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남해-1
광서성도 그곳의 절반 정도는 운남성 못지않은 밀림이었기에, 우리는 이곳이 운남인지 광서인지도 구분하지 못한 채 한참을 더 밀림 속에서 움직여야만 했다.
그래서 사람도 만나지 못한 채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도 우리에겐 흑표가 있었다.
흑표가 공기 중에서 소금 냄새를 맡고는 우리를 바다 쪽으로 이끌어 줬던 것이었다.
과연 영물의 경지에 도달한 동물의 후각은 놀라웠다.
어쩌면 요즘 내공심법을 익혀서 감각이 더 예민해진 건지도 몰랐다.
나는 쉬는 동안 녀석의 목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고맙다, 삭월아. 네가 아니었으면 길을 한참 헤맸을지도 몰라.”
삭월은 녀석에게 붙여 준 이름이었다.
까만 달이란 이름이 녀석에게 어울릴 것 같기도 했고, 월하환검무의 오 식을 익히고자 하는 내 기원이 들어 있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자 녀석이 내게 머리를 비비며 고양이처럼 골골 소리를 냈다.
덩치는 호랑이만 한 놈이 요즘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자, 쉬는 동안 운기를 해 보도록 해. 좀 더 힘이 날 거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녀석은 얌전히 운기에 들어갔다.
나는 최근 녀석에게 내공심법을 가르쳐 준 상태였다.
물론 꿈속에서 묵랑 어르신께 배워서 말이다.
예전에 묵랑 어르신이 키우던 늑대에게 가르치기 위한 내공심법을 만드셨다는데, 그걸 흑표에게 맞게 수정해서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동물을 위한 내공심법을 만들다니, 그것만도 놀라운데 수준 또한 범상치 않아 더 놀라웠다.
선우세가 가주의 심법인 혼원무극공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삭월이의 몸놀림이 전보다 더 민첩해진 것 같았다.
그러자 증칠이 신기한 듯 말을 걸었다.
“그 참, 내 살다 살다 동물이 운기를 하는 광경을 다 보게 될 줄이야. 진이, 네 녀석은 대체 그런 것들을 어디서 익힌 게냐?”
나는 씨익 웃으며 대답해 줬다.
“꿈속에서 신선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형님.”
그러자 그가 인상을 팍 찡그리며 말을 내뱉었다.
“무슨 묻기만 하면 신선님이냐? 차라리 말하기 싫으면 싫다고 하거라!”
흠, 진짠데.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에게 은근슬쩍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신선님께서 어젯밤에 증 형님의 얘기도 하셨는데….”
그러자 그가 대번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잉?! 그게 진짜냐?!”
“아니오. 거짓말입니다.”
“이 자식이! 형님을 놀리다니!”
“하하하, 죄송합니다, 형님.”
요즘 내가 설풍 형님과 형, 아우로 지내기 시작하자 증칠은 그게 부러워 보였는지 자기도 형님으로 불러 달라며 졸라댔었다.
자기가 당 소저의 오빠이니 우리에게도 형님이 되는 것이 맞다고 빡빡 우기면서 말이다.
참 부러울 것도 많은 노인네였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없이 그를 형님으로 부르기 시작했었는데, 그러자 뭔가 책임감을 느꼈던 것인지 그의 행동이 좀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를 부르는 호칭도 짐승, 기생오라비가 아닌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러 주기 시작했고, 가끔 아침에 일어나 자기가 사냥을 해 오기도 했던 것이다.
뭔가 맏형으로서의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자기 기분 내킬 때만 그러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좀 귀여웠다.
이러다 바다에 도착하면 도원결의, 아니 해원결의도 자기가 먼저 하자고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때였다.
눈을 감고 운기를 하고 있던 흑표 삭월이 갑자기 번쩍 눈을 뜨더니만 나무 위로 급히 솟구쳐 올라갔다.
그러자 증칠과 설풍 형님이 나를 보며 물었다.
“응? 무슨 일이냐?”
