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합산파-1
광서성 합산.
합산에서는 물론 현재 광서성에서도 최강을 자랑하는 세력이 된 합산파의 정문에는 늘 찾아오는 무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무인들은 대부분 좋은 용무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오늘도 많은 무인들이 절박한 표정으로 수문 무사들에게 사정하고 있었다.
“제발 문주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저희 평도문의 식솔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처참하게 살해됐습니다! 그날, 합산파의 무사들을 근처에서 본 이들이 있습니다! 제발 저희 평도문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제 여식이 간살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합산쾌검 계주석이 근처에서 술을 마시다 사라졌다는 증언이 있었습니다! 제발 그놈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제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합산파 문주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수많은 무인들이 정문 앞에서 아우성치고 있었다.
하지만 합산파의 수문 무사들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밀어낼 뿐이었다.
“그대들의 억울함은 문주님께 잘 전달해 드렸소! 그러니 이만 각자의 본가로 돌아가 연락을 기다리시오!”
수문 무사들은 이런 말로 그들을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몰려온 자들이 고작 그런 말만 듣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며칠 전에 왔을 때도 그렇게 말했지 않소?!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만이라도 알려 주시오! 그래야 우리도 돌아가 기다릴 것이 아니오!”
무인들은 어떻게든 제대로 된 대답을 듣고자 했다.
하지만 수문 무사들의 태도는 늘 그랬듯 완강했다.
“문주님께서 용무가 바쁘시긴 하나 결코 동도들의 억울함을 모른 척하실 분이 아니시오! 가서 기다리면 꼭 연락을 드릴 것이오!”
그들이 그렇게 아우성치고 있을 때였다.
정문에서 멀지 않은 숲의 나무 위에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한 명의 노인과 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소녀가 문득 노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저들은 정말 저렇게 떼를 쓰면 합산파에서 답을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러자 노인이 호리병의 술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대답했다.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합산파에 대항할 무력도 용기도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설마 정파인 합산파가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일 게다.”
그 말에 소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무 바보 같아요. 범인일지도 모를 자들에게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사정하는 게요. 주변만 돌아봐도 어제까지 함께 항의하던 자들 몇 명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그러자 노인은 다시 호리병의 술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한탄하듯 말했다.
“저들의 말처럼 돌아가서 기다리기로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설마 정파인 합산파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처리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리 멀쩡한 사람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저렇게 바보 같아지는 것이란다. 이랑이 너도 주의하거라.”
그 말에 이랑이라고 불린 손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휴우, 정말 안타깝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네요. 그런데….”
그녀가 문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합산파 저자들이 정파의 탈을 쓴 나쁜 놈들인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아요. 근데 진짜 형산파의 괴뢰일까요? 벌써 일주일을 잠복해 살펴봤지만 딱히 형산파와의 연결점을 발견하지는 못했잖아요?”
그러자 노인이 소녀를 달래듯 대답했다.
“내부에서 캐낸 정보인데 틀릴 리가 없지 않느냐? 어디 일주일 정도 가지고 되겠느냐? 최소한 한 달은 살펴봐야지. 그렇게 쉽게 꼬리를 발견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면 우리가 왜 그렇게 고생을 했겠느냐?”
“하지만 너무 지겹고 힘든걸요. 시간 낭비인 것 같단 말이에요.”
“허어, 참. 그래서 따라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래도요.”
소녀가 노인에게 투정을 부리고, 노인이 그것을 달래 주고 있을 때였다.
합산파의 정문에서 소란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벌써 한 달째 기다렸소! 더 이상 얼마나 더 기다리란 말이오?! 난 이제 더 못 참겠소! 당장 문주님을 만나게 해 주시오!”
“맞소! 기다리란 말도 이젠 지겹소! 어서 문주님을 접견하게 해 주시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수문 무사들에게 사정하던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더 참지 못하고 수문 무사들을 밀치고 들어가려 했던 것이었다.
“우와아아아!”
“합산파 문주는 나오시오!”
