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결심
선우진이 전선으로 돌아왔을 땐 모든 일이 다 끝나 버린 후였다.
그가 들을 수 있었던 소식은 결과뿐이었다.
“검성 어르신께서… 서일에게 패해 돌아가셨다고?”
선우진은 그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검성이 서일 따위에게 패하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검성의 시신은 이미 하남 해씨세가로 운구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제갈지강의 수작인지 대결의 자세한 과정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선우진을 충격에 빠트린 소식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비룡대 본부에서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비룡십삼대로 황급히 돌아간 선우진은 너무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천주은이 펑펑 울며 그에게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선우 공자!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언니들이! 서유 언니와 청연 언니가…!”
검성의 죽음에도 어떻게든 냉정을 유지했던 선우진은 감당하지 못할 소식에 결국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늘 그의 곁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 한꺼번에 무너져 가고 있었다.
***
‘천의검성 해운백이 독안괴검 서일에게 패해 죽었다.’
최근 놀라운 소식에 수없이 들끓었던 무림은 다시 한번 들려온 엄청난 소식에 용광로처럼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일전의 어떤 소식도 이만큼 무림을 진동시킨 적이 없었다.
그 내용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 자세한 과정이야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검성이 서일에게 패했다는 것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는데, 심지어 서일의 단 일 검에 패해 죽었다지 않는가.
그 소식은 검성을 우상시하던 무인들에게 있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검성께서 서일의 일 검에 패하셨다고? 단 일 검에?”
“서일이 그렇게 강했단 말인가? 그게 아니면….”
그 후로 검성이 이제껏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고 있었다는 말들이 무림에 들끓기 시작했다.
검성은 사실 운 좋게 절대자 십오 인에 이름을 올린 자인데 너무 과분한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검성이 사실은 파렴치한 자였다는, 그래서 그로부터 피해를 입었음에도 그의 위세가 두려워 나서지 못했다는 피해자들의 증언까지도 무림을 떠돌기 시작했다.
검성의 죽음 이후 검성의 진정한 몰락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모든 건 당연히 제갈지강의 조작이었다.
그는 검성의 위상을 바닥까지 떨어뜨린 후 무림맹에서 그의 영향력을 지워 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가장 껄끄러웠던 가시를 뽑아낸 제갈지강은 이제 자신의 집무실에서 천천히 섭선을 부치며 여유 있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맹에는 검성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지나치게 많았었지. 쓸데도 없는 협의에 얽매이느라 실리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 말이야, 쯧.”
그간 그런 자들 때문에 맹의 행사가 얼마나 제약받아 왔던가.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었다.
협의를 부르짖던 자들의 우상을 철저하게 부숴 줄 테니까 말이다.
제갈지강은 검성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나면 그다음으로 그의 추종자들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사실은 파렴치한에 불과한 검성을 추종하던 자들이니 명분을 얻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내 사람들로 채우고 나면, 그제야말로 무림맹은 완전무결한 세력이 되는 것이지.”
그렇다.
완전무결한 세력이었다.
제갈지강이라는 현자가 이끌어 가고, 그 지시를 철저히 수행하는 맹원들만이 존재하는 완전한 세력 말이다.
문득 조용히 중얼거려 봤다.
“무림맹주 제갈지강이라. 괜찮군.”
제갈무후 이후로 ‘제갈’이라는 성을 가진 자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이인자로만 인식되어 오곤 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천한 농민이나 소작농도 한 나라를 세우는 판국에 능력을 갖춘 제갈가의 사람이 늘 이인자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것은 모두 이제껏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고정관념에 불과했다.
그러니 제갈지강은 자신이 그 전례가 되어 줄 생각이었다.
제갈의 성을 지닌 인물 중 첫 번째 일인자가 되는 것으로서 말이다.
‘나는 역사에 남을 존재로, 그리고 제갈무후를 뛰어넘는 영웅으로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그리 머지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후, 그는 자신에게 올라온 보고에 분노를 터트려야만 했다.
“뭐라고?! 검성수호단?!”