“삭월이 뭘 발견한 건가?”
요즘 나는 묵랑 어르신의 해석 없이도 삭월의 의사를 어느 정도 느끼곤 했다.
그래서 삭월의 행동에 관한 건 모두 내게 묻곤 했는데, 지금 그런 내게 녀석의 경계심이 느껴지고 있었다.
“뭘 느낀 모양입니다. 저희도 올라가 보죠.”
우리 모두는 순식간에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바로 볼 수 있었다.
넓게 펼쳐진 녹색의 수림 저 너머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을.
삭월은 아마 그 연기의 냄새를 맡았던 모양이었다.
증칠이 물었다.
“산불인가?”
그러자 설풍 형님이 고개를 저었다.
“군데군데에서 올라오는 것을 볼 때 자연스러운 산불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군요.”
나 또한 형님의 말에 동감이었다.
그들에게 말했다.
“가 보죠.”
우리는 수림 위를 날듯이 달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잠시 후 우리는 또 볼 수 있었다.
수림이 끝나는 곳에 넓게 펼쳐진 푸른색의 거대한 수평선을….
말로만 듣던 바다였다.
드디어 바다에 도착한 것이었다.
“하아!”
달리면서도 감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푸른 곡선, 그건 정말이지 엄청난 광경이었다.
하지만 멍하니 서서 그것을 감상할 수만은 없었다.
연기가 그 바다 바로 앞에서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좀 더 달려가자 우리는 목격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바닷가에 펼쳐진 아름답지 못한 광경을.
바닷가 앞에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앞바다엔 큰 배 두 척이 정박해 있었는데, 연기는 그 마을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을의 집들이 불타고 있는 연기.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 약탈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아악! 살려 주세요!”
“어서 와, 이년아!”
“나으리, 제발 제 아내를, 으아악!”
“안 돼!”
“제, 제발 목숨만은, 끄아아악!”
우리의 눈에 살기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
해남파 소속 해전대 십오 번 함 함장인 식혈어 추계인은 원래 유명한 해적이었다가 해남파로 넘어온 절정 고수였다.
하지만 예전에 해적이었다는 그 이력이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해남파에 그런 자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해남파로 넘어왔다고 해서 딱히 많은 게 바뀌지도 않았다.
현재 해남파의 수장인 진태도는 자신의 명령에 절대복종을 요구하긴 했지만, 그 이외엔 예전처럼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전과 똑같이 술 마시고, 즐기고, 싸우고, 약탈했다.
아무런 제약도 없었다.
오히려 해남파라는 울타리가 있기에 전보다 더 안전하게 설칠 수 있게 된 느낌이었다.
해적인 그들로서는 너무도 신나는 삶이 아닐 수 없었다.
“선장님! 이년은 아직 열한 살이라는데 어쩔까요?!”
“뭘 묻는 거냐! 넌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단 얘기도 못 들어 봤냐?!”
“킬킬킬킬! 과연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돈 되는 건 다 빼앗아라! 아, 웬만하면 죽이지는 마라! 살려 둬야 다음에 또 올 거 아니냐?!”
“크하하하하하! 알겠습니다!”
“어이쿠! 선장님, 이미 죽였는데 어쩝니까? 그냥 툭 치니 억! 하고 죽던데요?”
“거, 뭐 원래 죽을 운명인 걸 어쩌겠느냐?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최근 해남파 해전대 소속의 무인들에게 백랑검개라는 거지를 잡아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었다.
그가 최근 들어 몇 척의 해남파 배들을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추계인도 이 마을에 백랑검개의 행적을 조사해 보기 위해 왔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 넓은 남해에서 거지 한 명의 행방을 찾는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당연히 백랑검개의 행적을 알지 못했다.
그러자 정보를 얻지 못한 추계인은 자기를 헛걸음하게 한 대가라며 마을을 부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억지스러운 일이었지만 아무도 거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약탈하고 있는 무인들은 물론 약탈당하는 마을 사람들까지도 그들이 원래 그러기 위해 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영웅님들 다 가져가셔도 되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마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목숨만이라도 건지게 해 달라고 비는 것뿐이었다.
