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무황
흑혈환마 두당의 붉은 눈과 선우진의 황금빛 눈이 서로 마주쳤을 때였다.
두당이 갑자기 양손으로 자신의 눈을 감싸더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마치 엄청난 공격이라도 받은 것 같은 고통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자 자신의 몸으로 행한 낯선 수법에 선우진은 멍해진 채 물었다.
‘…이건?’
묵랑이 유쾌하게 대답했다.
- 지존신안이라는 것이네. 묵랑심법이 원래의 천마신공이었다면 자네도 갖게 됐을 섭혼술이지.
그렇게 말한 묵랑은 막 달려들려던 혈마인 여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풍에 의해 안으로 던져졌던 그 여인은 다시 밖으로 막 뛰쳐나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두당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고는 사나운 얼굴로 선우진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 또한 선우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는 두당이 그랬듯 자신의 눈을 감싸 쥐고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아악!”
그런 그녀를 보며 묵랑이 가볍게 말을 던졌다.
- 아무리 예쁜 몸이라도 아예 옷을 안 입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다니, 거 참 대범한 여인이로군. 아마 저자에 의해 정신에 금제를 당한 것 같네. 그래서 일단 그것만 깨 줬다네.
선우진은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어쩐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생에서도 붉은 복면을 쓰고 나타났던 첫 번째 혈마인, 적의혈마녀가 바로 그녀인 모양이었다.
그건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선우진의 지난 삶에서 혈마인이 처음 나타난 때는 앞으로 적어도 사 년은 지난 후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우리 앞에 나타난 건 사 년 후였지만, 이미 이때부터 혈마인의 제작에는 성공했었던 모양이로군. 만약 지금보다 더 늦게 왔더라면 아예 막을 수도 없을 뻔했어.’
문득 등에 소름이 돋았다.
어쩔 수 없이 오게 되긴 했지만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묵랑이 두당을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 자, 시간이 없으니 이자를 빨리 정리하고 제어실로 가 볼까? 이곳을 무너뜨리는 건 굳이 내가 전면에 나오지 않아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긴 하네만.
그때였다.
선우진이 황급히 묵랑을 만류했다.
‘어르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응? 왜 그러는가?
방금 묵랑이 보여 준 섭혼술에 선우진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떠오른 상태였다.
‘혹시 저자를 섭혼해 주실 수도 있습니까?’
흑혈환마 두당을 보며 한 얘기였다.
그러자 묵랑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 그야, 가능하긴 하네. 근데 왜 그러는가?
‘그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자로부터 알아내야 할 정보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 흠, 정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군. 알겠네.
그렇게 말한 묵랑은 검을 가볍게 휘둘러 두당을 점혈하는 동시에 그의 피를 몇 방울 검에 묻혔다.
그러곤 선우진의 피를 약간 낸 후 두 피를 섞으며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옴 바라….
그러자 묘한 감각이 선우진의 몸을 감쌌다.
마치 두당의 혼 일부를 빼앗아 몸 안에 간직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묵랑이 말했다.
- 어째 이번에는 이런 사이한 것들만 보여 주게 되는 것 같아 찝찝하군. 아이들한테 나쁜 짓을 가르쳐 주는 기분이랄까? 이건 예전 귀마라는 자가 창안했던 칠음비기, 그중에서도 분혼술이라는 것일세. 혹시라도 익히려고는 하지 말게. 내 진신절기를 이은 후라면 모를까 지금은 절대 안 되네. 칠음비기는 시전자를 망칠 수도 있는 꽤 위험한 무공이니 말일세.
그리고 그 분혼술의 효과가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는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흑혈환마 두당이 한순간 멀쩡해진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만, 선우진을 향해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건 정말이지 충격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선우진의 지난 생에서 실질적으로 선우세가를 무너뜨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원수 흑혈환마 두당이, 섭혼술에 당해 자신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있는 광경이라니….
선우진이 지금 자신의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입을 떡 벌린 채 멍해져 있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묵랑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 지시했다.
“저 여인을 안고 무황총의 중심부로 나를 안내하라.”
그러자 그가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예, 알겠습니다.”
두당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여인을 어깨에 얹고는 통로를 빠르게 달려 어딘가로 향했다.
선우진은 이제 그를 따라오는 흑표와 함께 편안히 그의 뒤를 쫓아가기만 하면 됐다.
흑표는 본능적으로 지금의 선우진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격이 비할 바 없이 높다는 것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놈은 이제 선우진의 옆도 아닌 뒤에서 그저 고양이처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다른 마두들은 거의 만날 수 없었다.
과연 설풍 일행이 적들의 시선을 끌어 준 덕분인 모양이었다.
