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검성 대 혈마
잠시 혈마를 바라보던 검성이 침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강이 당신을 보냈소?”
그러자 혈마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구려. 그리고….”
혈마의 온몸에서 붉은 강기가 천천히 불꽃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납게 웃으며 물었다.
“그게 중요하오?”
혈마의 말에 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제갈지강이 혈교와 소통하고 있었다는 건 거의 확실한 사실이고, 지금 이 순간 누가 살아남을지도 모르는데 혈마를 그가 보냈다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건 일단 살아남고 나서 생각해 볼 문제였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매우 어려운 일이 되겠지.’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검성의 상태는 지금 그리 좋지 않았다.
앞서의 싸움에서 너무 많은 공력을 한꺼번에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이기어검을 사용했던 것이 컸다.
초장부터 이기어검을 사용한 이유는 적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적들이 정신을 차리고 힘을 합하지 못하도록 수를 빨리 줄이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이기어검은 검성인 그에게도 그리 만만한 수법이 아니었다.
그 잠깐 동안 호신강기를 뚫을 만큼 힘을 쓴 것만으로 내공의 반을 소진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혈마가 나타나다니. 게다가 척강, 두당, 구우절이 모두 건재한 상태라면….’
만약 저들이 합공한다면 오늘 자신은 절대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듯했다.
백호대 무사들이 있다 한들 아까 봤듯이 그들은 두당 한 명조차도 상대하기 벅찼으니까 말이다.
‘혈마를 도발해 어떻게든 일대일 대결로 끌고 갈 수만 있다면….’
검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팔을 지혈한 흑혈환마 두당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지존! 저희가 돕겠습니다! 오늘 검성을 사냥하시옵소서!”
그의 말에 백면시마 구우절과 철신광마 척강도 자세를 낮추고 전투를 준비했다.
이미 검성에게 당한 적이 있기에 모두 힘을 합쳐 그를 잡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검성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뭘 해 보기도 전에 최악의 상황이 된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혈마가 엄한 표정으로 두당을 꾸짖었다.
“너는 나를 지존이라 부르면서도 내 명예를 땅바닥에 처박으려고 하는구나! 내가 그를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래서 검성과 무를 논할 수 있는 기회를 내게서 빼앗으려 하는 것이냔 말이다?!”
그의 노호성에 두당은 당황하고 말았다.
“예, 예?! 아, 아닙니다, 지존. 속하는 단지….”
자신도 모르게 혈마를 검성의 아래로 생각했던 두당은 어떻게든 자신의 실수를 변명하려 해 봤다.
하지만 혈마는 그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와 나의 싸움은 서로의 무를 겨루는 숭고한 싸움이다! 설사 내가 그에게 죽는다 해도 아무도 끼어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느냐?!”
혈마의 명령에 두당과 구우절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때 척강이 먼저 털썩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존! 지존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는 자신의 주인이 보여 준 무인다움에 완전히 감복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서로 눈치를 보던 두당과 구우절은 혈마가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나서야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지존.”
“…….”
혈마는 부하들에게 끼어들지 않을 것을 다짐받자 다시 검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그대의 힘을 상당량 소모한 상황에 이제 와서 무사다운 척한다고 비웃어도 할 수 없소만, 그래도 나는 지금부터라도 그대와 무인답게 겨뤄 보고 싶구려. 그러니 그대도 그대의 일행들에게 당부해 주시겠소?”
그러자 검성은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백호대 무사들에게로 고개를 돌려 당부했다.
“혈교도들도 하지 않는 짓을 정파인 우리가 할 수는 없다.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그의 말에 백호대 무사들이 이를 악물고 고개 숙여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어르신!”
검성은 잠시 묘한 눈빛으로 혈마를 바라봤다.
사실 백호대 무사들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그들이 끼어들어 봐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혈마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아마도 자신을 존중한 배려인 듯했다.
혈마의 외관은 생각보다 훨씬 청수했다.
혈교의 마두라기보다는 정파의 대협에 훨씬 더 가깝게 생긴….
