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해남파의 무사-2
그러자 여자아이가 다시 빠르게 설명해 줬다.
“백랑검개는 하얀 늑대가 새겨진 검을 들고 다니는 거지를 말하는 거예요. 이제껏 몇 번이나 해남파 해적들과 싸워서 박살을 내곤 했대요. 혹시 협사님께서 백랑검개신가요?”
아이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선우진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 말에 선우진보다 그의 속에 있는 묵랑이 먼저 반응했다.
- 하얀 늑대가 새겨진 검이라고?
선우진은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묵랑이 세상에 남겼던 다섯 개의 검 중 자신의 묵랑검, 검제의 혈랑검, 독안괴검 서일이 가지고 있던 벽랑검과 부순 황랑검을 제외한 나머지 하나의 검이 바로 설랑검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백랑검개라는 자는 그 설랑검을 가지고 있는 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선우진은 일단 유해응의 말에 대답해 주기로 했다.
- 우리 중엔 백랑검개라는 자가 없고 그런 자를 알지도 못하오!
그러자 잠시 묵묵히 선우진의 검을 바라보고 있던 유해응이 다시 소리쳤다.
- 그럼 왜 우리 해남파의 무사들을 공격한 것인가?!
그 물음에 선우진이 다시 소리쳤다.
- 그들이 해남파의 무사였구려?! 마을을 약탈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잡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그들이 해적인 줄 알았소!
그러자 그 말에 반응한 자는 유해응이 아닌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일도살경 오익덕이었다.
그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뭐라고?! 놈들이 마을을 약탈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잡아갔다고?! 그게 사실이냐?!
아무래도 유해응뿐 아니라 오익덕도 그런 해적들과 결을 달리하는 자였던 모양이었다.
그의 분노한 목소리에 대답한 사람은 증칠이었다.
증칠은 조금 전에 오익덕에게 가지고 놀려지다시피 당했던 것이 무척 억울했는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네놈은 동태눈이냐?!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마을 꼴을 보면 알 것이 아니냐?! 아니면 이 여자아이한테 물어보지 그러느냐?! 무려 이런 어린 여자아이까지도 잡아가려 하던데 말이다!
그러자 오익덕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저놈들에게로 가자! 감히 대해남파의 명예를 더럽히다니! 상어 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러고는 배를 돌려 먼 바다에 머물고 있던 배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 배가 아까 도망갔던 배인 모양이었다.
그러자 묵묵히 그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용왕지궁 유해응이 갑자기 훌쩍 몸을 날렸다.
촤악! 촤악! 촤악!
그는 세 번에 걸쳐 부서지는 파도를 밟으며 해안가에 착지했다.
선우진 일행만큼 뛰어난 신법은 아니었지만 배종관 못지않은 거구를 지닌 자가 저런 날렵한 몸놀림을 선보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선우진, 설풍, 증칠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당당히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가까이서 본 그는 실로 철탑과 같은 사내였다.
배종관 같은 근육질의 육체와 늘 과묵했던 십삼 대주 풍양을 보는 듯한 진중한 얼굴을 가진 사내.
그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선우진들 앞에 다가와 문득 정중히 포권했다.
그리고 사과했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자파의 쓰레기들을 대신 치워 주신 분들께 사례를 하지는 못할망정 무례를 범하고 말았구려. 해남파 전체를 대신해 이 유 모가 여러분께 사과드리겠소.”
해남파의 손꼽히는 초절정 고수가 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중한 사과였다.
그는 진심으로 해적질을 한 해남파의 무사들을 부끄러워하고 선우진 일행에게 미안해하는 듯했다.
그 정중한 사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긴장하고 있던 삼 인이 오히려 당황했을 정도였다.
증칠과 설풍은 뭐라고 말할지 알 수 없어 눈빛으로 선우진에게 대답을 미뤘고, 선우진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조금 당황스럽군요. 같은 해남파의 일원들이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시니….”
그러자 유해응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본 파의 부끄러운 모습에 그저 사죄드릴 뿐이오.”
그는 자파의 내밀한 사정을 말할 생각까지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해남마검 진태도가 해적들을 복속시켜 해남파의 힘을 키우는 동안 내부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라고 선우진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고 말이다.
선우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누가 다치거나 한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 마을은 괜찮겠습니까? 다른 해남파 사람들은 또 유 대협과 다르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유해응이 돌아간 뒤 다른 자들에 의해 다시 복수를 당하거나 하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그러자 유해응이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유 모의 명예를 걸고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소. 내 부하를 이곳에 상주시켜 다른 피해가 없도록 지킬 테니 부디 믿어 주시기 바라오.”
그의 말에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거짓을 말하는 자는 아닌 것 같았다.
묵랑 또한 그의 진심을 확인해 줬다.
- 그 참 보기 드문 바위같이 진중한 사내로군. 이 남자는 믿어도 될 것 같네.
선우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부분은 저희도 유 대협을 믿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여자아이는 유해응이 부하를 상주시켜 마을을 지켜 주겠다는 얘기를 듣고는 기쁨에 겨워 눈을 크게 떴다.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유해응은 천으로 감싼 묵랑검을 잠시 묵묵히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혹시… 여러분께서 백랑검개라는 자를 만나게 되거든 전해 주시겠소? 해남파의 유해응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이오.”
선우진은 문득 그가 자신들의 정체를 묻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그는 여전히 자신이 백랑검개라는 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정체를 묻지 않는 것이고 말이다.
