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계속되는 위험
사인교(네 명이 메는 가마)에 탄 채 섭선을 부치고 있던 제갈지강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곳의 공기는 정말 정이 안 가는군.”
운남성의 후덥지근한 공기는 그저 그 안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더군다나 마치 귀양을 오는 듯한 기분으로 운남성의 전선으로 와야 했던 제갈지강의 기분이 절대 좋을 리 만무했다.
그는 세상 모든 곳에 짜증을 폭발시키고 싶은 충동을 이성으로 억누르며 앞으로 할 일을 정리해 봤다.
일단 자신의 주변을 호위하고 있는 흑호대와 흑랑대, 흑룡대의 정예 삼백여 명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저들 중에서 내 사람을 골라내는 일이겠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맹주에게로 넘어갔는지를 파악해야만 해.’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을 골라낼 수 없다면 얼마의 시간이 지나든 자신은 결국 무림맹주 모용검의 장기 말로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 작업에 자신의 사활을 걸어야만 한다고 제갈지강은 다짐했다.
‘그런 후엔 전선에 존재하는 검성의 잔재들을 지워야겠지. 특히 놈의 딸이 있었던 비룡십삼대를 제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어.’
제갈지강은 그 뛰어나다는 설풍이라는 자는 물론 비룡십삼대에서 해청연과 함께 행동했던 칠 조원들을 깡그리 정리해 버릴 생각이었다.
귀주성에서 독수 오 남매라는 이름으로 함께 활동하기까지 했으니 그들이라면 분명히 많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구석에 몰리게 된 원인도 해청연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그녀와 관련된 것들은 복수심 때문에라도 무엇 하나 남겨 둘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비룡대 본부에 도착했던 제갈지강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보고를 듣게 되고 말았다.
“비룡십삼대 칠 조 조장 설풍이 사망했다고?”
그러자 검성의 사후 임시로 비룡대 본대를 관리하고 있던 비룡대장 관구붕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정확히는 칠 조원 비사영, 야운향, 그리고 삼 조 부조장인 선우진과 함께 실종된 동료를 구하겠다며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제갈지강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럼 사망한 건 아니지 않나?”
그러자 관구붕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전선에선 이틀 이상 밀림에서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모두 사망으로 분류합니다.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도 돌아온 선례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근데 그들은 이미 오 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미 사망한 것이나 다름이….”
그때였다.
제갈지강의 옆에 서서 함께 보고를 듣고 있던 그의 딸 제갈서율이 갑자기 창백해진 얼굴로 비틀거렸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장로 제갈지용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해 줬다.
“서율아! 괜찮으냐?! 왜 그러는 것이냐?!”
제갈서율은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저, 저는 그저….”
제갈서율은 이번에 아버지 제갈지강을 따라 전선에 내려왔었다.
전선의 무사인 선우세가의 후계자에게 패했던 것이 실전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전선에 와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청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진정한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선우진의 사과를 들은 후 완전히 혼란에 빠져 버리고 말았었다.
그를 증오하고 파멸시키겠다는 목적의식을 가졌을 때는 차라리 모든 것이 선명했었는데, 마지막 그의 사정을 듣고는 그조차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진짜 증오했던 것이 아니었구나.’
그랬다.
제갈서율은 선우진을 증오한 적이 없었다.
그저 너무나도 그를 원하게 되어 버렸기에 차라리 증오한다고 자신을 속였을 뿐이었다.
제갈서율은 그 사실을 증오를 걷어 낸 이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선우진이 그날 해 준 얘기는 그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사과 또한 충분히 진심이 담겨 있었고 정중했다.
제갈서율은 냉정하게 그의 상황이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품고 있던 증오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야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뭐, 뭐야? 내가 왜 이러지?’
제갈서율은 당황했다.
증오가 사라졌음에도 그의 얼굴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뇌리에 항상 선우진의 얼굴이 떠다니고 있었다.
자신을 부축해 주던 자상한 모습.