그때였다.
밀림 저편으로부터 세 줄기 빛이 날아들었다.
쉬이이익!
제일 먼저 빛이 도달한 곳은 열한 살짜리 여자아이를 끌고 가려고 했던 해적 쪽이었다.
“꺄아아악! 살려 주세요, 아저씨!”
“크흐흐흐, 그냥 얌전히 따라…!”
타닥!
해적은 갑자기 자신과 여자애 사이에 뭔가가 떨어져 내리자 깜짝 놀라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웬 남자의 뒤통수였다.
허공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웬 남자의 뒤통수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었다.
“뭐, 뭐야?”
그가 놀란 눈으로 그 뒤통수를 쳐다볼 때, 선우진이 아이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안녕, 꼬마야? 괜찮니?”
선우진은 아이가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 바로 상대를 죽이지 않고 그 앞에 떨어져 내렸던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이에게 빙긋이 웃으며 말을 걸어 주는 동안 뒤차기로 해적의 가슴을 강타했다.
퍼어억!
“커허어억!”
해적으로선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가슴이 함몰된 해적은 바로 즉사했고, 그 순간 선우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증칠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암기를 흩뿌렸다.
“막내, 이놈! 먼저 출발하다니, 반칙이다!”
푸슈슈슉!
“크아아악!”
“아아악!”
“크허어억!”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식혈어 추계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과 함께 상륙했던 이십여 명의 부하들이 순식간에 몰살당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소리쳤다.
“웬 놈들이냐?! 감히 해…!”
늘 그랬듯 해남파의 위세를 빌려 위협하려 했지만, 결국 그는 그럴 새조차 없었다.
그에게 바로 덮쳐 간 이가 바로 설풍이었기 때문이었다.
슈학!
“남파의…!”
퍼석!
빛살처럼 날아와 휘두른 설풍의 정권에 추계인의 머리는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예전 해적이었을 때부터 남해의 무법자로 이름을 떨치던 식혈어 추계인의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머리가 사라져버린 추계인의 몸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 마침내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털썩!
선우진은 그 끔찍한 모습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에이, 애들도 보고 있는데 형님들도 참….”
그러고는 다른 해적들에게로 바로 몸을 날렸다.
쉬이이익!
“무…!”
“헉!”
선우진의 신형이 질풍처럼 그들을 스쳐 지나가고 그 사이로 검광이 순간처럼 번쩍였다.
그러자 잠시 후, 한 박자 늦게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해적들이 쓰러져 갔다.
푸화아악!
털썩! 털썩! 털썩!
초절정의 무위를 가진 세 명의 무인 앞에서 스무 명의 해적들 따위는 벌레와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고작 몇 호흡도 지나지 않아 상륙해 있던 모든 해적들은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러자 해변에서 십 장쯤 떨어진 바다에 정박해 있던 배에서 반응이 왔다.
다른 한 척이 그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니 방금 죽인 해적들은 앞쪽의 배에서 쪽배를 타고 왔던 모양이었다.
십오 번 함의 부선장이자 역시 절정의 고수인 잔심어 가노제가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 이놈들! 너희가 감히 대해남파의 무인들을 죽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해남파.
선우진과 설풍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역시 이들은 해남파였던 모양이었다.
묵랑이 탄식했다.
- 설마 했건만, 이따위 해적 패거리들이 진짜로 해남파 소속이었다니.
그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져 선우진이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요즘 해남파 소속이 아닌 배들은 서남해에 돌아다니기조차 힘들다고 하더군요. 지금의 해남파는 어르신께서 기억하시는 곳과 전혀 다른 곳인 듯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묵랑을 위로하는 선우진의 마음도 복잡했다.
혹시라도 해남파와 엮이는 일이 생길까 봐 바다로 오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해남파와 그냥 엮이는 것도 아닌 충돌을 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서남해를 지배하는 거대 세력과의 충돌이라니, 매우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 홍해아 증칠이 역시 내공을 담아 대소를 터트리며 소리쳤다.
