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소봉주
혈교의 절정 고수인 노제억은 지독한 애주가였다.
아니, 단순히 술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술이 없이는 삶이 괴로워지는 중독자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의 별호도 주귀였다.
과거에는 필살표라는 별호도 있었던 것 같지만 이제 아무도 그 별호를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그는 이제 혈교 교도들에게 그저 술에 미친 귀신 주귀 노제억이라고 불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몇 번의 근무 때 볼일을 보고 온다며 홀로 외곽 통로에서 술을 마시다, 결국 무황총의 책임자인 흑혈환마 두당과 백면시마 구우절에게 들키기까지 했던 얼간이이기도 했다.
‘멍청한 술귀신.’
그것이 노제억에 대한 혈교도들의 인식이었다.
그런 주귀 노제억은 요즘 경계 근무 때마다 늘 우울감에 빠져 살고 있었다.
한 시진의 근무 시간 동안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괴로움에 심장이 말라비틀어져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 방울, 딱 한 방울만이라도 입에 댈 수만 있다면….’
그럼 이 모든 괴로움을 날려 버리고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술에 미친 귀신인 그라도 이제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도 자신이 한 방울만으로 만족하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혹시 술을 마시다 백면시마 구우절에게 걸리게 된다면 다시는 목숨을 건질 수 없을 거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흑혈환마 두당이야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자가 아니었지만, 백면시마 구우절은 혈교도답지 않게 매우 꼼꼼하고 규율을 중시하는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제억은 오늘도 자신에 대한 동료들의 놀림을 한 귀로 흘리며 그저 이 경계 근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때였다.
문득 그의 코가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킁, 킁, 킁. 음?”
그의 눈이 순간 번쩍 뜨였다.
짐승이나 맡을 수 있을 법한 미약한 냄새였지만 그는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술 냄새였다.
공기 중에 술 냄새가 섞여 오고 있었다.
술에 관련해서는 거의 짐승과 같아지는 그의 예리한 후각이 술 냄새를 포착했던 것이었다.
그의 후각이 냄새의 출처를 빠르게 추적하기 시작했다.
‘어디지? 통로 안쪽?’
그랬다.
분명히 외관 통로 안쪽이었다.
통로 안에서 아주 미약하지만 너무나도 향기로운 술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험을 쌓아 온 그의 후각은 술의 가치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해 낼 수 있었다.
‘이건… 싸구려 중엽청 따위의 냄새가 아니다. 아주 고급술이야!’
꿀꺽!
술의 존재를 파악한 그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군침을 꿀꺽 삼켰다.
슬쩍 눈치를 보니 다른 동료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노제억은 이제 몸을 안절부절못하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저걸 찾으러 가야만 해!’
통로 안에서 왜 술 냄새가 나는지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저 냄새를 확인하러 가야만 한다는 생각과, 어떻게 동료들에게 변명하고 자연스럽게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때였다.
통로 안쪽에서 갑자기 두 개의 불빛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도깨비불 두 개가 나란히 떠 있는 듯한 밝은 녹광이었다.
그 불빛을 목격한 동료들이 낮게 경호성을 울렸다.
“저길 봐!”
“불빛이다? 뭐지?”
그게 고양잇과 맹수의 안광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파박!
호랑이만 한 거대한 흑표범이었다.
흑표범이 통로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더니만 바로 옆쪽의 다른 통로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었다.
그러자 잠시 당황했던 혈교 고수 두 명이 바로 횃불을 들고는 그 흑표범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내가 간다!”
“나도! 우리가 잡아 오마!”
그러자 역시 움직이려던 다른 네 명은 멈칫하고는 제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좀 크긴 했지만, 표범 한 마리를 잡는 데 절정 고수 삼 인 이상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입맛을 다시며 서로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외관 통로 쪽에서 어떻게 표범이 나오는 거지?”
“어떻게는. 기억 안 나나? 지난번에 저쪽에 무너진 틈이 생겼다고 했었잖아?”
“아, 그랬나? 그거 보수해야 하는 거 아닌가?”
“보수는 무슨. 어차피 아무도 안 오는 곳을 귀찮게.”
남은 혈교 고수들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주귀 노제억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더니 엉거주춤 횃불 하나를 들며 말했다.
“어째 몸이 좀 찌뿌둥하군. 나도 저 표범이나 잡으러 갔다 오지.”
그러자 다른 동료들이 비웃으며 물었다.
“네가? 또 어디 처박혀 술이나 마시려는 거 아니고?”
“그러게. 주귀 네놈이 술 이외의 일로 움직일 리가 없지 않나?”
하지만 동료들의 의심 섞인 물음에 노제억은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소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술이 어디 있다고 술을 마신다는 거냐?! 두고 봐라! 내가 반드시 저 표범 가죽을 벗겨 올 테니!”