냉정하게 쏘아붙이던 차가운 표정.
자신과 싸우는 도중이었음에도 아름답다고 중얼거리고 말았던 그 환상적인 검법.
마지막으로 남긴 진솔한 목소리까지도….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래서 한참을 그를 머릿속에서 지워 보려 노력했던 제갈서율은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를 연모하게 되었다는 것을.
첫사랑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그녀가 전선으로 따라온 이유가 다른 것일 수 없었다.
‘그가 보고 싶어. 다시 한번만 그를 볼 수 있다면….’
오직 그 이유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전선에 내려와 처음 듣게 된 소식이 선우진의 사망 소식이라니….
제갈서율은 너무 충격이 커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녀의 아버지 제갈지강은 그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게 전선은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더냐? 몸이 안 좋으면 숙소로 가서 쉬고 있도록 해라.”
그러자 제갈서율은 억지로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잠시 현기증이 왔을 뿐 괜찮습니다. 계속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녀는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떠날 수는 없었다. 반드시 그의 소식을 끝까지 들어야만 했다.
그러자 이제껏 지켜봤기에 그녀의 감정을 대강이나마 짐작하고 있던 제갈지용만이 어두운 표정으로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딸의 이해할 수 없는 고집에 제갈지강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차마 외인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꾸짖을 수는 없었던 그는 다시 관구붕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래, 그럼 다른 칠 조원들은 아직 십삼 대에 남아 있겠군?”
“예, 실종된 부조장 나서유까지 제외하면 세 명 정도가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제갈지강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 그들을 비룡대 본부로 좀 불러 주겠나? 자세한 상황을 듣고 싶군.”
“예, 군사님. 알겠습니다.”
사실 제갈지강은 남아 있는 칠 조원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다.
‘철신유성 배종관, 쾌도묘랑 천주은이라고 했었지? 나머지 한 명은 새로 온 조원인가 보군. 하필 칠 조로 배정되다니, 쯧.’
독수 오 남매로 해청연과 함께 행동했던 배종관과 천주은은 당연히 살려 둘 수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본부로 불려 오는 도중, 또는 돌아가는 도중에 죽일 생각이었다.
새로 들어온 조원이야 좀 안됐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그의 운명인 것을.
그렇게 생각한 제갈지강은 희미한 웃음을 짓고는 검성이 전선에서 해 왔던 일들에 대해서도 질문하기 시작했다.
검성의 흔적을 지우려면 그가 한 일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야만 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자 그의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갈서율은 결국 다시 나오지 않는 선우진의 소식에 어쩔 수 없이 비틀거리며 숙소로 향해야만 했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하기도 전, 그녀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으흐흐흑! 선우 공자!”
심장이 부서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
운남성 점창산.
혈마는 문득 지기음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지존, 무황총에 있던 시마 구우절이 지존을 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혈마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두당 녀석이 내 명을 어긴 것을 보고하러 왔다더냐?”
지기음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혈마의 말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백면시마 구우절은 흑혈환마 두당이 혈마의 명을 어기고 해청연의 동료인 두 남녀를 잡아 왔다며 보고하러 와 있었다.
그런데 혈마가 그 사실을 정확히 맞히다니, 아무리 그가 모시는 지존이라 해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 당황했던 지기음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혈마에게 물었다.
“…지존께선 이미 두당이 그렇게 행동할 것을 예상하고 계셨습니까?”
그러자 혈마가 다시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는 전제까지 달아 줬으니, 어찌 두당 그놈이 가만히 있을까? 당연히 섭혼해서 다시 돌아오게 하지 않았겠느냐?”
그의 말에 지기음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자신이 모시는 주인다운 뛰어난 지모였다.
그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속하는 지존의 지혜로우심에 감탄했습니다.”
그러자 혈마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사내답지 못한 치졸함을 욕하면 모를까 감탄을 하다니, 아부가 심하구나. 이래서야 내가 어찌 네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 말에도 지기음은 더욱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할 뿐이었다.
