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해청연의 믿음
“뭐라고?! 뭐가 어떻게 됐다고?!”
제갈지강은 참지 못하고 소리쳐 되물었다.
지금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엉망이 된 신색으로 되돌아온 흑룡대주와 흑랑대주가 덜덜 떨며 다시 말했다.
“그, 그곳엔 괴, 괴물이 있었습니다.”
“시, 신선이었습니다. 그 노인이 신선처럼 너울너울 춤을 추자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거, 검성이 돌아온 게 분명합니다! 검성께서 원혼이 되시어 우리를 벌하시려! 으아아악!”
“거, 검성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원혼이라기보단 신선에 가까운 외모였습니다.”
제갈지강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것인지 산전수전 다 겪은 암영대 출신의 흑랑대주가 완전히 공포에 질려 정신이 나가 있었다.
흑룡대주가 그나마 정신이 멀쩡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선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아무튼 그자가 괴물이든 신선이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흑호대가 전멸당했고, 흑룡대와 흑랑대도 각각 반밖에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무려 삼백 명이나 됐던 정예들이 고작 백 명만 남아 돌아왔던 것이었다.
“이게 무슨….”
제갈지강은 문득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선에서 와신상담하며 세력을 다시 재정비해, 맹주의 자리에 재도전하려던 그의 야망이 멀어지고 있었다.
“으윽!”
어금니를 세게 악물었던 제갈지강은 일단 마음을 추스르고는 눈앞에 있는 흑룡대주와 흑랑대주부터 치우기로 했다.
저 상태들로는 어차피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니까.
“일단 돌아가 재정비하고 있도록.”
제갈지강이 물러나기를 명하자 그들은 여전히 덜덜 떨며 집무실에서 나갔다.
그 뒷모습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이 다 나간 집무실에서 제갈지강은 마침내 참았던 분노를 터트렸다.
“으아악!”
콰아앙!
제갈지강의 주먹이 서탁을 세게 내리쳤다.
하지만 북해의 철목으로 만든 튼튼한 서탁은 그의 주먹에도 부서지지 않았다.
다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멀쩡한 서탁을 보며 제갈지강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허, 허허.”
마치 운명이 그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서탁 하나 부술 만큼의 무력도 갖추지 못한 자가 무림맹주를 노리다니 가당키나 한 것이냐고 말이다.
“으윽!”
제갈지강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가슴을 움켜잡았다.
심장에 격통이 느껴지고 있었다.
***
그로부터 얼마 후, 제갈지강은 비룡대장 관구붕을 통해 비룡십삼대에 있는 자가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인 백학노검 양문헌이라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백학노검… 양문헌이라고?”
놀랍고 또 참담했다.
열다섯 명의 절대자도 아닌 자가 무려 삼백여 명의 정예 무력대를 패퇴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제갈지강 자신이 무려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이 있는 곳에 아무 대비도 없이 자신의 전력인 무력대를 보내 버렸다는 사실에 말이다.
제갈지강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가 왜 하필 그곳에…?”
그러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관구붕이 밝게 웃으며 그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전해 줬다.
“백학노검 양 노사께서 얼마 전 비룡십삼대 삼 조 조장인 당여은, 당 소저를 의손녀로 삼으셨답니다. 그래서 당 소저를 돌봐주시려고 이곳 전선에까지 오신 거지요. 이제 검성께서도 안 계신데, 저희 전선 무사들로선 천만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의 웃음을 한 귀로 흘리며 제갈지강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제갈지강 자신의 실수였다.
조금만 알아봤다면 거기 양문헌이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삼백여 명의 무력대라면 비룡십삼대쯤은 가볍게 지울 수 있으리라는 자만에 사전 조사도 없이 그대로 계획을 진행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자만의 대가로 제갈지강은 가진 대부분의 전력을 잃게 되고야 말았다.
아직 백여 명의 무력대가 남아 있었지만, 삼백 명과 백 명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컸다.
그 정도 전력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바로 어젯밤에 보고가 들어왔었습니다. 그제 밤에 혈교의 마두들이 때로 몰려와 십삼대를 습격했다고 하지 뭡니까? 엄청나게 많은 수였다는데 양 노사께서 계셔주신 덕분에 아무런 피해도 없이 몰살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다 제갈 군사님의 복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와하하하하!”