물론 외모만으로 그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행동만으로도 아까 자신이 죽였던 우차만, 교재곡보단 훨씬 더 사내다운 자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검성이 그를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
“나를 꼭 잡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소? 아니면… 내게 절대 질 리가 없다는 자신감인가?”
그러자 혈마가 빙긋이 웃고는 대답했다.
“내 비록 혈교 무공의 광기에 휩쓸린 마두이지만, 검성을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자부할 만큼 오만하지는 않소. 다만….”
잠시 말을 고르던 혈마가 어쩐지 착잡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은 검성 그대를 꽤 인정하고 있다오. 과거엔 그대와 같이 강력한 명문가 출신이기를 바란 적도 있었지. 하지만 막상 이 자리에 오르게 되니 알겠더구려. 그대와 같은 환경을 얻었다 해서 모두가 그대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걸 말이오. 아니, 세상 사람의 대부분은 그렇게 살지 못하겠지. 이 나를 포함해서 말이오. 그래서요. 많은 정파의 위선자들 중 그대만큼은 무사 대 무사로서 대해 주고 싶었소.”
검성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은 친우이자 무림맹의 군사인 제갈지강이 혈교와 거래해 자신을 죽이려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혈교의 마두는 자신의 삶을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미 부하들을 이용해 자신의 전력을 감소시킨 상태이니, 지금 그가 말하는 것 역시 그저 기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혈마의 진중한 눈빛을 바라본 검성은 어쩐지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검성은 상대의 진심에 응답해 주기로 했다.
그는 검을 들어 혈마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하남해가의 가주를 맡고 있는 해운백이라고 하오. 무림의 동도들로부터 천의검성이라는 과분한 별호로 불리고 있소. 지금부터 가전무공인 성라검법으로 그대를 상대할 생각이오.”
그러자 혈마는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가는 이내 뜨거운 눈빛으로 검성을 바라보며 정중히 포권해 화답했다.
“과거 운남 전가장의 가주였고, 현재는 혈교의 교주를 맡고 있는 전무광이라고 하오. 그대와 달리 성정이 흉악하고 행사가 악랄하여 동도들에게 사혜혈마라는 별호밖에는 얻지 못하였구려. 지금부터 구천혈룡공으로 그대를 상대할 생각이오.”
구천혈룡마공.
검성은 그 이름을 듣고는 긴장하는 동시에 투지를 불태웠다.
구천혈룡마공이라면 혈교 무학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도의 무공 중에선 천마신공 다음으로 쳐주는 극강의 무공, 혈마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절기로 검성을 상대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검성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천천히 검을 겨눴다.
“솔직히… 그대와 싸우는 기분이 즐거울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오.”
그러자 혈마 또한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영광이오.”
다음 순간, 두 사람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이곳저곳에서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콰쾅! 콰콰쾅! 콰쾅! 콰콰콰쾅!
숲이 순식간에 초토화되고 있었다.
그 폭발들이 눈으로 좇을 수 없는 두 사람의 충돌 때문임을 깨달은 백호대주 동방무극은 자신의 대원들에게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물러나! 최소 십 장 밖으로 물러서라!”
그러자 이미 순식간에 뒤로 물러서 있던 혈교의 마두들 중 흑혈환마 두당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내 눈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군. 어이, 척가야. 네놈 눈에는 보이느냐?”
두당이 척강을 향해 물었지만 척강은 완전히 대결에 집중해 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구우절 또한 더 이상 무표정하지 않은 얼굴로 대결에 집중하고 있었다.
문득 검성과 혈마의 움직임이 멈춘 것은 일대의 숲이 완전히 초토화된 후였다.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신색으로 마주 서 있었다.
문득 혈마가 즐거운 표정으로 검성에게 말했다.
“자, 이제 몸은 다 푼 것 같구려.”
그의 말에 검성 또한 빙긋이 웃음 지었다.
두 사람은 방금 탐색전을 펼친 것이 맞았다.
하지만 이미 공력을 많이 소모한 검성에게는 그 탐색전에 소모되는 공력조차 만만치 않았다.