“나와라! 합산파 문주 어정기! 어서 나와라!”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수문 무사들은 당황해 창대로 그들을 밀어내려 했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물러서라! 물러서지 않으면 찌르겠다!”
그렇게 서로 밀고 밀어내며 정문에서의 소란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갑자기 정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이게 무슨 소란이냐?!
강력한 내공이 실린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고막을 강하게 진동시키는 그 목소리에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귀를 틀어막은 채 물러서야만 했다.
그러자 냉막한 인상의 사내가 다시 소리쳤다.
- 어딜 감히 합산파의 정문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모두 죽고 싶으냐?!
그의 강력한 기세에 숨어서 지켜보던 소녀가 조부에게 급히 물었다.
“고수인 것 같아요. 누굴까요?”
그러자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으음, 합산파의 절정 고수인 합산쾌검 계주석이로구나. 하필 저자가 나오다니 아무래도 일이 커지겠는걸?”
“네? 그가 왜요?”
그때였다.
귀를 틀어막았던 무인들 중 한 명이 계주석을 알아보고는 눈을 크게 부릅뜨며 소리쳤다.
“계주석, 이놈! 네가 드디어 나왔구나!”
그 말에 계주석이 남자를 노려보며 물었다.
“계주석? 네놈이 뭔데 감히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그러자 남자가 피 끓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도안 지가장의 장주 지석중이다! 대답해라! 이 주 전 내 외동딸을 간살한 자가 네놈이 아니더냐?!”
그 말에 계주석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도안… 지가장이라고?”
그러더니 이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난 그쪽으로 간 적도 없건만 대체 무슨 소리인가?”
하지만 그 말에 지가장주 지석중은 오히려 더 격분해 소리쳤다.
“거짓말 마라! 그날 네놈이 도안의 주루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봤다는 사람만 수두룩하다! 그리고 네놈이 사라진 그 시각, 바로 그 시각쯤에 내 딸이 간살당했다! 네놈이 떳떳하다면 대체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그러자 계주석이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거 귀찮구먼.”
그러고는 예리한 눈빛으로 장내의 사람들을 스윽 둘러봤다.
장내에는 대충 스무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인원수를 확인한 계주석은 문득 살기 어린 웃음을 보이며 물었다.
“그래, 만약 내가 한 짓이 맞다면 어쩔 테냐?”
그 물음에 지가장주 지석중이 격분해 소리쳤다.
“뭐, 뭐라고?! 네놈이 지금 네놈의 죄를 자백하는 것이냐?!”
그러자 계주석이 씨익 웃으며 검을 뽑았다.
스르릉!
“그러니까, 내가 한 짓이 맞다면 네가 뭘 어쩔 거냐고 묻지 않느냐?”
살기 어린 웃음과 뽑아 든 검, 이제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지가장주가 흠칫해서는 소리쳤다.
“이, 이놈! 정파인 합산파의 무사이면서 설마 살인멸구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이 자리에 계신 많은 분들이 다 증인이시다!”
하지만 계주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으흐흐흐, 이 자리에 많은 사람이 있다고? 곧 없어질 것 같은데?”
“뭐, 뭐?!”
그 순간, 계주석의 검에서 노랑 검강이 솟구쳤다.
화악!
그러곤 바로 남자를 향해 뛰어들었다.
“죽어랏!”
그러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손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조부를 바라보며 작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하지만 노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아아압!”
슈하아악!
“으아악!”
계주석의 노란 검강이 지가장주의 가슴을 갈라 버릴 듯 날아들고, 지가장주가 대응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을 때였다.
그 순간 갑자기 계주석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쐐애애액!
그것은 엄청난 속도의 암기였다.
“!”
계주석은 차마 경시하지 못하고 다시 검을 그것을 막아 내야만 했다.
따앙!
“크윽!”
날아온 무언가를 간신히 검 면으로 막아 낸 계주석은 강한 경력에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공력이 실린 암기였다.
그리고 검 면에 부딪쳐 튕겨 나간 암기의 정체를 본 순간 계주석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이 그냥 돌멩이였기 때문이었다.
‘고작 돌팔매를 던져 내 검을 막아 냈다고?’
