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묵랑검법
폭진보를 전개했음에도 피할 수 없었던 세 개의 쇠구슬이 막 내 등을 꿰뚫기 직전이었다.
나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쇠구슬 때문이 아니었다.
피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미 등을 관통했어야 할 쇠구슬이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쏘아지고 있었던 내 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한 번 느껴 봤던 익숙한 감각.
시간이… 멈춘 것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마침내 세 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해 냈군. 축하하네.
‘아아!’
가슴에 벅찬 희열이 몰려왔다.
묵랑이었다.
아마도 검신의 정신일 그분이 마침내 다시 나타나 내게 말을 건 것이었다.
문득 바라본 호수구에 새겨진 늑대의 눈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솔직히 말하자면 시험은 아까 자네가 낭인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린 순간부터 통과한 것이었다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협심을 세 번 증명하는 것이 내 시험이었거든. 하지만 좀 더 극적인 순간에 등장하고 싶어 기다리고 있었지.
역시!
시험의 내용은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맞았었다.
내 예상이 정확했던 것이다.
그러자 문득 ‘그럼 여령색마 손은상 선배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을 때가 세 번째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전에 당 소저를 위해 목숨을 버리려 했을 때는 묵랑검을 다른 곳에 숨겨 놓은 상태였고, 또 그게 실제가 아닌 환상이었기에 그렇다 치지만, 손 선배를 구하려 뛰어들었을 땐 실제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 그때는 무효라네. 내가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몸을 날린 거야 순수한 협행이라고 볼 수 없지 않겠나?
유쾌하지만 좀 얄미운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묵랑이 나올 거라는 기대 없이 정말 순수하게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지나치게 까다로운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상관없었다.
본인이 말했듯 그가 등장하기에 지금보다 더 적당한 상황은 없었을 테니까.
- 자, 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말하겠네. 나는 다섯 개의 검에다 각각 모두 다른 무공들을 남겨 놨다네. 모두 다른 검법들을 보고 영감을 얻어 창안했던 것들이지. 묵랑검에 남겨 놓은 건 묵랑검법과 묵랑심법일세. 이름이 좀 단순하지? 하지만 내용은 그리 단순하지 않을 거라네. 그것들이 천마신공과 아수라파천무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것들이거든.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문득 지금 상황도 잊은 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예에?!’
다섯 개의 검? 하나가 더 있었어?
아니, 그보다 천마신공? 아수라파천무라고?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천마신공과 검법인 아수라파천무, 그리고 보법인 천마군림보는 천 년을 이어 왔다는 천마신교의 수장, 천마의 상징과도 같은 무학이었다.
그리고 천마는 현 무림의 절대자인 일제, 이왕, 삼성, 사마, 오괴 중 천하사마의 일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묵랑은 지금 그 천마신교 최고의 비기인 천마신공과 아수라파천무를 이용해 새로운 무학을 창안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아, 마기에 침식당하지 않을까 걱정은 안 해도 된다네. 내가 만든 묵랑심법은 마기를 쌓는 마공이 아니거든. 사람들을 섭혼하는 지존신안의 효과도 그래서 없애 버렸지. 형님이야 그걸 요긴하게 쓰셨던 것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섭혼술은 너무 마교스럽지 않은가? 대신에 재생력을 더 극대화했다네. 칠 성 이상으로만 익히면 팔 하나쯤 떨어져도 금세 재생할 수 있을 걸세.
뭔가 굉장히 비현실적인 얘기가 머릿속에 들어오고 있었다.
팔이 떨어졌는데 재생을 한다고?
도마뱀 꼬리처럼 말인가?
분명히 이해를 했는데 이해가 안 됐다.
멍하니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예?’
- 흠, 원래 천마신공이 불사신공이라고 불렸던 걸 몰랐던 모양이로군. 팔을 재생하는 정도는 수준이 떨어지는 당대 천마도 가능할걸세.
‘아…, 네, 천하사마의 일인인 천마가 수준이 떨어지는 거였군요?’
너무 광오한 얘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있으려니 어쩐지 현실감각이 없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묵랑이 혀를 차며 대답해 줬다.
- 무려 천마신교의 주인이면서 마신이나 마황, 마제는커녕 기껏 천하사마의 일인 정도로 불리고 있다니, 수준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지는 놈이지.
