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해남파 가주 회의-2
결국 회의는 진태도가 물러서는 것으로 일단락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중재를 해 보려던 묘가의 가주 묘청주도 이젠 더 어쩌지 못하고 진태도에게 양보할 것을 요구했고, 그에 진태도는 해전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말로 회의를 이 주일 연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회의가 끝나자 진태도는 더 이상 참지 못한 채 제일 먼저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콰앙!
그런 그의 모습은 평소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웃으며 다른 가주들을 배웅하던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그의 뒷모습에서도 느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그의 행동에 당황한 축가, 미가, 술가, 해가의 가주들이 황급히 그를 부르며 뒤를 쫓아 나갔다.
“자, 장문인!”
“진 장문인!”
“기,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그들이 모두 회의실 밖으로 사라지고 조용해진 회의실 안, 웃음을 참고 있던 오익덕은 끝내 더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으하하하하하! 저 구렁이가 저렇게까지 분을 못 참고 속을 드러내는 건 처음 보는 것 같구려! 내 최근 회의 중 오늘만큼 통쾌한 적은 처음이요! 아주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형님! 으하하하하하!”
그 호탕한 웃음에 작지만 탄탄한 체격을 가진 신가의 가주 신두월이 동조하며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나 또한 마찬가지요! 아주 통쾌하구려! 지금 바로 돌아가 쇠를 두드려야겠소! 이 기분을 유지한 채 검을 만들면 상당한 명검이 만들어질 것 같구려! 크하하하하!”
하지만 모든 이의 표정이 밝은 것은 아니었다.
가장 연장자인 묘가의 가주 묘청주가 그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자네들, 그렇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니네!”
그러고는 바로 자신 밑의 연장자인 자가의 가주 자개추에게 타박하듯 말했다.
“자 가주! 저렇게 피만 끓는 이들이야 그렇다 쳐도 설마 자 가주께서도 이 얘기에 동조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소.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요? 아무리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가 분열한다면 해남도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상상이 안 가시는 거요?!”
그러자 염소수염을 매만지며 눈을 피하는 자개추 대신 유해응이 그의 말에 대답했다.
“묘 가주님. 선후가 바뀐 것 같습니다. 저희가 해남파를 분열시킨 게 아니라 해전대가, 정확히는 진 가주가 저희를 분열시킨 것이 아닙니까? 저는 분명히 제가 그의 밑으로 들어가 해전대를 지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해남파를 분열시킬 만한 요구입니까?”
그러자 묘 가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다독이듯 말했다.
“후우우. 유 가주, 그는 우리가 뽑은 장문인이 아닌가? 장문인이 무력대의 지휘권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세. 그런데 자네 같은 이가 해전대의 지휘자가 된다면 어떻게 장문인이 마음대로 무력대를 움직일 수 있겠나? 그건 결국 장문인에게서 무력대의 지휘권을 빼앗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이 어떻게….”
그때 유해응이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뽑은 적은 없었지요. 무슨 이유에선지 뽑을 사람 한 명이 사라져 그럴 기회도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그 말에 자개추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자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설마 자네도 입 가벼운 자들이 떠드는 것처럼 진 장문인이 인 가주를 죽였다는 근거도 없는 음모론을 입에 담겠다는 건가?”
그러자 유해응이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전부터 느꼈지만,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어차피 드러나지 않은 모든 사실은 드러나기 전까지 음모론이란 소리를 듣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가 인 가주님을 죽였다는 것이 아닌, 그가 우리가 뽑은 장문인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모르지요. 그가 만약 신물인 백호검이라도 가져와 명령을 내린다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을지도. 하지만 이젠 그것조차 없군요. 누구 때문에 없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유해응은 지금 진태도에게 장문인의 자격은 물론 권위도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진태도를 장문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말이다.
그러자 다른 가주들도 그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묘가 가주 묘청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묘가 가주 묘청주의 막내딸 묘아란은 벌써 한 시진 째 해남파 정원의 작은 정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그녀의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많은 시종들이 그런 그녀를 흘깃거리고 수군거리며 지나갔다.
한 시진째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단아하고 기품 있는 외모로 해남도 전체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녀다운 아름다운 자태였다.
시종들의 감탄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묘아란 아가씨는 여전히 아름다우시군!”
“어쩜 저렇게 선녀 같으실 수가 있지?”
“저런 분은 대체 누구와 혼인을 하시게 될까?”
“그러게. 인가의 후계자가 사라졌으니 이제 정혼자도 없는 거잖아?”
“하지만 그래도 인가의 안주인이 되실 분이었잖아. 다른 누가 쉽게 아가씨와 혼인할 수 있을까?”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묘아란의 귀에 그들의 수군거림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감탄과 수군거림들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흐트러짐 없이 책을 읽었다.
그러던 잠시 후,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어 정자 바깥쪽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아버지 묘청주가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자 묘아란은 단아한 얼굴로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표정이 안 좋으세요, 아버지. 회의 때 무슨 일이 있으셨나 봐요?”
그녀의 질문에 묘청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은 무슨, 아니다. 어서 돌아가자꾸나.”
그러자 묘아란이 눈을 빛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유 가주께서 반기를 드셨나요?”
그 말에 묘청주는 깜짝 놀라 묘아란을 바라봤다.
세상 사람들이야 묘아란의 외모에 대해서만 찬사를 늘어놓곤 하지만, 묘청주는 자신의 막내딸이 외모보다 더한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이 말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그가 보기에도 과한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표정만 보고 그런 것을 맞춘단 말인가?
그것도 유해응의 이름을 콕 집어서 말이다.
묘청주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네 눈은 도저히 속일 수가 없구나. 대체 어떻게 그걸 맞춘 것이냐?”