선우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꼭 전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해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제 돌아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하지만 잠시 멈칫한 그는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러곤 망설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혹, 여러분께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해안가가 아닌 내륙 쪽으로 이동하시기를 추천드리겠소. 요즘의 남해는… 그리 여행하기 좋은 곳이 아니라서 말이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몸을 날려 배로 돌아갔다.
선우진 일행은 잠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설풍이 문득 입을 열었다.
“자신의 문파를 비난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데 상황이 안타깝군.”
그 말에 선우진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증칠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그래 봐야 해적 놈들과 동문 아니겠느냐?”
그 말을 들은 선우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증칠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와 얘기를 좀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자 찔끔한 증칠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뭐, 뭐? 왜, 왜 그렇게 보는 게냐? 아깐 내가 너무 방심해서 그런 거지 제 실력을 발휘했다면 저런 해적 놈들쯤은….”
“형님!”
애초에 먼저 시비를 걸고 뛰쳐나간 게 문제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 제일 문제였다.
아무래도 그와의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또한 아까 유해응의 말대로 바닷가 근처로 이동하는 진로는 포기해야만 할 것 같았다.
수공에 미숙한 자신들에게 있어 바다에서의 싸움은 너무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계속 바닷가로 이동하다 다른 해남파 무사들과 또 부딪친다면, 그때도 오늘처럼 운이 좋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어째 전선에서 벗어났음에도 위협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기분이었다.
***
전선의 비룡대 본대.
한참 전선 장악 작업을 수행 중이던 제갈지강은 비룡대장 관구붕으로부터 뜻밖의 보고를 받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십삼 대 칠 조의 남은 인원들은 물론 이 조 조장인 점창검룡 사군일까지도 한꺼번에 사라졌다고?”
“예, 그렇습니다. 칠 조의 인원들은 주변인들에게 실종된 동료들을 찾으러 간다는 말을 남겼었고, 사군일은 유서 같은 서신을 남겼다고 합니다.”
“유서 같은 서신?”
제갈지강의 반문에 비룡대장 관구붕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그것이… 이대로 땅만 지키며 동료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이제 더 이상 무림맹에게 점창파의 복수를 맡길 수 없으니 스스로 복수를 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이었답니다.”
그 말에 제갈지강은 살짝 눈을 움찔거렸다.
건방진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감히 무림맹의 행사에 의문을 품는 것도 그랬고, 그런 것을 유서로 남겨 다른 이들을 선동하는 것 또한 그랬다.
실종되지만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암영대를 파견해 암살하고픈 충동이 들 정도였다.
제갈지강이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다시 물었다.
“그들이 죽은 것은 확실한가? 아니, 혈교도들을 향해 간 것은 확실한가? 그런 척하며 탈영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그러자 비룡대장 관구붕은 살짝 인상을 굳히며 대답했다.
“후방에서 그들을 봤다는 목격담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모두 상당한 실력자들이니만큼 몰래 숨어서 전선을 빠져나갔다 해도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들은 모두 스스로의 의지로 혈교도를 상대하기 위해 전선에 들어온 협사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동료들을 버리고 몰래 탈영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군사님.”
관구붕은 제갈지강이 전선의 근무자들을 의심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그의 기색을 눈치챈 제갈지강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도 그렇군. 내가 실언을 했네, 관 대장. 미안하군.”
그러자 제갈지강의 소탈한 사과에 오히려 당황한 관구붕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군사님. 제가 감히, 죄송합니다.”
“아니네. 그럴 의도는 아니었네만 결과적으로 전선 근무자들의 협심을 의심한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내 실언이 맞네. 부디 못 들은 것으로 해 주게나. 그럼 이제 그만 나가 봐도 좋네.”
“예! 알겠습니다, 군사님!”
관구붕은 감격스러운 표정이 되어 제갈지강의 집무실을 나갔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을 보는 제갈지강의 눈빛은 아주 차갑게 식어 있었다.
관구붕이 완전히 나가자 그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군.”
무척 공교로운 일이었다.
남은 칠 조원들을 모두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그들이 사라졌다는 것도 그렇고, 그들과는 별 연관점이 없어 보이는 점참검룡 사군일이 하필 함께 사라졌다는 것도 그랬다.
게다가 이런 공교로움은 제갈지강에게 마치 그때를 연상케 했다.
검성 해운백이 자신의 계산에서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를….
그 기억은 제갈지강의 뇌리에 깊은 교훈을 남겼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설사 그 이유가 드러나지 않았다 해도 미리 치워 버리는 것이 낫다는 교훈을 말이다.
그때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만 갖고 있다 결국 통한의 결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제갈지강이 이제 살기 어린 눈빛이 되어 중얼거렸다.
“한 번 겪었던 일을 다시 감수할 필요는 없겠지. 아무래도 비룡십삼대는….”
거기까지 말한 제갈지강은 목소리를 높여 더러운 일을 해 줄 자들을 불렀다.
“흑호대와 흑랑대, 흑룡대의 대주들을 불러라!”
아직 자신의 손발이라 믿고 있던 세 개의 무력대 중 맹주 측 인물들을 솎아 내는 작업은 완료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제갈지강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런 지시를 통해 그들을 솎아 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선에 있으니 이런 건 편하군. 맹주 측에 연락을 시도하려는 자를 잡아 내면 될 테니.’
또한 뒤처리가 쉽다는 장점도 있었다.
증거와 증인들까지도 깔끔하게 조작해야 했던 맹에서와는 달리, 이 모든 짓을 혈교도들의 행위로 돌려 버리면 될 테니까 말이다.
제갈지강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비룡십삼대 전체를 모두 지워 주지.”
바야흐로 선우진과 칠 조원들이 없는 비룡십삼대에도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