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해남파 가주 회의-1
“어서 오시게, 유 가주! 오 가주! 두 가주께서 그 백랑검개라는 거지 놈을 잡으러 출항했었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네!”
유해응과 오익덕이 해남파 장문인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가주들이 모두 모여 자리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둥근 탁자에 둘러앉은 여덟 명의 가주들, 그중 가장 중심에 앉은 해남마검 진태도는 호탕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겨 주었다.
그런 환대는 마치 오래된 친우를 맞이하는 듯한 친근한 태도였다.
하지만 유해응과 오익덕은 그의 환대에도 말없이 고개만 꾸벅하며 자리에 앉았다.
본인은 물론 지켜보는 사람들도 무안해질 것만 같은 냉랭한 태도였다.
하지만 진태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두 사람의 차가운 반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 좋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 어떻게 소득은 좀 있었는가? 이젠 나도 그 거지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매우 궁금하다네.”
그러자 유해응이 드디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백랑검개는 발견하지 못했소. 하지만 백랑검개를 찾는다는 핑계로 마을에서 해적질을 하고 있던 해전대 소속의 해적 놈들은 발견했다오.”
그 말에 진태도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건 거의 순간에 불과했다.
그는 바로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런 놈들이 아직도 있었단 말인가?! 내 그렇게 주의를 줬건만! 그놈들은 어떻게 했나?! 부디 내게 넘겨주게! 아주 가루로 만들어 해전대원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야 말겠네!”
호인 같은 얼굴에 중후한 목소리,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진심으로 분노하는 것처럼 보였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아직 진가에 복속되지 않은 가주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사실상 해전대원들의 만행을 방치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유해응이 여전히 냉정한 표정으로 진태도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실 필요 없소. 이미 그들은 가루가 됐으니 말이오.”
그러자 진태도가 바로 환한 얼굴로 그를 치하했다.
“오! 역시 유 가주답군! 잘했네, 잘했어! 그런 놈들이야 죽어도 싸지! 오히려 점잖은 유 가주가 너무 쉽게 죽여 줬을까 봐 걱정이군.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 줬어야 하는데 말일세.”
진태도는 마치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해응은 그런 그를 잠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말했다.
“그 죽어도 싼 놈들이 내가 죽인 놈들만 벌써 세 자릿수를 넘어가고 있다는 건 어찌 생각하시오. 이쯤 되면 진 가주가 놈들에게 주의를 줬다는 말이 거짓이든가, 아니면 진 가주의 말이 놈들에게 전혀 먹히고 있지 않고 있든가 둘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겠소? 그중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깝든 이제 해전대의 존폐를 논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말이오?”
아주 직설적인 요구였다.
유해응은 단도직입적으로 해전대의 존폐를 결정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드디어 진태도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리 유들유들한 그라도 이 정도의 말까지 웃어넘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그렇게 분위기가 싸늘하게 냉각되었을 때, 문득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술가의 가주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유 가주! 이 무슨 망발인가?! 엄연히 우리 해남파의 장문인이신 진 장문인께 진 가주라니?! 너무 무례하지 않은가?! 당장 사과드리게!”
그러자 그의 주변에 있던 해가, 미가, 축가 등 진태도의 밑에 들어간 다른 가주들 또한 바로 동조했다.
“맞네! 감히 장문인께 그 무슨 무례인가?!”
“당장 사과드리시게!”
“언제부터 우리 해남파의 위계가 이렇게 엉망이 됐단 말인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먼!”
장내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유해응이 먼저 무례를 사과하지 않고선 도저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시끄러운 분위기를 보며 유해응은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지금 저들이 저렇게 난리를 치는 것이 진태도의 지시였음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껏 유해응이 진 가주라는 말을 쓴 적은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와서 갑자기 진 가주라는 말에 대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불리한 논제가 나왔을 때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려 분위기를 흐리는 것은 이제껏 여러 번 반복되어 왔던 진태도의 주특기이기도 했다.
