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두 번째 삶의 의미
선우진이 간절한 마음으로 몸을 회복시키고 있을 때, 건장한 체격을 가진 과묵한 성품의 종 무사, 종우는 흙을 담은 포대를 든 채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암혈향이라….’
아직은 죽음이 실감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이게 자신의 마지막이 될 거라는 건 분명한 듯했다.
살수들의 왕인 암혈향의 추격이라니, 평생 꿈도 꿔 보지 못했던 일이 아닌가.
자신 따위가 살아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장 형님, 공 형, 양 형, 이 형.’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인지 동료들과 함께했던 지난날들이 문득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처음 칼을 잡았던 날도, 무사가 되겠다며 집을 뛰쳐나갔던 날도.
경험이 부족해 죽을 뻔했던 자신을 지금의 의형인 장 무사, 장대룡이 구해 줬던 날도.
또 동료들의 설득으로 부모님을 다시 뵈러 갔다가 두 분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됐던 날도,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부모님의 복수를 했던 날들까지도 말이다.
힘들고 슬픈 날들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좋은 인연들을 만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잡초같이 흔한 낭인의 삶치고는 꽤 운이 좋았지.’
그래서 그는 항상 생각했었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면, 그 죽음은 자신의 좋은 인연들을 위한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아무런 가치도 없이 사그라지곤 하는 낭인의 덧없는 삶에, 소중한 인연을 위해 마침표를 찍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날이 온 모양이었다.
그러니 즐겁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승에 가서도 부모님께 자랑할 수 있으리라.
나름 멋지게 살다가 멋지게 죽었다고.
보잘것없는 낭인들의 삶 중에서 그래도 제일 멋있는 삶이었다고 말이다.
문득 몇 년을 얼굴만 보고 지나치다 드디어 얼마 전 장래를 약속했던 기녀 유향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은 지금 유일하게 남은 단 하나의 아쉬움이었다.
아주 잠깐, 그녀와 자식을 낳고 키워 보는 삶을 꿈꿨더랬다.
하지만 역시 그런 건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삶인 모양이었다.
아쉬움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세상 사람 중 아쉬움 하나 없이 저무는 삶이 또 어디 있으랴.
그러니 자신 정도면 충분히 많이 이룬 삶일 것이었다.
종우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미안하오, 유향.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 순간이었다.
푸우욱!
“!”
뒤에서 빛살처럼 날아온 쇠구슬이 종우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가 미처 유향에 대한 사과를 마저 끝내지 못했을 때였다.
***
가슴을 꿰뚫린 종우의 몸이 인형처럼 땅을 굴렀다.
그러자 곧 그의 옆으로 유령 같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암혈향이었다.
암혈향이 종우와 그가 들고 있던 포대를 스윽 훑어보고는 중얼거렸다.
“흙을 넣은 포대인가?”
그러곤 다시 유령과 같은 움직임으로 미련 없이 이동했다.
중간 방향으로 도망간 장 무사, 장대룡이 가고 있는 쪽 방향이었다.
같은 시각, 중간 방향으로 도망간 장 대룡도, 왼쪽 방향으로 도망간 공오말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암혈향의 추격을 뿌리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잠시 후, 마침내 도주하는 장 대룡의 신형을 따라잡은 암혈향이 중얼거렸다.
“둘.”
그가 중간으로 도주한 장 대룡을 따라잡기까지 걸린 시간은 종우를 잡은 후 고작 일 각(1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의 손가락이 쇠구슬을 강하게 튕겼다.
티잉!
그러자 맹렬히 날아간 쇠구슬은 또다시 장 대룡의 가슴을 꿰뚫고 말았다.
푸욱!
“크윽!”
단말마의 신음 소리만을 남긴 채 장 대룡은 힘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에게도 선우진이 없음을 확인한 암혈향은 다시 왼쪽으로 간 공오말을 향해 유령처럼 사라졌다.
이제 마지막일 세 명째를 잡는 건 그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
그때.
장 대룡의 가슴이 꿰뚫리던 것과 같은 시각.
드디어 물속에서 운기 중이던 선우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바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푸우우우!”
운기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방금 전 선우진은 또 하나의 벽을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고 있던 중이었다.
