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안 좋은 시점
다캄은 그간 석 노인의 유언대로 은신처에서 육 개월을 숨어 있었다.
그러다 육 개월이 지나자, 그는 다시 그곳을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선우진이 없는 비룡십삼대로 찾아왔었다.
설풍은 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를 환대하고는 비룡십삼대 북쪽에 동생들과 함께 살 거처까지 마련해 준 상태였다.
선우진은 이 모든 일이 마치 운명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예전에 혈교의 끄나풀일지도 모를 다캄을 위험도 무릅쓰고 도와줬던 건, 언젠가 혈교로 쳐들어가기 위해서는 운남성 밀림의 지리를 아는 길잡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지 않은가.
그러자 선우진의 질문에 영문도 모르는 채 함께 칠 조의 회의에 참석해 있던 순박한 얼굴의 묘인족 청년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애, 애뇌산이효?! 커긴 쾨물틀이 너무 많습니타! 너무 휘험함니타!”
그의 만류에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당연히 많겠지. 나는 놈들이 거기서 마인들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래서 가려는 거야.”
“아, 크, 크래도!”
애뇌산은 예전 무황총혈사가 벌어졌던 곳이었다.
무황의 무학이 잠들어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것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탐욕으로 끔찍한 혈사가 벌어졌던 그곳.
그래서 마침내 점창파가 몰락하게 됐고, 운남성을 혈교의 영역으로까지 만들어 줬던 그곳 말이다.
선우진은 예전부터 그곳에서 마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지난번 사천당문으로 보냈던 철귀의 머리 덕분에 확신으로 굳어졌었다.
당여은을 통해 사천당문으로 보냈던 철귀가 본래 과거 사천성에서 활약하던 철패권 장곤이라는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철패권 장곤은 무황총혈사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알려진 사람이기도 했다.
선우진은 겁을 먹은 듯한 다캄에게 다시 말했다.
“가는 동안 우리가 지켜 줄 거고, 그 안쪽으로도 우리만 들어갈 거야. 그러니 위험할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다캄, 너도 석 어르신의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어?”
겁먹은 얼굴로 내켜 하지 않던 다캄은 문득 선우진의 마지막 말에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톡노의 폭수… 말입니카?”
“그래, 독노의 복수.”
그러자 다캄의 표정이 천천히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러곤 잠시 후 이를 악문 그가 선우진에게 말했다.
“크 폭수, 확실히 할 수 있는 컵니카?”
선우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놈들이 마인들을 만들고 있을 그곳을 쳐들어갈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복수는 있을 수 없겠지.”
그 말에 다캄도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켔습니타! 안내해 트리겠습니타!”
그러자 이제 길잡이를 확보한 선우진이 매서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곳에 정면으로 쳐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번엔 조용히 침투해 동료들을 구해 내는 것이 우선이겠죠. 그러니 갈 수 있는 인원은 신법과 은신술에 능한 사람들뿐입니다. 설풍 조장, 비사영, 저. 이렇게 세 명이 갑니다.”
그의 말에 설풍은 맹수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사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혈교 놈들에게 쳐들어간다니, 내가 친구 하나 잘못 사귄 죄로 요절하게 생겼군. 아, 무섭다. 무서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비사영의 눈빛 또한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애뇌산의 무황총은 그의 사문 비종문을 몰락게 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곳으로 가는 비사영의 투지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인원을 확정 지은 선우진은 마지막 말로 회의를 마무리했다.
“각자 떠날 준비를 하시죠. 동료들의 상황을 알 수 없으니 시간을 많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한 시진 후에 출발….”
그때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새로운 칠 조원, 혈편서시 야운향이 끼어들었다.
“나도 데려가 줘요. 내 신법도 꽤 쓸 만할 거예요. 은신도 가능하고요.”
그녀의 말에 선우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를 돌려 설풍과 비사영을 바라봤다.
그러자 비사영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아직 쓸 만한 정도는 아니지만, 뭐 간신히 따라 올 정도는 되겠더라고. 천풍신법을 가르쳤거든.”
