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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전선 비룡십삼대-204화 (191/359)

204화 인파랑-4

인파랑의 봇짐 속에는 두 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그중 한 권은 해남인가와 해남사가의 가전무학을 기록한 비급이었고, 다른 한 권은 인파랑이 그간 작성했던 일지였다.

선우진 일행은 인파랑을 땅에 매장해 주고는 일지부터 확인해 봤다.

거기에는 해남인가의 전대 가주였던 인계운이 실종된 이유와 그 이후의 일들이 적혀 있었다.

일지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 아버지께서 결국 돌아가셨다.

나는 숨을 거두시는 아버지 앞에서 꼭 복수하겠다고 약속드렸다.

그렇다. 나는 복수를 해야만 한다.

우리를 습격한 모든 자들.

해남진가는 물론 그들과 함께했던 모든 가문들에게.

하지만 사실 너무 두렵다.

고작 네 명이 살아남았는데.

나는 아직 열다섯 살일 뿐인데….

우리가 그들 모두에게 복수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긴 한 일일까?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두렵다. -

일지를 대충 다 읽은 선우진은 탄식하듯 말했다.

“결국 인계운을 비롯한 해남인가의 사람들이 실종됐던 건 해남마검 진태도의 습격 때문인 것이 맞았군요. 해남진가와 진태도를 따르는 다른 해남파 가문의 사람들이 습격했던 거였어요.”

그러자 증칠이 물었다.

“그런데 살아남았으면 다시 돌아가면 됐잖아? 왜 인파랑은 해남파로 돌아가지 않은 거지?”

그의 질문에 어쩐지 무거운 표정이 된 설풍이 대답했다.

“아마 적아를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워낙 많은 가문의 이들이 습격에 참여했기에 누가 자신의 편인지, 누구를 믿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던 모양이지요. 아마… 해남파 전체가 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요.”

선우진은 그렇게 말하는 설풍의 표정을 슬쩍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설풍이 인파랑의 처지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설풍 또한 비슷한 처지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선우진은 그의 말에 덧붙였다.

“더군다나 일지에 따르면 인계운을 비롯한 해남인가와 그의 최측근인 해남사가의 사람들은 극비에 형산파 사람들을 만나러 이동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형산파와 비밀 동맹을 맺고 지원을 받기 위해서요. 근데 같은 가문의 일원들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던 그들의 이동을 진태도가 알아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누구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자 증칠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탄식했다.

“그것참, 그래서 십 년 가까이 숨어 지내며 복수를 위해 칼을 갈았는데, 이렇게 나오자마자 바로 죽게 됐다는 말이지? 이 녀석 팔자도 참 기구하고만.”

그의 말대로였다.

인파랑은 그간 산속에 숨은 채 오랜 수련을 통해 드디어 절정의 경지에 올랐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제야 복수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세상에 나왔는데, 그 첫걸음이 바로 저승으로 향하는 첫걸음이 되고 말았던 것이었다.

너무도 안쓰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설풍이 문득 말했다.

“예전 인계운 가주 때도 형산파를 만나기 위해 가던 중이었는데, 인파랑 역시 형산파의 힘을 빌리기 위해 그들을 만나러 가다 변을 당했다는 얘기로군. 그렇다는 건….”

그의 말에 선우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거의 확정이라고 봐야 할 것 같군요.”

인파랑은 해남파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에게 힘을 빌려주려 했던 형산파만은 믿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시 세상에 나오자마자 형산파에 도와달라는 서신을 보냈고,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그들의 답신을 받은 후 형산파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그 결과가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와 똑같이 습격을 받게 되는 결과가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

배후에 해남파는 물론 형산파까지 있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세 사람은 잠시 침묵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기 때문이었다.

증칠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 엄밀히 말해 우리가 이 일에 끼어들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 인파랑이란 청년의 죽음이야 무척 안타깝기는 하지만, 우리가 해남파와 어떤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의 말도 충분히 일리는 있었다.

끼어들 의무도 없었고, 혹 그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싶다고 해도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산파와 해남파.

무려 구대문파의 하나와, 구대문파의 하나가 될 뻔했던 세력이 동시에 얽혀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세 사람이 초절정의 실력자라 해도 그들과 대립하는 건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운남성으로 뛰어 들어가 혈교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자 설풍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 우리가 끼어들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대로 물러나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군요. 인파랑이란 청년의 억울함을 떠나 목적을 위해 일반 백성들도 학살하는 이런 자들을 못 본 체하는 것이 말입니다.”