“당장 사과드리시게!”
“그렇네! 어서 사과하지 않으면 본인은 절대 이 회의를 계속…!”
그들이 당장이라도 들고 일어날 듯 유해응에게 악을 쓰고 있을 때였다.
유해응이 갑자기 그들을 향해 확 기세를 뿜어냈다.
화아아악!
“어서 사과를… 허억!”
“흐윽!”
“이, 이게 무슨!”
그 엄청난 기세에 해가, 미가, 술가, 축가의 가주들은 바로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초절정 고수인 유해응의 기세를 버틸 수 있는 자들은 같은 초절정의 고수들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태도를 제외한 해남파의 초절정 고수들은 모두 진태도에게 복속되지 않은 가주들뿐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가주가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가문들이 모두 진태도에게 복속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유해응의 강력한 기세를 해, 미, 술, 축 네 개 가문의 가주들이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릴 때, 유해응은 꿋꿋하게 자신의 기세를 버텨 내는 진태도와 오익덕, 그리고 자가, 신가, 묘가의 가주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간 나는 해남파의 일원으로서 해남파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해전대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진 장문인께 수차례 요구해 왔었소.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계속 심각해지기만 하더구려.”
그러자 진태도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점에 있어선 본 장문인도 유 가주에게 할 말이 없군. 하지만 세력을 키우는 와중에 부작용이 좀 있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또 마경에게 해전대의 배 몇 척이 당했다네. 그러니 우리 해남도의 안전을 위해선 지금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단 얘기지.”
거기까지 말한 진태도는 이제 오만한 표정으로 다른 가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해전대원 소수의 일탈에 대해선 본인이 좀 더 노력해 보겠소. 하나 해전대의 해체나 축소에 관해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소. 소수의 일탈이야 고쳐 나갈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 해남파의 전력을 약화시킨다면 앞으로의 존망을 장담할 수 없을 테니 말이오. 그러니 오늘 본인은 여러분께 해전대의 확대에 대한 허락을 얻고자 하오. 마경의 함대를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말이오.”
그 말에 진태도를 따르는 축가, 미가, 술가, 해가의 가주들은 모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가주들은 불편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소수의 일탈, 마경의 위협, 해남파의 존망.
이 세 가지는 진태도가 늘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들고 나오곤 했던 근거들이었다.
이젠 너무나도 뻔하게 들리는 핑계들.
하지만 그렇게 뻔한 핑계임에도 불구하고 가주들은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소수의 일탈이라는 말이야 진짜 헛소리였지만, 나머지 두 가지 근거가 모두 천하사마인 남해마경 만학숭과 관련된 얘기였기 때문이었다.
해남파의 모두는 남해마경 만학숭의 무서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만학숭이 지금처럼 대남도에 박혀 있지 않았을 때, 그와 정면으로 충돌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태도가 이를 갈며 말했다.
“만학숭. 그자의 무위를 다들 기억하실 거요. 배 위에서 단지 강환을 던지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열 척의 배를 가라앉혀 버렸던 그 괴물을 말이오.”
그 말을 듣고 있던 가주들은 모두 자기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려야만 했다.
“으음.”
“흐음.”
진태도의 말은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가주들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 아닐 수 없었다.
만학숭의 함대를 대패시키고, 무려 삼십여 척의 선단으로 만학숭을 포위해 드디어 천하의 마경을 잡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순간, 뱃머리로 나온 만학숭이 던진 강환에 순식간에 열 척의 배가 침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해남파의 무인들은 속절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만학숭의 강환을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죽은 고기면 다가와 뜯어 먹고, 살아 있으면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모습들이 꼭 추어(송사리) 떼를 보는 것 같구나! 해남파 말고 추어파라고 부르는 것은 어떠하냐?! 크하하하하!’
