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납치
“검성 어르시이이인!”
백호대주 동방무극은 목이 터질 듯 절규하며 검성에게로 달려갔다.
다른 백호대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르신!”
“안 됩니다, 어르신!”
비록 심장을 관통당했음에도 검성은 여전히 검을 땅에 박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마치 그에게로 가면 평소처럼 ‘허허!’ 하고 소리 내 웃으며 반겨 줄 것만 같았다.
“어르신!”
하지만 동방무극이 사력을 다해 달려가 그의 몸에 손을 댔을 때, 그는 검성의 몸이 뒤로 천천히 넘어가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다.
“어르시이이인!”
“검성 어르신!”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어르신!”
모든 백호대원들이 달려들어 울부짖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심장이 멈춘 검성이 다시 깨어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안 돼애애애!”
그들은 다 함께 울부짖었다.
그들의 우상이자 영웅이 이렇게 억울하고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됐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이 검성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장내가 모두 울음바다가 됐을 때였다.
문득 누군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동방 대주, 맹으로부터의 전언이요.”
모든 무인들의 우상 검성이 죽었음에도 전혀 아무런 느낌이 없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 지독한 이질감에 줄줄 눈물을 흘리던 동방무극은 문득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의 눈에 백호대와 비슷한 복장, 하지만 백호 대신 흑호가 그려진 무복을 입고 있는 무사 한 명이 들어왔다.
동방 무극은 처음 보는 그의 얼굴에 애써 울음을 멈추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로군. 누구지?”
그러자 그가 비릿하게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처음 보기는 어차피 피차일반이 아니겠소? 나는 흑호대의 대주 원당이라고 하오.”
“…흑호대라고?”
처음 들어 보는 무력대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무림맹 무사의 복장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맹으로부터의 전언이요. 지금 이곳은 물론 전선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기밀로 부치라는 상부의 명령이 있으셨소.”
“모든 일이라고?”
“그렇소. 모든 일.”
동방무극은 냉정을 되찾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천천히 다시 물었다.
“모든 일이라고 하면, 검성께서 대결을 위해 이곳에 오시던 중 혈마를 비롯한 마두들에게 습격을 받으셨다는 것도 포함인가?”
그러자 흑호대주 원당이라는 자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한 게 아니겠소? 혈교와의 분쟁이라니, 그건 그야말로 특급 기밀이 아니오. 맹에선 그 일은 물론 전선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한 기밀 유지 서약을 백호대 모두에게 작성시키라는 명령을 내리셨소. 그리고 바로 복귀하란 명령도 말이오.”
동방무극은 문득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흑호대주 원당과 그 주변의 흑호대원들은 물론, 그들과 비슷한 검은 표식을 새긴 무력대원 몇백 명이 이미 자신들의 주변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방무극은 검성이 아까 말했듯 주변을 포위했다는 병력들이 이들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원당에게 물었다.
“너, 암영대 출신이로군.”
그러자 원당이 비릿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암영대? 그게 뭐 하는 곳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그보다… 명령에 대한 답을 하셔야 하지 않겠소?”
동방무극은 또한 알 수 있었다.
만약 자신들이 따르지 않겠다고 할 경우 백호대 모두를 살인멸구할 작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동방무극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잠시 후 지친 표정으로 눈을 떠서는 물었다.
“검성 어르신을 그분의 집까지 직접 모시고 싶군. 그건 가능하겠나?”
그러자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던 원당은 심장이 꿰뚫려 있는 검성의 시신을 힐끗 보고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상관없소.”
동방무극은 분노를 억눌렀다.
검성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왜 그 몸 상태로도 대결을 마무리하러 왔는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검성이 목숨을 바쳐 살려 낸 대원들을 자신이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백호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검성 어르신을 집까지 모셔다드려야 한다! 모두…!”
목이 메었다.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백호대의 대주였다.
자신이 중심을 잡고 대원들을 책임져야만 했다.
“모두, 모두 어르신을 편안히 모실 수 있도록 준비하라!”
그의 명령을 들은 백호대원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검성의 시신을 운구할 준비를 시작했다.