“으으음.”

그의 말에 증칠은 침음성을 흘렸다.

확실히 그 말도 맞았다.

아무리 저들의 세력이 커도 이 상황을 모른 척하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목적을 위해 일반 백성들까지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이런 자들이 정파인 척 행세하고 있고, 또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런 상황을 말이다.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설풍과 증칠은 결국 선우진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의견이 상충되고, 실제 일행들을 이끌어 온 사람이 선우진이니만큼 이제 그의 의견이 제일 중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은 지금 고개를 푹 숙이고 깊이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거의 결정을 굳힌 상태였다.

그는 아니지만 그의 은인과 같은 이가 인파랑과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우진의 마음속에서 묵랑이 말했다.

- 해남인가의 마지막 아이라니, 이미 내가 죽으며 끊어진 과거의 인연이긴 하지만…. 그래도 영 마음에 걸리는군. 진, 힘든 일인 줄은 알지만 부탁을 좀 해도 되겠는가? 나는 저 아이의 복수를 해 주고 싶다네.

묵랑은 수없이 선우진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자, 그에게 있어 오히려 광협검괴보다도 더 스승 같은 이였다.

또한 그와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는 둘도 없는 친우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묵랑이 인파랑의 복수를 원한다면, 선우진은 반드시 들어줄 생각이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일에 끼어드느냐 마느냐가 아닌 어떻게 인파랑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선우진은 문득 씨익 웃으며 설풍과 증칠을 바라봤다.

“저희 힘으로 저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대로 모른 척하기는 영 내키지 않고, 생각해 보니 한 방 정도는 충분히 먹일 수 있을 것도 같군요. 제게 재밌는 계획이 하나 떠올랐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설풍과 증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집중했다.

“재밌는 계획이라고?”

“저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니. 어서 말해 주게.”

역시 증칠은 재미있다는 말에, 설풍은 저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말에 끌리는 모양이었다.

선우진은 문득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저들이 아까 저를 인파랑으로 착각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증칠과 설풍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래, 실제로 봐도 엄청 닮기는 했더구먼. 근데 그래서 그게 뭐?”

그러자 선우진의 미소가 약간 사악해지며 악동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 한번 그들이 본 대로 해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진짜로 인파랑이 되어 주는 거지요.”

그 말에 설풍과 증칠의 표정이 구겨졌다.

“…뭐라고?”

“진 아우가… 인파랑이 되겠다고?”

하지만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던 두 사람의 표정은, 선우진의 설명이 계속될수록 점점 그의 악동 같은 표정과 닮아 가기 시작했다.

***

어두운 밤.

운남성 비룡십삼대가 위치한 밀림 근처로 많은 수의 인원들이 은밀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수는 무려 삼백여 명.

함께 비룡십삼대 근처까지 온 그들은 어느 순간 조용히 세 무리로 나누어져 비룡십삼대 주변을 천천히 포위하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소음은 전혀 없었다.

삼백여 명의 인원들 중 일류 중급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일류 중급 이상의 실력자들로 구성된 삼백여 명의 무인들, 그들은 바로 흑호대, 흑룡대, 흑랑대의 무사들이었다.

제갈지강이 부리는 사냥개들.

그들이 고작 육십 명에 불과한 비룡십삼대 전원을 사냥하기 위해 함께 이곳까지 왔던 것이었다.

그중 비룡십삼대의 후면으로 움직였던 흑호대의 대주 원당은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스윽!

그러자 은밀하게 그를 따라오던 흑호대 전원의 움직임이 한순간 정지했다.

착!

백여 명의 움직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이었다.

과연 무림맹의 최정예 무력대다운 모습이었다.

오늘 원당과 흑호대의 역할은 비룡대의 안을 휘젓는 것이었다.

그러면 반대쪽으로 포위하고 있던 흑룡대와 흑랑대가 도망치는 자들을 습격하는 것이 작전의 전체적인 개요, 그러니 이제 포위망이 완성되기를 기다릴 차례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후, 먼 숲 쪽에서 갑자기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우우우우!”

