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백교방
묘가의 가주 묘청주는 정원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던 자신의 딸 묘아란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이번에도 네 예상대로 됐구나. 양측의 의견을 모아 파견 인원이 결정됐다. 나와 자가주, 술가주가 가기로 말이다.”
아버지의 말에 묘아란은 빙긋이 웃으며 책을 덮었다.
“역시 그렇게 됐군요. 나름 균형이 잘 맞춰졌네요.”
묘아란은 가주들이 진태도를 만나기 전부터 양쪽 모두 인파랑을 만나러 가려 할 것이고, 아마 진태도, 유해응, 오익덕 세 사람을 제외한 선에서 파견 인원이 결정 날 것이라고 예상한 바 있었다.
“진 장문인 쪽 사람인 술가주님, 그 반대쪽인 자가주님, 그리고 중립이신 아버지 이렇게 세 분을 뽑은 거로군요?”
“그렇지, 네 말대로다.”
하지만 묘아란은 속으로 그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술가주는 진태도 쪽 사람들 중 가장 무위가 높은 가주가 아니던가.
그리고 자가주는 진태도의 반대파 중 가장 무위가 낮고 나이까지 많은 사람이고 말이다.
아마도 두 사람의 무위 역시 양쪽의 계산에 들어 있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묘아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잘됐군요. 아버지께서 가신다니 제가 따라가도 상관없겠죠?”
아주 당연한 일을 묻는다는 듯 가벼운 말투였다.
하지만 딸의 물음에 묘청주는 인상을 굳히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절대 안 된다.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따라간단 말이냐?”
그러자 묘아란이 생긋 웃으며 되물었다.
“왜요? 위험한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으세요?”
그 물음에 묘청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한 일을 딸이 생각하지 못했을 리가 없기에 차마 거짓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으음….”
딸의 말은 정확했다.
만약 그자가 진짜 인파랑이라고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그 만남이 절대 그저 신분을 밝히는 선에서 끝날 리가 없었다.
정말 무슨 일이든 벌어질 것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묘아랑이 빙긋이 웃으며 그녀의 아버지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도 제 몸 하나 지킬 능력이 된다는 건 아시잖아요. 그리고… 그가 정말 인파랑, 인 오라버니가 맞다면 정혼자인 제가 가장 잘 알아볼 수 있지 않겠어요?”
그 말에 묘청주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아란아! 그 정혼은!”
“왜요? 정말 그가 살아 있다면 정혼이 무효가 된 것은 아니잖아요?”
그 말에 묘청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묘아란은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묘아란은 어린 시절 인파랑의 모습을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 무척 오랜 시간을 그와 함께 뛰놀았었기 때문이었다.
묘아란과 인파랑은 무척 사이가 좋았었다.
너무 사이가 좋아 양가에서 정혼을 시켰을 만큼이나 말이다.
그래서 묘아란은 자신의 혼인 상대로 인파랑 이외의 남자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녀의 아버지 묘청주와 인계운의 사이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묘아란의 눈빛에 묘청주는 그저 침을 꿀꺽 삼킬 뿐이었다.
***
진태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의 분노는 단지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하게 됐거나 유해응 무리들이 자신에게 대항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파랑.
그 망할 녀석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자체가 진태도에게 너무나도 크나큰 위협이기 때문이었다.
‘그놈이 정말 살아 있었다니….’
진태도는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인계운을 처리했던 그 날, 인파랑 그놈을 놓친 것을 자신이 얼마나 안타까워했었던가.
그래서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형산파와 긴밀히 연락해 놈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건만, 그놈이 정말로 나타나고 말다니….
게다가 그냥 나타나기만 한 것도 아닌 자신의 숨겨 둔 세력인 합산파를 무너뜨리고 그때의 일을 온 무림에 퍼트려 버리다니, 너무 화가 나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 살계를 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진태도는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건 없다. 녀석이 한 건 그저 말뿐이고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까. 오히려 이제라도 밖으로 나와 줬으니 고마운 일일 수도 있지. 드디어 깨끗하게 정리해 버릴 수 있게 됐으니까.’
그랬다.