‘…네, 그렇군요.’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 아무튼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 검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딱 세 번 내가 자네의 몸을 대신 움직여 줄 수 있다는 것일세. 그래서 말인데, 자네는 그 시점을 언제로 하고 싶은가?
어쩐지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였다.
그나저나 몸을 대신 움직여 준다고?
문득 거력마 저웅원과의 싸움이 생각났다.
그때 묵랑은 내 몸을 움직여 당시 내 수준으론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저웅원을 그야말로 가볍게 요리해 버렸었다.
생각해 보면 선우십삼검 십오 초인 공즉시색을 익힐 수 있었던 것도, 그 후 내가 급속도로 발전한 것도 모두 그때 묵랑이 내 몸으로 시범을 보여 줬기 때문이었지 않은가.
그러니까 지금 묵랑은 암혈향에게 죽기 일보 직전인 내게, 그때처럼 몸을 맡기겠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 정확히 이해했네.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그는 나를 가르치겠다는 핑계로 암혈향과의 싸움을 도와주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싫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사정을 해서라도 부탁해야만 할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문득 나도 장난기를 담아 대답해 봤다.
‘꼭 지금 당장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묵랑검법과 묵랑심법이 너무 궁금해 도저히 더 기다릴 수가 없군요.’
그러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 하하하하하! 그거 아는가? 난 참 자네가 마음에 든다네. 내 생전에 만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일세.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작스럽게도 시간이 다시 원래의 속도로 돌아왔다.
그 갑작스러운 원상 복귀에 나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암혈향이 쏜 세 개의 쇠구슬이 등을 꿰뚫기 일보 직전인 상태에서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무리 묵랑이라 해도 이 상황에선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싶었다.
설사 그의 정신이 진짜 검신이라 해도 몸의 수준은 결국 아직 초절정도 못 된 내가 아닌가.
호신강기를 쓴다 해도 막기 힘들 것 같은데 심지어 나는 그걸 쓸 수조차 없었으니….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그 걱정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이었는지를 실감해야만 했다.
팽!
내 몸이 한순간 팽이처럼 급속도로 회전했다.
그러자 회전하는 내 등은 두 개의 쇠구슬을 흘려 내고는, 나머지 하나의 쇠구슬을 측면으로 밀어내고 말았다.
내 등을 마치 손처럼 사용해 쇠구슬을 쳐 냈던 것이었다.
그 요술 같은 상황에 나는 멍하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고법?’
그것은 고법이었다.
등을 타격점으로 사용하는 박투술 말이다.
선우세가의 질풍십팔박에도 등을 이용한 고법이 있었기에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섬세하게 등을 사용하는 박투술은 보기는커녕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때 묵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전륜박이라고 하네. 한때 천하제일인이었던 투신마 고광의 무학이지.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떤 무공을 썼는가가 아니라네. 사고에 한계를 두지 않는 것이지.
그와 동시에 내 몸은 폭진보를 이용해 암혈향을 향해 튀어 나갔다.
파앙!
내 쪽으로 달려오는 암혈향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문득 침을 꿀꺽 삼켰다.
불안했다.
그가 비록 검신의 정신이라 해도 이건 내 몸인데,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인 암혈향과 정면으로 맞붙는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말도 안 되게 깨져 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자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묵랑이 말했다.
- 상대가 두렵다고 느껴질 땐 과대평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도록 해야 하네. 우리가 최대한 빠르게 놈과의 거리를 좁혀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나 있지.
그의 말은 무척 의외였다.
내가 암혈향과의 거리를 좁혀야 하는 이유가 세 가지나 있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 첫째, 저자의 병기가 구절편이고 우리 병기가 검이기 때문일세.
‘…아아?!’
그 말에 나는 속으로 어이없는 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사정거리가 긴 구절편을, 사정거리가 짧은 검으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간격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본을 잊는 것은 모두 암혈향의 거대한 존재감 때문이었다.
가까이 가면 당하고 말 거란 두려움에 눈이 멀어 기본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아무리 그가 두려워도 싸우기로 결심했다면 당연히 간격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했어야 할 것인데….’
그러자 묵랑이 가볍게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 사고를 자유롭게 하되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네. 무인들이 자기보다 고수와의 싸움에서 쉽게 지는 이유는 의외로 상대가 강하기 때문이 아닌 자기 스스로가 먼저 두려움에 빠져 스스로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니까 말일세.