물론 몇 명 정도 만나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알아챌 수 없었다.
두당을 본 그들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고, 두당은 그들을 바로 고혼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환마 어르신, 연구실로 가십…! 커헉!”
이런 식이었다.
두당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묵랑이 문득 내게 말했다.
- 이제 곧 이번 강습 시간도 끝날 것 같군. 실제로 묵랑검법의 강습은 거의 못 한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걱정할 필요는 없다네. 아까 말했듯 중앙의 통제실로 가면 이곳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기관도 있을 테니 말일세.
‘예, 알겠습니다, 어르신.’
원래 무황총의 중심부에서 묵랑의 힘을 빌리려던 선우진이 그냥 아까 묵랑을 호출한 것도 방금 그가 말해 준 이 사실 때문이었다.
그의 말대로 무황총을 파괴할 기관 장치가 있다면 굳이 중심부에서 묵랑검법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문득 선우진이 묵랑에게 물었다.
‘선배님, 만약 선배님께서 다시 제 몸을 사용하신다면 혈마를 죽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건 전부터 궁금해했던 부분이었다.
만약 자신의 몸을 움직인 검신이 혈마를 죽일 수 있다면 모든 일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지금 이대로 혈마를 찾아가 결판을 내고 해청연을 구해오는 것도 충분히 고려해 볼 만했다.
하지만 역시 세상사는 그리 쉽지 않았다.
- 불가능하네.
그 단호한 대답에 선우진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렇군요.’
그러자 묵랑이 추가 설명을 이어 갔다.
- 이 시대의 절대자라 불리는 이들은 내공 이 갑자, 화경의 경지를 넘어선 이들이네. 천하삼십육성이라 불리는 자들은 아직 그 경지를 넘지 못하고 벽에 막혀 있는 자들인 것 같더군. 하지만 내가 지금 자네의 몸으로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은 사실상 천하삼십육성까지가 한계라네. 그것도 암혈향 같은 살수나 두당같이 섭혼술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자들은 모를까 전투 기술로 초절정에 오른 이들은 힘들 수도 있지.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 초절정의 고수들 중에서도, 박투술이 특기인 철신광마 척강 같은 자들은 아무리 묵랑이 자신의 몸을 쓴다 해도 상대하기 힘들 수 있다는 얘기였다.
암혈향 같은 경우는 살수 비기로 초절정의 벽을 넘어선 그가 방심한 채 정면으로 맞붙었기에 쉽게 처리할 수 있었고, 섭혼술로 초절정의 벽을 넘어선 두당은 훨씬 상위의 섭혼술을 익힌 묵랑을 섭혼술로 상대하려 했기에 쉽게 무너졌던 것이고 말이다.
선우진으로선 실망스러운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선우진은 곧 실망을 털어 버리고 다시 의지를 굳혔다.
아무래도 여기서 나가는 대로 검신의 진신절기를 찾으러 가야만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이보다 훨씬 강해지지 않는 한 혈교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얘기였으니까 말이다.
“도착했습니다, 주인님.”
잠시 후, 선우진이 두당을 따라 도착한 곳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고 밝은 석실이었다.
또한 그 석실의 가장 안쪽 벽에는 커다란 석상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무척이나 위엄 있는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의 석상이었다.
“저 사람은?”
그러자 이제 다시 선우진의 심상 속으로 들어간 묵랑이 재밌다는 듯 말했다.
- 호오, 그 양반이 여기를 이렇게 꾸며 놓으셨군.
‘그 양반이요?’
-우리 형님 말일세. 정말 무황의 석상을 꾸며 놓다니 기가 막히는군.
‘…예?’
아무래도 저 석상의 주인공이 바로 무황총의 무황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왜 기가 막힌 일인지 선우진으로선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석실 벽에는 음각된 벽화와 글씨들이 벽 전체를 가득 뒤덮고 있었다.
슬쩍 둘러본 결과 그 글씨와 벽화들이 무황의 생애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선우진이 벽화와 그림들을 둘러보고 있자 옆에서 두당이 그것에 대해 공손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저 벽에 쓰인 글씨들에 따르면 무황은 무신, 뇌신, 검신과 동시대의 인물인 듯했습니다. 그는 황가에서 태어난 왕자였지만 선천적인 반신불수였고, 그로 인해 많은 멸시와 핍박을 받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한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결국 뼈를 깎는 노력 끝에 환골탈태에 성공했습니다.”
거기까지 들으니 무황은 그야말로 인간 승리의 산증인 같은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선우진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문득 묵랑이 코웃음을 치며 그의 말을 받았다.