그간 녀석이 어디선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항상 마음 한구석에서 그의 신경을 갉아 먹곤 했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그것을 완전히 털어 낼 수 있게 된다면 앓던 이를 뽑듯 시원해질 수 있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중점적으로 키우던 백교방이 무너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합산파도 아깝기는 하지만 자신보다는 형산파의 힘이 더 많이 들어간 곳이니 그렇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그래, 이번 기회에 아주 깔끔하게 처리해 주마. 파견대가 놈을 찾기 전에 먼저 깨끗이 사라지게 해 주지.’
아마 자신이 하지 않아도 형산파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을 것 같기는 했다.
그들은 자신보다 의사 결정이 훨씬 간단하니까 말이다.
장문인을 중심으로 수직적인 위계가 완벽하게 확립되어 있는 형산파의 체계는 진태도가 늘 부러워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가만있자. 광서성 쪽에서 쓸 만한 곳이….’
진태도는 천천히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쓸 만한 칼들을 골라봤다.
합산파를 단신으로 무너뜨린 놈이니 아주 날카로운 칼을 골라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문득 집무실 밖에서 진태도의 수하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장문인! 속하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진태도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번에도 저 녀석이 합산파의 멸망 소식을 전할 때 저런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수하가 창백해진 얼굴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장문인! ……!”
그러자 수하의 말을 들은 진태도의 얼굴은 그대로 바위처럼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
광동성의 젖줄 주강.
청원, 불산, 강문, 광주 등의 여러 지역을 얼기설기 연결하고 있는 이 거대한 수로는, 오래전부터 광동성 사람들의 생활과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다.
광동성 사람들은 주강을 통해 다른 도시를 오갔고,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 가며 늘 주강을 통해 삶을 이어 가곤 했다.
하지만 최근 그 주강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황은 무척 좋지 않았다.
무도한 수적들이 주강의 물길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안개 자욱한 새벽,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둘러 배에 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배의 사공은 일 장 밖도 잘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불안한 듯 둘러보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좀 더 빨리! 어서 서두르시오! 안개가 끼어 있을 때 강을 건너야만 하오!”
그러자 조심조심 배에 타려던 남자 한 명이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이, 이렇게 안개가 자욱한데 건너갈 수나 있겠소? 가다 바위에 부딪칠 수도 있지 않소?”
그 물음에 사공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하, 이 안개 속에서 강을 건너는 게 밝을 때 건너는 것보다 살 확률이 백배는 높을 거요.”
그러고는 이미 배에 탄 사람들 중 여인들을 슬쩍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더군다나 여인들까지 있어서야 천배는 높겠지.”
사공은 사람들에 이어 자신 또한 배에 올라타며 망설이고 있는 남자를 향해 작게 소리쳤다.
“겁나면 빨리 빠지시오! 여기서 시간을 끌다간 다 죽게 될 수도 있으니!”
그러자 남자가 급히 대답했다.
“빠, 빠지기는 누가 빠진다는 거요! 지금 타지 않소!”
마지막 남자가 허겁지겁 배에 오르며 이제 사공의 배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로 꽉 차게 되었다.
사공은 삿대로 땅을 밀어 배를 띄우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자, 출발하오! 반 시진이면 반대편에 도착할 수 있을 거요. 모두 천지신명께 무사함을 빌어 주시오.”
그 말을 끝으로 배는 안개 속을 조용히 헤치며 강 반대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안개 덮인 강물만을 바라보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끼이익! 끼이익!
이제 안개 자욱한 강물 위에는 사공이 삿대를 움직이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배는 주강을 건너 광동성의 성도인 광주 쪽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타고 있는 나룻배였다.
예전이었다면 하루에도 수십, 수백 척이 주강을 오갔을 너무나도 당연한 풍경.
하지만 지금은 그 당연한 풍경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 주강이 백교방이라는 수적들의 차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끼이익! 끼이익!
한참을 조용히 강을 건너던 중 마지막에 탔던 남자가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사공에게 물었다.
“그 백교방이란 놈들이 그렇게 무섭소?”
그러자 사공이 깜짝 놀라 주변을 휙휙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남자를 윽박질렀다.
“미쳤소?! 그 이름을 입에 담지도 마시오!”
남자는 당황했다.
그냥 물어봤을 뿐인데 너무 과한 반응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 아니, 나는 그냥 물어본 거지 않소?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시오?”
그러자 사공이 두려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며 남자에게 말했다.
“부정 탈 일 있소? 괜히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놈들을 만나게 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만약 놈들을 만나면 장담컨대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 중 남자는 다 물고기 밥이오! 그러니 제발 그 입 좀 닥치시오!”
