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검신의 유진
꼬르륵! 꼬르르륵!
문득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코에 맛있는 냄새가 흘러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내 배에서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눈을 살며시 떠 보니 그가 내 옆의 모닥불에서 물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는 내가 일어난 기척을 바로 느낀 듯 나를 바라보며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놈은 정말 대단한 놈이다. 배가 그렇게 꼬르륵거리고 있는데도 계속 잘 수 있다니. 게다가 이 나로 하여금 물고기를 구워 바치게 만들다니 말이다.”
그저 배시시 웃어 줬다.
“감사합니다, 대협.”
일단 정신을 잃기 전 던졌던 노림수는 훌륭히 성공한 것 같았다.
그사이 그가 나를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마따나 물고기까지 구워 바치게 하지 않았던가.
아직 완전히 살게 된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히 고무적인 성과임에는 분명했다.
그러자 그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허!”
하지만 어쩐지 마냥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그가 물고기 꼬치를 하나 내밀며 내게 말했다.
“자, 이거나 먹으며 하던 얘기나 마저 해 보거라.”
하던 얘기란 당연히 검신의 유진에 관한 얘기일 것이었다.
아마 깨어나자마자 당장 다그치지 않을까 했는데 그래도 물고기를 먹으며 얘기하자는 말은 조금 의외였다.
‘뭔가 아까와는 느낌이 약간 달라진 것 같기도 한데….’
확실히 아까 쓰러지기 전보다 훨씬 친근하게 대하는 느낌이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혹시 검제의 유진에 관해 알고 있다는 점에 공감대를 느낀 걸까?’
그가 남에게 과시하는 걸 좋아하는 소인배임을 감안하면 그것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무림의 절대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무에게도 존경받지 못하는 외톨이였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어차피 죽일 생각이니 그전까지 잘 구슬려 보자고 결심한 걸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인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진짜 내게 친근감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방심할 순 없었다.
그는 변덕이 무척 심하고 그 변덕에 따라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유명한 자였으니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일단 물고기를 받으려 했다.
“으윽!”
하지만 몸을 좀 일으켜 보려던 나는 결국 포기하고는 그냥 누워서 그가 준 물고기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아직 몸 상태가 이리도 좋지 않았다.
“무례하게도 대협께서 주신 음식을 누워서 받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대협.”
그러자 그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흥, 예의 차리다 죽을 참이냐? 헛소리 말고 그냥 누워 있거라.”
나는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고기를 받아 들고 입에 넣었다.
그리고 한 입 깨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응?’
맛있었다.
아니, 진짜 맛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너무나도 맛있게 느껴졌다.
음식이 입에 들어간 순간, 그간 못 느끼고 있던 허기가 한순간 밀려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내 몸이 음식을 너무나도 많이 그리워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신없이 물고기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쩝! 쩝! 쩝!
순식간에 한 마리를 해치우자 지켜보고 있던 그가 말없이 다른 물고기를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대협!”
그러고는 또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그렇게 세 마리를 먹어 치운 것은 아주 순식간이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가만히 나를 지켜보며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먹기만 한다며 짜증이 난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어쩌면 진짜 내게 친근감을 느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후 그가 궁금해하는 내용에 대해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검신의 유진에 대해 제가 생각이 난 것이 있기는 한데… 제 생각에 대해 말하기 전에 혹시 대협께 뭘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그래라.”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혹시 대협께선 검제 어르신에 대해 잘 아십니까?”
그러자 그의 인상이 순간 팍 일그러졌다.
“검제라고?”
역시 생각대로였다.
아까부터 그는 검제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무척 기분 나쁜 듯한 반응을 보이고는 했던 것이다.
그냥 소인배가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보이는 호승심이라기엔 좀 지나쳐 보일 정도였다.
내 추측으론 그와 검제가 뭔가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예, 그분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제 추측을 좀 더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러자 잠시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그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그는 생각보다 과묵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사실은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과시욕이 있는 자가 말을 못 하면 과시도 못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자가 다른 이와 오랫동안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면 꽤 쓸쓸했을 것 같기도 했다.
“어린 시절, 그놈과 나는 동문이었다.”
“…예?”
“시골의 작은 무관에서 놈과 나는 함께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었지.”
