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드러난 비사-1
“수련 중이신 모양이구려.”
거처의 마당에서 명상에 잠겨 있던 해청연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거처는 원래 점창파의 장로들이 사용하던 독채로 넓은 마당을 연무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넓은 숙소였다.
그녀가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혈마를 보며 입을 열었다.
“보시는 대로 그랬습니다.”
무표정한 눈빛에 평온한 말투였지만 어쩐지 수련 중에 끼어든 무례함을 비난하는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그러자 혈마는 빙긋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방해해서 미안하오, 소저. 들으면 좋아할 것 같은 소식이 있어 전해 주러 왔다오.”
그의 말에 해청연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좋은 소식이라고요?”
자신에게 좋은 소식이라니.
이상한 말이었다.
자신에게 좋은 소식이라면 분명 혈교에겐 안 좋은 소식일 테니 말이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혈마가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로서는 치명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겠지. 소저는 잘 모르겠지만 처음 우리가 소저를 데려갔던 곳은 애뇌산이었소.”
“…애뇌산이라면?”
“그렇소. 무황총이 있는 곳이지. 지금은 마인들을 생산하는 시설이 있던 곳이기도 하고 말이오.”
그 말에 최근 늘 무표정했던 해청연의 얼굴에 놀라움의 감정이 떠올랐다.
무황총혈사 때 무너졌다고 알려진 그곳이 마인들의 생산 시설이었다니, 아무리 자신이 잡혀 있다고 해도 외인에게 알려 주기엔 너무 큰 비밀이었던 것이다.
해청연이 문득 물었다.
“그 사실을 왜 제게?”
그러자 혈마가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젠 말해 줘도 상관없다오. 그곳은 이제 진짜로 무너져 버렸으니 말이오.”
그것은 엄청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해청연의 눈이 깜짝 놀라 점점 더 커져 갔다.
“마인들의 생산 시설이… 무너져 버렸다고요?”
“그렇소. 생존자들의 말에 따르면 설풍과 선우진이라는 아이가 일행들을 이끌고 왔었다고 하더구려. 아마… 소저를 구하고 싶었던 모양이오.”
그 말에 해청연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여기서 다시 들을 거라곤 상상하지도 못했던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선우진, 그가… 그가 자신을 구하러 왔다고?
그것도 마인들이 가득한 밀림을 뚫고 혈교의 소굴인 애뇌산까지?
해청연은 혈마의 앞에서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만큼 몸이 떨려 왔다.
‘그가, 그가 왔었어. 나를 구하러.’
선우진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었다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 표정을 면밀히 살피며 빙긋이 웃음 지은 혈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단한 아이들이더구려. 무려 흑혈환마 두당과 다섯 명의 초절정 고수, 칠십여 명의 절정 고수가 지키고 있던 그곳을 뚫고 결국 무너뜨렸으니 말이오. 소저는 아버지만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동료들도 대단한 이들을 두셨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해청연이 문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들은 지금…?”
그녀의 질문에 혈마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애뇌산을 무사히 벗어난 것까지는 확실한데, 그다음은 나도 잘 모르겠구려. 안 그래도 나도 궁금해 구유음마를 보내 놓은 참이오. 또 소식이 있으면 전해 주리다.”
그의 대답에 해청연은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청연은 혈마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혈마가 자신에게 이런 소식을 알려 주는 건 분명 자신에게 생의 의지를 불어넣기 위해서임이 틀림없었다.
역천혈마의 그릇이 되기 위해선 자신의 격이 높을수록 더욱 좋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것이 설사 그의 의도라도 최선을 다해 그렇게 해 줄 생각이었으니까.
혈마는 이제 돌아가려는 듯 발걸음을 돌리며 물었다.
“이제 가 보겠소. 혹시 불편한 것이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주시구려.”
그러자 해청연이 문득 그에게 말했다.
“혈교의 무공을 익힐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에 혈마는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그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뭐라고 하셨소?”
“혈교의 무공을 익히고 싶다고 했어요. 어차피 당신의 계획을 위해서도 제가 혈교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어요?”
혈마는 잠시 복잡한 눈빛으로 해청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녀가 혈교의 무공을 익힌다면 자신으로선 절대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나중에 그릇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그녀가 혈교 무공의 광기에 휩쓸린다면 더 다루기 편해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걸 익히 알고 있을 그녀가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이유도 말해 줄 수 있겠소?”