수많은 무림맹의 무사들에게 포위당한 채였다.
***
한편 검성이 막 비룡십삼대에서 출발했을 때, 해청연은 두 손을 꼭 모은 채 떠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도 불안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알고 있고, 그 아버지의 옆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고 있음에도 그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해청연은 냉정하게 절대자 십오 인이 오지 않는 한 그녀의 아버지를 해칠 수는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아니, 절대자 십오 인 중에서도 검제나 사왕과 같은 최상위권의 실력자가 아닌 이상 자신의 아버지를 절대 해할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아버지는 늘 실력을 감추고 계셨으니까. 설사 아버지와 동급으로 알려진 권성이나 성녀가 온다 해도 아버지를 이길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아버지의 진정한 실력을 모르고 있는 제갈지강이 아무리 함정을 파 봐야 결국 무위로 끝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냉정하게 그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냉철한 이성과 판단을 중요시하는 그녀로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해청연은 검성이 떠난 한참 뒤까지도, 그래서 다른 비룡십삼대원들이 모두 돌아간 후에도 홀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문득 예전 칠 조의 동료들인 나서유와 천주은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청연아, 너무 걱정 마. 검성 어르신께선 무사히 돌아오실 거야.”
“그래요, 언니. 너무 걱정하지 마요.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분명 혼자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에게 열렬히 구애 중인 점창검호 제원영은 물론 설풍과 비사영, 배종관들도 차마 다가오지는 못한 채 주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마 자신을 걱정해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해청연은 문득 가슴이 따뜻해지는 동시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했다.
누가 자신을 기다리는 건 귀찮기만 한데, 저런 위로의 말들 역시 아무 의미도 쓸모도 없는 말들임에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울컥했다.
문득 그가 왜 이들을 그렇게 소중히 여겼는지 약간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보고 싶었다.
이 순간, 자신의 옆에서 위로해 주는 사람이 그일 수만 있다면….
그때였다.
설풍이 갑자기 다급한 표정으로 몸을 날려 오며 소리쳤다.
“피하시오!”
그 갑작스러운 돌진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을 때였다.
“조장?!”
“왜?!”
그 행동의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맹수같이 돌진해 온 설풍이 해청연의 뒤쪽을 덮치자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콰아아아앙!
“크으윽!”
무언가와 충돌했던 설풍이 다시 뒤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제야 다른 이들도 볼 수 있었다.
설풍을 튕겨 내고 살짝 물러서는 그림자 같은 흑의인을, 그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호오, 그 나이에 벌써 초절정? 게다가 내 은신을 꿰뚫어 봤다고?”
그제야 흑의인을 발견한 모두가 깜짝 놀라 뒤로 황급히 물러서며 소리쳤다.
“누구냐?!”
“적이다!”
“피해!”
그러자 검은 피풍의를 푹 뒤집어쓴 유령 같은 흑의인이 문득 해청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해청연인가?”
그 순간 해청연은 온몸에 소름이 확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다시 설풍이 맹렬히 돌진해 왔다.
“물러서라, 마두!”
붉은 강기에 휩싸여 거대한 붉은 발톱이 된 맹호조가 유령 같은 남자를 갈기갈기 찢을 듯 휘둘러졌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원영이 설풍의 뒤를 따라 뛰어들고 있었고, 비사영 또한 질풍이 되어 마두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대단하구나. 살려 두면 귀찮아질 놈이로군.”
조용히 중얼거린 남자의 몸에서 빛줄기 몇 개가 튀어 나갔다.
퓨슈슉!
빛줄기 세 개가 살아 있는 것처럼 휘어지며 설풍의 요혈을 덮쳐 갔다.
엄청난 속도였다.
“크윽?!”
설풍은 공세를 멈추고 몸을 맹렬히 휘돌리며 자신을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티티팅!
설풍의 몸이 다시 뒤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나마 방어가 가능했던 것도 설풍 한 명뿐이었다.
또 하나의 빛줄기는 검강을 뿜으며 달려오던 제원영의 배를 꿰뚫어 버렸던 것이었다.