혈마는 지금 그런 검성의 사정을 알고는 그가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때 제대로 싸워 보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검성으로선 마다할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문득 검성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가장과 그대의 비사는 나도 들었소. 어쩌면 그대를 혈교에 가도록 한 것이 이 시대 정파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일지도 모르겠구려.”
그러자 혈마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게 운명 아니겠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었다.
검성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검에 온 공력을 집중하며 소리쳤다.
“가겠소!”
다음 순간, 검성의 신형이 빛살이 되어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슈학!
그야말로 한 줄기 빛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 순간 혈마에게 검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엔 오직 검 한 자루만이 남아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있었다.
검성의 몸이 검과 하나가 된 것이었다.
“허어!”
그 고절한 경지에 혈마가 감탄성을 토해 낼 때 검성의 검이 순간 폭발하듯 분열했다.
성라검법 십팔 초.
은하서천.
화아아아악!
그것은 마치 밤하늘에 가득 찬 은하수와도 같았다.
검성의 검강이 별 무리를 토해 내듯 찬란하게 빛나며 혈마의 시야를 가득 채운 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경이롭고 아름다운 절초에 혈교의 세 마두들 또한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허어….”
“엄청나군.”
“…….”
그러자 혈마 또한 준비하고 있던 초식을 펼쳤다.
성라검법의 최고 절초에 부족하지 않은 구천혈룡마공의 최후 초식이었다.
구천혈룡마공 최종 식.
구천혈룡식천하.
다음 순간, 혈마의 타오르는 듯한 붉은 강기에서 아홉 개의 붉은 용머리가 뛰쳐나왔다.
캬아아아아아아!
마치 지옥에서 뛰쳐나온 듯한 붉은 빛의 거대한 구두룡이었다.
그 압도적인 모습에 백호대 무사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어억!”
“저, 저럴 수가!”
“어르신!”
그리고 혈마의 구두룡과 검성의 은하수가 마침내 하늘 위에서 충돌했다.
투웅!
그 충돌의 순간은 고요했다.
주변인들이 볼 수 있었던 건 천지가 개벽하듯 세상을 환하게 밝힌 거대한 광채뿐이었다.
화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 직후,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악!”
“쓸려 나간다! 모두 엎드려!”
“아아아아아아악!”
십 장 이상을 떨어져 있던 백호대 무사들마저도 그 엄청난 폭발에 휘말려 낙엽처럼 내팽개쳐질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인간과 인간의 충돌이 만든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폭발이었다.
백호대 무사들은 모두 쓸려 나갔고, 간신히 그 자리에서 버텨 낸 혈교의 세 마두들만이 잠시 후 폭발의 현장을 바라볼 수 있었다.
“쿨럭! 쿨럭! 지존!”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억! 저기!”
“……!”
그곳엔 검성과 혈마가 여전히 꼿꼿이 선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두 사람 다 방금 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는 믿을 수 없는 평온한 신색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망부석처럼 서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몸을 돌린 것은 혈마였다.
혈마가 등을 돌리자 검성이 문득 그에게 물었다.
“이대로 갈 생각이오? 아까 나를 존중하고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러자 혈마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잠시 멈춰 탄식하며 말했다.
“그대를 존중하오. 아니, 존경하오. 하지만 내겐 혈교 지도자로서의 입장이 있다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그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만약… 내가 도움이 필요했을 때 그대와 같은 무인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구려. 그대를… 절대 잊지 않겠소.”
그렇게 말한 혈마는 다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로 의아한 눈빛으로 시선을 교환한 세 마두들이 그의 뒤로 바로 따라붙었다.
세 마두들은 아무 말도 없이 걸어가는 혈마의 뒷모습에 차마 결과에 대해 묻지 못했다.
하지만 검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자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두당이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자 혈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교천하를 이루려면 반드시 혈마인부터 완성시켜야 하겠구나. 검성도 이리 힘들었는데 검제는 오죽할꼬.”