내공 팔십 년의 벽을 넘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구십 년의 벽을 넘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움직일 수 있는 몸 상태가 됐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미련 없이 운기를 멈추고 물속에서 나와 버리고 말았다.
구십 년의 벽을 넘을 수 있는 기회를 발로 차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무림인에게 있어 그런 기회는 절대로 쉽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생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의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니 지금 선우진은 평생에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를 기회를 발로 차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따위 것.”
선우진은 사납게 웃으며 세 낭인 무사들이 암혈향을 유인했을 방향 쪽을 바라봤다.
장 무사는 분명 선우진에게 운기를 마치고 반대 방향으로 도주하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오히려 그들이 간 쪽을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파앙!
폭진보로 튀어 나간 그의 신형이 빛살이 되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 바로 망설임도 없이 월하환검무의 삼 식을 전개했다.
월하환검무 삼 식.
현망월.
그러자 곧 세상이 유채색의 장막으로 뒤덮였다.
화아아아악!
그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월하화검무 삼 식 현망월을 전개하는 것은 아직 선우진에게 있어서 감당하기 힘든 경지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암혈향이 도사리고 있을 방향을 향해 돌진하는 것보다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선우진의 행동은 굉장히 바보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세 낭인들이 목숨으로 만들어 준 기회를 스스로 버리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선우진의 마음은 확고했다.
‘다시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무력하게 잃지 않겠다!’
이 각오는 선우진의 두 번째 삶, 그 의미와도 같은 말이자 맹세였다.
그러니 그것을 어기고 삶을 유지하는 것은 적어도 선우진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물론 ‘기껏해야 잠깐 만났을 뿐인 그들이 전생의 소중한 인연은 아니지 않나?’라는 의문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이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맞다고.
예전에 자신이 분명히 그들에게 말했지 않은가.
‘서로 마음이 통했고 사선까지 함께 넘었으니 우리는 친우가 아닙니까?’라고….
그리고 그들은 이번에 그 말을 자신에게 똑같이 화답해 주었다.
그러니 선우진이 고민할 것은 그들을 구하러 가야 하는가, 가지 말아야 하는가가 아니었다.
그저 그들을 구할 수 있는가, 어떻게 구해야 하는가 뿐이었다.
선우진은 빛살처럼 날아가며 암혈향을 상대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붙어선 당연히 승산이 없다.’
그건 당연한 얘기였다.
그렇게 깨지고도 다시 달려든다면 그거야말로 바보 같은 선택일 것이니까.
그러니 선우진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를 끌어들인 후 도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도 가능할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때도 달리다 뒤에서 기습적으로 저격당하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때는 암혈향이 추격한다는 것을 몰랐던 상태가 아닌가.
월하환검무의 삼 식, 현망월을 전개한 상태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러니 현망월을 전개한 상태로 최선을 다해 도주한다면 암혈향의 저격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선우진의 생각이자 바람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유일한 가능성일 것이었다.
‘내 최고의 장점은 누가 뭐래도 신법이니까.’
그렇게 결론은 낸 선우진은 바로 내공을 끌어모아 소리쳤다.
- 암혈향! 내가 여기에 있다! 어디 있느냐, 암혈향!
그의 내공을 실은 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암혈향이 막 공 무사, 공오말을 추격해 그에게 쇠구슬을 날리려 하던 시점이었다.
“음?”
선우진의 목소리를 들은 암혈향은 문득 빙긋이 웃음 지었다.
그리고 공오말에게 던지려던 쇠구슬을 회수했다.
그를 죽이는 것이야 너무나도 쉬운 일이지만 선우진을 빨리 찾은 기념으로 살려 줘도 될 것 같았다.
그들에게도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한 명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결정한 그의 신형이 다시 유령이 되어 선우진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스스슥!
동시에 암혈향의 허리에 감겨 있던 구절편도 다시 살아 있는 것처럼 풀어져 그의 몸 주변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차르륵!
낭인 무사들을 저격하는 데야 구절편까지는 필요 없었다.
하지만 선우진이 상대라면 역시 이 정도는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
선우진은 바람처럼 전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전신의 감각을 집중해 사방을 경계하는 중이었다.