이십여 척만 남아 분루를 삼키며 후퇴하던 그들을 향해, 광소를 터트리며 비웃던 마경의 목소리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아 있었다.
진태도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내 방식을 모두 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지는 않소. 하지만!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오직 우리 해남파를 위함이라는 것만큼은 모두 알아주실 거라고 믿소! 지금이야 마경 놈이 대남도 안에 처박혀 있다지만, 만약 놈이 우리 해남도에 발을 디디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소?!”
거기까지 말한 진태도는 좌중을 주욱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마경이 해남도에 상륙한다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아무도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진태도가 이제 단호하게 못을 박듯 말했다.
“우리가 놈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오! 압도적인 해상 전력! 그것을 구축해서 바다에서 놈을 막는 방법밖에 없소! 그러니…!”
과연 해남마검 진태도는 천하삼십육성의 한 자리를 차지한 효웅다운 자였다.
그의 강력한 기세와 연설에 가주들은 또다시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한 명을 제외하면 다들 그랬다.
그리고 그 한 명이 드디어 입을 열고는 열정적으로 소리치고 있는 진태도의 말을 끊으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 해남파라….”
조용한 목소리임에도 모두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존재감을 가진 목소리, 바로 유가의 가주 유해응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유해응은 그 시선들 속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것이 궁금하오. 지금의 해남파가 과연 우리의 해남파인지, 아니면 진 가주의 해남파인지 말이오.”
그 말에 진태도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하지만 분노한 진태도와는 달리 유해응의 표정은 아까와 똑같았다.
마치 바위같이 침착하고 진중한 모습. 그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말했다.
“진 가주가 원하는 것이 정말 해남파의 힘이라면 좋소. 그렇다면 해전단의 지휘를 나에게 맡겨 주시오. 그럼 한 달 안에 쓰레기 같은 놈들을 모두 걸러 내고 최정예로 만들어 주리다. 다시는 해남파의 이름으로 그런 망종 짓을 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최고의 전력으로 만들겠소. 어떻소, 진 가주? 정말 해남파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그래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오?”
그 질문에 진태도는 순간 눈을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여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유 가주는 지금 장문인인 내게서 문파의 병력 통제권을 가져가겠다는 말이오? 장문인인 내가 해전단의 지휘권을 갖는 것과 한 가문의 가주인 유 가주가 지휘권을 갖는 건 전혀 다르다는 걸 모르시진 않을 텐데 말이오? 혹시 유가의 전력을 높여 장문인 자리에 도전해 보고 싶기라도 한 거요?”
그러자 유해응 역시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유가의 가주여서 문제라면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날 용의도 있소. 가주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해전단의 지휘자로서 장문인의 밑으로 들어가겠소. 어떻소? 그럼 문제가 없지 않겠소?”
“허어, 유 가주!”
“형님!”
그것은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유가의 가주인 그가 본가와의 관계도 끊고 가주로서의 명예도 버린 채 진태도의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제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가주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태도의 얼굴 역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유가의 가주직을 버리고 자신의 밑으로 들어와 해전단을 관리하겠다니, 그렇게까지 얘기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진태도는 일순 거절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명분상 유해응의 말은 무척 훌륭한 자기희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을 받아들여 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진태도는 해전단의 지휘권을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없었다.
특히 유해응과 같이 자신의 사람이 아닌 자에겐 절대로 불가했다.
“그건….”
진태도는 황급히 머리를 굴려 봤지만 결국 바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늘 그랬듯 일단 다른 가주들에게 난입하라는 전음을 보내려고 할 때였다.
- 어서 끼어들…!
그때였다.
이번에는 진태도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유해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방금 내 가문도 버리고 해남파만을 위해 살겠다고 말했소. 그런데도 진 가주는 대답을 못 하시는구려. 해전대가 진정 해남파를 위한 전력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을 텐데도 말이오.”
그리고 선언하듯 말했다.