- 그래. 환골탈태를 하고는 엄청난 초고수가 됐지. 그리고 황궁을 장악해 황제가 되더니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을 모두 자신의 발아래 꿇리겠다며 전 무림의 문파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했고 말이야.
두당이 해 준 얘기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긴 했다.
하지만 묵랑이 어쩐지 비웃는 듯한 말투로 설명한 것과 달리 두당이 해 준 얘기는 마치 영웅담처럼 미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천하를 막 제패하시려던 무황께서는 그때 나타났던 무신과 뇌신에게 패해 결국 안타까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무황총은 두 절대자들에 의해 아깝게 꺾이신 그분을 기리는 곳으로 글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내 뒤를 잇고 싶은 자는 나를 경배하라.’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묵랑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 응? 하하하하하!
선우진으로선 연유를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단 두당의 말에 집중했다.
“저희는 아마 그 말이 무황의 유진을 이을 수 있는 열쇠일 거라 보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해 봤습니다. 특히 저 석상 앞의 제단에 뭔가가 있을 거란 생각에 그 위에서 참배를 해 보기도 하고 그것을 열어 보려고 시도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무황의 유진은 나타나지 않더군요.”
그가 말한 제단이란 석상의 앞쪽에 위치한 긴 네모 모양의 돌 침상 같은 곳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뭔가 비밀이 있을 것처럼 보이는 수상한 구조물이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혈교도들은 그곳을 혈마인을 만드는 제작대로 사용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우진이 문득 두당에게 물었다.
“기관을 해제해 보려고 해 보진 않았나?”
그러자 두당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처음엔 시도도 해 봤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기관이 워낙 정밀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져, 함부로 건드리게 되면 이 무황총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지요. 그 이후론 차마 기관을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말에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서 묵랑이 거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 후후, 당연한 일이지. 어딜 감히 혈교도 따위가 내가 설계한 건축물을 제어하려 한단 말인가.
선우진은 쓴웃음을 짓고는 문득 그에게 물었다.
‘그럼 무황의 유진이라는 건 원래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혈교도들이 찾지 못한 걸까요?’
그러자 묵랑이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군. 혈교도들은 헛짓거리를 했어. 설사 무황의 유진이 숨겨져 있다고 해도 아마 그런 식으론 절대 찾지 못했을 걸세.
그의 말에 선우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황총에서 무황의 석상에 참배하는 것이 잘못된 방법이라면 대체 무슨 방법을 써야 한단 말인가?
여전히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묵랑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 가서 저 석상에게 한 방 먹여 보게. 아니, 아예 부숴 버리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그의 말에 선우진이 자기도 모르게 육성으로 되물었다.
“예?”
그건 너무나도 황당한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무황총에 와서 무황의 석상을 때리라니.
아니, 아예 부숴 버리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그러자 묵랑이 다시 말했다.
- 모르겠나? 정황상 이 무황총이란 곳은 내 형님이 만든 곳이라네. 근데 형님께선 저 작자를 엄청나게 싫어하셨거든. 생각해 보게. 애초에 무림을 제패하려다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던 악인인 그의 무덤을 뭐가 예쁘다고 만들어 준다는 말인가? 그것도 저 작자라면 이를 갈던 형님께서 말일세.
선우진은 이제야 묵랑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그럼. 무황총이란 곳은 사실 무황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 절대 아닌 거지. 그것만큼은 내가 장담할 수 있네.
선우진은 이제야 아까 묵랑이 보였던 웃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저 근엄해 보이는 무황의 석상도, 벽에 잔뜩 써 놓은 영웅담 같은 그의 일대기도 모두 속임수인 것이었다.
이제 묵랑과 같이 어이없는 웃음을 지은 선우진은 바로 몸을 날려 무황의 석상을 덮쳐 갔다.
“하아아압!”
그러자 두당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선우진의 정권이 석상의 머리를 강타하자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안 됩니다, 주인님! 그러다 이 무황총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하지만 석상의 머리를 반파시켰음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선우진은 두당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묵랑에게 물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요?’
- 아직 부족한가 보군. 더 두드리시게.
콰아앙!
선우진은 이제 신나게 석상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두당은 그를 말리지도 못한 채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선우진이 막 석상의 하부까지 완전히 부쉈을 때였다.
콰아아아아앙!
갑자기 그를 둘러싼 주변의 환경이 확 변하고 말았다.
화르르르륵!
한순간 그의 주변이 온통 불타오르고 있었다.
사방이 시뻘건 화염으로 둘러싸여 금방이라도 그를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온몸이 익어 버릴 것 같은 뜨거운 열기에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으윽!”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득 혹시 석상을 부순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던 건가,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그의 눈앞에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났다.