그 말에 남자는 입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여자도 많이 탔는데 왜 남자만….”
그러자 사공이 좀 더 서둘러 삿대를 저으며 말했다.
“흥! 남자는 물고기 밥이고 여자는 놈들 밥이오.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난 차라리 물고기 밥 쪽을 택하겠소.”
그 말에 배에 타고 있던 여인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몸을 움츠렸다.
백교방이 주강의 물길을 장악한 후, 그들은 주강을 오가는 모든 배들에 대해 통행세를 걷기 시작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과한 통행세를 말이다.
그런 행위는 과거 주강을 장악했던 다른 세력들이 작은 어선이나 나룻배들에 대해서만큼은 손을 대지 않았던 것과는 전혀 상반된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이 주강을 오가는 모든 배의 통행세를 걷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드넓은 주강을 모두 감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백교방은 아주 잔인하고 집요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세력의 모자람을 공포로 채워 넣었다.
그들은 강을 건널 자들은 미리 찾아와 자발적으로 통행세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혹시라도 그들에게 통행세를 내지 않고 어업을 하거나 사람들을 태우다 걸렸을 경우, 단 한 명의 예외도 두지 않고 모두 처참하게 살해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이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백교방에게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강에 배를 띄우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고 몰래 강을 건너거나 둘 중 하나를 말이다.
사공이 안개 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절반쯤 왔소. 그러니 왔던 만큼만 아무 일 없이 갈 수 있다면….”
그때였다.
구석에서 삿갓을 쓰고 조용히 앉아 있던 남자 한 명이 문득 비릿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크크크, 꿈도 크군.”
남자는 삿갓을 벗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품에서 폭죽을 꺼내더니 갑자기 하늘을 향해 그것을 터트렸다.
퍼어엉!
조용한 안개 속에서 천둥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굉음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굉음에 배에 타고 있던 모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그들이 놀라 아우성을 쳤다.
“꺄아악!”
“뭐, 뭐야?!”
“이, 이게 무슨 짓이오!”
하지만 그들 중 사공만은 지금 이것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삿갓을 벗은 남자의 흉악한 얼굴이 그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 수 있게 해 줬기 때문이었다.
사공이 절망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백… 교방?”
그러자 남자가 킬킬거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백교방이다. 이 어르신께서 바로 백교방의 일원이시지.”
그때였다.
안개 속을 뚫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남자 또한 크게 소리쳤다.
“어어이! 여기다!”
사람들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안개 너머로 거대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에 탔던 남자가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배, 배?”
그랬다.
그 거대한 그림자는 큰 배, 그것도 한 척도 아닌 세척의 배였다.
백교방의 배 세 척이 나룻배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나룻배에 타고 있던 백교방의 남자가 킬킬 웃으며 사공에게 말했다.
“아까 뭐랬더라? 남자는 물고기 밥, 여자는 우리 밥이라고 했던가? 거 마음에 쏙 드는 말이로구먼. 앞으로 계속 써먹어야겠어, 크크크크!”
그러고는 배에 타고 있는 여인들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술을 핥았다.
“오늘 수확이 괜찮군. 아주 즐거운 하루가 되겠어. 역시 낚시는 새벽에 해야 제맛이라니까.”
나룻배에 탄 사람들은 이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절망 가득한 눈빛으로 나룻배를 둘러싼 큰 배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삼면에서 그들을 둘러싼 커다란 배 위로 수적들의 그림자가 빼곡히 보이고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절망에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돼….”
그때 배 위에 탄 수적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나룻배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감히 우리에게 통행세를 내지 않고 강을 건너려 하다니! 그 대가는 너희의 목숨이다! 각오는 이미 되어 있겠지?! 아, 여자들은 예외다! 너희는 몸으로 갚으면 되니까! 크하하하하!”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절망이 깊숙이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문득 죽립을 쓴 채 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어째 하는 짓들이 똑같군. 누가 해남파 놈들 아니랄까 봐.”
그러곤 백교방의 수적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진가장의 사람이다! 너희가 감히 진가장의 사람을 해하려는 것이냐?!”
그 말에 나룻배에 탄 사람들의 눈에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가, 이내 희망의 빛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웅성거렸다.
“진가장?”
“그 진가장의 사람이라고?”