무슨 말인지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하수들이 고수들 앞에서 빠르게 무너질 때는, 대부분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닌 너무 소극적이거나 무모하게 대응했기 때문일 때가 많다는 건 나도 익히 봐 왔기 때문이었다.
그때 묵랑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다음 이유를 설명했다.
- 둘째, 저자가 지금 방심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다시 철환을 날렸다면 충분히 위협적이었을 것을, 얼마나 자네를 우습게 봤으면 이렇게 쉽게 거리를 좁히도록 허용해 주고 있군. 무려 단거리 병기인 검을 든 자네에게 말일세.
그 말 또한 정확한 사실이었다.
암혈향은 내가 그쪽으로 방향을 틀자, 더 이상 공격하지 않은 채 그저 거리를 좁히기만 하고 있었다.
내가 뭘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에 방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셋째, 내가 자네의 몸을 그렇게 오랫동안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일세. 앞으로… 한 이십을 셀 정도의 시간만이 남았군. 그러니 사실 빨리 승부를 결정해야 하는 건 저자보단 우리 쪽이었던 거지.
‘예에?!’
다른 두 가지의 이유들도 내게 놀라움을 주기는 했지만 단연코 세 번째 이유만큼은 아니었다.
겨우 이십을 셀 정도의 시간뿐이라니…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인 암혈향을 잡는단 말인가?
그때였다.
드디어 내 신형이 놈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구절편이 기다렸다는 듯 곡선을 그리며 내게 쏘아졌다.
촤아아아악!
엄청난 속도의, 그러면서도 살아 있는 지네가 덮쳐 오듯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치명적인 찌르기였다.
‘위험…!’
내가 깜짝 놀라 소리쳤을 때 내 몸은 이미 부드럽게 슬쩍 흩날리며 그 찌르기를 피한 후였다.
촤아아악!
바로 뒤에서 방향을 바꿔 찔러 온 찌르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몸이 강풍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팽그르르 돌며 놈의 공격을 흘려 내고 있었다.
묵랑이 말했다.
- 다른 사람이었다면 신법도 가르쳐 주려고 했겠지만, 자네에겐 그럴 필요가 없더군. 천풍신법은 충분히 훌륭한 신법이거든.
그 말을 하는 도중에도 내 신형은 주변을 둘러싼 채 조여 오는 구절편의 공격도, 반으로 쪼개 버릴 듯 내리치는 공격도, 연속적으로 찔러 오는 찌르기까지도 모두 피해 내고 있었다.
- 너무 감각에 의존해 억지로 움직이려고 하지 말게. 천풍신법의 목표는 공기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 공기가 어디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던가? 흐름에 순응하게. 그럼 어떤 공격도 자네에게 닿지 못하게 될걸세.
‘아아아!’
나는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내 몸은 지금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음으로써 암혈향의 공격을 모두 다 흘려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황홀했다.
지금 월하환검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황홀경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자 잠시 의외인 듯하던 암혈향의 눈빛이 점점 진지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화아아아악!
한순간 구절편의 머리가 아홉 개로 분열됐다.
그러곤 내 아홉 방향을 점한 상태에서 빛살처럼 찔러 들어왔다.
아홉 방향에서 내 몸을 벌집으로 만들 듯 찔러 오는 엄청난 속도의 찌르기였다.
촤아아아악!
하지만 그 찌르기도 내 몸에 닿지 않았다.
구절편들이 내 몸을 꿰뚫는 순간 내 신형이 꽃잎처럼 파사삭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묵랑이 내 몸으로 펼쳐 낸 천풍화엽의 초식이었다.
하지만 그가 펼친 천풍화엽은 오히려 내가 했던 것보다도 화려하지 않았다.
수십 개의 잔상을 만들었던 나에 비해 고작 십여 개 정도, 훨씬 적은 수의 잔상을 만들어 냈던 것이었다.
그 십여 개의 잔상이 꽃잎처럼 흐르며 놈의 주변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다.
묵랑이 말했다.
- 하수들이라면 모를까 자신보다 실력이 높은 자를 상대할 때 중요한 건 양보단 질이라네.
그게 무슨 말인지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수가 적어진 만큼 더 명확해진 잔상에 암혈향도 일순 내 진신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 천하삼십육성의 일인, 진신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해서 전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화아아악!