제갈지강은 자신의 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이자를 당장 쳐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간신히 표정을 관리한 제갈지강은 힘겹게 입을 열어 그에게 말했다.
“관 대장, 오늘 내 몸이 좋지 않으니 나머지는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세.”
“네? 아, 네! 어쩐지 안색이 좋지 않으시더니, 알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군사님!”
관구붕을 밖으로 내보낸 제갈지강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냉정히 말해 이런 상태라면 자신의 힘만으로 다시 일어선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설사 그게 가능하다 해도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던 제갈지강은 마침내 번쩍 눈을 떴다.
핏발이 선 그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제갈지강은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혈교…. 그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겠군.”
밖으로 드러낼 수 있는 전력은 아니지만 그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건 자신만의 큰 강점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에겐 아직 혈교와 거래할 물건도 남아있지 않은가.
으드득!
핏발 선 눈으로 이를 간 제갈지강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제 다시 움직일 시간이었다.
혈마와 내통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 따위는 이제 그의 머릿속에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그에게 야망을 포기한다는 선택지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
운남성 점창산.
혈마 전무광은 제갈지강에게서 온 전서를 읽고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제갈지강이 만나자고 하는군.”
그러자 그의 주변에 은신해 있던 구유음마 지기음이 대답했다.
“그건 좀 이상한 일이로군요. 그자는 지존께 공포심을 갖고 있을 텐데요. 혹시 그자가 주군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하기라도 한 걸까요?”
그의 물음에 전무광이 손가락을 튕겨 삼매진화로 전서를 불태우며 대답했다.
화르륵!
“그렇진 않을 걸세. ‘공포’를 극복했다면 아마 ‘야망’도 극복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야망’을 극복했다면 굳이 날 만나려 할 리가 없겠지. 아마 무척 절박한 모양일세. 공포에도 불구하고 내 힘을 빌려야 할 만큼.”
그의 말에 지기음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흥, 그 정파의 위선자 놈도 갈 때까지 갔군요.”
그러자 혈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아직 검성을 처리해 준 대가도 받지 못했으니, 그가 절박하다면 이 기회에 좀 더 몸값을 올려 받을 수도 있겠지. 비급과 더불어 재료까지도 좀 청구해 보도록 하겠네.”
혈마가 검성을 처리해 주기로 하며 제갈지강에게 받기로 한 것은 무림맹에서 보관하고 있던 혈교의 옛 비급들이었다.
무림맹이 압수했으나 소각하지 않았던 혈교의 비급들, 제갈지강은 그것들을 몰래 빼돌려 혈마에게 되돌려 주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제갈지강은 알지 못했지만 그 비급 안엔 죽은 자의 영혼을 다른 육신에 빙의시킬 수 있는 비법이 들어 있었다.
역천혈마 과염을 해청연에게 빙의시킬 수 있는 비법, 그의 사랑하는 제자 구유상의 죽은 혼을 다시 혈마인으로 만든 육신에 안착시킬 수 있는 비법이 말이다.
혈마가 문득 애잔한 눈빛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유상이를 다시 볼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그의 그리움 가득한 목소리에 구유음마 지기음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주군의 그리움을 방해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었다.
잠시 후 혈마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어 지기음에게 물었다.
“마유겸, 그놈의 행방은 아직도 찾지 못했나?”
“…예, 아마 전선 지역에서 완전히 벗어난 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기음의 대답에 혈마는 낮게 코웃음을 쳤다.
“전선에서 벗어나 갈 곳도 없을 놈이…. 애를 먹이는군. 역시 그놈의 핏줄이라 그런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 희금이는 아직도 그러고 있는가?”
그러자 지기음이 송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아가씨께서는 여전히….”
간신히 다시 만나게 된 혈마 전무광의 딸 전희금은 마유겸의 행방불명이 길어지자 벌써 몇 개월 동안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혈마가 직접 찾아가도 만나 주지 않았고 대화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직접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아버지 혈마를 원망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인 혈마가 그녀의 아들인 마유겸을 죽였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딸을 생각하며 잠시 침묵에 잠겼던 혈마는 잠시 후 다시 평정을 찾은 목소리로 입을 열어 물었다.