등골이 서늘해진 계주석은 돌이 날아온 곳을 향해 검을 겨누며 소리쳤다.
“누구냐?! 누가 감히 대합산파에 시비를 거는 것이냐?!”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도 동시에 그쪽을 향했다.
그러자 그들은 곧 볼 수 있었다.
새하얀 백의를 입고, 하얀 호랑이가 새겨진 순백색 검을 든 잘생긴 청년 하나가 냉막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는 것을.
청년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웃으며 중얼거렸다.
“대합산파라고? 웃기는군.”
작게 중얼거렸음에도 장내에 있는 모든 이들의 귀에 선명히 꽂히는 목소리였다.
그 비웃음에 계주석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네놈이 감히 우리 합산파를 비웃어?! 정녕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러자 숨어 있던 소녀가 조부를 향해 급히 물었다.
“엄청 잘생긴 오라버니예요! 누굴까요, 할아버지?”
하지만 그녀의 조부 또한 놀란 눈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도 모르겠구나. 처음 보는 얼굴이야. 하지만 저 백호가 새겨진 하얀 검은 설마…?”
그때였다.
상대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계주석이 수문 무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뭐 하느냐?! 감히 대합산파의 문 앞에서 우리를 비웃은 놈이다! 저자를 죽여라!”
그의 명령에 당황한 표정으로 청년을 보고 있던 열 명의 수문 무사들이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창을 겨눴다.
“예,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빙긋이 웃음 지은 청년이 검파를 잡으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수문 무사들은 물론 절정 고수인 계주석마저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헉!”
“무, 무슨!”
청년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갑자기 그들 사이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형환위를 시전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나타난 동시에 발검했다.
슈하악!
그것은 한순간 수평으로 세상을 갈라 버린 듯한 발검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그어진 빛나는 실선에 세상이 약간 어긋난 듯한 착시를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수문 무사들의 몸에도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본인들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선이 마침내 갈라지며 피를 뿜어낸 것은 한 호흡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푸화악!
“커어억?!”
“이게…?!”
“아아악!”
뒤에 물러서 있던 계주석은 이제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 무슨, 가, 감히 합산파의 무사들을….”
그러자 청년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염려 마라. 어차피 모두 죽는다.”
“뭐…?!”
그 순간 백의 청년이 계주석을 향해 뛰어들었다.
팡!
엄청난 속도의 돌진이었다.
계주석은 깜짝 놀라 황급히 그의 검을 방어하려 했다.
하지만 그로선 불가능했다.
따앙! 쉬이익!
청년의 검은 딱 두 번 그어졌을 뿐이었다.
수평으로 한 번, 수직으로 한 번.
거의 시간차도 없는 검격이 마치 허공에 열십자 검광을 생성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한 번의 공격으로 계주석의 몸은 수직으로 갈라져 버리고 말았다.
미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푸화악!
양쪽으로 갈라진 그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너무 경악해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아니,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방금 일어난 일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었던 이는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노인뿐이었다.
노인이 경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저럴… 수가?”
방금 저 백의 청년이 절정 고수인 계주석을 죽이는 데 필요했던 것은 단 이 검뿐이었다.
수평으로 가른 검격과 수직으로 가른 검격의 단 이 검.
그중 수평으로 가른 검격에 계주석의 방어한 검이 밀려나고, 수직으로 가른 검격에 몸이 갈라졌었다.
노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합산파의 유명한 절정 고수 합산쾌검 계주석을 단 이 검 만에 고혼으로 만든 것도, 합산파의 정문 앞에서 합산파 무인들을 학살한 것도 모두 너무나도 충격적인 광경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사실은 그 두 가지가 아니었다.
노인이 경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서, 설마… 나, 남십자검?! 어, 어떻게?!”
그 말에 소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십자검이요? 그게 뭔데요?”
“그 검법은 바로 해남인가의…!”
그 순간, 노인은 다시 한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백의 청년이 고개를 돌려 정확히 자신이 숨어 있는 곳을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허공중에 백의 청년과 노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꿀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