그렇게 말하는 혈마의 입에선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편, 폭발에 휘말려 쓸려가 버렸던 백호대 대주 동방무극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황급히 검성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검성 어르신!”
하지만 그가 검성에게 거의 다가갔을 때 보게 된 건, 검을 땅에 꽂은 채 꼿꼿이 서 있던 검성이 한순간 비틀거리며 피를 토하는 모습이었다.
“커헉!”
검성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검으로 땅을 받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전신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동방무극이 그에게 달려들어 부축했다.
“어르신! 검성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검성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서, 대원들을 추슬러라. 약속 시간이 지났구나.”
그 말을 들은 동방무극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약속이라니요?! 괴검 서일과의 약속 말씀이십니까? 안 됩니다, 어르신! 이런 몸으론 대결을 진행하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검성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느냐? 제갈지강의 손길이 이미 우리를 둘러싸고 있느니라. 내가 이 자리를 벗어나려 하면 바로 공격해 올 것이다.”
검성은 혈마가 떠난 뒤 주변을 두껍게 둘러싼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미 포위망이 완성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상태를 알면서도 공격해 오지 않는 이유는 뻔했다.
“그들은 내가 자연스럽게 괴검에게 패해 죽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제갈지강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말이다.”
그러자 동방무극이 울부짖듯 소리쳤다.
“어르신께서 그 계획에 왜 따라 주셔야 한단 말입니까?!”
검성은 창백한 얼굴로 빙긋이 웃음 지었다.
그 계획을 따라 주어야 하는 이유는 만약 자신이 괴검에게 죽는다면 백호대 무사들은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자리에서 벗어나려다 공격을 받게 되면 백호대 무사들마저 모두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검성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내 삶에 ‘도주’라는 불명예를 남길 수는 없다.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천의검성으로서 죽을 것이다.”
단지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몸으론 도주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만, 자신이 만약 도주를 시도한다면 제갈지강은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전 무림인에게 소문내 자신의 명성을 깎아내리려 할 테니까.
검성은 자신의 품에서 영약 하나를 꺼내 물끄러미 바라봤다.
딸 해청연이 자신에게 줬던 생사괴의의 ‘생사환’이라는 단환이었다.
‘소환단보다 낫다고 장담했다지?’
물론 그걸 먹어도 소용없을 것은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몸은 어떤 영약을 먹는다 해도, 설사 전설의 대환단을 먹는다 해도 서일과 싸울 만큼은 회복될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검성은 그것을 꿀꺽 삼켰다.
마지막 순간 혼자 걸어갈 수 있을 만큼이라도 회복되어야만 했다.
약을 삼킨 검성은 바로 몸에 도는 약 기운을 느끼며 몸을 억지로 바로 세웠다.
“자, 가자꾸나.”
결국 동방무극은 검성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는 비통한 표정으로 검성을 따라 비룡대 본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무림맹 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동방무극은 사람들의 중심에 그가 앉아 있는 것을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독안의 검사, 독안괴검 서일을 말이다.
서일은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창백한 얼굴의 검성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늦으셨구려. 안 오시는 줄 알았소.”
그러자 검성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하네. 시간을 착각할 뻔했지 뭔가.”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일이 먼저 검을 뽑으며 말했다.
“가겠소.”
검성 역시 애써 아무렇지 않게 검을 내밀며 대답했다.
“오시게.”
다음 순간, 서일의 신형이 빛살이 되어 짓쳐 들었다.
푸우욱!
“크윽!”
서일의 검이 검성의 심장을 꿰뚫을 때까지 필요했던 건 단 일 검뿐이었다.
지금의 검성으로선 서일의 검을 막기는커녕 두 다리로 서 있는 것까지가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던 것이다.
서일은 검성의 가슴에서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심장을 꿰뚫렸음에도 검으로 땅을 받친 채 꼿꼿하게 서 있는 검성을 잠시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그리고 찝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망할 놈을 그냥 내 손으로 죽일 걸 그랬군.”
무림의 모든 정파 무인들에게 존경받았던 협객 중의 협객이자, 이 시대의 가장 큰 별이었던 무인 검성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