그건 꽤나 놀라운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어디서도 듣지 못했던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현 무림의 최강자인 혈랑검제와, 최하위이긴 하지만 역시 절대자 십오 인 중 한 명인 독안괴검이 원래 동문이었다니, 무림의 호사가들이 알면 깜짝 놀랄 만한 내용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린 시절 놈은 무척 한심하기 그지없는 멍청이였다. 내가 한 번 배우고 익힌 것들을 며칠에 걸쳐서 익혀야 했고, 대련을 하면 늘 얻어터지기만 했었지. 그 주제에 또 오지랖은 넓어서 쓸데없이 이 일 저 일 끼어들다 늘 손해만 보곤 했었다.”
그는 한참을 어린 시절의 혈랑검제에 대한 험담을 늘어놨다.
그 말을 다 믿는 것은 아니기에 최대한 그의 주관을 제외하고 들으려 했지만, 그걸 감안한다 해도 현 무림의 최강자인 혈랑검제 반중양은 어린 시절부터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만 협심이 강해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불의를 참지는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기는 했어도 꽤 친했는지 늘 같이 붙어 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혈랑검과 황랑검을 얻었을 때도 함께 있었고 말이다.
어린 시절의 혈랑검제를 비웃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 가던 서일은, 혈랑검과 황랑검의 이야기로 접어들자 문득 분노한 표정이 되어 이를 악물었다.
“그때 내가 혈랑검을 갖겠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아마 그때 황랑검을 먼저 택한 것이 서일이었던 모양이었다.
그에겐 황랑검을 택하고 혈랑검을 친구에게 넘긴 것이 아마도 오랜 회한으로 남은 것 같았다.
그는 이제 계속 분노한 표정이 되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어느 날부터 놈은 갑자기 처음 보는 무공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검신의 무공이었지.”
그때를 떠올리는 그의 눈빛은 이글이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쓰기 시작하자, 늘 내 발끝만 쫓아오던 놈은 순식간에 내가 따라갈 수 없는 고수가 되어 버리고 말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 놈은… 비열하게도 나를 배신하고 말았지.”
“…배신이라고요?”
그 말은 무척 의외였다.
지금이야 은거에 들어간 지 한참이 되었다고 하지만, 활발하게 활동하던 예전의 검제는 대단한 협객이자 의인이라고 들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그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우리는 늘 붙어 다니던 친구였다! 아니, 정확히는 스승님의 당부 때문에 내가 녀석을 보살펴 주고 있었지! 그러니까 나는 녀석의 보호자이자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던 거다! 그런 우리는 그전까지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의 눈빛은 숨길 수 없는 증오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놈은! 검신의 유진을 얻고는 완전히 돌변해 나를 배신하고야 말았다! 검신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내게 무공을 공유하지 않았던 거다! 그간 놈을 위해 그렇게 희생해 왔던 내게 말이다!”
“….”
그의 말을 이해한 나는 차마 그에게 동조해 줄 수가 없었다.
결국 원망의 정체는 검신의 유진을 공유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검신의 유진을 얻은 그가 친구인 자신을 외면했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림의 누가 당연하게도 자신의 기연을 공유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지금 그의 모습을 보건대 그때 검제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도 없었다.
문득 그에게 물었다.
“그럼 서 대협께서 지금 익히고 계신 무공은 다른 곳에서 배우신 겁니까?”
그러자 살짝 흠칫했던 그가 대답했다.
“…파마검법과 파마심결은 분명 놈이 가르쳐 준 무공이 맞다. 하지만 놈은 자신은 검신의 유진을 익혀 놓고는 내게는 훨씬 떨어지는 절기만을 가르쳐 줬다! 그렇지 않았다면 재능도 훨씬 뛰어난 내가 놈보다 못할 리가 없었겠지! 내 재능을 질투한 놈이 치사하게도 비열한 수를 쓴 것이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무슨 얘긴지 알 것 같았다.
서일은 지금 검제 반중양이 자신을 질투해 급이 낮은 무공을 가르쳐 줬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시골 무관에서 무공을 배웠던 서일을 무림의 절대자로 만들어 준 무공이 그렇게 급이 낮은 것이라고?
저런 소인배를 무려 무림의 절대자로 만들어 준 무공이?