“그녀는, 해 소저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그러자 지기음이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벌써 근처에 있던 몇 놈이 죽은 걸 보면 최근 벽을 깬 것 같더군요.”
그의 대답에 혈마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몇 놈을 죽였다는 건 그녀가 혈교의 흡정술을 이용해 내공을 흡수했다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녀가 혈교의 무공을 익혀 무위를 높여 가고 있다는 것도, 사람을 죽여 내공을 흡수할 만큼 광기에 사로잡혔다는 것도 무척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광마가 문득 안타깝다는 듯 탄식하며 말했다.
“검성이 이 광경을 보면 뭐라고 할지 매우 궁금하군. 정파 최고의 협객이던 그의 딸이 혈교의 무공을 익혀 마두가 되어 가는 광경을 보면 말일세.”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그의 얼굴에는 곧 잔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 참 상상만 해도 흥미롭지 않은가? 이럴 줄 알았다면 그를 어떻게든 살려줄걸 그랬지 뭔가. 크흐흐흐흐!”
지금 혈마가 보여 준 웃음은 그 누구보다도 더 마두다워 보이는 사악한 웃음이었다.
“크흐흐흐, 크하하하하하!”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한참을 통쾌하게 웃던 혈마는 문득 웃음을 그치고는 지기음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그녀에게 가 봐야겠군.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그 말에 모습을 드러낸 지기음이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지존의 뜻대로.”
그리고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혈마의 신형이 이미 집무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
샤아아악!
콰직!
벼락같은 청색의 검강이 번뜩이자,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수직으로 쪼개졌다.
해청연의 검격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검에 쪼개진 나무의 단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짝! 짝! 짝!
갑자기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구려, 소저. 익힌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혈뢰검결을 그 정도까지 사용하다니 말이오.”
혈뢰검결은 일전에 구유상이 선우진을 상대로 사용했던 혈교 최고의 검법이었다.
그리고 그 검법에 쪼개진 나무의 단면은 과연 검으로 반듯하게 베어졌다기보다는 벼락에 맞은 듯 과격하게 쪼개져 검게 그을린 상태였다.
해청연은 혈뢰검결을 익힌 지 불과 한 달도 안 되어 혈뢰검결에서 가장 중요한 뇌기를 뿜어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었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뒤돌아 혈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칭찬 감사드립니다. 훌륭한 검법이더군요. 원래 남궁세가의 검법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요.”
그녀의 말은 혈교가 타문파의 무공을 훔쳐 개량했다는 걸 비난하는 말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혈마는 개의치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의 제왕검결보다 훨씬 더 익히기 쉬워졌고, 위력도 나아졌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소. 해 소저만 해도 벌써 익힐 수 있게 되지 않았소?”
혈교의 무공이 익히기 쉽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혈교 무공을 익히면 광기에 사로잡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의 유혹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일 테고 말이다.
해청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오랜만에 오셨군요. 또 무슨 좋은 소식을 전해 주러 오신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혈마는 문득 지난번에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은 분명 좋은 소식이 생기면 다시 전해 주겠다고 그녀에게 약속했었다.
신경도 쓰지 않아 까맣게 잊고 있던 약속이었지만 혈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게 좋은 소식인지는 잘 모르겠구려. 설풍과 선우진의 종적이 사라졌소. 게다가 그들은 물론 애뇌산에 오지 않았던 비룡십삼대 칠 조의 인원들까지도 모두 전선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소식이오.”
그 말에 해청연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사라졌다고요?”
그런 그녀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며 혈마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렇소. 그들이 애뇌산에서 무사히 돌아간 것은 분명하건만, 그 후 그들은 비룡십삼대에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곳에 있던 이들이 동료들의 복수를 한다며 사라져 버렸다오. 흥미롭지 않소?”
해청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혈마가 예상했던 질문이 아니었다.
“지금 전선의 책임자가 혹시 제갈지강인가요?”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혈마는 천천히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대답했다.
