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남과 여
천주은과 선우진의 얘기가 진행되는 동안 당여은은 그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도 해청연에 관한 얘기는 꽤 많이 들어 봤었다.
선우진이 칠 조원들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종종 그녀의 얘기도 해 줬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은 그녀를 무척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늘 선우진 자신보다 훨씬 지혜로운 사람이며, 머리카락을 내려 미모를 가리고 있을 뿐 당여은과도 비견될 만한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말해줬었다.
‘하지만 나와 비슷하다는 말도 사실 내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말해 준 얘기에 불과했었지.’
당여은은 선우진에게 정협방 사건 때 일어났던 일들에 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얘기를 통해서 해청연이 사실은 자신보다 훨씬 아름다울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됐었다.
자신으로선 그녀처럼 미모만으로 두 집단의 전투를 멈추게 하거나, 존재만으로 낭인 수백 명을 끌어모을 자신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좀 이상했었다.
자신보다 훨씬 아름답고 뛰어난 사람이 이미 선우진의 옆에 있었다는 사실에 말이다.
‘그래도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해 줘서 조금 안심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그저 선우진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검성의 딸이자 누구보다 지혜롭고 아름답다는 해청연이 자신을 연모했었다는 사실에, 선우진은 그대로 정신이 나가 버린 것만 같았다.
어떤 순간에도 주변의 모든 걸 감지하곤 했던 그가 자신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당여은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몰랐을 때도 선우진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혈교로 침투할 각오를 했다지 않은가.
그런데 심지어 그녀가 그를 연모하고 있었다니.
어떤 기분일지….
어쩐지 조금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당여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문득 이대로 그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기 전에 몰래 돌아가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도망치고 싶었다.
감당 못 할 지금의 상황으로부터.
외면하고 싶은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럴 수는 없어.’
설풍에게 듣기로 선우진은 이제 곧바로 목숨을 걸고 혈교로 향할 계획이라고 했었다.
그러니 지금 만약 자신이 도망친다면 이대로 그를 더 보지 못한 채 사지로 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그를 보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아무리 자신의 마음이 힘들어도 절대로 이대로 그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들에 차마 도망치지도 못한 당여은이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선우진이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는 뒤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당 소저?”
그의 부름에 당여은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짙은 허전함과 서운함을 느꼈다.
‘여은’이 아닌 ‘당 소저’라고 자신을 부른 그의 호칭 때문이었다.
단지 그 호칭 하나로 그와의 거리가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진 것만 같았다.
그와 함께했었던 지난날들마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당여은은 그런 감정을 애써 숨기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 얘기 중이신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혈교로 가신다고 한 것 같아서….”
그러자 선우진은 그녀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는 손짓을 한 후 먼저 천주은에게 인사했다.
“아무튼 알려 줘서 고맙소, 천 소저.”
“아니에요.”
천주은은 당여은을 슬쩍 바라보고는 발걸음을 옮겨 멀어져 갔다.
그러자 선우진은 그녀가 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당여은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여은이 먼저였다.
그녀는 선우진이 입을 열기 전, 황급히 먼저 말을 꺼냈다.
다시 그의 입에서 ‘당 소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혈교로 가신다면서요?!”
그러자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던 선우진은 그 물음에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부터 했다.
“예. 곧 출발할 생각이에요.”
“해 소저… 를 구하러 가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네, 맞아요.
순간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 그녀의 심장을 종처럼 세게 두드린 것만 같았다.
바로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아니, 지금 이대로 도망치고만 싶었다.
하지만 당여은은 사력을 다해 참아 냈다.
그의 마음이 어디로 가든, 그를 홀로 사지로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설사 자신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안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꽉 막힌 목으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랬다.
그에게 도움이 되어 주고 싶었다.
혹시라도 이게 마지막이라면, 그 순간만큼은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것이 당여은이 지금 바랄 수 있는 단 하나의 소망이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그 부탁마저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요. 그곳에 갈 사람들은 모두 신법과 은신에 능한 사람들이어야 하니까요. 우리는 죽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을 구하고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너무나도 즉각적이고 단호한 거절이었다.
물론 그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신법과 미숙한 은신술로는 그에게 방해만 될 뿐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고 있음에도 가슴으로는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가슴이 저밀 것처럼 서운하고, 또 서러웠다.
“그렇군요.”
당여은은 간신히 그렇게 말하고는 더 견디지 못하고 몸을 돌려 버렸다.
이젠 그의 앞에 더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려던 그녀의 머리에 문득 자신과 함께 온 세 명의 노고수들이 떠올랐다.
자신은 몰라도 그들이라면 선우진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말이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췄다.
다시 돌아서서 그를 볼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그에게 도움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러니 다시 돌아서서 어떻게든 말을 해야만 했다.
그분들이라면 도움이 될 거라고.
부디 도움을 받아 달라고.
그 말을 하기 위해 당여은이 온 힘을 다해 눈물을 참으며 몸을 다시 돌리려 할 때였다.
문득 선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은!”