그의 말에 선우진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웬만큼 신뢰가 쌓이지 않은 사람에게 비사영이 천풍신법을 가르쳐 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핏 보기에 야운향의 성격은 별로 사교적이지 못한 것 같았는데 벌써 그 정도의 신뢰를 쌓았다는 게 놀라웠다.
아무튼 비사영이 괜찮다고 인정했다면 절정 고수인 그녀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야 소저, 다캄까지 다섯 명이 함께 가죠.”
이로써 정혈대전 이후 첫 번째 혈교 원정대가 결성된 순간이었다.
***
선우진은 회의를 마치고 바로 칠 조의 창고로 향했다. 영약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촉박한데도 한 시진이란 여유를 둔 이유가 바로 영약을 섭취하기 위해서였다.
“흠, 그 많던 영약도 이제 절반이나 사라졌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필요한 만큼의 영약을 꺼냈다. 꽤 많은 양이었다.
그는 지난번 암혈향과의 싸움 때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를 발로 차 버리고는 낭인들을 구하러 갔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언제 다시 벽을 넘을 수 있을지 요원해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때 선우진의 예상은 틀렸었다.
그 직후, 암혈향과의 전투 때 묵랑의 의지에 몸을 맡겼던 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벽을 넘어 버리고 말았으니까 말이다.
한동안 말이 없던 묵랑이 문득 유쾌한 목소리로 선우진에게 말을 걸었다.
- 이제 한 걸음만 더 디디면 초절정이로군. 축하하네.
그걸 한 걸음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도 두려울 정도의 빠른 성장이긴 했다.
시간만 놓고 본다면 단 일 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류에서 초절정의 코앞까지 발전한 것이 아닌가?
선우진은 문득 헛웃음을 짓고는 대답했다.
‘다 검신 어르신 덕분입니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절정 이후의 발전은 모두 거력마와 싸울 때 그가 자신의 몸으로 싸워 준 기억 덕분이었고, 이번 발전 또한 그가 몸을 움직여 준 감각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암혈향과 싸웠던 그때, 묵랑이 보여 줬던 것들은 모든 것이 다 경이로웠다.
마치 절대자의 감각을 직접 체험해 본 느낌.
더군다나 묵랑검법으로 보여 준 천재지변과도 같은 위력이란….
그런 걸 경험했는데 경지가 오르지 않으면 비정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 내가 낸 시험을 통과했으니 당연한 보상일세. 그러니 그건 내 덕이 아닌 자네가 스스로 해낸 것이지. 그리고 나는 그냥 묵랑이라고 불러 주게나. 검신은 이미 죽었으니, 흔적만 남은 내가 그렇게 불리는 것이 어쩐지 마땅치 않군.
‘알겠습니다. 묵랑 어르신.’
그와의 대화를 마친 선우진은 영약을 섭취한 후 바로 운기에 들어갔다.
이번엔 선우세가의 혼원무극공이 아닌 묵랑이 가르쳐 준 묵랑심법으로 행한 운기였다.
그러자 잠시 후,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그의 머리 위로 점점 모여들어 늑대가 포효하는 것 같은 형상을 취했다.
그러곤 다시 순식간에 그의 콧속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선우진이 한층 더 깊어진 눈빛으로 번쩍 눈을 뜬 것은 그 직후였다.
그가 살짝 감격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내공 백 년의 느낌이로군요.”
월하환검무를 쓰지 않았음에도 주변의 모든 것이 감각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고양감과 전능감.
그 감각 속에서 선우진은 지금이야말로 혈교로 쳐들어갈 때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월하환검무를 사용한다면 설사 암혈향이라 해도 다시 상대해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게다가 묵랑이 직접 등장할 수 있는 기회도 아직 두 번이 남아 있고 말이다.
‘청연 소저.’
선우진은 문득 해청연을 생각했다.
혈교에 잡혀간 건 해청연, 나서유, 삭무흔의 세 명.