마치 진짜 늑대 울음소리와 똑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원당은 그것이 약속된 흑랑대의 신호임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우우우우!”

다른 방향에서 들려온 소리, 흑룡대의 신호였다.

이제 포위망이 완성된 것이었다.

흑호대주 원당은 비릿하게 웃음 지었다.

이제 드디어 피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온 것이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살육의 시간 말이다.

흑호대주가 되기 이전에 원래 암영대에서 조장을 맡았었던 그는 살육중독자였다.

하루라도 뭔가를 죽이지 않으면 잠도 잘 오지 않을 정도의 살육중독자.

그런 그가 포위대가 아닌 돌격대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흐르릅!”

자꾸 입술로 흘러내리는 군침을 들이마신 원당은 이제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흑호대 전원이 몸을 움츠렸다.

마치 수풀 밖으로 뛰쳐나가기 직전의 맹수들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원당이 마침내 오른손을 앞으로 확! 내리자, 흑호대 전원은 소리도 없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파박! 파바박!

그 모습은 실로 검은 호랑이 떼의 습격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무 소리조차 없기에 더욱 살벌한 호랑이 떼의 습격, 그 호랑이 떼의 선두에는 흑호대주 원당이 환하게 웃음 지으며 비룡십삼대 막사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사사사삭!

그때였다.

제일 먼저 원당의 눈에 막사 밖에 서 있는 한 명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들의 습격에 반응도 못한 듯 가만히 굳어져 있는 사람의 그림자였다.

원당은 이제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를 노리고 덮쳐 갔다.

‘넌 내 거닷!’

첫 번째 사냥물을 절대 남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그의 하얀 검날이 빛살처럼 쏘아지고 있었다.

쉬이이익!

그때였다.

원당이 검을 내리치는 순간, 가만히 서 있던 인형의 눈이 드디어 원당과 마주쳤다.

뜻밖에도 백발의 노인이었다.

‘음?’

물론 그가 노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진 않았다.

원당은 살육할 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검이 베어 가는데도 여전히 차분한 노인의 눈빛과 빙긋이 웃는 표정만큼은 좀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검날이 노인에게 닿을 듯했던 순간, 원당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음? 그러고 보니 비룡십삼대에는 노인이 없…!’

그때였다.

촤아아악!

원당의 몸이 반으로 쪼개진 건 한 순간이었다.

단 한 걸음을 내디디며 부드럽게 휘두른 노인의 검에, 원당이 스스로 달려든 것처럼 베이며 반으로 갈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

“!”

뒤에서 쫓아오던 흑호대 무사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내공 팔십 년이 넘는 고수인 그들의 대주가 단 일 검에 격살당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게다가 그를 죽인 노인은 멈추지 않고 마치 춤을 추듯 검을 휘두르며 그들을 향해 뛰어들고 있었다.

샤아아악!

푸화아아악!

“!”

“!”

한 순간 노인을 중심으로 한 이 장 정도의 공간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백호대 무사들은 죽어가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고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샤아아악!

푸화아아악!

그것은 불가해한 광경이었다.

노인은 마치 검무를 추듯 너풀너풀 부드럽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 춤의 결과가 주변의 공간을 온통 피바다의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늘 그렇듯, 그 상황은 흑호대의 무사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온 사방에 가득한 피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그 상황은 사실 노인의 검에서 이장 가까이 흩뿌려진 기다란 백색 검강이 직경 사장 정도의 거대한 원을 피바다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샤아아악!

푸화아아악!

그 원은 마치 사람을 잡아먹는 공간처럼 보였다.

심지어 가만히 있지 않고 아직 살아 있는 흑호대 무사들을 향해 이동하기까지 했다.

아차하는 순간 다가온 원이 어느새 살아있던 사람을 삼켜버렸다.

눈으로 보기엔 별로 빠른 움직임처럼 보이지도 않았건만 어느새 피의 원은 그들을 따라와 삼켜 버렸고, 그 결과 단 몇 호흡이 지나는 동안 벌써 흑호대의 반수가 고혼이 되고야 말았다.

“으으으으!”

“흐으윽!”

샤아아아악!

푸화아악!

그것은 같은 사람이 행한 일이라기 보단 오히려 거대한 자연재해, 재앙처럼 보이고 있었다.

도무지 대항할 방법도, 의지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드디어 공포를 견디지 못한 흑호대 무사 한 명이 소리쳤다.

