 거의 반드시라고 할 만큼 남을 인정하기 싫어했고 아부에 취약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건 무림의 절대자 중 한 명인 서일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나는 바로 다음 행동을 개시했다.
그것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후배가 생명의 은인께 감사의 인사도 제대로… 으윽!”
하지만 지금 내 몸이 움직일 수 있는 상태일 리 만무했다.
몸을 움직이자마자 몰려온 격통에 나는 바로 신음을 흘려야만 했다.
그러자 그는 무형지기로 나를 다시 바닥으로 누르고는 짜증을 내듯 말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기껏 살려 놨더니 다시 죽을 참이냐?”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은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도 무척 부드러워 보였다.
아마 속으로 그래도 예의는 있는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누운 채 죽어 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제 생명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정말 감사드립니다, 서 대협.”
그러자 그가 살짝 의외라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그의 질문에 두 눈 가득 존경하는 눈빛을 담아 대답해 줬다.
“물론입니다. 허공섭물을 간단히 사용하시는 엄청난 무공에다, 살수들의 왕이라는 암혈향을 말 한마디로 쫓아내실 수 있는 분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첫눈에 서일 대협이시라는 걸 알아봤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제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흥, 살수들의 왕은 무슨, 그래 봐야 살수 나부랭이일 뿐이지.”
아무래도 이제 기분이 꽤 좋아진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나는 지금 암혈향과 싸웠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생사를 건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일의 손에서 살아남느냐 마느냐의 싸움을 말이다.
정황상 서일이 묵랑 때문에 나를 살린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목적을 이루고 나면 묵랑을 내게 돌려줄까? 아니, 살려 두려고나 할까?’
아마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게 내 결론이었다.
저자가 내게 묵랑을 돌려줄 리도 없고, 저런 소인배가 내게서 검을 빼앗고는 나를 살려 줄 리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 자신의 치부를 감추겠다며 나를 죽이려 들 것이 뻔했다.
물론 내가 자발적으로 묵랑을 그에게 바치면 살아날 확률이 좀 올라가기는 할 것이었다.
하지만 묵랑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내가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어떻게든 잘 구슬려 봐야만 했다.
가능하면 묵랑도 빼앗기지 않으면서 나를 죽이지 않도록 말이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일단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든 건 다행이었다.
적어도 당장 죽이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으니.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저런 성격이라면 변덕 또한 심할 테니까.
저러다 갑자기 아부한다며 성질을 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제게 뭘 물어보시지 않았습니까? 제 검에 관해 뭐라고….”
내가 묵랑을 바라보며 그렇게 묻자 그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인상을 굳히며 내게 물었다.
“그래, 물었었지. 너 이 검을 어디서 얻었느냐?”
일단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으로 순순히 대답해 줬다.
“묵랑이라면 귀주성의 흑상방과 싸우다 흑상방주의 창고에서 얻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탐색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물었다.
“흑상방이라…. 네놈이 이걸 얻은 후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한 적은 없느냐?”
그의 질문에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순박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특별한 경험이라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혈교의 소면마군과 싸우거나 아까 암혈향에게 노림을 받기는 했습니다만….”
순박한 바보 연기야 선우세가에서 질릴 정도로 해 봤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신법보다도 더 자신 있는 분야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자 내 반문을 들은 그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런 거 말고!”
나는 바로 찔끔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대협. 그럼 혹시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그러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도 내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제대로 설명하자면 묵랑과 검제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할 테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결국 잠시 망설이던 그는 내게 다른 것을 물어봤다.
“아까 네놈이 사용한 검법은 무엇이냐?”
역시 해맑은 표정으로 순순히 대답해 줬다.
“저희 선우세가의 선우십삼검과 점창의 사일검법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눈에 실망의 빛이 어렸다.
“그래, 사일검법은 진작 알아봤었다만 그 환검이 선우십삼검이었구나. 어쩐지.”
그의 실망한 눈빛을 보며 나는 다시 대화를 이어 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실망감을 갖게 되는 건 위험했다.
내게 더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무슨 생각을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최악의 경우 바로 죽이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다른 생각을 하기 전 먼저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검신의 유진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그러자 그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만 다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설마?!”
그의 활활 타오르는 눈빛이 문득 내 묵랑에게로 향했다. 묵랑에 뭔가가 있었기에 알게 됐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다시 난처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제 의형께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타오르는 눈빛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의형이라고? 네 의형이 누구고 무슨 얘기를 들었단 말이냐?”
서둘러 대답해 줬다.
“청성파의 적하신검 화영빈이 제 의형이십니다. 그가 예전에 제 검을 보고는 검제 어르신의 혈랑검과 꼭 닮았다는 얘기를 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혈랑검으로부터 검신의 유진을 얻었다는 얘기도 말입니다.”
