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소식-2
사천성 사천당문의 외당림.
당여은은 평상시 늘 이곳으로 와 백학노검 양문헌과 수련을 하고 있었다.
“후우우!”
방금 전까지 양문헌의 의동생인 제운검객 벽리중과 대련을 했던 당여은은 깊게 심호흡을 내쉬며 밝은 얼굴로 그에게 인사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벽 어르신.”
그러자 벽리중은 흡족하게 웃으며 그녀를 칭찬했다.
“또 발전했구나. 이제껏 내가 본 이십 대의 여아 중 너보다 뛰어난 아이는 없었다. 형님, 이러다 형님의 의손녀가 나중에 천하제일녀, 아니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답을 한 것은 양문헌이 아닌 그 옆에 있던 왜소한 체구의 원숭이 같은 노인 홍해아 증칠이었다.
그가 경박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크헤헤헤! 내 여동생을 감히 천하제일인 따위로 한정 짓다니! 재능에 성품, 미모에 기연까지 갖췄으니 고금제일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않소, 양 형…, 아니 양 조부님?! 크헤헤헤헤!”
증칠의 호들갑에 벽리중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고금제일은 무슨. 어디 가서 그런 소리 좀 하지 말 거라. 무신과 뇌신, 검신의 전설을 추종하는 자들이 사방에 깔렸건만, 그러다 여은이에게 해만 끼치겠구나.”
“흥! 과거의 전설이나 추종하는 그런 하잘것없는 놈들이 뭐가 무섭다는 거냐?! 내가 가서 다 박살 내 주면 되지!”
“쯧쯧, 당장 검제께서도 검신의 추종자이신데 말이냐? 참, 잘도 박살 내겠구나. 그리고 네놈이 형님을 조부로 모셨으면 나도 조부가 아니더냐? 왜 나에게는 반말을 하는 것이냐?!”
“뭐, 뭐?! 이 망할 놈이 노망이 들었나?! 너 따위가 어떻게 내 조부라는 거냐?! 한판 해보자는 거냐?!”
“아니, 네놈이 먼저 형님께…!”
두 사람은 늘 그렇듯 티격태격하고 있었고, 양문헌은 예의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양문헌이 당여은을 바라보며 물었다.
“표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아 보이는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당여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조부님. 그저… 이제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가주께 드릴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흠…, 전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전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느냐?”
당여은은 일전에 선우진으로부터 귀주성과 선우세가의 상황에 대해 설명한 서신을 받았었다.
그는 그 서신에서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혹시 당가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언급을 남겼었다.
하지만 당여은은 그래도 계속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최선을 다한다고 했으니 자신도 끝까지 믿어 줘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는 못 올 것 같아서요. 원래 그런 말을 전하기도 했었지만, 최근 검성과 괴검의 대결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면 아마 바로 전선에 복귀했을 거예요.”
당여은은 선우진이 얼마나 검성을 존경하고 따르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아마 그라면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당연히 바로 전선으로 복귀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서운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말에 양문헌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괴검과 검성의 대결이라.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지 모르겠구나. 괴검이 검성에게 감히 대결을 청할 리가 없을 터인데. 아무래도 뭔가 알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것만 같구나.”
양문헌의 말에 당여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선우진을 생각했다.
‘그라면 그 내부에 숨겨진 상황을 충분히 짐작해 알려 줄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이다.
하지만 잠시 그에 대한 생각을 하던 당여은은 문득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선우진도, 괴검과 검성의 대결도 물론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급한 일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당 가주이신 아버지 당정후를 만나러 가야만 했던 것이다.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서 말이다.
당여은은 분명 이전보다 훨씬 당당해지고 대범해진 상태이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있어 천하제일인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만 할 일이었다.
‘난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렇죠, 진?’
그녀의 마음속에서 늘 속삭여 주는 선우진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힘을 주고 있었다.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난 여은을 믿어요.’
당여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같은 시각, 자신의 집무실에 있던 사천당문의 가주 독암지존 당정후는 총관과 함께 가문의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에게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여은 막내 아가씨로부터의 접견 요청입니다!”
그 목소리에 당정후의 눈이 잠시 이채를 띠었다.
당여은이 먼저 자신을 만나러 오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흠, 그 아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웬일이지?”
그러자 옆에 있던 총관이 말했다.
“전선으로의 복귀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휴가도 거의 끝나갈 시간이니까 말입니다. 게다가 최근 검성과 괴검의 대결에 관한 소문도 있으니 아무래도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흠,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던가?”
그의 말에 새삼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던 당정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는 입을 열었다.
“그럼 가기 전에 혼사를 마무리 지어야겠군.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먼저 온제웅을 불러오게.”
그러자 총관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홍사검룡 온제웅이 선우진을 처리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젠 당여은과 그와의 혼사를 더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총관이 사람을 시켜 온제웅을 불러오게 하고 다시 집무실로 들어오자, 당정후가 문득 생각난 듯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자네는 괴검과 검성의 대결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총관도 당연히 검성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당가 제일의 두뇌로 알려진 총관 당사현이 대답했다.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당정후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정후는 그의 설명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들으며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
“다녀오마.”