‘쯧, 절대 그럴 리가 없지.’
그는 그러고도 봇물이 터진 듯 한참 동안을 반중양에 대한 험담과 원망을 쏟아 냈다.
나는 그저 말없이 그가 쏟아 내는 것들을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 말들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가 얼마나 소인배인지만 확실히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저런 소인배가 무림의 절대자 십오 인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니 재능 하나는 뛰어나긴 한 모양이라고.
익힌 무공 또한 대단한 절기일 것이고 말이다.
한참을 열을 올리며 험담을 쏟아 내던 서일은 문득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는 것이 자신의 말에 동조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가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물었다.
“그래서, 내게 이런 얘기들을 하게 한 이유는 무엇이냐? 너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해야만 할 것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들으며 아까부터 준비하고 있던 대답을 꺼낼 시간이었다.
“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검신께서 유진을 남기셨다면 그걸 아무에게나 전수해 주지는 않으셨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검제 님에 대해 여쭤본 것이었습니다. 근데 서 대협의 말씀대로라면 검제 님 또한 혈랑검을 얻자마자 검신의 유진을 얻지는 않았던 것 같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불의를 두고 보지 못하는 협객이셨던 모양입니다.”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놈이 협객이라고?”
“예, 전설에 따르면 검신께서도 협객으로 유명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당신의 진전 또한 자신과 같은 협심을 가진 사람만이 익힐 수 있도록 안배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얘기는 그저 그를 속이기 위해 만든 거짓말만은 아니었다.
돌이켜봤을 때 실제 묵랑, 아마도 검신의 정신일 그분이 내게 말을 걸었을 때는 항상 내가 목숨을 걸고 다른 이를 구해 주려고 했을 때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솔직히 지난번 탐화색마 화사유의 자폭에서 여령색마 손은상을 구하려 뛰어들었을 때도 이렇게 하면 다시 묵랑이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좀 했더랬다.
‘물론 그때 나타나지 않았던 걸 보면 다른 조건이 더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리고 지금 이 얘기를 서일에게 해 주는 이유는 그의 행동을 제약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나를 죽일 수 없도록, 그리고 가능하면 묵랑에도 손을 댈 수 없도록 말이다.
지금 내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암혈향이 분명히 어디선가 서일이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고, 그에 반해 내 몸 상태는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좋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이라고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독암괴검 서일이 나를 살려 두고 있는 건 그저 검신의 유진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고 싶은 욕심 때문일 테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더 얻을 정보가 없다고 생각하면 나를 죽일 수도 있겠지.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묵랑은 반드시 들고 가 버릴 테고.’
그래서 이 얘기를 해 준 것이었다.
그에게 협의를 강요하기 위해서.
서일이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놈이 협객이기 때문에 검신의 유진을 이을 수 있었단 말이냐?”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가 벌컥 화를 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를 배신한 그딴 놈이 무슨 협객이란 말이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그가 분노를 보이는 건 위험한 신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그의 비위를 맞추려 연기하지 않았다.
이젠 승부를 걸어 볼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줬다.
“물론 서 대협의 말씀대로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제 추측일 뿐이고 저는 두 분의 자세한 사정을 잘 모르니까 말입니다. 서 대협께서 진심으로 그가 협객이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아마 제 생각이 틀린 거겠죠.”
그러자 그는 분노한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도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그도 사실은 알고 있는 것이었다.
검제가 진짜 협객이고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자신의 원망과 증오가 비뚤어진 것이라는 걸 말이다.
잠시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던 그가 천천히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그의 눈빛이 위험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 좋다. 그놈은 네가 모른다 치자. 그럼 나는 어떠냐? 네놈의 목숨을 구해 준 나는 협객이냐, 아니냐?”
나는 본능적으로 이 대답이 중요한 고비가 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말 한마디 잘못하는 것으로 그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내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그의 비위를 맞춰서 분노를 낮춰 주거나, 아니면 진실을 말해 그에게 협행을 강요하는 것, 두 가지가….
그리고 당장 내가 살기 위해선 그의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선택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건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서 대협께서 묵랑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저를 구해 주시려는 마음으로 행동하셨다면 분명 협객이심에 틀림이 없겠지요. 하지만 제가 서 대협의 진심을 어찌 알겠습니까? 협객이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떳떳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내 선택은 그에게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의 비위를 맞춘다면 내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묵랑은 절대 되찾아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던진 모험 수였다.