그러자 내 말뜻을 이해한 그의 눈빛이 다시 실망해서는 사그라지고 말았다.
“흥! 어르신은 무슨! 그럼… 그저 그에게 들은 얘기를 했다는 거냐?”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나는 잔뜩 죄송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그래서 저도 묵랑검에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걸 물으시나 해서…. 실망시켜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러자 그가 실망한 눈빛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그럼 이것도 역시 껍데기에 불과한 모양이었구나.”
이것도라….
껍데기란 말이야 그렇다 쳐도 ‘이것도’라는 말은 좀 의미심장했다.
그의 말에 슬쩍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것도’라고 하셨습니까?”
그러자 그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나를 바라봤다.
얘기를 해 줄까 말까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저 해맑고도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결국 그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하긴, 이미 혈랑검에 대해 알고 있는 녀석이라면 말해 줘도 상관없겠지.”
그러고는 그는 자신의 등 뒤에서 검 한 자루를 뽑았다.
스르릉!
그러곤 그 검병(손잡이)을 감싸고 있던 천을 풀어 안쪽을 보여 주었다.
그것을 본 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그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네놈의 검, 그리고 그놈의 검과 똑같이 생긴 검이지. 아마도 검신이 남겼을 검인 벽랑검이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내 묵랑과 정말 똑같이 생긴 검이었다.
그 색이 푸른색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멍하니 중얼거렸다.
“혈랑검과 묵랑검만 있는 것이 아니었군요.”
그러자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발견한 것만도 이 벽랑검과 황랑검 두 개가 있었으니까. 묵랑검까지 하면 벌써 네 개로구나. 어쩌면 이것 말고도 다른 색의 검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혈랑검과 묵랑검 이외에도 다른 검들이 존재했었다니.
아마 그것들에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내 생명을 구해 줬던 검신의 정신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몰랐을 뿐 세상에는 이미 많은 기연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문득 멍하니 중얼거렸다.
“검신의 유산은 실체가 없다고들 하더니만. 사실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유산을 남기셨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서일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많이 남기면 뭐 하느냐? 그중 진짜는 그놈이 가진 혈랑검 한 자루뿐인 것을!”
그 말에 문득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벽랑검과 황랑검 두 자루나 발견했다면서도 그는 그 검들의 비밀을 전혀 알아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추측했던 묵랑의 시험 내용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나는 해맑은 표정으로 다시 대꾸했다.
“그래도 묵랑검은 충분히 좋은 검인걸요. 저는 현재 전선에서 근무하는 중인데 검기나 검강 없이도 마인들을 벨 수 있는 검은 묵랑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근데 대협께서는 묵랑 같은 검을 두 자루나 가지고 계신 거로군요. 부럽습니다.”
그러자 그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저 잘 드는 칼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거냐? 그런 칼이야 무림을 돌아다니면 한 수레는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리고….”
그는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흠, 황랑검은 지금 내게 없다. 부숴 버렸으니까.”
“…예에?!”
나는 이번에도 진심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 귀를 의심했을 정도였다.
황랑검을 부숴 버렸다니, 검신의 정신과 유진이 깃들어 있을 검을 부숴 버렸다는 말이 아닌가.
경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거, 검신의 유산을 부숴 버리셨다고요?!”
그러자 그가 확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깟 잘 드는 칼 좀 부순 게 뭐가 대수라고 그러는 거냐?!”
발끈하는 걸 보면 분명 자기도 대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티는 내지 않고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호, 혹시 검신의 비급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웃기지 마라! 내가 그 검을 몇십 년 가까이 들고 다녔어도 아무런 비밀도 찾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부숴 버렸는데도 말이다! 그건 그냥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좀 날카로운 검에 불과했던 거다!”
역시 그런 이유로 부쉈던 모양이었다.
혹시 부수면 뭔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고작 그런 이유로 무림의 신비 하나가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문득 몸에 다시 통증이 밀려왔다.
너무 황당한 얘기를 들어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많은 얘기를 나눠서 그럴 수도 있었다.
물론 이유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그대로 다시 쓰러져 자고 싶다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잘 수는 없었다.
여기서 내가 잠들어 버리면 그가 나를 어떻게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잠들기 전 마지막 말을 남겼다.
“어쩌면 검신의 유진은 그런 식으로 찾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건 어쩌면….”
마지막 힘을 짜내 거기까지 말한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내 귀에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느냐? 그런 식이 아니면 어떤 식이라는 거냐?!”
하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딱히 연기를 한 것만은 아니었다.
몸에 기력이 너무 없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한쪽 귀로 들어온 그의 목소리가 그대로 다른 쪽 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놈! 내 말이 안 들리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