드물게 분노한 그의 목소리에 보고를 하던 만청각주는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무림 곳곳에서 검성을 음해하는 세력들을 색출하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검성께 직접 은혜를 입었다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소문의 출처를 찾아 뒤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소식에 제갈지강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럼 조용히 처리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자 만청각주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그게… 너무 많습니다. 지나치게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 일어난 일이라…. 심지어 맹 내부의 무사들도 들고일어나 검성을 음해한 세력의 실체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개방이 나서서 그들을 연결하고 있고, 하오문도들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협조하고 있어서….”
콰앙!
제강지강은 마침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서탁을 내리쳤다.
개방과 하오문도들까지 나서서 그들을 돕고 있다면 이건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림맹과의 연결점을 빨리 끊어 버려야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검성에게 은혜를 입었던 자들이 그렇게 많을 거라곤, 그렇게 다양한 곳에 분포할 거라곤 제갈지강조차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검성은 이미 죽었건만, 그의 그림자는 오히려 더 크게 드리워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제갈지강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운백, 이놈! 언제까지, 대체 언제까지 내 앞길을 막을 셈이냐!”
하지만 분노는 분노고, 일은 일이었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상황이 그 지경까지 됐다면 이쯤에서 발을 빼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제갈지강은 애써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며 만청각주에게 명령했다.
“여론을 조작하던 자들을 소거하게. 그들과 맹의 어떤 연결점도 발견되어서는….”
그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맹주께서 드십니다!”
그것은 제갈지강에게 있어서 너무도 의외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맹주? 맹주가 여기에 왔다고?”
무림맹주인 협왕 모용검은 근 몇 년간 한 번도 제갈지강을 찾아온 적이 없었다.
아니, 찾아오기는커녕 제갈지강이 직접 찾아가도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시기에 맹주가 직접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아니겠지.’
제갈지강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만청각주를 내보내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들어오십시오, 맹주!”
그러자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모용검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군사! 잘 있었소?!”
제갈지강 또한 푸근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저 그랬습니다. 그나저나 맹주께선 어인 일로 여기까지 행차하셨습니까? 저를 부르시면 될 것을….”
겸손하게 말하긴 했지만 찾아온 이유부터 밝히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모용검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와하하하! 또 바쁘신 모양이구려. 하긴 군사는 늘 바쁘셨으니 말이오. 그래, 바로 본론을 말하리다. 소문으로 듣자 하니 최근 검성을 음해하는 세력이 있다고 하더구려? 군사도 혹시 들어 보셨소?”
제갈지강은 순간 가슴이 뜨끔하고 말았다.
하지만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무림엔 워낙 뜬소문들이 많지 않습니까? 저는 잘….”
하지만 오늘의 모용검은 제갈지강이 알던 평상시의 모용검이 아니었다.
그의 대답에 모용검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래요? 이상하구려. 내가 듣기엔 그걸 지시한 사람이 제갈 군사라고 하던데. 정말 못 들으셨단 말이오?”
모용검은 이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비릿하게 웃으며 제갈지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갈지강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이건 그저 지나가는 얘기로 물었던 게 아니었다.
모용검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제갈지강도 웃음을 가장할 수가 없었다.
오늘의 모용검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맹 운영에 아무런 관심도 없던 그가 갑자기 자신을 압박하려 하고 있었다.
그가 왜 이러는지를 알아내야만 했다.
게다가 이번 일은 제갈지강이 모용검에게 알리지 않고 독단으로 꾸몄던 일이었다.
정보도 부족했지만 그와 대립할 명분도 부족했다.
제갈지강은 일단 빠르게 머리를 숙이기로 했다.
“허허허, 맹주께서 이미 알고 계셨군요. 죄송합니다. 맹주님을 귀찮게 해 드릴 것 같아 저 혼자 처리했던 일이었습니다. 미리 보고를 드리지 못한 건 제 불찰….”
제갈지강은 이 부분에 대해 빠르게 인정하고 넘길 생각이었다. 일단 한 번 고개를 숙였으니 그도 자신의 사정을 봐줄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한번 이빨을 드러낸 모용검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뿐이 아닐 텐데요, 군사. 듣자 하니 검성이 괴검과 싸우기 전 혈마를 포함한 혈교의 마두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고 하더구려. 군사, 혹시 혈교의 마두들과도 이 일을 공모하신 게요?”