현재 신법 속도는 최고로 낼 수 있는 속도의 오 할 정도, 이 정도라면 얼마 안 있어 암혈향이 따라붙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했다.
한순간 그의 눈이 번뜩였다.
‘온다!’
선우진의 감각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각을 느낀 순간, 선우진은 주변을 확인하지도 않고 폭진보를 전개해 사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파앙!
그러자 급가속한 그의 머리를 인식조차 못 했던 쇠구슬이 스치고 지나갔다.
쐐애액!
쇠구슬이 지나간 후에야 들려오는 파공성.
엄청난 속도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행동이 늦었다면 바로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을 것 같았다.
암기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던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선우진은 바로 방향을 틀어 쇠구슬이 날아온 반대 방향으로 폭진보를 사용했다.
파앙!
그러곤 가능한 최고의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신법 싸움이었다.
***
암혈향은 조금 감탄했다.
이미 한 번 붙어 본 적이 있었기에 전력으로 던진 쇠구슬 한 발이라면 충분히 그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피해 낸 선우진의 움직임도, 지금 보여 주고 있는 신법의 속도도 암혈향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수준이 아닐 수 없었다.
‘흠, 그땐 실력을 숨기고 있던 건가? 아니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성장한 건가?’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한 번은 피했지만 계속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아직 자신이 최선을 다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암혈향은 희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나도 좀 속도를 높여 볼까?’
파앙!
늘 유령처럼 움직였던 암혈향이 처음으로 땅을 박차고는 추진력을 발휘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선우진의 최고 속도를 상회하는 엄청난 속도였다.
“!”
암혈향 쪽으로 감각을 집중하고 있던 선우진은 그 순간 이를 악물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암혈향의 신법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광검 스승님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계획은 실패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적당히 거리가 좁혀졌다고 생각한 암혈향은 달리면서 구절편의 끝에 쇠구슬을 끼웠다.
그러곤 다시 몸을 회전시키며 그것을 힘껏 휘둘렀다.
촤아아악!
소리보다 빠른 쇠구슬이 찰나의 순간 다시 한번 선우진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쐐애애액!
촤아아악!
쇠구슬을 던지고 결과를 지켜보던 암혈향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흠.”
이번 것도 명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쇠구슬이 쏘아진 순간 바로 사선으로 폭진보를 전개한 선우진의 움직임에, 쇠구슬은 그의 옆구리를 강하게 훑으며 지나가 버리고 말았었다.
암혈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훌륭하군.’
하지만 그리 실망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 거리에서 옆구리를 스쳤다면 좀 더 거리를 좁힌다면 충분히 명중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암혈향의 다리가 다시 한번 땅을 박찼다.
파앙!
그러자 더 가속한 암혈향이 다시 선우진과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제 둘 사이의 거리가 십 장 정도로 좁혀졌을 때였다.
암혈향은 다시 구절편을 움직였다.
이 정도 거리라면 쇠구슬을 던지는 순간 선우진의 몸을 뚫고 지나갈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암혈향은 구절편의 머리를 앞쪽으로 움직여 그곳에 쇠구슬 세 개를 끼웠다.
아직 한 번도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을 감탄시킨 선우진이라면 이 정도 예우는 충분히 해 줘도 될 것 같았다.
그가 마음속으로 선우진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선우진, 너는 충분히 훌륭했다. 너의 이름을 내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겨 주마.’
그렇게 생각한 암혈향은 다시 맹렬히 몸을 회전시키며 구절편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그러자 회오리처럼 휘둘러진 구절편에서 세 개의 쇠구슬이 뛰쳐나갔다.
투우우웅!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순간 이동을 한 듯 그 순간 선우진의 등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
선우진은 암혈향이 쇠구슬을 쏘아 낸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순간 바로 폭진보를 전개했다.
파앙!
하지만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이젠 이걸로는 피할 수 없음을.
뭔가 다른 방법을 써야만 했다.
그렇지 못한다면 끝장일 테니까 말이다.
그때였다.
선우진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이 나타나기에 가장 극적인 순간인 것 같군. 그렇게 생각지 않나?
그가 세 번째 들어 보는, 지금의 선우진에게는 구원과도 같은 유쾌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