그러자 해청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제 가문의 성라검법은 더 높은 경지로 가기 위해 많은 깨달음이 필요해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죠. 제 성향과 잘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요. 저는 한 가지 무학을 깊게 파는 것보단 다양한 무학을 많이 접하고 익히는 것에 훨씬 더 적합한 재능을 지니고 있어요. 발전 속도를 훨씬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지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그녀에겐 한 우물을 깊게 파는 것보단 여러 우물을 많이 파는 것이 훨씬 빠른 성장을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말에 혈마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려. 곧 혈교 최고의 비급들을 보내 주리다. 아, 혹시 벽을 넘어 내공을 높일 필요가 있거든 지나다니는 놈 아무나 잡아 흡수하도록 하시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영약 같은 것은 별로 구비하고 있지 않다오. 대신 독단은 넉넉히 보내 주겠소.”
“그러지요.”
혈마가 방금 한 말은 혈교의 흡정술을 익혀 자신의 부하 중 아무나 희생시킨 후 내공을 쌓으라는 말이었다.
그런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혈마는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아무래도 이번 방문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마당에서 해청연은 드디어 털썩 주저앉았다.
간신히 참고 있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 당신이….”
감격스러웠다.
이 지옥 같은 삶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한 줄기 희망을 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해청연은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원래도 혈마의 뜻대로 해 주지는 않을 생각이었지만, 이젠 죽을힘을 다할 의지가 생긴 것 같았다.
해청연은 이제 과거의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었는지를 정확히 깨닫고 있었다.
그때의 그녀는 너무 자기만을 생각한 나머지 선우진에게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는 걸 말이다.
‘처음엔 오만했고, 나중엔 이기적이었지.’
그를 마음에 두게 된 초반, 그녀는 언제라도 자신의 진정한 외모만 보여 주면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자신하며 그저 흥미롭게 지켜보기만 했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후엔 먼저 그의 옆에서 떠났었다.
그로 인해 상처받고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자존심 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었다.
그에게 진심으로 다가갔어야 했었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를 먼저 헤아리려 노력했어야만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해청연은 이를 악물었다.
‘똑같은 잘못을 또 반복할 수는 없지.’
그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면 자신 또한 그에 화답해 줘야만 했다.
선우진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경지를 높여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보고 싶은 그에게로, 선우진에게로 말이다.
해청연의 눈 속에서 뜨거운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후우우우.”
백학노검 양문헌과 검을 수련하던 당여은은 문득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는 깜짝 놀라 변명했다.
“아, 조부님. 죄송합니다. 제가 또….”
그러자 그녀에게 검을 지도해 주고 있던 양문헌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 하나 그런 마음으론 도저히 수련을 이어 갈 수가 없겠구나.”
“…죄송합니다.”
당여은은 요즘 습관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곤 했다.
선우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녀 또한 전선의 근무자이기에 쓸데없는 걱정에 시간을 소비하기보단 지금의 수련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알고 있음에도 도저히 다른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후우우우.”
선우진이 밀림으로 들어간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후로 어떤 소식도 전해 들을 수 없었기에 그녀의 마음은 나날이 타들어 가고만 있었다.
‘진….’
그와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입을 맞췄던 그 순간의 기억만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어쩌면 그 순간이 그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끊임없이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조금만 더 많이 그의 얼굴을 바라볼 것을.
조금만 더 많이 그에게 마음을 표현할 것을.
아무런 쓸모가 없는 후회임에도 좀처럼 심마를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던 한순간,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우!”
이번 한숨은 힘없는 한숨이 아니었다.
잡념을 떨쳐 버리기 위한 깊은 한숨이었다.
언제까지나 과거의 영상에만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었다.
절대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 순간이 정말 그와의 마지막이었다면, 그의 복수는 자신의 몫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강해져야만 했다.
무공은 물론 마음까지도.
당여은은 다시 검을 들어 올려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당여은. 그게 진정 그를 위하는 길이야.’
그리고 월하환검무를 발동했다.
월하환검무 일 식.
비월.
화아아악!
그녀의 시야에 문득 꿈결 같은 장막이 뒤덮였다.
당여은이 현재 안전하게 발동할 수 있는 경지는 비월까지였다.
이 식 현월도 도전해 본 적은 있었지만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금세 풀어 버렸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당여은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월하환검무의 두 번째 단계를 발동했다.
월하환검무 이 식.
현월.
화아아아악!
그러자 감각이 확장되며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녀의 감각 안으로 들어왔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이든 알 것 같은 전능과 전지의 감각.
정신이 붕 떠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몽롱한 느낌에 더 이상 이성을 유지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당여은은 입술을 더욱 꽉 깨물었다.
마침내 터진 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그 통증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할 수 있어. 버틸 수 있어. 아니, 버텨야만 해!’
그때였다.
그녀의 확장된 감각에 무언가가 느껴졌다.
쉬이익!
뒤에서부터 무언가가 그녀를 노리고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이 식 현월로 시간을 느리게 했음에도 충분히 빠르게 돌진해 오는 물체였다.
당여은은 옆으로 몸을 날려 그것을 피한 후 바로 공격으로 이어 가기로 했다.
파박!