“…그렇소.”
그러자 해청연의 표정이 다시 편안하게 풀어졌다.
그러곤 뭔가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전무광은 짧은 사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간신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제갈지강이 전선에 와서 그들이 일부러 전선을 빠져나갔으리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혈마 자신과의 관계를 드러내 보인 제갈지강이 그녀의 지인들을 죽일 것이라는 판단과 애뇌산의 생산 시설이 무너졌으니 마인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까지 복합적으로 판단해서 말이다.
역시 대단한 사고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재지에 혈마가 새삼 감탄하고 있을 때 그녀가 문득 다시 물었다.
“사라진 건 칠 조원들뿐인가요?”
그 질문에 혈마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오. 이 조의 점창검룡 사군일도 같이 사라졌다고 하더구려.”
“점창검룡…. 그 이외엔 더 없다는 말이죠?”
혈마는 그녀가 자신에게 말해 주지 않은 뭔가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무척 궁금했지만 대놓고 물어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해청연이 사실 당여은도 선우진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는지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혈마에게 그렇게까지 속을 내보일 수는 없는 일, 해청연은 당여은이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하고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제게 좋은 소식이로군요. 감사드려요.”
그녀의 표정을 알 수 없는 감사 인사를 들으며 혈마는 문득 답답함을 느꼈다.
처음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올려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름답다는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두 눈에 흐르고 있을 혈교 무공의 광기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해청연이 참았듯, 혈마 또한 충동을 참아 냈다.
곧 진행할 의식을 위해서라도 이제 와서 그녀와의 관계를 냉각시킬 필요는 없었다.
혈마는 진한 아쉬움을 느끼며 그녀에게 한마디를 더 던져 봤다.
“아, 벽을 깨셨다는 얘기를 들었소. 축하드리오.”
겉으로 드러난 내용은 그저 축하인사였지만, 속에 담긴 내용은 해청연이 혈교의 흡정술로 다른 이를 희생시키고 내공을 흡수한 걸 알고 있다는 얘기를 한 것이었다.
그 얘기로 그녀를 떠보려고 말이다.
하지만 혈마가 그녀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했음에도, 해청연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감사해요.”
결국 혈마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 보지 못한 채 소득 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홀로 남은 해청연은 방 안에 들어가 좌정한 후 심호흡을 했다.
심결을 연마할 시간이었다.
“후우우우!”
해청연이 혈교 무공의 광기에 대해 알면서도 그것을 익히기로 한 건 결코 자포자기하거나, 위험을 감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극복할 충분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혈마가 자신에게 혈교 무공을 아낌없이 공급해 주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광기에 빠지기를 바라서겠지. 그래야 다루기 쉬워질 테고 역천혈마를 빙의시키기도 쉬울 테니까.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 생각대로는 안 될 거야.’
그녀는 머리카락 속에 감춰진 두 눈을 번뜩이며 다시 한번 의지를 다졌다.
어린 시절 해청연은 지나치게 뛰어난 재지로 심성이 점점 오만해졌던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 그녀의 언니들까지도 눈 아래로 내려다보게 되었고, 성정까지 점점 잔인해졌었다.
그런 그녀를 보다 못한 검성은 딸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비법을 수소문했다.
그러자 곧 친분이 있는 소림의 승려로부터 한 가지 심결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심결은 해청연을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어줬었다.
검성의 정성이 통한 것이었다.
문득 검성을 떠올린 해청연의 가슴이 아려 왔다.
‘아버지….’
사실 그것을 익혔다고 해서 해청연이 특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당시 그녀를 이끌고 있던 여러 가지 감정들.
오만함, 경멸, 증오와 같은 감정들이 자신의 진정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직시하게 됐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후의 해청연은 뛰어나지만 오만하지 않고, 별나지만 다른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게 그 심결 덕분이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그 당시, 마음을 가다듬게 된 해청연은 더 이상 그 심결을 익히지 않았다.
굳이 다른 효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별로 더 익힐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혈교 무공을 익혀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그 심결이었다.
그 심결이라면 혈교 무공의 광기도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익혔던 그 심결의 이름은 바로 ‘대연정심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