푸욱!
“허억!”
제원영이 푹 꼬꾸라지는 동시에, 비사영은 자신을 노린 빛줄기를 폭진보로 급가속하여 간신히 피해 낼 수 있었다.
파앙!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팔을 강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는 없었다.
치이익!
“으윽!”
그리고 제원영의 몸에 박힌 빛줄기를 통해 사람들은 그 빛줄기가 무엇인지를 간신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은사에 달린 비검들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비검들이 은사로 조종되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풍이 튕겨 나가고 제원영, 비사영도 모두 격퇴되자 검은 남자는 다시 해청연에게로 다가왔다.
하지만 아직 해청연을 지키려는 이들은 더 있었다.
해청연의 그림자에 은신해 있었던 삭무흔이 벼락같이 뛰쳐나오며 검을 찔러 넣었다.
슈하악!
삭무흔과 전음을 통해 시점을 맞췄던 나서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측면에서 남자를 향해 뛰어들었다.
얼마 전 마침내 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녀의 검에 연노란색의 검강이 희미하게 맺혀 있었다.
“하압!”
쉬이익!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간단히 양손을 들어 자신을 찔러 오는 두 개의 검을 쳐 냈다.
쩌정!
“!”
“윽?!”
두 사람은 경악하고 말았다.
검강까지 씌웠던 자신들의 검이 너무나도 어이없이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경악했던 삭무흔과 나서유의 목은 순식간에 남자의 양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터덕!
“헉!”
“끅!”
두 사람의 마혈을 제압한 채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
“감히 내 앞에서 은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귀엽구나.”
그리고 막 손에 힘을 줘 두 사람의 목을 끊어 버리려고 할 때였다.
“멈춰!”
해청연이 소리쳤다.
그리고 그녀를 힐끗 봤던 검은 남자는 정말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자결할 듯 그녀 자신의 목에 검을 갖다 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그리고 그가 진짜로 손을 멈칫하는 것을 본 해청연은 자신의 가설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침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는 이들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죽는다면 제 시체를 보게 될 거예요.”
그러자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물었다.
“왜 네가 죽는 것을 내가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느냐?”
해청연이 빙긋이 웃으며 되물었다.
“아닌가요?”
동시에 그녀의 검날이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을 살짝 파고들었다.
붉은 선혈이 그녀의 목에서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남자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만!”
그러곤 낭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다. 너만 얌전히 따라간다면 아무도 죽이지 않으마.”
해청연이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해청연은 바로 주변에서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던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공격을 멈춰요!”
그러자 남자의 틈을 노리고 있던 설풍과 비사영이 의문 섞인 눈빛으로 해청연을 바라봤다.
해청연은 남자에게서는 절대 눈을 떼지 않으면서 천천히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자는 구유음마 지기음이에요! 어차피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에요!”
“…지기음?!”
“구유음마 지기음이라고?!”
그녀의 말은 충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유령 같은 자가 혈교오마이자 천하삼십육성에 속하는 초고수라는 것이었다.
설풍을 비롯한 사람들은 경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귀찮아졌다는 듯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흥!”
그로써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가 정말 구유음마 지기음이 맞다는 것을.
해청연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가시고 바로 이자가 왔어요. 제가 아버지의 딸이고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죠. 아마 제갈지강과 혈교 사이의 관계가 생각보다도 더 밀접한 것 같군요. 그리고 이번에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함정에도 혈교도들이 포함된 것 같고요.”
그 말에 모두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심지어 지기음마저도 놀란 모양이었다.
“아무리 지혜롭다 해도 어차피 어린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단하구나.”
해청연이 문득 그에게 물었다.
“혈마가 아버지께 갔나요?”
지기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청연은 이미 그 반응에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을 결정했다.
“그렇군요. 지금부터 제 스스로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대신 일정 거리 이상으로 접근한다면 바로 자결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모두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언니?!”
“해 소저!”
“소저, 안 되오!”