그 순간, 당여은은 ‘헉’ 하고 숨을 멈추고 말았다.
한순간 그녀의 동공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당여은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줬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렇게 갑자기 세상이 달라질 수가 있다는 것이 말이다.
너무나도… 행복했다.
***
“그녀가 나를… 연모했었다고?”
청연 소저가 나를 연모하고 있었다니….
상상도 못 했었고, 그 말을 들은 지금도 사실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할수록 점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천주은 소저의 말 대로였다.
타인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던 그녀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꿰고 있었던 일.
그리고 나에게 나 소저에게 고백하라고 해 놓고 정작 그녀의 상태가 내내 좋지 않았던 일.
마지막으로 내가 나가장에 간 사이 너무 갑작스럽게 조를 옮겨 버렸던 일까지도.
그 모든 사실들을 정리해 봤을 때 모든 원인은 한 가지로 귀결되고 있었다.
결국 그녀가 힘들어했던 이유가 다름 아닌 바로 나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도 까맣게 모른 채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어 했던 거고 말이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선우진, 너 진짜 심각하구나. 아무리 여자를 잘 몰라도 그렇지, 이래서 어디 혼인은커녕 연애라도 할 수 있겠냐?’
스스로가 너무도 한심했고, 그녀에게 무척이나 미안했으며, 한편으론 기분이 좀 묘하기도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기분이 좋았다.
청연 소저 같은 천하제일의 미녀이자 재녀가 나를 연모해 주다니, 그보다 더 감사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마치 내가 굉장히 엄청난 사람이라도 된 것만 같지 않은가.
자존감이 하늘까지 치솟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렇다고 변하는 것은 없었다.
‘어차피 목숨 걸고 그녀를 구하려 하는 건 똑같으니까, 그걸로 마음의 빚을 좀 덜 수밖에.’
이제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그녀와 나는 인연이 아닌 모양이라고 말이다.
청연 소저가 처음 나를 연모했을 땐 내가 나 소저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나 소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땐 청연 소저도 내 곁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이, 누군가가 먼저 내 마음에 스며들어 버리고 말았다.
바로 당여은, 그녀가 말이다.
그땐 나도 몰랐지만, 이젠 확실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당여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누군가 만약 내게 청연 소저가 아닌 당 소저인 이유를 묻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었다.
‘청연 소저가 너무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청연 소저는 그녀 혼자만으로도 완전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너무도 뛰어나기 때문이겠지만, 그녀에겐 언제나 그녀가 세상의 중심이고 다른 이들은 모두 그 주변에 위치한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그것은 심지어 그녀가 연모하고 있었다는 나에게조차도 그렇게 느껴졌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나를 연모하고 있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반면 당 소저는….’
그녀와 함께 있으면 마치 그녀의 중심이 내가 된 것만 같았다.
내가 중심을 잡아 주지 않으면 곧 무너져 버릴 사람 같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보다도 내가 더 중요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늘 자신보다 나를 더 위해 줬었다.
그 선하고 선명한 진심이 마치 햇살처럼, 함께 있는 내내 그대로 내게 비춰졌었다.
그리고 그 햇살을 정면에서 받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햇살을 받고 피어 버린 꽃처럼 말이다.
이것이 그녀와 떨어져 선우세가에 가 있던 사이, 내가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당 소저를, 여은을 사랑하고 있다고.’
그랬다.
나는 지금 이 순간도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때였다.
문득 묵랑이 내게 말을 걸었다.
- 내가 말해 줘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 보고 싶은 그녀가 지금 바로 자네의 뒤에 있다네. 심지어 아까부터 그랬지.
‘…네?!’
그 말에 깜짝 놀란 나는 문득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어쩐지 안색이 매우 어두운 당 소저가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그녀가 뒤에서 다 듣고 있었다니, 그리고 그 사실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말이다.
아무래도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너무 당황해 바로 ‘여은!’이라고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문득 천주은 소저가 아직 옆에 있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간신히 호칭을 다르게 바꿔 불렀다.
“당 소저!”
그러자 깜짝 놀란 듯한 그녀가 어색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아, 얘기 중이신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혈교로 가신다고 한 것 같아서….”
그녀의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당가에서 그녀를 기다리게 해 놓고는 나 혼자 전선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녀가 혼자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니, 내게 실망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또 방금 천 소저가 한 얘기도 다 들었을 테니, 그녀가 그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문득 두려워졌다.
꿀꺽!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일단 천 소저를 보내고 그녀와 얘기하기로 했다.
“아무튼 알려 줘서 고맙소, 천 소저.”
“아니에요.”
천 소저가 그녀와 나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살폈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당 소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내가 없는 동안 당가에서 별일은 없었는지, 혹시 내가 없는 동안 그놈과의 혼사가 진행된 건 아닌지….
하지만 그녀는 내가 뭘 묻기도 전에 먼저 내게 급히 물었다.
“혈교로 가신다면서요?!”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게 제일 급한 일일 테니까.
그래서 그 질문에 먼저 대답해 줬다.
“예. 곧 출발할 생각이에요.”