“이제 나는 마지막으로 요구하겠소. 나를 해전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해 주지 않겠다면, 해전대를 폐하시오. 만약 이번에도 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나는 해남파가 더 이상 우리의 해남파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렇기에 해남유가는 해남파에서 탈퇴하도록 하겠소.”
아주 조용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의 파괴력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바다에 떨어진 거대한 운석과도 같았다.
그가 일으킨 충격이 해일처럼 좌중을 덮치고 말았던 것이었다.
경악한 가주들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뭐, 뭐라고?!”
“유, 유 가주!”
“그게 무슨?!”
그것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해남유가는 몇백 년을 함께한 해남파의 일원이자, 뛰어난 궁술로 해남파의 해상 전투력에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해응은 지금 그 해남유가가 해남파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가주들은 물론 노회한 진태도라 해도 전혀 상상조차 못 했던 초강수가 아닐 수 없었다.
가주들은 이제 유해응이 진태도를 진 가주라고 불렀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더 이상 그를 장문인으로 생각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어휘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여러 가주들이 유해응의 충격적인 발언에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가장 연장자이자 늘 해남파의 꾀주머니 역할을 담당해 왔던 해남묘가의 가주 묘청주가 문득 흰 수염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유 가주, 자네의 심정은 이해하네. 하지만 좀 지나친 발언이었던 것 같군. 가주 회의에서 표결로 현안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오랜 전통이었건만, 자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그런 식으로 반응한다면….”
그때였다.
해남오가의 가주 오익덕이 그의 말을 끊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오익덕 또한 유 가주님의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하오! 만약 해전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 해남오가 또한 해남파에서 이탈하도록 하겠소! 이 해남파가 우리의 해남파가 아니라면 굳이 그 안에 있을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오!”
그러자 이제 묘가의 가주 묘청주마저도 당황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평소 유해응과 형제처럼 지내던 오익덕마저 저 충격적인 발언에 동조해 버렸던 것이었다.
그것은 곤란하기 이를 데 없는 얘기였다.
해남파에 있어 해남오가의 중요성은 오히려 해남유가보다도 더했기 때문이었다.
해남오가는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로 해남파의 모든 전선을 만들고 그것을 조종하는 항해사를 배출한, 그리고 지금도 배출하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러니 만약 해남오가가 해남파에서 이탈한다면 해남파의 해상 전력은 완전히 무너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묘청주는 이제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들, 이건 좀 지나치군! 아무리 자네들이 호형호제하는 사이라 하나 이런 식으로…!”
그때였다.
묘청주에 이어 두 번째 연장자이자 무가보단 상가에 가까운 활동으로 해남파의 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해남자가의 가주 자개추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흠, 꼭 두 사람의 친분 때문만은 아닌 것 같소, 묘 가주. 나 역시도 지금 우리가 속한 곳이 과연 해남파가 맞는지 아닌지 헷갈리고 있으니 말이오. 이곳이 해남파가 아니라면, 우리가 굳이 이곳에 소속되어 있을 필요가 있겠소?”
해남파의 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자, 그런 자개추의 말이 엄청난 무게를 갖는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묘청주는 이제 완전히 당황한 표정이 되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뛰어난 제작술로 모든 해남파 병기의 제작을 담당하고 있는 해남신가의 가주 신두월 또한 걸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끄럽기 그지없구려. 다른 가주님들이 이렇게 우리 해남파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그저 쇠만 두드리고 있었다니 말이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부끄러워질 수는 없을 것 같소. 우리 신가 또한 유 가주를 따르겠소! 해남파가 더 이상 해남파가 아니게 됐다면 우리 또한 그 안에 있을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다른 가주들의 동조에 진태도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늘 부드러웠던 그의 눈에선 이제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상황은 명확했다.
진가에 복속당한 자들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묘가를 제외한 모두가 해남파를 이탈할 것을 천명했던 것이다.
진태도는 이제 더 이상 호인 같은 얼굴을 유지하지 못한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