천의검성 해운백은 마치 집 앞에 산보를 나가듯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
하지만 그 인사를 듣는 해청연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
자신의 딸인 해청연이 굳은 표정으로 인사에도 대답하지 않고 있자, 피식 웃은 해운백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옆에 있던 설풍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딸이 또 뭔가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군. 내 딸이지만 저럴 땐 나도 너무 무섭다네. 아무리 예쁘고 똑똑하면 뭐 하나? 저래서 남자나 만날 수 있을까 싶군. 자네 생각엔 어떤가?”
하지만 설풍 역시 그의 장난에 맞춰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저희가 따라가면 안 되는 겁니까, 어르신?”
그러자 해운백이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것 참, 역시 진이 녀석이 아쉽군. 그 녀석이 있었어야 내게 좀 쿵짝을 맞춰 줬을 텐데 말일세.”
그러고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근무 중인 자네들이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그거 근무지 이탈이라네. 감히 전선을 관리하고 있는 내 앞에서 근무지 이탈을 당당히 요구할 셈인가? 그리고… 만약 나조차 감당하기 힘든 함정이 펼쳐져 있다면 그땐 자네들이 있는 것이 더 힘든 상황이 될 수 있다네. 청연이도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해청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한 말이 자신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검성이신 아버지조차 감당하지 못할 함정이 펼쳐져 있다면 자신들이 옆에 있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차피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감정적으로 그것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게 해청연이 좀처럼 얼굴을 펼 수 없는 이유였다.
그때 해운백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근데 어디 그럴 일이 있겠는가? 지금 나와 함께 가는 인원들을 보게. 이 인원이면 정혈대전도 다시 한번 치를 수 있을 것 같구먼.”
현재 해운백과 함께 움직이는 자들은 무림맹의 정예 무력대인 백호대 백여 명이었다.
그 대주인 백호군자검 동방무극은 내공 팔십 년을 넘어선 고수였고, 그들 모두는 검성 해운백의 열렬한 추종자들로도 유명했다.
또한 검성의 옆에는 얼마 전까지 없었던 두 명의 고수들이 더 붙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쌍룡장 우차만과 유성비표 교재곡, 두 사람 모두 천하삼십육성에 속하는 극강의 고수들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무리엔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고 인정받은 오십 위 안의 인물 세 명이 함께 있는 것이었다.
검성이 그들을 불렀던 이유는 해청연 때문이었다.
해청연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고수들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었다.
‘설사 나중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시더라도 지금은 최대한 많은 고수들을 부르셔야만 해요. 어떤 함정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런 해청연의 주장에 해운백도 지인들에게 급히 연락을 돌렸었다.
하지만 일정이 워낙 촉박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제때 도착할 수는 없었다.
쌍룡장 우차만과 유성비표 교재곡, 이 두 사람은 그런 촉박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급히 시간에 맞춰 달려와 준 해운백의 지인들이었다.
거구의 쌍룡장 우차만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걱정 말거라, 청연아. 괴검 그놈과의 대결 전까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네 아비 옆에 가지 못하도록 이 숙부가 지켜 줄 테니 말이다. 하하하하!”
그러자 왜소한 체격의 유성비표 교재곡 또한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지. 우리가 옆에 있는데 무슨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너는 전혀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호언장담에 해청연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감사합니다, 숙부님들. 질녀는 두 분 숙부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그런 자신의 딸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해운백은 문득 저 멀리 뒤쪽 그림자에 은신해 있는 삭무흔에게 전음을 보냈다.
- 청연이를 잘 부탁한다, 무흔아.
- 걱정 마십시오, 스승님. 제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청연이를 지키겠습니다.
해운백은 얼마 전 삭무흔을 자신의 정식 제자로 인정해 주고는 독문 무공인 성라검법도 전수해 줬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해청연에게는 비밀로 했었다.
자신이 사후를 준비하는 모습을 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수많은 위기를 넘겨 왔던 해운백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실력이 아닌 운이라는 사실을….
그러니 자신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이번 길이 마지막이 될 확률도 충분히 있었다.
또한 제갈지강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지 않은가.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자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쩌면 지금 이 대결에 대해 가장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딸 해청연이 아닌 해운백 자신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런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해운백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작 산보나 갔다 오는 길에 인사가 너무 길었구나. 번잡하니 모두 들어가도록 해라. 이만 다녀 오마.”
해운백은 당당한 걸음으로 길을 출발했다.
그의 뒤로 천하삼십육성에 속한 고수인 우차만과 교재곡, 그리고 백호대 대원 백여 명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해청연은 불안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해운백의 바로 뒤에 선 우차만과 교재곡이 은밀하게 시선을 교환하는 모습까지는 눈치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