그녀의 몸이 자연스럽게 날아오는 뭔가를 피해 내며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순간 숨이 멎을 듯 놀라고 말았다.
“!”
마치 암기처럼 날아와 자신을 습격한 것은 물체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녀가 잘 아는 사람 말이다.
일주일간 단 한 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었던 바로 그, 선우진의 얼굴이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여은, 많이 늘었는데요?”
그러자 당여은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소리쳤다.
“진!”
당여은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와락!
그리고 그의 품에 꼭 안겨 눈물을 흘렸다.
“돌아왔어! 정말 돌아왔어!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진!”
선우진은 그녀를 꼭 안아 주며 푸근하게 웃음 지었다.
“왜 나한테 고마워요. 이렇게 반겨 주는 여은이 훨씬 더 고맙지.”
그러자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제운검객 벽리중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흠, 하여간 요즘 아이들은 부끄럼도 없는 것 같습니다, 형님.”
그의 말에 백학노검 양문헌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보기 좋은데 뭘 그러는가? 혹시 아우님이 부러워서 그러시는가?”
그러자 그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선우진과 당여은이 화들짝 놀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선우진은 어색한 표정으로 양문헌과 벽리중에게 인사했다.
“두 분께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양문헌이 예의 푸근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은이가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 내 손녀를 아껴 주는 모습이 보기 좋으이. 그래, 갔던 일은 잘 해결되셨는가?”
그의 물음에 선우진이 깊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목적의 칠 할 정도는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동료 한 명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와 관련해 노사님께 드릴 말씀이 좀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게 말인가?”
“예, 두 분 모두 와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선우진의 요청에 양문헌과 벽리중은 의아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지.”
선우진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양문헌, 벽리중, 당여은을 칠 조의 숙소로 데리고 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이미 그들 이외에도 다른 이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증칠, 설풍, 비사영, 야운향의 원정대 인원들은 물론 무황총에서 구해 온 나서유, 삭무흔, 그리고 십삼 대에 머물러 있던 배종관, 천주은, 마맹운도 함께였다.
그들은 이미 나서유, 삭무흔과 한참 동안 감격스러운 해후를 나눈 후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제 바로 선우진에게로 집중했다.
선우진은 모인 이들이 모두 자신에게로 집중하자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제가 다른 이들에게 돌아온 것을 알리지 않고 여러분을 모은 이유는 이번 원정에서 알게 된 사실을 여러분께 공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선우진은 무황총에서 무황의 비급을 얻은 후, 섭혼한 두당에게 그간 여러 가지 궁금했던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들은 사실들은 선우진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고 말았다.
두당으로부터 얻은 정보들이 사실이라면 이제껏 그들은 적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제가 그곳에서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난 정혈대전의 비사입니다.”
“…정혈대전의 비사라고?”
선우진의 말에 이미 그 사실을 들어 알고 있는 원정대의 인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정혈대전은 혈마가 무황총혈사로 점창파의 정예를 제거하고 점창산은 물론 운남성 전체를 차지하게 됐을 때 일어났던 대전이었다.
그때 욱일승천하던 혈교의 세력을 막기 위해 무림맹의 정예들이 운남성으로 원정을 왔었던, 근 몇십 년 내 무림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전투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무림맹 측은 무림맹의 정예들과 사천성의 사청당문, 아미파, 청성파의 일부까지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고 말았었다.
무려 전대 무림맹의 맹주였던 소림속가 출신의 협왕 천기강이 혈마와 호기롭게 벌였던 일대일 대결에서 패해 사망했었고, 아미파의 정예들은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몰살당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선우진은 정혈대전에 대해 모두가 알고 있을 내용들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의 위기 상황에서 당시의 검성이자 무림맹의 이인자였던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검이 협왕 천기강 대신 무림맹의 세력을 지휘해 혈마를 간신히 패퇴시켰고, 그 공적으로 후일 무림맹주에 추대받을 수 있었다는 건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자 배종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맞아! 그때의 일로 협왕이란 칭호까지도 이어받으셨잖아?”
천주은이 그 말을 이었다.
“하지만 좀 이상하긴 했어요. 혈마를 패퇴시켰다면서 혈교의 세력을 완전히 압도한 것도 아니었고, 결국 운남성을 그들의 영역으로 인정해 주고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도 다 지금의 무림맹주 모용검이 한 짓이었잖아요. 그런 그에게 협왕이라니 너무 과한 것 같아요.”
지금 이들이 말한 것이 모두가 알고 있는 정혈대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선우진은 지금 여기에 비사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선우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당시의 협왕 천기강은 혈마와 일대일로 싸워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혈마는 물론 그 당시 대결의 참관인으로 참석했던 현 협왕 모용검의 합공으로 살해당한 것이었죠.”
그 느닷없는 말에 장내에 모인 사람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에 순간 그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우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