“그녀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정보의 유출을 막으셨으니 그것이 어찌 현명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실 정파인과의 약속 따위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속하는 그저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그의 말에 혈마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혈마가 검성을 존경한다고 말했던 것은 분명히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도 그다지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정파인이 아닌 혈교의 교주였으니까 말이다.
그에게 있어 정파인과의 약속 따위는 그저 기분이 내키면 지켜 줄 수 있는 가벼운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혈마인의 재료로 유용히 쓰일 인재들을 어찌 쉽게 보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모든 일이 그가 원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고지식한 우절에게는 나중에 내가 친히 두당을 벌할 것이라고만 일러두거라. 지금은 혈마인을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니 그것에 집중하라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지존.”
그 말을 끝으로 구유음마 지기음은 그림자가 되어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뱀의 지혜를 가졌다는 사혜혈마 전무광도 다시 애뇌산으로 돌아갔던 백면시마 구우절이 얼마 후 급히 돌아올 것까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그가 가져온 충격적인 소식도 말이다.
얼마 후, 혈마가 눈을 부릅뜨고 되물었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느냐?! 무황총이 무너졌다고?!”
분노한 그의 기세가 그로부터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화아아악!
그 엄청난 압력에 바닥에 납작 엎드린 백면시마 구우절과 그의 수하 세 명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으으윽!”
“끄으으으!”
“지, 지존, 부디….”
백면시마 구우절을 제외한 나머지 마두들은 곧 죽을 것처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러자 그들의 모습을 본 혈마는 애써 기세를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다시 말해 봐라. 대체 무황총이 왜 무너졌다는 것이냐?!”
백면시마 구우절은 원래 말주변이 없는 데다 이번 일도 무너진 무황총에서 도망 온 부하들을 만나 들었을 뿐이기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뒤에 엎드린 부하 마두들이 더듬더듬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그것이….”
잠시 후,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 혈마가 중얼거렸다.
“붉은 강기를 뿜어내고 철조를 쓰는 젊은 놈, 그리고 연보라색 강기와 검은 늑대가 새겨진 검을 사용하는 젊은 놈이라고?”
“예, 예! 그렇습니다, 지존! 그 철조를 사용하는 젊은 놈이 먼저 자기 일행들을 구해 빠져나갔었습니다! 그때 전 인원들이 달라붙어 막아 보려 했지만 모두 깨져 나갔고, 그 후 뭘 하고 있었는지 조금 이따가 늑대가 새겨진 검을 사용하는 젊은 놈이 빠져나갔습니다! 무황총은 그 직후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혈교에서도 정보를 담당하는 구유음마 지기음이 황급히 말했다.
“철조를 사용하는 젊은 놈이라면 저도 해청연을 잡아 올 때 본 적이 있습니다. 분명 비룡십삼대 칠 조의 조장인 설풍이란 놈이 틀림없습니다. 젊은 나이에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대단하단 생각은 했지만 무황총의 인원들을 모두 처리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늑대가 새겨진 검을 사용하는 놈이라면 같은 칠 조원인 비천흑랑 선우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혈마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설풍, 선우진이라….”
그러곤 다시 마두들에게 물었다.
“두당은 어찌 됐느냐? 그리고 마군들은?”
“환마 님은 저희도 잘…. 그리고 다른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혈수마군께선 그 철조를 쓰는 놈에게 몇 초도 채 버티지 못하고 당해 버리셨습니다. 그걸 보면 다른 분들도 아마…. 무황총 안에 있던 사람들 중 그곳이 무너지기 전에 탈출한 건 저희 셋뿐이었습니다.”
화아악!
혈마에게서 다시 폭풍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끄으으윽!”
“지, 지존!”
혈마는 도저히 분노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흑혈환마 두당은 천하삼십육성이자 혈교오마라는 위치를 떠나, 백면시마 구우절과 함께 마인들을 생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황총의 가치는 더했다.
