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196화 (183/359)

196화 형제-2

무슨 이유에선지 묵랑은 해남파에 관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과거의 인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혹시 해남파와 인연이 있으십니까?’

그러자 그가 어쩐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인연이라…. 있었지. 예전에 해남십이가의 하나인 해남인가의 건방진 꼬맹이가 내게 찾아와 가르침을 청한 적이 있었다네. 자신을 지도해 주면 언젠가 나와 형님을 능가해 무림의 평화를 지켜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었지.

해남인가라면 열두 가문으로 이루어진 해남파에서도 오랫동안 해남파의 지도자를 배출해 왔던 명가였다.

그러고 보니 그 해남인가가 해남파의 지도자가 된 것이 분명 남해검왕 인증호 때부터라고 들었었는데….

문득 그에게 물었다.

‘혹시 그 천둥벌거숭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 응? 그놈? 워낙 오래된 얘기라 잘 모를 걸세. 인증호라는 놈이었네.

쿨럭!

역시 묵랑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너무 잣대가 커서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남해검왕 인증호는 무신, 뇌신, 검신 다음 세대의 천하제일검이자 천하제일인으로 인정받았던 절대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인증호를 천둥벌거숭이로 기억하고 있다니….

묵랑이 내게 물었다.

- 반응을 보니 아는 이름인가 보군?

‘예, 어르신께서 돌아가신 이후 남해검왕이라고 불렸던 절대자였습니다.’

그러자 그가 코웃음을 쳤다.

- 흥! 자신 또한 신화경에 들겠다며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만 고작 검왕이란 별호밖에 얻지 못했다니, 역시 그저 건방지기만 한 꼬맹이였구먼.

그저 검왕이라….

좀 서러웠다.

나는 그런 별호라도 얻게 된다면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그에게 설명해 줬다.

‘사실 그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남해검황으로 추앙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본인이 마다했다고 합니다. 고작 검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신이 그런 과분한 호칭을 얻을 수는 없다면서요.’

그랬었다.

그는 평생 뇌신과 검신을 추앙하며 그들의 무공은 물론 행적까지 뒤따르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던 협객이었다고 했다.

내 설명에 묵랑은 작게 읊조렸다.

- 그랬는가? 그 꼬맹이가.

어쩐지 쓸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내게 물었다.

- 근데 그런 녀석의 후인들이 해적 집단이 되다니 그건 또 어떻게 된 얘긴가?

‘어, 그것이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해남파가 변질된 것은 대략 십 년 전, 무황총혈사와도 비슷한 시기였다.

잘은 모르지만 항상 해남파의 지도자 역할을 해 오던 해남인가의 상황이 당시에는 무척 좋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열두 가문 중 역시 강력한 무력을 자랑하는 해남진가가 해남인가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왔고, 그래서 해남인가와 해남진가는 해남파의 지도자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남파의 지도자는 열두 가문 가주들의 의결로 결정이 됐기에 다른 가문의 지지를 얻어야만 하는 경쟁이었다.

그런데 그때 해남인가에 악재가 터졌다.

당시 해남인가의 가주였던 인계운이 구설수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구설수는 무척 여러 가지였습니다. 처음엔 여자 문제였다고 하더군요. 다른 가문의 미망인이 그와 오랫동안 불륜을 맺었었다며 폭탄선언을 했던 거지요. 게다가 그것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다른 소문들도 연속적으로 터지기 시작합니다. 청부 살인을 했다는 의혹, 해남파의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소문 같은 것들이 말입니다.’

- 허어! 그게 사실이었나?

‘인계운이야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결백을 입증하려 애썼습니다만, 결백을 입증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구설수가 터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더군요. 그래서 결국 그는 다른 가문들로부터도 외면받게 되고 말았습니다. 다른 가문들의 지지를 받아야만 해남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벼랑 끝에 몰린 것이었죠.’

그리고 그는 결국 자신의 결백함을 영원히 입증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 갑자기 측근들과 함께 실종됐기 때문이었다.

- 실종됐다고?

‘예, 해남인가의 측근들은 물론 그를 추종하던 해남사가의 사람들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해남인가에서 대대로 간직해 오던 해남파 장문인의 신물 백호검과 함께요.’

- 흐음, 그럼 그 이후엔?