그러자 묘아란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저 운이 좋았지요. 저는 이대로 가다간 진 장문인께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올 거라고 예상했을 뿐인걸요. 오히려 예상보다 좀 늦은 일이었죠. 그리고 가주님들 중 진 장문인과 대립할 수 있는 격을 지닌 사람은 유 가주님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그 대답에 묘청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래, 네 예상이 맞았다. 유 가주가 그러더구나. 해전단을 자신에게 맡겨 주거나 아예 없애지 않는다면, 해남유가가 해남파에서 떠나버리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오가, 신가는 물론 자가의 가주도 그의 말에 동조하더구나.”
“그렇군요.”
묘아란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딸을 본 묘청주는 조금 불퉁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설마 너도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러자 묘아란이 웃으며 묘청주에게 되물었다.
“아버지는 그들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세요?”
그 반문에 묘청주가 버럭 화를 내듯 말했다.
“당연하지 않느냐?! 설사 진 장문인의 방식이 과격하다 해도 분열이라니?! 마경이라는 대적과 계속 충돌하고 있는 이 시점에 그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정녕 모르겠더란 말이냐?!”
하지만 그의 분노한 목소리에도 묘아란은 차분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 전제가 맞다면 그럴 수도 있겠죠.”
그 말에 묘청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라고 했느냐? 그 전제가 맞다면이라고?”
그러자 묘아란은 자신의 아버지의 눈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런데… 우리가 마경이라는 대적과 계속 충돌하고 있다라는 전제가 과연 맞는 걸까요? 아버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 말에 묘청주는 일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묘아란이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해남파의 장문인인 해남마검, 또는 남해거망이라 불리는 진태도는 회의실을 박차고 나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뒤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가주들의 폭소 소리에 당장이라도 돌아가 검을 휘두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으드득!
‘감히!’
그는 이를 부러지도록 갈며 간신히 충동을 억눌렀다.
그러곤 자신을 따라오는 가주들에게 차갑게 말했다.
“혼자 생각을 좀 정리할 생각이니 모두 돌아가시오.”
그의 말에 이제껏 그를 허겁지겁 뒤쫓아 오던 축가, 술가, 미가, 해가의 가주들은 당황한 표정을 짓고는 이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 아, 예, 장문인, 알겠습니다.”
“부디 저런 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시고….”
“그럼 저희는 이만.”
진태도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우르르 빠져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반기를 든 가주들이 저런 자들이었다면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처리했을 텐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저런 쓸모없는 자들과는 달리, 회의실에 남은 가주들은 하나같이 해남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궁수들을 양성하는 유가, 배를 만들고 선원들을 양성하는 오가, 갖가지 무기를 제작하는 신가, 재정을 담당하는 자가.
어느 곳 하나도 함부로 처리할 수 있는 가문이 없었다.
결국 분노를 억누르고 자신의 집무실에 앉은 진태도는 한참을 살기 어린 눈빛으로 분을 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피식 웃음 지으며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그래, 이래서 해남파로는 안 된다는 거다. 강력한 지도자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수 없는 이런 허술한 구조로는 절대 더 이상 성장할 수가 없어. 그러니….”
거기까지 말한 진태도는 문득 사납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해전대를 없애라고? 그래, 없애 주지. 없애 주고말고. 조금만 기다려라, 유해응. 내 세력이 완성되는 그 날, 네 말대로 해 줄 테니까.”
진태도는 사실 진작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가주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해남파의 장문인으로서는 한계가 있다고 말이다.
자신이 남해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뜻에 따라 움직여 주는, 오직 자신만의 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예전부터 육지에 자신만의 세력을 쌓아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작은 문파를 비밀리에 점령한 후 그곳을 천천히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사실 해전대의 배들이 마경의 함대와 충돌해 침몰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었다.
진태도는 사람들에게 배들이 침몰했다고 알리며, 조금씩 해전대의 병력들을 빼서 자신의 세력 쪽으로 옮겨왔던 것이었다.
그런 핑계로 해전대의 규모를 계속 확대하도록 압력을 넣으면서 말이다.
그 모든 게 진태도가 자신의 직속 세력을 키우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 세력들은 이제 꽤 성장해 각각 광서성과 광동성을 대표하는 방파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들이 바로 광서성의 합산파와 광동성의 백교방이었다.
진태도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가능하면 해전대의 병력들을 모두 백교방으로 옮기고 싶었는데, 일단 합산파로 먼저 옮겨야만 하는 건가?”
이제 명실공히 광서성 최강의 문파가 된 합산파와는 달리 백교방은 아직 광동성에서 광동진가의 세력을 넘어서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진태도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전대의 세력을 조금씩 백교방 쪽으로 옮기고 있던 중이었다.
“흐음….”
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던 진태도는 탐탁지 않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로선 합산파보단 백교방의 세력을 제대로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형산파와 합자해 만든 합산파와 달리 백교방은 오롯한 그 자신만의 세력이었다.
또한 백교방이 위치한 광동성 광주는 수로를 따라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도 했다.
그 수로를 따라 해전대의 세력을 이전하기에도 용이하고 말이다.
그래서 천천히 해전대의 세력을 옮겨 백교방을 강화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아직 그 작업이 완료되지 않은 시점에서 유해응이 들고일어나 버렸던 것이다.
진태도는 문득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그로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일 년 정도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훨씬 수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가 그렇게 어떤 방식으로 해전대의 병력을 백교방으로 이전해야 할지에 대해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의 부하가 급히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탁! 탁! 탁!
“방주님! 속하입니다!”
무척이나 급박한 목소리였다.
평소 같지 않은 부하의 호들갑에 진태도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들어오너라.”
그러자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온 부하가 급히 말했다.
“방주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고?”
“예, 합산파, 합산파가!”
부하의 보고를 듣고 있던 진태도의 눈이 점점 크게 확대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