그렇게 말한 노제억은 통로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표범이 간 통로 쪽으로 움직이던 그는 뒤의 동료들을 슬쩍 보다가는 그들의 시선이 잠깐 떨어진 사이 바로 다른 통로로 몸을 날렸다.
바로 술 냄새가 풍겨 오고 있는 쪽으로였다.
노제억은 이제 온 힘을 다해 어두운 통로 속을 달려갔다. 뒤에서 동료들이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이 멍청아! 그쪽이 아니야!”
그는 으흐흐 웃으며 그저 달리기만 했다.
지금 자신의 코를 점점 강하게 자극하는 주향에 너무 좋아 혼이 나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으흐흐흐! 이쪽이 아니긴, 정확하게 이쪽이건만. 술 냄새! 진짜 술 냄새다! 크흐흐흐!”
얼마나 달렸을까.
가까워진 술 냄새가 이제 완전히 코를 찌르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의 눈에 통로 한구석에 놓여 있는 호리병의 아름다운 모습이 들어왔다.
올록볼록한 아름다운 자태, 어디를 봐도 틀림없는 술병이었다.
“오오오오! 진짜 있었어!”
노제억은 환호했다.
저 술병이 여기 왜 놓여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을 불쌍히 여기신 신령님께서 흑표범의 모습으로 강림하셨던 건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어서 저 술병을 잡고 뚜껑을 따서 입에다 기울이는 것뿐이었다.
“으허허허허!”
그가 그렇게 감격스러운 눈으로 막 술병을 잡아 갈 때였다.
퓨슉!
순간 들려온 작은 파공성과 함께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뒤에서 날아온 암기에 점혈당했던 것이었다.
“?!”
하지만 노제억은 순간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따끔한 느낌 직후, 바로 뒤에서부터 갑자기 덮쳐 온 가죽 채찍이 자신을 휘감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휘리리릭!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 안 돼!’
한순간 가죽 채찍에 휘감겨 번데기가 된 채로 끌려가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안타까운 눈빛으로 술병을 바라봤다.
그의 사랑이 멀어지고 있었다.
***
증칠의 암기와 야운향의 채찍으로 노제억을 유괴해 온 선우진 일행은 일단 그를 들고 좀 더 뒤쪽 통로로 후퇴했다.
그러곤 그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심문을 준비했다.
증칠과 설풍이 일단 허공에 기막을 만들어 소리가 통과할 수 없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곤 노제억의 마혈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말을 할 수 있게 된 노제억이 바로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정파 놈들! 감히 네놈들이 이곳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너희의 뼛조각 하나 남길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지만 증칠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선우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심문할 생각이냐?”
그의 질문에 선우진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전에 겸사겸사 분근착골술을 익혀 둔 적이 있습니다. 그걸 써 보도록 하죠.”
“…겸사겸사 고문술을 익혔다고? 대체 밖에서 뭘 하던 놈이냐, 네놈은?”
하지만 선우진은 그의 말을 무시하며 노제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지금부터 너에게 질문을 할 것이다. 대답할 마음이 들거든 눈을 깜빡이도록.”
하지만 그의 태도는 완강했다.
“웃기지 마라! 정파 놈들 따위에게 내가 한마디라도…!”
타닥!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다시 마혈을 점한 선우진은 일단 그에게 분근착골의 일 단계를 펼쳐 줬다.
우두둑!
그러자 근육과 뼈가 어긋난 고통에 노제억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끄으으으으!”
마혈을 짚어 말을 하지 못하는 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상태를 잠시 지켜보던 선우진은 한 단계를 높이며 그에게 말했다.
“이제 이 단계다. 모두 십 단계까지 있지. 어디 네놈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기대해 보마.”
“으끄으으으으!”
그러자 그의 몸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선우진과 노제억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이 튀어나올 듯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노제억의 모습과, 천천히 그의 근육과 뼈를 뒤틀어 고통의 단계를 높여 가는 선우진의 평온한 모습이 뭔가 광기스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증칠은 문득 질린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거봐. 저놈 뭔가 이상하니까. 애초에 겸사겸사 분근착골술을 익혀 두는 놈이 어디 있겠냐고?”
그러자 이번에는 비사영과 설풍 역시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선우진은 분근착골술의 오 단계까지 간 다음 그것을 풀어 주고는 노제억의 마혈을 풀어 입을 열도록 했다.
하지만 노제억은 거의 사색이 된 표정으로도 일행들이 원하던 말을 해 주지 않았다.
“크아아아아! 이, 이 개 같은 놈들! 이따위 고통에 내가 굴복할 줄 알았더냐?! 크하하하하하! 십 단계까지 있다고?! 어디 백 단계까지 해 보아라! 내가 들려줄 말은 너희 어미…!”