당연히 나서유가 먼저 떠오를 줄 알았건만, 이상하게도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찬 건 해청연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선우진에게 있어 늘 고맙고 또 아쉬운 사람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많이 도와주고 챙겨 주고 있었는지는 그녀가 없어진 이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소중함을 옆에 있는 동안 알아주지 못했다는 것이, 그리고 자신이 그 보답을 해 주지 못했기에 멀어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후회스럽고 아쉬웠다.
그러니까 이대로 그녀를 보낼 수는 없었다.
‘부디 기다려 주시오, 청연 소저. 이번만큼은….’
선우진이 그런 생각을 하며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던 천주은이 그를 발견하고는 뛰어왔다.
“천 소저?”
선우진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조금 난감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말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실력은 현재 일류 최상급, 많이 발전한 건 사실이지만 이번 원정에 그녀를 데려갈 순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꺼낸 말은 선우진의 예상과는 좀 다른 것이었다.
“선우 공자, 공자에게 해 줄 말이 있어요.”
“예? 무슨…?”
그녀는 잠시 선우진의 눈을 피하며 말을 꺼내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 많이 고민했어요. 이런 말을 내가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서요.”
그녀의 망설임에 선우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무슨 말인데 그러십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그때였다.
천주은이 문득 선우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청연 언니가 공자를 연모하고 있어요.”
“…예?”
그 말을 들은 선우진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뜻밖의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천주은이 답답하다는 듯 다시 반복했다.
“청연 언니가 선우 공자를 연모하고 있다고요! 그것도 무척 깊이요!”
그 말에 잠시 멍해 있던 선우진은 이내 실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장난치지 마시오, 소저. 검성 어르신의 따님이며 천하제일의 미녀이자 재녀인 청연 소저가 뭐가 부족해 나 같은 자를 연모한단 말이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으셔도 되오. 그런 말 안 해도 내 목숨 걸고 청연 소저를 구할 생각이니 말이오.”
그러자 천주은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고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렇게 받아들일 줄 알았어요. 그러니 청연 언니가 그렇게….”
그러곤 선우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청연 언니는 처음부터 선우 공자를 연모하고 있었어요. 그것도 공자가 처음 전선에 와 살이 빠지지도 않았을 때부터요. 모르시겠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공자 말대로 천하제일의 미녀이자 재녀인 언니가 왜 공자 옆에 붙어서 그렇게 공자를 챙겨 줬겠어요? 언니가 원래 그렇게 배려가 많은 성격은 아니잖아요?”
“…그야.”
그 말은 선우진에게 너무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천주은의 말은 분명히 사실이었다.
해청연은 재능이 뛰어나긴 했지만 나서유처럼 딱히 남들을 살뜰히 챙겨 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무슨 이유에선지 전선까지 나를 따라왔었지. 나중에야 효귀를 보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지만 그럼 처음엔….’
그 후 전선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사교적이지 않은 성격의 그녀가 남들에게 오해를 사면서까지 유독 자신과 붙어 다녔지 않은가.
그럼 그 이유가 설마….
뭔가 생각지도 못했던 그림이 맞춰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나도 미래에 그녀와 함께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 하지만 너무 아름답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말도 안 된다며 웃어넘겼었는데….’
문득 그녀가 머리를 들어 올려 얼굴을 보였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보인 그녀의 신비롭기까지 한 미모와 자신과 의견을 나누던 지혜로운 모습들.
선우진은 멍하니 되뇌었다.
“그녀가 나를… 연모했었다고?”
***
당여은은 휴가 복귀를 얘기하기 위해 당 가주인 독암지존 당정후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당정후의 집무실에서 어쩐 일인지 미리 와 있는 홍사검룡 온제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불길한 느낌에 당여은의 표정이 굳어졌을 때, 당정후가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 녀석은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이제 여기 온 공자와 혼약을 맺는 것에 대해 불만은 없겠지?”
당여은은 불길한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생각에 이를 꽉 깨물고는 온제웅을 바라보았다.