그러자 그는 잠시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만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네놈이 지금껏 나를 속였구나. 네놈은 처음부터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검을 빼앗기 위해 구해 주는 척하는 도적이라고!”
그의 따끔따끔한 살기가 바늘처럼 몸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강해지면 그것만으로도 진짜 몸이 뚫려 버릴 것 같았다.
사신의 손길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그저 담담한 척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의 입이 다시 다물어졌다.
그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말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걸.
그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나를 노려봤다.
그의 눈 속에서 여러 가지 마음들이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나를 죽일지 말지에 대한 갈등일 것이 틀림없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뭔가 결심한 듯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 협행이란 말이지. 네 말은 잘 들었다. 그리고 인정하마. 그놈은 분명 나보다 훨씬 협객에 가까운 놈이었다. 나는 그놈보다 욕심이 많고, 솔직하지 못했지. 심지어 겁도 많았다. 그래서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자와만 싸웠고, 그 상대가 다시 성장해 나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죽여 버리곤 했지. 그래, 그랬었다. 어쩌면 검의 차이가 아니라 그 차이로 놈이 검신의 유진을 이었고, 나는 그렇지 못했을지도 모르겠구나.”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솔직한 고백이었다.
그의 너무나도 진솔한 속마음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제기랄….’
아무래도 내 모험은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가 저런 얘기를 털어놓은 상대를 살려 놓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는 나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서일은 들고 있던 묵랑을 잠시 바라보다 문득 내게 던져 줬다.
철컹!
“네 말대로 검신의 유진을 얻는 방법이 협행이라면 나는 너를 살려 주겠다. 죽어 가던 너를 살려 줬으니 그건 분명히 협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 또한 이 검도 빼앗지 않겠다. 멀쩡히 돌려주지. 어차피 내겐 벽랑검이 있으니 말이다.”
이상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분명 나를 죽이겠다는 눈빛을 하고는 말로만 살려 주겠다고 하고 있었다.
‘무슨 속셈이지?’
그 속셈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바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좀 바쁜 약속이 있구나. 이게 더 중요한 일이라 시간을 소비하기는 했지만 이제 들을 얘기는 다 들었고 네 목숨도 구했으니 그만 가 봐야겠다. 살아 있다면 다음에 또 보기로 하자꾸나.”
그렇게 말하며 비릿하게 웃음 지은 서일은 바로 훌쩍 몸을 날려 하늘을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두고 떠난 것이었다.
‘젠장.’
이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차도살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나를 직접 죽이고 검을 빼앗지는 않았지만, 자리를 비켜 줌으로써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를 다시 암혈향에게 넘겨줬던 것이다.
‘비열한 자 같으니!’
하지만 그렇게까지 최악의 사태는 아니었다.
어쨌든 암혈향은 그가 간 것을 아직 알지 못할 테고 내게는 약간의 시간이 있을 테니까.
그러니 암혈향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까지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몸을 일으키려 해 봤다.
“으으윽!”
하지만 바로 다시 쓰러졌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오래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어떻게든 암혈향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도망치든가 숨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그때였다.
나는 내 생각보다도 시간이 훨씬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저 멀리서 독안괴검 서일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 와하하하하! 잘 있거라, 하하하하하!
그의 목소리가 온 사방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나는 물론 암혈향도 들었을 것이 분명한 그의 목소리가….
그는 진짜 비열한 작자였다.
내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암혈향에게 그가 갔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었다.
“이 개 같은!”
욕을 내뱉으며 다시 몸에 힘을 줬다.
이젠 진짜 시간이 없었다.
“으으윽!”
격통이 찾아왔다.
머리가 하얗게 되어 버릴 정도였다.
아무래도 월하환검무를 발동해 통증을 지워 내야만 할 것 같았다.
‘몸에는 매우 안 좋겠지만 어쩔 수가….’
그때였다.
부스럭!
문득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암혈향?! 벌써?!’
아마 통증 때문에 정신이 팔려 주변의 기척조차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아득해진 눈으로 누군가 수풀을 헤치며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