타닥!
뭔가 패륜적인 말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 선우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마혈을 점했다.
아무래도 진짜 십 단계까지 가 봐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나른한 눈빛으로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야운향이 문득 입을 열었다.
“잠시만.”
그러자 모두가 의아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가 앞으로 나서며 선우진에게 말했다.
“내가 한번 해 봐도 될까요?”
선우진은 그녀의 자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러자 야운향은 증칠이 들고 있던 술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 좀 빌려주세요.”
증칠은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호리병을 감싸 안았다.
“뭐, 뭣?! 내, 내 술을 또 왜?!”
그가 애지중지하는 소봉주는 이제 절반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아까 선우진이 잠시만 빌려달라고 했을 때도 증칠은 마치 친자식을 보내는 것처럼 거부 반응을 보였었다.
하지만 그저 냄새만 필요할 뿐 술은 절대 건들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했기에 잠깐 빌려줘 미끼로 쓸 수 있었던 것이었는데.
이번에 야운향이 또 그의 귀한 술을 빌려달라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운향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쓸게요.”
그녀의 말에 증칠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어쩔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비사영이 그를 다독였다.
“에이, 사숙. 예쁜 사질이 혈교의 무리들을 토벌하기 위해 잠깐만 빌리겠다지 않소. 마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잠깐만 빌린다는데 그러시오.”
그의 말에 증칠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 그래? 진짜 마시는 건 아니겠지?”
비사영이 당연하다는 듯 호언장담했다.
“당연하지 않소! 이 와중에 우리가 술을 마시게 생겼소?!”
그러자 증칠은 간신히 호리병을 야운향에게 넘겨줬다.
하지만 야운향은 호리병을 넘겨받자마자 비사영에게 전음을 날렸다.
- 증 노인을 좀 제압해 주세요, 대사형.
- 응? 뭐라고?
비사영은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야운향은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행동을 시작한 상태였다.
그녀가 노제억에게로 거침없이 다가가더니 호리병을 기울여 그의 입에 술 몇 방울을 부어 줬다.
그러자 순간 두 사람의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확대됐다.
“끄으으으으!”
한 명은 분근착골을 받을 때보다도 더 격한 반응을 보이는 노제억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당연히 증칠이었다.
증칠이 활화산처럼 분노를 터트리며 소리 질렀다.
“뭐, 뭐 하는 짓이냐, 이 계집애야?!”
하지만 상황을 파악한 비사영이 먼저였다.
그가 황급히 증칠의 등 뒤를 점혈했다.
타닥!
“으읍! 으으읍!”
그러자 마혈이 점혈된 증칠은 마치 고문을 받는 것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만 야운향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또한 선우진은 신속하게 증칠이 막고 있던 기막을 다시 만들어 방음을 완성하고 있었다.
마치 사전에 약속된 것처럼 순식간에 돌아간 상황이었다.
야운향이 노제억의 아혈을 풀어 주며 말했다.
“정보를 말한다면 이 술을 마실 수 있게 해 줄게.”
그러자 분근착골에도 굴하지 않던 노제억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뒤에선 점혈 당한 증칠이 필사적으로 울부짖었다.
“끄으으으으으!”
야운향은 나른한 눈빛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겠다면.”
그러고는 천천히 호리병을 땅바닥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호리병에 담긴 술이 바닥에 속절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쪼르르륵!
노제억은 마침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안 돼! 이 잔인한 년! 그러지 마라! 다 말하겠다! 다 말하겠단 말이다!”
증칠 역시 울부짖었다.
“끄으으으으으으!”
그 혼란한 상황 속에서 선우진이 기가 막힌 얼굴로 묵랑에게 물었다.
‘저게 진심일까요?’
그러자 상대방의 의지를 읽어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묵랑이 대답해 줬다.
- …너무나도 격한 진심일세. 나도 어이가 없군.
선우진 일행은 잠시 후 노제억에게서 무황총 안쪽의 사정을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야운향은 노제억이 좋은 정보를 풀 때마다 조금씩 그에게 술을 부어 줬고, 결국 그는 모든 정보를 다 풀고는 행복한 얼굴로 숨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한쪽에 행복한 자가 있으면 다른 한쪽에선 불행한 자가 생기는 것이 세상의 이치. 노제억이 행복한 얼굴로 숨을 거뒀을 때 증칠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눈물을 그친 증칠의 눈빛은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점혈을 풀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피바다를 만들 것만 같은 살기등등한 눈빛이었다.
그러자 야운향은 나른한 눈빛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증칠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돌아가면 소봉주 세 동이를 줄게요.”
그 순간, 증칠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야운향이 그의 아혈을 풀어 주자 당장 크게 소리쳤다.