그곳은 마인들을 생산하기 위한 모든 것들을 모아 놓은 곳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혈마인을 만들기 위한 자료와 시설, 재료들을 모두 그곳에 모아 놨었는데….
혈마는 결국 참지 못하고 포효하며 분노를 쏟아 냈다.
“으아아아아아!”
그러자 백면시마 구우절 뒤에 부복해 있던 마두 세 명의 몸이 그대로 으스러져 버리고 말았다.
우두두두둑!
“끄어어어억!”
“지조오오온!”
“사, 살, 아아악!”
그들은 공중에 둥둥 뜬 채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짓눌려진 듯 완전한 곤죽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그러자 그들의 앞에 부복해 있던 백면시마 구우절은 덜덜 떨며 더욱 납작 엎드렸고, 잠깐 분노를 덜어 낸 혈마는 눈을 감고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구우절이 덜덜 떨고 있을 때, 혈마가 다시 평온한 눈빛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생각하면 혈교의 긴 역사 중 요즘처럼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적이 없었지. 그래, 한 번쯤 시련이 찾아올 때도 된 것 같구나. 그나마 연구 자료들을 모두 필사해 이곳에 옮겨 놓았으니 천만다행한 일이 아니냐?”
혈마의 긍정적인 말에 구우절은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지기음과 구우절은 머리를 더 숙일 수 없을 만큼 깊게 숙이며 외쳤다.
“지존! 속하들의 무능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이미 평정을 되찾은 혈마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절, 너마저 벌하면 이제 혈마인들은 어찌 만들란 말이냐? 그래도 네가 아닌 두당이 당해 다행이로구나. 두당의 역할이야 내가 할 수 있지만, 네 역할은 나로서도 좀 힘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혈마의 인자한 말에 구우절은 감복해 소리쳤다.
“지존!”
혈마는 무형지기로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자, 이제 우리 둘이서 혈마인을 만들어 보자꾸나. 할 수 있겠느냐?”
“제 목숨을 바쳐 해내겠습니다!”
“허허허! 이제부터 네 목숨을 그리 쉽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나저나 우절 네 목소리를 이렇게 많이 들어 본 건 처음인 듯하구나.”
“송구하옵니다, 지존!”
혈마는 진심으로 그가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구우절만 있다면 시간은 좀 더 걸려도 충분히 다시 혈마인들을 완성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혈마인으로 완성할 초고수들의 시체도 다행히 무황총이 아닌 이곳에 옮겨 놨었지 않은가.
특히 전 점창파 장문인인 마원웅이라든가, 전 아미파 장문인인 결허 사태의 시체를 옮겨 놓은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혈마는 그런 생각에 웃음을 짓고는 문득 고개를 돌려 구유음마 지기음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음, 자네는 무황총으로 가 살펴 주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혹시 그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낼 수 있는지 말일세. 그리고… 그 설풍과 선우진이라는 아이들의 동향도 좀 살펴 주게나.”
“명을 받듭니다!”
“아, 함부로 접근하지는 말게. 그 아이들이 정말 두당을 죽인 것이라면 자네도 위험할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지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기음의 모습은 유령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선을 돌린 혈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절, 자네는 이곳에 혈마인을 만들 수 있는 시설을 좀 만들어 주게. 그리고 나가며 저 지저분한 것들을 좀 치워 주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지존!”
그가 치워 달라고 부탁한 것은 곤죽이 되어 버린 마두들의 시체였다.
혈마는 유용한 자들에겐 한없이 자상한 주군이었지만, 그에게 별 가치가 없는 자들의 시체는 그저 쓰레기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이제 백면시마 구우절마저 나간 방에서 혈마는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무황총이 무너진 것이야 치명적인 손실이었지만, 살면서 수없이 많은 시련을 겪어 온 혈마에겐 전혀 감당 못 할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 눈을 뜬 혈마는 문득 해청연이 머물고 있을 쪽을 바라보고 빙긋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좋은 소식이나 전해 줘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