그러자 그녀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이자가 직접 온 이상 제가 따라가지 않는 선택지는 없어요. 가장 나쁜 건 여러분이 다 죽고 제가 이자에게 잡혀가는 것이고, 두 번째로 나쁜 건 우리 모두가 여기서 다 죽는 거예요. 그러니 제가 제압당하지 않고 이자를 따라가는 것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어요. 여러분이 해 주실 일은 바로 돌아가 이 일에 대해 알리는 거예요. 아시겠죠?”
그렇게 말하며 해청연은 문득 생각했다.
그가 있었다면 어쩌면 이보다 좋은 선택지를 생각해 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의 옆을 떠나기로 결정한 건 바로 자신이었는데.
그때였다.
설풍이 서서히 붉은 기를 띠기 시작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아니오, 소저. 다른 선택지도 분명히 있다오. 날 믿으시오.”
해청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설풍이 저 적안의 무공을 사용할 때 얼마나 무서운 실력을 발휘하는지는 해청연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 아버지 검성과 수련한 후의 성과를 알지 못하니, 어쩌면 진짜 구유음마와 맞상대가 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청연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조장. 설사 조장이 저자를 상대할 수 있다 해도, 그러면 나 언니와 삭 오라버니가 반드시 죽게 될 거예요.”
그녀의 말에 설풍은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해청연의 말이 맞았다.
나서유가 잡혀 있는 한 설풍은 절대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으니까.
지금 상황은 지기음이 나서유와 삭무흔을, 해청연이 자기 자신을 인질로 삼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그게 가능한 것도 저자가 나를 살려서 데려가려 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것도 나를 죽게 하지 않기 위해 목격자들을 살려 둘 만큼 절실하게 말이야.’
해청연은 아마도 그 이유가 자신의 아버지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협박할 인질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기엔 좀 이상한 점도 몇 가지 있긴 했다.
혈교도들의 비술이라면 굳이 살아 있지 않아도 충분히 인질로 쓸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아무튼 이 상황에서 해청연의 선택은 지기음을 순순히 따라가되 가능한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는 저자를 순순히 따라가야 했고, 인질이 되어 아버지께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선 대결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러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건 끝까지 저자에게 제압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해청연은 지기음이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쳐서 요구했다.
“자, 이제 거리를 좀 벌려 주시겠어요? 그럼 제가 따라가도록 하죠.”
하지만 겉으론 평온하게 말하면서도 해청연은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인질로서 필요한 거라면 그가 시간을 끄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지기음은 순순히 그녀와의 거리를 벌려 주었다.
스스슥!
“이 정도면 되겠느냐?”
해청연은 문득 자신이 필요한 이유가 인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겉으론 그저 냉정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네, 그 정도면 되겠군요. 그럼 가죠.”
그러자 주변에서 어쩌지도 못하고 있던 동료들이 소리쳤다.
“언니!”
“해 소저!”
특히 지기음의 비검에 배를 꿰뚫렸던 제원영은 쓰러져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애타게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소저! 안 되오! 가면 안 되오!”
해청연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미안한 사람이었다.
이제껏 봤던 누구보다도 뜨겁고 강렬하게 자신에게 다가와 준 사람.
하지만 결코 그에 응답해 줄 수는 없었던 사람 말이다.
그런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만약 자신이 선우진보다 먼저 그를 만났다면 자신은 아주 당연하게도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은 선우진을 먼저 만났고, 도저히 그의 마음을 받아들여 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런 것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성만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반항해 볼 수도 없는 그런 것….
어쩌면 선우진, 그도 그랬을까?
그 운명이 그의 마음을 나서유에게, 그리고 당여은에게 이끌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해청연은 동료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 언니와 삭 오라버니는 제가 어떻게든 무사히 돌려보낼게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저자가 저를 살려서 데려가려는 걸 보면 아마 당장 죽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에요. 그러니… 우리 미래를 기약해 봐요. 모두 건강해요.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해청연은 결국 마지막 선우진에 관한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지기음을 따라갔다.
잠시 외출을 나가듯 가볍게 걸어가는 그녀의 뒤로 제원영의 애끓는 소리만이 계속 울려 펴지고 있었다.
“소저! 소저! 안 되오! 소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