‘당연히 해남진가의 가주 진태도가 해남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해남파의 지도자가 된 후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진태도는 해남파의 지도자가 된 후 협도가 아닌 패도를 천명했다.

힘으로 남해의 지배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간 해남파와 대립해 왔던 수많은 해적들을 회유하고 복속시키더니 결국 거대한 해적 집단으로 성장하고 말았다.

한때 천하제일인을 배출했으며 구대문파의 일원이었던 적도 있었던 해남파가 거대 해적 집단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현재 그 해남파의 수장 진태도의 별호는 해남마검, 또는 남해거망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흔히 남해 사람들에게 ‘천하에 사마가 있다면 남해에는 삼마가 있으니 마경과 마검과 마도라.’라고 떠도는 말 중 두 번째 마검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묵랑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 그럼 이전에 있었다던 인가 가주의 구설수는….

‘예, 이제는 모두 그게 진태도의 수작이었을 거라고 짐작하게 됐습니다. 인가의 가주 인계운도 아마 그가 제거했을 거라 믿어지고 있고요. 하지만… 그래 봐야 이미 다 늦은 얘기지요.’

- …안타까운 일이로군.

‘그렇죠. 아무튼 해적으로서 그들의 위세는 이미 정파일 때의 위세를 훨씬 넘어섰습니다. 남해에선 대남도의 남해마경 만학숭과 더불어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남해삼마 중 마경에 해당하는 남해마경 만학숭은 천마신교의 천마, 혈교의 혈마, 여령색마 손은상과 함께 천하사마의 일인인 이 시대의 절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고작(?)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에 불과한 해남마검 진태도가 강력한 세력을 바탕으로 그 무림의 절대자와 쌍벽을 이루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나라에서도 수군을 동원해 어떻게든 그들을 토벌해 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배와 무기, 화포까지도 모두 빼앗겨 버렸다고 합니다.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한 거지요.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그들에게 벼슬을 줬다고 합니다. 남해거망 진태도가 서남 수군 제독, 남해마경 만학숭이 동남 수군 제독입니다.’

그 말을 들은 묵랑은 너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 허허, 해적들에게 벼슬을 줬다고? 나 때도 나라 꼴이 엉망이긴 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상상을 초월하는군.

나야 두 번의 삶에 거쳐 계속 그래 왔으니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확실히 처음 듣게 됐다면 어이없는 상황임에 분명할 것 같긴 했다.

그때였다.

증칠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다 들리도록 투덜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에잉, 뭔 초절정씩이나 된 젊은 놈들이 패기가 없어? 고작 해적들 무섭다고 그걸 피해 가자니, 에잉!”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증 선배, 혹시 호남성으로 가기 곤란하시면….”

그러자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곤란하긴 뭐가 곤란하다는 거냐?! 이 세상에서 이 증 어르신을 곤란하게 만들 건 하나도 없다!”

마치 어린애가 투정 부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철없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설풍 조장에게 의견을 물으려 그를 바라봤을 때였다.

그는 증칠의 투정에는 관심도 없는 듯 자신의 팔에 감긴 수실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나 소저를 생각하십니까, 조장?”

그 수실은 나 소저와 헤어지기 전 그녀가 조장의 손목에 묶어 준 것이었다.

그 후로 조장은 틈날 때마다 저 수실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저렇게 애틋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그러자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하네. 보기가 좀 그렇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보기 좋습니다. 오히려 부럽네요. 저도 하나 달아 달라고 할 걸 그랬어요.”

진심이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내 전생에 가장 존경했던 남자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행복을 이렇게 진심으로 빌어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말이다.

조장은 문득 아련한 눈빛으로 수실을 보며 말했다.

“나는… 여인이란 존재가 두려웠다네. 무서웠지. 모든 여인들이 내 어머니와 같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름답고 선량한 외모로 주변 모든 사람을 속이고 불행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런 존재일 거라고 말일세.”

조장의 깊은 눈빛에 나는 입을 다물고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이 얘기는 지난 생에서도 듣지 못했던 얘기였다.

“날 키워 주셨던 외조부께서는 늘 아버지와 어머니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말일세. 나는 그분께 반드시 그러겠다고 약속하며… 늘 울고 싶었네. 그리고 외조부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마음껏 울 수 있었지.”