- 크헤헤헤헤!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냐고?! 그럴 것 같은데?! 크헤헤헤헤! 너희야말로 이 증…! 어르신 앞에서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증칠이 무려 떳떳하게 자기 이름을 밝히려다가 선우진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증 어르신’으로 말을 바꿨다.
그러고는 ‘나 잘했지?’라는 듯한 표정으로 뿌듯하게 웃으며 선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우진은 이마를 감싸고 싶은 것을 참기 위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설풍이 물었다.
“진 아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그러자 생각을 정리한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 다 정리해야겠죠. 이왕 엎질러진 물이기도 하고, 아무리 해남파라 해도 저런 자들을 살려 둘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설풍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증칠이 환한 얼굴로 맞장구쳤다.
“그치? 그치? 저런 놈들을 어떻게 살려 둘…!”
그때였다.
배에서 갑자기 폭음이 들려왔다.
콰콰쾅!
“응?”
처음 들어 보는 천둥소리 같은 폭음이었다.
세 사람은 모두 놀란 눈으로 바로 배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배에서부터 검고 둥그런 바위 같은 것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투석기인가?”
처음 보는 모습에 선우진과 설풍이 미간을 찌푸릴 때 경험이 많아 이미 그것을 본 적이 있었던 증칠이 소리쳤다.
“포탄! 대포다!”
그 말에 선우진과 설풍은 깜짝 놀랐다.
대포라면 나라에서 엄격하게 관리하는 무기가 아니었던가.
일개 해적들이 저런 것을 쏠 수 있다니, 해남파가 수군을 접수했다는 소문은 정말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걸 차분히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시시각각 날아오는 포탄을 향해 선우진이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제가 왼쪽을 맡겠습니다!”
파박!
그러자 설풍과 증칠도 바로 몸을 날렸다.
“제가 오른쪽!”
“그럼 나는 중간이군!”
파박! 파박!
유성처럼 날아간 선우진이 눈앞에 근접한 포탄을 보며 혀를 찼다.
저런 크기의 둥근 철 덩어리가 저 속도로 날아오다니. 정통으로 맞는다면 웬만한 마인들도 박살 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휘익!
몸을 휘돌린 선우진의 후려차기가 포탄의 옆쪽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러자 방향이 완전히 바뀐 포탄이 측면의 아무도 없는 해안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피식 웃음 지은 선우진이 중얼거렸다.
“정통으로 안 맞으면 아무 소용도 없지.”
하지만 그 순간,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콰아아아앙!
깜짝 놀라 바라보자 설풍이 맡았던 포탄이 수직으로 떨어져 바다에 추락하고 있었다.
퍼어어엉!
수면에서부터 하얀 파도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아마도 정면으로 포탄을 후려쳐 아래로 처박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설풍다운 대처였다.
반면 증칠은 아마 손으로 포탄을 잡아 멈춰 세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초절정 고수라 해도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양손으로 포탄을 잡고 있는 증칠이 포탄과 함께 날아가고 있었다.
“으아아악! 이거 왜 안 멈춰!”
깜짝 놀란 선우진이 소리쳤다.
“증 형님!”
저대로는 포탄과 함께 마을에 처박힐 것 같았다.
콰아아앙!
하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증칠이 잡았기에 포탄의 속도가 감소하기는 했는지 포탄은 마을 앞쪽에 떨어졌고, 증칠은 손을 놓고는 그 옆쪽에 착지했다.
“아이고, 삭신이야.”
증칠이 어깨를 감싸며 주무르고 있었다.
포탄을 억지로 멈춰 세우려다 몸에 무리가 온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선우진이 한숨을 내쉬며 해안가에 착지할 때, 설풍 역시 해안가에 착지하며 소리쳤다.
“진! 저기를 봐라! 또 발사하려는 모양이다!”