또한 함께 가고 싶다는 그녀의 말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요. 그곳에 갈 사람들은 모두 신법과 은신에 능한 사람들이어야 하니까요. 우리는 죽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을 구하고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실력은 분명 뛰어나지만 이번만큼은 실력보다 신법과 은신술이 더 중요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바보 같은 내가 이번에 또 실수를 하고 만 모양이었다.
그녀를 데려갈 수 없다고 대답하자 그녀가 아예 몸을 돌려 버렸던 것이었다.
그냥 이대로 가 버릴 것만 같았다.
당황한 나는 황급히 그녀를 불렀다.
“여은!”
그러자 다행히 그녀가 멈춰 줬다.
엄청 화가 난 듯했지만 그래도 얘기는 들어줄 모양이었다.
역시 그녀는 너무 착한 사람이었다.
나는 등을 돌려 버린 그녀를 향해 서둘러 변명을 시작했다.
“그… 혼자서 오게 해서 미안해요. 변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나도 진짜로 당가로 가고 있었어요. 근데 갑자기 암혈향의 습격을 받고, 또 검성 어르신이 괴검과 대결을 하신다는 얘기를 들어서 어쩔 수 없이 전선으로….”
그때였다.
그녀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네?! 뭐라고요?!”
돌아본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그녀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조차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눈물이 가득한 그녀의 눈을 보니 내가 그녀의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했는지 새삼 실감이 나는 듯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저 마음을 풀어 줄 수 있을지 나로선 짐작조차 되지가 않았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기는 해야겠지?’
그래서 일단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 주기로 했다.
“어, 그러니까, 정말이에요. 정말로 고의로 당가에 안 간 것이 아니라….”
하지만 그다음 순간, 나는 내가 여전히 그녀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말았다.
그녀가 절박한 눈빛으로 내게 확 다가오며 물었기 때문이었다.
“암혈향이 습격했다니요?! 대체 왜요?!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정말 괜찮은 거예요?!”
황급히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는 그녀의 눈빛에서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감정뿐이었다.
나에 대한 걱정.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녀는 그저 나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껏 늘 그랬듯이, 자신의 감정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문득 가슴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 순간, 그녀를 꼭 안아 주고 싶다는 충동이 솟아올랐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떠오른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대답해 줬다.
“괜찮아요, 여은. 아무 일도 없었… 진 않지만 그래도 다 잘 해결됐는걸요. 보다시피 이렇게 무사하잖아요?”
그러자 그녀가 천만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진심 어린 마음이 눈에 보일 듯 생생하게 느껴져 다시 한번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나니 어쩐지 이제는 조금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야 계속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 놓았다.
선우세가에 있을 때부터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을 말이다.
“사실, 음… 이건 당가에 가서 직접 얘기해 주려고 했던 말이긴 한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아, 물론 지금도 직접이긴 하지만….”
분명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게 나 스스로에게도 너무나 잘 느껴지고 있었다.
문득 비사영 녀석이 옆에 있다면 내 뒤통수를 한번 때려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을 정도였다.
당 소저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떻게든 정리를 해 봤다.
“그러니까 내 얘기는, 음, 맞아요. 그, 허락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러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네? 무슨 허락을요?”
“아, 그게 무슨 허락이냐 하면, 그러니까, 그, 우리 둘의 혼약에 관한 허락을….”
거기까지 말하고는 그녀의 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 또한 이제야 무슨 얘기인지를 이해했는지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있었다.
얼굴 또한 순식간에 새빨갛게 상기된 상태였다.
문득 ‘아차!’ 싶어 바로 변명했다.
“아,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여은이 그런 놈과 혼인하게 되는 걸 막기 위해 썼던 방법에 불과하긴 했었죠. 또 그런 식의 혼인이 여은의 감정을 무시하는 폭력적인 방법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하지만….”
거기까지 말했던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너무도 행복하게.
마치 햇살처럼 눈부시게 말이다.
그게 행복한 웃음이라는 건 아무리 여자를 잘 모르는 나라고 해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 말을 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정말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요. 언젠가 여은이 전역하고, 나도 전역하게 되면 여은과 함께 우리 아버지와 당가주님께 직접 찾아가 말하고 싶어요. 여은과… 혼인하고 싶다고요. 내가 혹시 그래도 되는 걸까요?”
그러자 그녀는, 여은은 행복하게 웃음 지으며 또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 좋아요. 그리고… 고마워요, 진.”
그 모습을 보자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걸 인내하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나는 월하환검무를 완성할 만한 인내심을 갖춘 인재는 못되었던 모양이었다.
와락!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그녀를 꽉 안아 버리고 말았다.
내 품 안에 꼭 들어온 그녀의 가녀린 몸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꼭 안은 채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별빛 같은 눈이 나를 향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본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로 내 입을 가져갔다.
작고 도톰한 그녀의 분홍빛 입술이 부드럽게 닿아 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살며시 감기는 그녀의 눈도, 입술에 와 닿는 촉촉한 감촉도, 무엇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정말 빈틈없이 행복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