백옥같이 희고 잘생긴 얼굴에 오만한 표정, 그리고 사방으로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남자였다.
‘고수다!’
엄청난 고수였다.
선우진이 만났던 이 시대의 절대자들인 검성, 혈마, 색마는 물론 스승인 광협검괴와 비교해도 오히려 더 까마득해 보이는 느낌을 주고 있는.
그가 뿜어내는 강력한 기세에 화염조차도 그의 주변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분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이놈! 감히 내 무덤에 와서 나를 참배하지는 못할망정 내 석상을 부수다니! 그러고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심혼을 뒤흔들 것만 같은 강력한 목소리였다.
그 어마어마한 기세에 선우진의 몸이 저절로 덜덜 떨려 왔다.
아무래도 석상을 부쉈던 건 제대로 잘못된 선택인 모양이었다.
선우진이 묵랑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어르신, 이제 어떻게 하죠?’
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르신?’
선우진은 당황했다.
그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엔 자신 혼자만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사이, 그의 눈앞에선 무황으로 보이는 존재가 계속 분노를 토해 내고 있었다.
- 선택하라! 네놈을 어떻게 죽여 줄까?! 불에 태워 주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갈기갈기 찢어 줄까?!
엄청난 압박감이었다.
당장이라도 무릎 꿇고 잘못을 빌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선우진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는, 마침내 마음을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어디 네 마음대로 해 봐라, 무황!”
하룻강아지가 범에게 대들 듯 무모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무황에게서 폭풍과도 같은 기세가 확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뭐라고?!
하지만 선우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기세를 억지로 버텨 내며 계속 소리쳤다.
“내가 네놈에게 살려 달라고 사정이라도 할 것 같으냐?! 세상을 피에 물들인 악인! 뇌신, 검신에게 패해 죽은 실패자 따위에게 말이다!”
그러자 분노한 무황의 기세가 유형화되어 그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압력에 전신의 뼈가 부스러질 것만 같았다.
- 다시 한번 지껄여 봐라!
하지만 선우진은 고통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몇 번이라도! 으득! 말해 주마! 이익! 이 실패자야!”
그 순간이었다.
선우진을 부스러뜨릴 듯 조여 오던 압력이 한순간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졌다.
“헉!”
갑자기 편해진 몸에 선우진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에서 넘실대던 화염마저도 처음부터 없었던 듯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무황이 있던 곳에는 처음 보는 다른 남자가 있었다.
선이 굵은 남자다운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어떤 남자였다.
그가 씨익 웃으며 선우진에게 말했다.
- 마음에 드는 녀석이로군. 합격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선우진은 원래의 석실로 돌아왔다.
- 진! 진! 자네, 무슨 일인가?! 정신 차리게!
정신을 차려 보니 묵랑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옆에선 흑표 또한 정신을 차리라는 듯 가볍게 그의 다리를 물고 흔들고 있었다.
선우진은 먼저 흑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며 묵랑에게 대답해 줬다.
‘예, 어르신. 저 이제 돌아왔습니다.’
그의 대답에 묵랑이 안도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 하아, 돌아오다니 무슨 말인가? 자네 잠깐 동안 제자리에 우뚝 멈춰 있었다네. 불러도 대답도 안 하는 것이 그대로 정신이 나간 것만 같았지.
‘아, 네. 사실은….’
선우진은 자신이 방금 겪었던 일을 묵랑에게 설명해 줬다.
그러자 묵랑이 어쩐지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군.
선우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분이 혹시…?’
- 그래, 내 형님이라네. 나이를 먹고도 그 애 같은 장난기를 못 버렸었지. 아쉽군. 나도 자네와 같이 볼 수 있었다면 철 좀 들라고 놀려 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일세.
그 목소리에 담긴 짙은 그리움에 선우진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기관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드르르르릉!
뒤쪽이었다.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니 네모난 제단이 있던 곳이 뒤로 밀려나며 아래에서부터 뭔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뒤에서 보고 있던 두당이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 저건 설마?!”
그것은 네모난 서탁이었다.
그리고 그 위엔 두꺼운 서책과 커다란 금박으로 싸인 단환이 하나 놓여 있었다.
또한 그 서책에는 황룡무상강기라는 제목이 황금빛으로 적혀 있었다.
문득 묵랑이 말했다.
- 황룡무상강기. 저게 바로 무황의 비급이라네.
선우진은 멍하니 다가가 그 책을 들어 올렸다.
혈교의 무리들이 이곳을 발견하고도 오랜 세월을 찾을 수 없었던 무황의 비급이 선우진의 손에 들어온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