“거짓말 마라, 이년아! 그 귀한 걸 네가 어떻게 준다는 말이…!”
하지만 그의 말을 끊으며 야운향이 말했다.
“만들 수 있어요.”
“…뭐?”
증칠이 잠시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자 야운향이 다시 한번 확언했다.
“제가 만들 수 있다고요. 소봉주뿐 아니라 소홍주, 두강주, 백아주 다 만들 수 있어요. 우리 선조 중 지독한 주당이 계셨거든요. 세상 모든 술을 다 마셔 보시겠다며 천하의 주조법을 다 모으셨었죠.”
그러자 증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소봉주, 소홍주, 두강주, 백아주.
모두 다 한 지역을 대표하는 명주였기 때문이었다.
증칠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물었다.
“그, 그걸 다 네가 만들 수 있다고? 그, 그 거짓말이 정말이냐?”
그러자 야운향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돌아가면 다 만들어 드릴게요. 사숙이시니까.”
그것으로 증칠의 분노는 완전히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상황이 해결된 순간이었다.
***
외관 쪽 통로의 경계를 서던 혈교 고수 여섯 명이 이제 막 교대하려 하고 있었다.
“여어, 교대다!”
“으아아! 지겨워. 이제야 끝났군.”
“쳇, 이제 들어가 쉴 수 있다니 좋겠구만. 난 또 한 시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엥? 왜 다섯 명이야? 주귀 놈은 어디 갔어?”
“몰라. 통로로 침입한 표범을 잡겠다며 들어갔는데, 정작 먼저 들어간 둘은 표범을 놓치고 나왔는데 놈만 안 나왔잖아? 뭐, 그놈이 할 짓이야 뻔하지.”
“크크크크크, 그 주귀 놈 진짜 죽고 싶어 환장했군.”
“크크크, 시귀 어르신께서 지금 안 계시다고 버릇이 도진 거지 뭐.”
그때 통로의 그림자에 은신한 선우진 일행은 교대하는 그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선우진이 전음을 보냈다.
- 준비합시다.
그러자 인원들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모두 수신했음을 알렸다.
주귀 노제억이 말한 내용에 따르면 외측 통로의 경계는 한 시진(2시간)마다 교대됐다.
그러니 저들이 교대한 후 바로 처리한다면 한 시진 동안은 다음 교대자가 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시진의 시간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동굴 바깥의 경계병이 그들과 반 시진씩 엇갈려 한 시진 간격으로 교대를 하기에, 실제로는 반 시진 후 외곽 경계자들이 교대를 위해 이곳 외측 통로를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은 반 시진뿐, 그 안에 어떻게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잠시 후, 눈을 감고 감각을 극대화시켜 교대한 근무자들이 멀어지는 것을 심안으로 지켜보던 선우진은 한순간 눈을 번쩍 뜨고는 설풍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설풍 또한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는 뜻이었다.
시작은 아까처럼 흑표가 먼저였다.
선우진이 흑표의 목을 쓰다듬으며 의지를 보냈다.
‘저들을 이쪽 통로로 좀 유인해 줄래?’
그러자 흑표는 직접 듣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일으키더니 어슬렁거리며 혈교도들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흑표의 안광을 발견한 혈교도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뭐지, 저 불빛은?”
“짐승? 흑표다!”
“아까 근무자들이 말한 그놈이로군! 두 명만 쫓아간다!”
“내가 가지!”
“나도!”
파박!
절정의 경지에 오른 두 명의 마두들이 횃불을 들고는 흑표를 따라 통로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은 흑표의 뒷모습을 추격하며 소리쳤다.
“제법 빠른데?! 앞의 놈들이 못 잡았을 만하군!”
“주귀 놈은 안 잡았겠지만 말이야!”
“뭐? 크흐흐흐! 그러게. 그놈은 처형 확정이로군.”
그때였다.
바닥에서 뭔가 길고 물컹한 것이 갑자기 일어나며 그들의 다리를 걸었다.
터턱!
“윽! 뭐야?!”
“뱀인가?”
절정 고수인 두 사람은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자신들의 발을 건 그것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것은 검은 뱀의 몸통처럼 생긴 기다란 줄이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그것이 채찍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 소리치려 했다.
“저…!”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샤악!
“컥!”
“끅!”
그들의 등 뒤 바닥 그림자에서부터 유령처럼 솟구친 두 인형이 그들의 입을 막으며 목을 그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선우진과 비사영이었다.
그 순간 마두들의 손에서 힘이 풀리며 떨어지는 횃불은 설풍과 증칠이 가볍게 받아들었다.
턱! 턱!
마치 몇 달은 호흡을 맞춘 듯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다섯 명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마두들이 경계를 서는 곳으로 소리 없이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