그의 구절편이 한순간 원을 그리며 빨려 들어가듯 응축되고 있었다.
‘이건?!’
분명 지난번에 본 적이 있었던 수법이었다.
내 공즉시색을 용권풍처럼 찢어발겼던 그 수법.
아마도 그것으로 잔상과 진신을 모두 날려 버리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조심…!’
그것을 바로 묵랑에게 경고해 주려고 했을 때였다.
놈의 구절편이 먼저 폭발하듯 확장했다.
화아아아아아악!
그러자 또다시 내 앞에서 거대한 용권풍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주변의 모든 것을 찢어발겨 버릴 것만 같은 흉포한 발톱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묵랑의 대응은 이번에도 내 상상을 초월했다.
‘무, 무슨?!’
나는 경악해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단지 내 몸이 그 공격을 흘려 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 진신뿐만이 아니라 잔상들마저도 천풍신법의 오의에 따라 그 흉포한 공격을 흘려 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잔상들에 나는 말을 이을 수조차 없었다.
‘이, 이게?!’
그러자 묵랑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러게 사고를 자유롭게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네는 이미 공즉시색을 익혔네. 검에 가능했던 것이 왜 몸에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띵!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내 공즉시색은 환검을 실검으로 치환해 상대를 공격하는 초식, 그게 검에 가능했다면 몸에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다시 묵랑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자, 이제 시간이 절반 정도 남았군. 더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이번에는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너무 충격을 받아 시간이 흘러가는 것조차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까 이십을 셀 정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었는데 말이다.
내가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묵랑이 말했다.
- 집중하게.
동시에 묵랑검에 검강이 맺히기 시작했다.
평소의 내 검강처럼 연보랏빛이 아닌 어두운 진보랏빛의 검강이었다.
화아아악!
- 아수라파천무는 단 하나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검법이지. 온 세상을 군림하는 패왕의 검에 두 번째 초식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내 묵랑검법은 삼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네.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단 일 검으로 부숴 버리는 패도 대신 상대의 수준에 맞춰 주는 배려를 담고 싶었기 때문이었지.
그때 구절편의 머리가 다시 아홉 개로 분열했다.
그것도 아까처럼 바로 찔러 오는 것이 아닌, 마치 구두룡의 머리처럼 아홉 방향을 점해 감아 오고 있었다.
모든 방향을 점하고 나면 그 순간 조여 올 모양이었다.
긴장된 눈빛으로 하늘을 가리는 구절편의 그림자를 보고 있을 때였다.
묵랑의 긴장감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일 초, 개천이라네.
그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문득 하늘이 열렸다.
나를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던 구절편에 의해 가려져 있던 하늘이, 갑자기 무언가에 의해 갈라지듯 열려 버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내 손에 들린 검이라는 사실에 나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시선을 암혈향에게로 돌렸다.
그러자 처음으로 경악한 표정의 암혈향이 뒤로 정신없이 물러서고 있었다.
그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때 또다시 묵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 초, 비상.
그러자 내 검이 앞으로 나아갔다.
검이 나아가는 주변으로 너무도 거대한 진보랏빛의 날개가 펼쳐지고 있었다.
암혈향은 경악한 표정으로 구절편을 휘둘러 그것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진보랏빛 날개가 완전히 펼쳐지자 놈의 구절편이 그 거력을 견뎌 내지 못하고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뚝! 뚜둑!
세 조각으로 나눠진 구절편이 무력하게 흩어져 버리고 있었다.
암혈향은 이제 다급한 표정으로 뒤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아마 도망치려 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묵랑이 세 번째 마지막 초식의 이름을 읊었다.
- 삼 초, 멸천.
그러자 완전히 펼쳐진 진보랏빛 날개가 한순간 광풍과 뇌전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하늘을 멸할 듯한 광폭한 폭격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찰나이자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세 번째 초식이 끝났다.
하지만 그 후 내 몸이 다시 땅을 밟았을 때까지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초식이 지나간 대지는 완전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암혈향의 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구절편, 그가 입었던 옷, 그리고 그의 몸이 모두 가루가 되어 초토화된 대지 어딘가에 뒤섞여 있었다.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대체 어디에 배려를 담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묵랑이 예의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 시간이 끝났군. 어떤가? 잘 배웠는가?
그러자 내 몸이 다시 내 의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초토화된 대지와 그 속에서 일부가 되어 있을 암혈향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