늘 무골호인같이 웃곤 했던 모용검의 눈빛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맹수처럼 위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제갈지강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봤다.
그가 말한 내용은 오직 자신의 직속 부하들만 아는 얘기였다.
현장에 아무런 증거도, 증인도 남기지 말 것을 지시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얼마 전 백호대 무사들 전원을 몰살시켰다는 보고도 듣지 않았던가.
그러니 맹주가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증인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다.
제갈지강은 일단 발뺌해 봤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체 누가 맹주께 그런 말을 전했단 말입니까?”
그러자 모용검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허, 검성을 옆에서 보필했던 백호대주 동방무극이 얘기해 주더구려. 혈마에다 철신광마, 흑혈환마, 백면시마까지 함께 습격해 왔었다지요? 그들을 움직이다니, 군사가 이토록 혈교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소!”
백호대주 동방무극이라고?
그 이름을 들은 제갈지강의 얼굴은 드디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분명히 죽었을 터인데….
제갈지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백호… 대주라고 하셨습니까?”
제갈지강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맹주의 말이 맞다면 자신에게 올라온 보고가 잘못됐다는 얘기였다.
그건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자 모용검이 비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죽었어야 할 백호대주가 살아 있어 놀라셨소?”
제갈지강은 경악하고 말았다.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완전히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백호대주를 죽이라고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걸 막은 후 자신에게 거짓 보고를 올리게 했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얘기는 자신의 것이라고 믿어 왔던 조직이 자신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았다.
‘이럴… 수가.’
제갈지강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가 늘 방만했던 그 모용검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의 손안에 들어간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모두일 수도 있었다.
‘내가 지금껏 그의 손안에서 놀아나고 있었구나.’
제갈지강은 모용검에게 완전히 목줄이 채워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제갈지강은 빠르게 패배를 인정했다.
지금은 그래야만 할 때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대응 방향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왜 지금 자신에게 왔는지, 뭘 원하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상식적으로 차라리 암살을 했다면 모를까 그가 자신을 정치적으로 파멸시키려 할 리는 없었다.
서로 한쪽을 파멸시키기엔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너무도 위험했으니까.
‘내 입이 열리면 그 자신도 끝장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럼 뭘 원하는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엔 지금 모용검이 꺼낸 패가 너무도 강력했다.
혈교와 협력해 검성을 죽게 하고, 그 이후 여론을 조작해 검성을 음해했다는 것이 무림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그 순간 자신은 물론 제갈세가까지도 끝장날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제갈지강은 이제 공손한 눈빛으로 모용검에게 물었다.
“제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맹주?”
그러자 모용검이 다시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상황 판단이 빨라서 좋구려. 흠, 뭘 원하냐라….”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던 모용검은 이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간 본인은 제갈 군사를 십 할 신뢰하고 있었다오. 그래서 뭘 하든 항상 믿어 주고 밀어줬었지.”
그건 분명한 사실이긴 했다.
비록 자신을 믿어서라기보다는 본인이 뭘 하길 귀찮아해서 그랬던 거였지만 말이다.
제갈지강은 속으로 분노를 억누르며 묵묵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 웬만한 일들은 다 이해하고 넘어가려 노력했소.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아무리 제갈 군사라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인 것 같구려.”
제갈지강은 긴장했다.
이제 본론이 나올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 생각엔 제갈 군사가 자숙의 시간을 좀 갖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소.”
“…자숙의 시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어디 공기 좋은 곳이라도 가서…. 아, 때마침 검성이 사망했으니 전선에 좀 가 보는 것이 어떻겠소? 가서 전선과 혈교의 상황도 좀 보고, 관리도 좀 하고 말이오.”
제갈지강은 그의 말을 이미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선이라면 혈마의 존재가 좀 걸리긴 해도, 모용검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세력을 정비하기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전선이라…. 그러지요. 마침 검성이 저지른 일들을 해결해야 하니 말입니다. 좋은 기회가 되겠군요.”
그러자 모용검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으하하하하! 역시 제갈 군사가 좋아할 줄 알았다오!”
제갈지강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방금 전까지 제갈가 역사상 최초의 일인자를 꿈꾸던 자신이 이제 전선으로 귀양을 가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속에서 열불이 활활 타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겉으론 환하게 웃었다.