그의 눈빛은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듯 혼란으로 가득 차 보였다.

“원망스러웠네. 나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내 어머니가. 아니, 증오스러웠지. 정말 견딜 수 없을 만큼 증오스러웠네. 그래서 도망쳤었지. 내 운명을 마주 보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능한 더 멀리로 말일세.”

아련한 눈빛으로 수실을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말하던 그는 문득 나를 향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참 묘한 일이지? 평생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여인이 준 수실을 팔에 단 채, 내 운명을 마주하러 가고 있다니 말일세.”

내가 아는 그에 대한 얘기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가 왜 그곳에서 도망쳤는지, 어떤 처지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내 소중한 사람이 운명을 마주하겠다고 결심했다면 그저 응원해 줄 뿐이었다.

웃으며 말해 주었다.

“제가 조장의 상황이나 마음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늘 믿고 있습니다. 조장이라면 분명 비틀린 운명 따위 모두 박살 내 버리실 수 있을 거라고요. 저 또한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맙네. 하지만 이미 큰 도움이 되었다네.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다 진, 자네 덕분이니 말일세.”

피식 웃으며 대꾸해 줬다.

“거짓말 마십시오. 나 소저 덕분이시겠죠.”

“응? 하하하하! 그건 부정할 수가 없군.”

그러자 문득 저 멀리로 걸어가는 듯했던 증칠이 돌아와 소리쳤다.

“뭔 사내놈들이 속삭이고 웃고 지랄이냐?! 연애하냐?! 정분났어?!”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자기가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는데도 아무도 안 잡아 줘서 삐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제 같은 조도 아니라며?! 뭘 아직까지도 조장 어쩌고 부르는 게야?! 내 마음속의 영원한 조장, 뭐 이런 거냐?! 닭살 돋는 것들, 사내놈들이 저렇게 마음이 물렁하니 해적 따위가 무섭다고 난리지!”

응?

분명 시비를 걸려고 하는 말이긴 한데,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지난 삶에서부터 너무 익숙해 계속 조장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이젠 조장이라는 호칭을 쓸 필요도 없지 않나?

문득 조장을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조장 말고 다르게 부를까요?”

“응? 어떻게 말인가?”

“그, 형님이라고 부르면… 어색하십니까?”

그러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설풍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가 형님이면 진, 자네는 내 아우가 되는 거로군. 나야 좋네. 자네 같은 형제가 생긴다면 그야말로 영광이니 말일세!”

나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조장을 제 형님으로 모실 수 있다면 정말 영광일 것 같습니다! 형님!”

“진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락 뜨겁게 손을 맞잡았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남자가 내 형님이 된다니, 왜 이제껏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아쉬울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가 환한 얼굴로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고 있자, 증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는 다시 소리쳤다.

“너희 지금 뭐 하는 거냐? 무슨 도원결의 하냐? 아, 왜?! 한날한시에 못 태어났지만, 한날한시에 죽게 해 달라고 아주 신선님께 빌지 그러냐?!”

“아, 그럴까요?”

“오! 그거 좋군!”

“아니, 이 자식들이 진짜!”

진짜 도원결의 그거 해 보고 싶긴 했는데, 더 하면 증칠의 상태가 너무 심각해질 것 같아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증칠을 달래기 위해 설풍 형님께 슬쩍 말했다.

“형님, 저희 이렇게 형제의 의를 맺기로 했는데 도원결의는 못 해도 바다 앞에서 형제의 맹세를 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크으, 설풍 조장을 형님이라고 부르다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야말로 짜릿한 기분.

그러자 그가 바로 눈치를 채고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바다 앞에서 형제의 맹세라. 그거 멋있겠군. 그럼… 이대로 바다까지 가 볼까?”

“그럴까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증칠을 보자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얼굴이 금세 환해져 있었다.

“바, 바다 앞이라고? 그, 그래, 생각해 보니 그거참 멋있겠구나. 확실히 복숭아나무보단 바다가 훨씬 낫지. 흠, 흠. 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우리는 그대로 진로를 유지한 채 바다로 향하기로 했다.

그동안 말로만 전해 들었던 바다를 두 번의 삶에 걸쳐 처음으로 만나게 된 순간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우리가 바다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보게 된 광경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모습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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