설풍의 말에 선우진도 시선을 배로 돌리자, 아까 포탄을 발사했던 통 안으로 놈들이 다시 뭔가를 집어넣고 있었다.
아마 저런 식으로 포탄을 장전하는 모양이었다.
배의 옆면에서 이쪽으로 향한 대포의 개수는 다섯 개, 다시 쏜다면 아까보다도 많은 수의 포탄이 날아올 것 같았다.
저것을 그대로 쏘도록 둘 수는 없었다.
물론 자신들에게 피해를 줄 수야 없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선우진이 증칠을 향해 외쳤다.
“증 형님은 잠시 쉬고 계십시오!”
그러곤 설풍을 향해 소리쳤다.
“형님!”
설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마음이 통해 말도 필요 없어진 두 사람은 동시에 배를 향해 튀어 나갔다.
파팍!
배까지의 거리는 십 장, 아무리 신법의 고수인 두 사람이라도 한 번 도약으로 도달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한 번에 닿을 필요도 없었다.
‘지금!’
한 번에 오 장의 거리를 날아간 두 사람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발을 튕겼다.
촤악!
그러자 물수제비처럼 물 위를 튕긴 두 사람이 그대로 물 위를 날아 배를 향해 쏘아져 갔다.
배 위에 있던 해적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경악해 소리쳤다.
“저, 저!”
“빠, 빨리 화살을!”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한 번 더 파도 위로 튕긴 선우진이 배 위로 높이 떠오르며 검을 치켜들었을 때, 설풍은 그대로 배 밑창을 향해 돌진해 들이받았다.
콰아아아앙!
포탄보다도 강하고 빠른 무언가가 배를 관통한 충격에 배 위에 있던 해적들은 모두 그대로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으어억! 이게 뭐야?!”
“배가 뚫렸다! 배가!”
그리고 그 순간,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던 선우진이 떨어져 내리며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묵랑검법 일 초.
개천.
촤아아아아악!
해적들에게 있어 그것은 그야말로 재앙과도 같았다.
선우진이 내리친 검격에 배의 삼분지 일 지점이 그대로 쪼개지며 배가 동강 나 버렸던 것이었다.
설풍이 가한 타격으로 배가 넘어질 듯 휘청거려 갑판 위를 구르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선원들은, 갑작스럽게 두 조각으로 쪼개진 배에 이제 그대로 바다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이게 뭐야?!”
“용왕님께서 노하셨다! 살려 줘!”
“바다에 빠진다!”
선우진과 설풍은 침몰하는 배 위에 가볍게 올라앉아 다른 한 척의 배를 보고 있었다.
“도망가는군요.”
“그렇군. 다시 해 볼까?”
원래도 이 배보다 뒤쪽에 정박해 있던 배는 이쪽 배가 쪼개져 침몰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먼 바다를 향해 도주하고 있었다.
거리는 대략 십오 장 정도. 게다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선우진은 고민했다.
조금 무리한다면 저 배에 닿는 것도 가능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선우진은 문득 아주 맑고 투명함에도 그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바닷속을 바라봤다.
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만약 바다 위를 건너 저 배까지 가려다 실패라도 하게 되면? 그럼 저기에 빠지게 되는 건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겪어 본 적 없는 미지의 공간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해 보였다.
게다가 지금 도착한 이 배까지는 바로 뒤쪽에 해안이 있고, 바다 속으로 바닥도 보여 심리적인 안정감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저 배는 이미 지나치게 먼 바다에 있지 않은가?
만약 공격하려다 실패한다면, 그 경우 뒤가 매우 애매해질 것만 같았다.
문득 설풍에게 물었다.
“형님은 수공을 좀 하십니까?”
그러자 설풍이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산에서만 살아서… 작은 계곡에서 헤엄은 쳐 봤지만, 이런 바다에서는 자신 없네.”
선우진 또한 수공에 자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찝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겠군요.”
아무래도 저 배는 보내 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지는 못하겠지만, 증거를 인멸하지 못했다는 것이 영 찝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