“허허허허! 제가 맹주께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마다할 리가 있겠습니까? 허허허허!”
무림맹의 내부의 권력 구조가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또한 전선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검성에서 제갈지강으로 바뀌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
선우진과 칠 조원들은 검성의 죽음과 구유음마 지기음에게 끌려간 동료들의 일로 무척 좌절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무척이나 빠르게 기운을 되찾았다.
그것은 그들이 동료의 죽음에 익숙한 전선 근무자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우진이 그들을 모아 다음의 계획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모두 힘드실 걸 알지만 저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슬퍼하고 있을 시간도 아까운 상태지요.”
곧 돌려보내 주겠다는 해청연의 말과 달리 나서유와 삭무흔은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니 선우진과 칠 조원들은 동료 세 명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일반적으로 혈교의 마두들에게 붙잡힌 비룡대원들이 살아서 돌아오게 되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전선에서 납치나 실종은 곧 사망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선우진은 동료들에게 이번만큼은 좀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구유음마 지기음은 다른 마두들처럼 발정 난 색마가 아닙니다. 오히려 혈마의 지시만을 충실히 따르는 충직한 자라고 알려져 있죠. 또한 우리 모두가 봤지만 혈마는 일반적인 혈교의 마두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오히려 정파의 명숙 같은 느낌을 주는 자였습니다. 저는 그가 적어도 청연 소저의 미색을 탐해 그녀를 납치하게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선우진의 말에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정혈회담 때 혈마를 직접 본 적이 있었던 칠 조원들이었다.
선우진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갔다.
“청연 소저는 아마도 혈마와 혈교의 마두들이 검성 어르신을 습격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정황상 저도 동의하는 바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와중에 혈마가 구유음마 지기음이라는 중요한 전력을 빼 청연 소저를 납치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비사영이 물었다.
“검성 어르신을 협박하기 위해 납치하려 한 걸까?”
그 질문에 선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청연 소저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녀는 제압당하지 않은 상태로 시간을 끌려고 한 거지. 검성 어르신의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 자신을 이용할 수 없도록. 그런데 그 얘기는 반대로 지기음 입장에선 그걸 들어줘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는 얘기거든. 정말 협박을 위한 납치였다면 최대한 빨리 청연 소저를 데려가야만 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는 거지.”
“…그렇다는 건?”
“나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해. 검성 어르신과의 결전을 앞두고 중요한 전력인 구유음마 지기음을 보내면서까지 그녀를 살려서 데려가야 할 이유가.”
선우진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애써서 데려간 해청연을 그들이 쉽게 죽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
그러자 설풍이 맹수처럼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해 소저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로군. 어쩌면 나 소저와 삭 형님도….”
선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삶의 기억을 갖고 있는 선우진은 그녀를 데려간 이유가 혹시 혈마인과 관계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인의 육체를 가진 절정 고수, 혈마인 말이다.
지난 삶에서도 초창기 나타났던 혈마인들은 최초의 혈마인인 적의혈마녀를 비롯해 대부분 젊은 무인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걸 보면 젊을수록 혈마인으로 만들기에 용이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자 설풍이 맹수와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망설일 이유가 없겠군.”
나서유를 잃은 지금의 설풍은 선우진이 기억하는 지난 삶만큼이나 위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당장 혈교로 쳐들어가 나서유를 구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곳의 위치도, 그곳까지 가는 길도 모르는 데다 수많은 마인과 마두들이 득실거리고 있을, 심지어 절대자 혈마가 있을 그곳으로 말이다.
그건 너무도 무모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또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가 준비를 해 보죠.”
선우진 또한 혈교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만약 선우진의 느낌대로 해청연을 혈마인으로 만들기 위해 데리고 간 것이 맞다면, 아마도 그곳이 어디인지를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하늘의 뜻인지 가는 길을 안내해 줄 길잡이까지 마침 와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선우진은 자신이 없는 사이 비룡십삼대로 찾아와 있던 그에게 말했다.
“다캄, 우리를 애뇌산까지 안내해 줄 수 있을까?”
그는 바로 다캄이었다.
예전에 독림에서 석경달 노인과 함께 동생들을 돌보며 살고 있었던 묘인족 청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