그는 당 가주의 옆에 서서 탐욕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당여은의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당여은은 원래 부모님의 말을 어기지 않는 착한 딸이었고, 어려서부터 가문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도록 교육받아 오기까지 했었다.
그러니 선우진도 옆에 없는 지금, 가주인 아버지께서 혼인을 강요하시는 걸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물론 예전의 당여은이었다면 그랬을 거란 얘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당여은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공손히, 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저는 온 공자와 혼약을 맺을 수 없습니다.”
당여은의 대답은 당정후가 감히 그녀에게서 듣게 될 거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진 그가 싸늘한 기세를 뿜어내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그러자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 대답은 당여은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온 대답이었다.
“그 녀석과 혼약을 맺지 않을 거라고 했소. 내 의손녀가 그런 녀석과 혼약을 맺다니, 나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구려.”
그렇게 말하며 집무실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온 이는 바로 외당림에 머물고 있던 천하삼십육성의 일인, 백학노검 양문헌이었다.
그의 뒤로는 역시 유명한 초절정 고수들인 홍해아 증칠과 제운검객 벽리중이 따르고 있었다.
그 순간, 당정후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저들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고?’
물론 천하삼십육성에 속하는 극강의 고수 양문헌이야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등한 경지라고 생각했던 홍해아 증칠이나 제운검객 벽리중의 존재마저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니.
어쩌면 그들도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고수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의손녀?’
그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당정후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지금 노사께서 이 아이를….”
그러자 양문헌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이 아이의 재능과 심성을 높이 사 의손녀로 삼았소. 가주께 미리 말하지 못한 것은 미안하구려. 하나… 설마 내 의손녀를 저런 녀석에게 시집보내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당 가주?”
잠시 당황했던 당정후는 바로 생각을 정리했다.
백학노검 양문헌은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이자 당가에 존재하는 모든 무인들 중 두 번째의 무위를 자랑하는 고수였다.
그는 당가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당정후가 강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잠시라도 당가에 머물러 주면 감사해야 하는 존재였지, 무언가를 요구할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양문헌이 지금 당여은을 의손녀로 삼았다는 것이었다.
당정후의 머릿속에 바로 그 생각이 떠올랐다.
‘그와 당가의 관계가 훨씬 더 밀접해질 수 있겠군!’
당정후로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양문헌은 홍사검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치를 지닌 고수였으니까 말이다.
또한 그런 이유로 당정후의 머릿속에서 당여은의 가치도 대폭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한 일이지요. 어찌 노사의 의손녀를 홍사검문 따위에 시집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에 관한 것은 모두 노사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초고속으로 이루어진 태도 변화였다.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적응하지 못한 온제웅이 당황한 표정으로 당정후를 바라봤다.
“다, 당 가주님?!”
하지만 당정후는 차가운 얼굴로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을 뿐이었다.
“자네의 혼사에 관한 얘기는 나중에 해야겠군. 그만 돌아가 있게.”
“아, 그, 저….”
온제웅은 당황스럽고 억울했지만, 당 가주가 결정을 내린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입만 뻐끔거리다 결국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 후, 당여은은 급히 전선으로 출발했다.
그녀를 돌봐 주겠다며 따라나선 양문헌, 증칠, 벽리중의 세 사람과 함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가 도착했을 땐 전선이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녀는 곧 검성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구유음마 지기음에 의해 선우진의 동료들이 납치당했다는 사실까지도 들을 수 있었다.
‘진….’
당여은은 선우진이 걱정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검성을 얼마나 따르고 존경했는지, 또한 전 칠 조원들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비룡십삼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선우진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먼저 설풍을 만났던 그녀는, 그에게 선우진이 곧 혈교로 쳐들어갈 생각이라는 것과 지금 창고에 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여은은 서둘러 칠 조의 창고로 달려갔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선우진을 위로해 주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 천주은과 얘기 중인 선우진을 발견했던 그녀의 귀에 들려온 얘기는, 그녀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청연 언니가 공자를 연모하고 있어요.”
당여은은 순간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