광동 진가장이라면 오대세가에는 들지 못하지만 항상 그 후보로는 꼽히곤 했던 무림의 명문 세가였다.
또한 명실공히 광동성 광주에 존재하는 무림 세력들 중 최강의 문파이기도 했다.
나룻배에 탄 사람들의 마음속에 잘 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떠올랐다.
백교방이 비록 주강의 물길을 장악했다곤 하지만 아직 진가장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것이 세인들의 평가였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 그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놈들이 백교방의 놈들이라도 진가장의 사람까지 해치지는….’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배 위에 타고 있던 수적들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트렸다.
“뭐? 진가장 놈이라고? 크하하하하하!”
“그것참 묘한 인연이로구나! 크하하하하하!”
사람들은 두려운 눈빛으로 수적들을 둘러봤다.
자신들을 둘러싼 세 척의 배에서 들려온, 이유를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그들의 심장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때 웃음을 그친 우두머리가 소리쳤다.
“안 그래도 오늘 진가장을 제치려고 하던 참이었다! 네놈은 가족들과 한시는 아니어도 한 날에는 죽을 수 있겠구나?! 크하하하하!”
그러자 죽립을 쓴 남자 부근에 앉아 있던, 역시 죽립을 쓴 소녀가 자신의 옆에 앉은 죽립인에게 말했다.
“백교방이 오늘 진가장을 치려고 한대요, 할아버지.”
“그러게 말이다. 아무래도 백교방의 세력이 세인들에게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큰 모양이로구나.”
그렇게 말한 노인이 죽립을 쓴 청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소, 인 공자? 아무리 공자라도 물에서 저들을 상대하는 건….”
그때였다.
삿갓을 쓴 남자, 선우진이 갑자기 몸을 솟구쳤다.
파악!
자욱한 안개 속에서 보기엔 갑자기 그의 신형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놀라운 신법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 소리쳤다.
“어억?!”
“사,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어!”
나룻배의 사람들이 당황해 소리치며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죽립인, 선우진의 신형은 안개를 뚫고 허공으로 날아오른 상태였다.
안개를 뚫고 올라간 그의 발밑으로 은빛 안개의 바다가 신비롭게 빛을 내며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검은 배 그림자들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잠시 동안 허공을 날듯이 떠 있던 선우진이 이제 천천히 낙하하기 시작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한 척만 남겨 두면 되겠지?”
그리고 그의 손이 검파를 쥔 순간, 백호검의 검날이 그 찬란한 검광을 드러냈다.
챵!
묵랑검법 일 초.
개천.
촤아아아악!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벌과도 같은 일격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 안개의 바다와 그 안에 숨어 있던 배를 통째로 반으로 쪼개 버렸던 것이었다.
콰지지지지직!
갑자기 반으로 쪼개진 배에, 거기 타고 있던 수적들은 균형을 잃고 강으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이, 이게 뭐야?!”
“배, 배가!”
“떨어진다!”
그들은 혼란에 빠져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당황하기는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수적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촤아아아악!
또다시 안개의 바다가 촤악 갈라지며 또 한 척의 배가 두 동강 나 버렸던 것이었다.
콰지지지지지직!
“우와아아아아악!”
“뭐, 뭐야?!”
“요, 용왕님이다! 용왕님이 노하셨다!”
“아아아악! 살려 줘!”
선우진이 갈라진 배를 밟고 다시 뛰어올라 또 한 척의 배를 갈라 버렸던 것이었지만, 수적들로선 그의 모습을 전혀 인식할 수 없었다.
두 척의 배를 동강 낸 선우진은 이제 마지막 남은 배 위로 착지했다.
수적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당황한 눈빛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는 곳이었다.
“뭐, 뭐냐?! 대체 뭐냐?!”
타닥!
선우진이 우두머리 수적의 옆으로 착지한 순간이었다.
샤아악!
주변에 있던 다른 수적들의 목에 문득 얇은 실선이 그어졌다.
그 실선이 벌어지며 피를 뿜은 것은 한 호흡 이후에나 벌어진 일이었다.
푸화아아악!
“끄아아악!”
“꺼어어억!”
우두머리 수적은 이제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동시에 피를 뿜으며 쓰러져 버린 부하들을 바라봤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선우진이 천천히 죽립을 벗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대답할 마음이 생기거든 눈을 깜빡거리면 된다.”
우두머리 수적이 상황을 파악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