“도, 도망쳐!”

공포는 순식간에 전염됐다.

흑호대 무사들은 이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 살려 줘!”

“괴물이다!”

듣도 보도 못한 경이로운 무위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선을 다해 달아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백발의 노인, 백학노검 양문헌은 결코 그들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가 침중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아이의 예상이 부디 빗나가길 바랐거늘.”

선우진은 떠나기 전 이미 이 상황을 예상했었다.

제갈지강이 비룡십삼대 전체를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양문헌은 그 예상만큼은 빗나가길 바랐었다.

무림맹의 무사들이 비룡대를 습격하는 이 광경만큼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결국 선우진의 예상은 현실이 되었고, 그렇기에 양문헌은 이제 살계를 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짓을 한 자들을 절대 살려 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백학노검 양문헌의 신형이 달아나는 무사들을 추격해 검강을 흩뿌렸다.

그러자 반경 이장을 가득 채운 빛무리 같은 검강에 흑호대원들은 대항해 보지도 못하고 삼켜질 수밖에 없었다.

슈학!

“끄아악!”

“사, 살려…. 으아악!”

원래도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인 백학노검 양문헌은 최근 오랜 정체를 깨고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상태였다.

의손녀인 당여은에게 배운 월하환검무가 그에게 내공 이갑자, 화경의 벽을 넘을 가능성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최근 그의 의제인 제운검객 벽리중에게 신법을 배우기 시작한 양문헌의 속도는 이제 일류의 무인들 정도는 충분히 추격할 수 있을 정도가 된 상태였다.

흑호대 무사들로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흑호대 중에도 특별히 신법이 뛰어난 자들이 있긴 했다.

그들은 양문헌의 검강에 삼켜지기 전에 먼저 숲으로 뛰어들 수 있었고, 그 안에서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살았…!”

하지만 숲에도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슈하악!

“어억?! 크아아악!”

“으아아악!”

비룡십삼대의 일 조 조장인 청풍검룡 한교성은 숲으로 뛰어 들어온 흑호대 무사들을 참살하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력이 많이 느신 것 같소, 당 소저?”

그러자 많이 움직이지도 않으며 딱 필요한 만큼의 검기를 던져 무사들을 죽이고 있던 당여은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력을 많이 했으니까요. 그리고….”

당여은은 그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선우진의 옆에 있기 위해선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는 말을 굳이 한교성에게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교성은 속으로 탄식했다.

얼마 전까지 자신보다 확실히 아래라고 생각했던 당여은의 무위가 어느 순간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올라 있었던 것이었다.

그간 자신도 놀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훨씬 더 분발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한교성과 당여은이 도주하는 자들을 처리하고 뒤에서 양문헌이 쫓아오며 무사들을 처리하자, 잠시 후 흑호대 무사들은 결국 몰살당하고 말았다.

흑호대가 자신 있게 비룡십삼대로 돌진했던 시간에서 기껏해야 반 각쯤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흑호대를 모두 처리한 당여은은 옷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깔끔한 모습으로 역시 평온한 신색의 양문헌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할아버지, 힘들지 않으세요?”

그러자 양문헌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이 정도는 괜찮구나. 그리고 힘들어도 어쩌겠느냐? 남은 것들도 처리해야지.”

현재 비룡십삼대의 정문 쪽엔 양문헌의 의제인 제운검객 벽리중과 십삼대장 풍양, 점창검호 제원영들이 반대쪽의 무사들이 습격해 올 것을 대비해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것은 모두 선우진이 제갈지강의 습격을 경고했기에 사전에 미리 계획을 세워놓은 덕분이었다.

또한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이면서 이제 월하환검무까지 익혀 평상시에 늘 월하환검무 비월을 발동한 채로 지내는 양문헌의 예리한 감각 덕분이기도 했다.

양문헌이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쪽 아이들이 몰살당할 동안 움직이지 않은 것을 보면 저쪽 아이들은 그저 포위 역할만 담당한 것 같구나.”

그의 말에 당여은이 하얗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저희가 먼저 가줘야겠네요.”

마치 산보를 나가듯 부드럽게 대화하는 두 조손을 보며 청풍검룡 한교성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어쩐지 저 천재지변에 가까운 두 사람의 습격을 받을 그들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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